3월 9일 대선 투표일을 맞이하는 나의 결론은 ‘어텐션 투 라이프’다. ‘attention to life’다. 직역하면, ‘생명에 주목하기’ 정도가 될 것이다. ‘생명에 유의하기’, 혹은 ‘생명에 깨어있기’로 옮겨도 좋을 것 같다. 프랑스의 생명철학자 베르그손이 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평소에 어디선가 많이 듣던 소리다. 누구든지 생각할 법한 말이다. 요점은 ‘삶-생명에 깨어있기’. ‘현재를 살아가기’. 이념적 잣대로 판단하지 않기. 다시 말하면, 구별임을 알아차리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통합/반–통합이라는 구별
지난 글에서 기존의 생명 관념에 대한 부정의 필요성과 ‘생/명’이라는 생각도구, 그리고 새로운 갈라치기의 필요성을 강조했거니와 먼저 갈라치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통합/반-통합’이라는 갈라치기 때문이다. 대선 투표일을 앞두고 ‘통합’이 대세가 되었다. 유력한 야당 후보 둘이 단일화를 하고, 여당과 야당은 각각 나름의 ‘통합’을 이야기하며 상대를 반-통합세력을 비난한다. 그리고, 일군의 사회원로들은 여야 모두에게 통합정부를 권고한다. 그러나 거꾸로 통합 이슈가 전면에 내걸리면서 여야의 대치는 더욱 치열해졌다. 전쟁이다.
나의 관점에서 이들의 통합론들, 최소한 여야의 통합론은 또 하나의 갈라치기이다. 투명하다.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여당은 야당에게 반-통합세력이라고 주장하고, 여당 또한 야당에게 반-통합세력이고 주장한다. 야당에 따르면,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은 친일/반일, 개혁/적폐의 갈라치기를 통해 패거리 권력을 강화해왔다. 여당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기득권세력이고 적폐일 뿐이며 야권의 후보단일화는 야합일 뿐이다.
그렇다. 통합은 없다. ‘통합/반통합’이라는 구별이 있을 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사회통합은 없다. 정치권이 이야기하는 통합은 하나의 정치적 구호이며, ‘통합’은 항상 ‘통합정치’일 뿐이다. 루만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정치체계, 경제체계, 학문체계, 종교체계 등 다(多)-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체사회를 포괄하는 사회통합이란 불가능하다. 역설적으로, ‘분화’가 통합의 형식이다. 전통적 신분사회에서 가부장제적 윤리나 보편적 도덕률 등 관습적 규범에 의한 ‘위계’로써 사회통합을 이루었다면, 현대사회의 사회통합은 사회체계의 분화와 분화된 부분체계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요컨대, 사회통합은 하나의 구별일 뿐이다.(그런 관점에서는 ‘갈등해결’도 없다. 갈등형식의 변형(transform)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이라는 구별은 유의미하다. 민주/반민주와 개혁/적폐, 공정/불공정과는 다른, 그나마 조금은 변화된 구별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구별의 예시라는 점에서 기대가 적지 않다. 그리고 ‘통합/반통합’이라는 구별에 대한 성찰과 함께, 새로운 구별들의 가능성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구별 이전에 감각, 관찰 이전에 체험
그러나 새로운 구별도 절실하고, 치열한 갈라치기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상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반민주의 구별은 신체적 위협과 억압의 체험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산업화 의미론은 굶주림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구동성으로 통합을 이야기하는 배경에는 아마도, 분단과 분열과 분리의 고통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관찰자는 각각 다른 세계를 생산한다. 그러나 관찰 이전에 체험이 있다. 문제는 생명감각의 부재 혹은 결핍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정치세력들은 기존의 구별을 반복하거나 양적인 비교에 머물고 만다.
이번 대선에서 비전경쟁, 정책경쟁은 사라졌다고들 한다. 미래/과거의 구별을 내걸었던 야권 후보가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후보를 사퇴하면서 미래라는 슬로건 자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더(more)’ 경쟁이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이른바 산업화세력은 ‘더 많은 부(富)’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더 많은 세력’과 ‘더 강한 세력’의 대결구도로 정치화된다.
그러나, 예컨대 ‘더 많은 부’의 경쟁은 의도치 않은 생명의 저항을 일으킬 뿐이다. 1인당 GDP 35,000달러(대략 4천3백만원) 뉴스는 국민들의 박탈감(感)과 자괴감(感)을 일으킬 뿐이다. 3인 가족의 소득이 1억 3천만원이 되어야 할텐데 3인 가족 전체의 소득이 4천3백만원이라면, ‘박탈의 감각’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 “남들은 최소한 4천 3백만원이라는데 나는?” 하면서 드는 자괴의 감각, 자기-모욕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뉴 라이트와 뉴 레프트는 말할 것도 없다. 새(new) 오른쪽 새(new) 왼쪽 말고, 최소한 앞과 뒤, 위와 아래, 깊이와 높이, 안과 밖으로 구별된 시공간적 경험을 정치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당장 그것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구별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구별은 고통스럽고 고단하고, 그러나 풍요롭고 재미난 체험의 토대 위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면, 파국적 체험 이후일 수도 있다.)
그렇다. 또 다른 구별을 기대하려면, 혹은 생산하려면 ‘삶-생명’에 주목해야 할 일이다. 갈라치기 아래 정치적 생존이 숨어 있다. 그리고 자주, 정치적 생존 아래 생존본능만 남은 불쌍한 영혼이 목격된다.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연민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인격(political persona)’은 항상 공정과 평등과 부의 미래를 강변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정당시스템, 정치시스템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시스템 전환, 혹은 시스템교체가 필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머뭇거릴 수도 있다.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투표를 안 할 수도 있다. ‘나’는 몸-인간이기도 하지만, 머리-인간이기도 하기에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할 일이다. 아니면, 인공지능에 물어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능 이전에 느낌이 있다. 생명에 깨어있어야 새로운 구별을 창발할 수 있다. 구별은, 이를테면 박탈의 감각과 자괴의 감각, 즉 감각들의 산물이다.
주목경제 주목정치
한때 attention economy가 뜬 적이다. 주의력 경제, 주목경제, 혹은 관심경제로 번역되었다. 간단히 말해 attention을 상품화한다. 요즈음의 미디어, 영상매체들 역시 주목을 팔아먹고 산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악플이라고 좋다. 주목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주목은 표피적이다. 그 이면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 혹은 흐름이 숨어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흐름이 숨어있다. 정동이론가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affect, 情動), 마음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경제 아래 정동이 있다. 생명의 흐름이 있다.
“시장의 변동은 근본적으로 비경제적인 요인인 정동(affect)에 따라 일어난다. 시장들은 공포와 희망, 확신과 불안정 위에서 돌아간다. 정동은 언제나 외부성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정동이 말 그대로 경제의 범위 외부에 있는 요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면 시장의 동학에서 정동의 구성적 힘을 과소평가하고 정동이 처음부터 경제학에 드리운 긴 그림자를 부인하는 게 된다. 케인즈는 자신의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순전한 의심, 불안정성. 희망과 공포라는 숨은 요인들에 대한 과소평가”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가치의 재가치화를 위한 99테제)
최근 독설가로 유명한 전북대 강준만 교수 문재인의 ‘임기 말 文 지지율 높은 10가지 이유’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레이건의 예를 들면서 ‘이미지 정치’를 말하고 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거기에다, 그를 인터뷰한 매체 신동안는 ‘그 원고로 끝나버린 취임사… 이미지가 ‘문재인 보유국’ 만들었다‘고 제목을 뽑았다.(이 역시 참 거시기하다.)
맞다. 레이건도 문재인도 이미지 정치 맞다. 그런데, 그 이미지 정치를 마수미는 그의 ’정동정치‘라고 말한다. 자기도 모르게 ’비-의식적‘ 마음의 움직임이 그냥 그리고 향하는 거다. 소박하게는 호감이라고 말해도 좋다. 넓은 의미에서의 생명정치로 말해도 좋다. 끌리는 무엇이 있다. 반대로 양대정당 후부들에게는 불편한 것이 있다. 정보왜곡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아니라’는 느낌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두고 말하는, “느낌이 좋다”는 느낌은, 이를테면 전염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affect의 번역어를 빌려 말하면, 정동(情動) 마음의 움직임이다. 물론 이때 마음은 생각이 아니다. 느낌이 생각을 격발한다.
생명과 정치의 역설
삶-생명에 깨어있기. 물론 로드킬 현장의 길냥이들과 멸종하는 생명체들과 기후변화의 현실도 그렇지만, 오늘은 생명으로서의 인간, 생명으로서의 ‘나’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 생명으로서의 ‘나’는 판단 이전에 어떤 느낌이 있다. 어떤 분위기에 대한 나름의 감각이 있다.
깨어있는 삶이란, 지성적인 날카로움이기도 하고, 삶의 매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자신의 신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신의 맥박, 숨소리, 아픈 부위들, 그리고 묘한 기분. 몸은 정직하다. 옮고/그름 이전에 좋음/싫음, 쾌/불쾌를 암암리에 드러낸다. 몸-생명은 매체이면서 동시에 지도가 된다.
마수미의 윤리학은 ‘판단 없는’ 삶을 요청한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이념, 가치판단 이전에 정직한 몸-생명의 움직임에 주목할 일이다. 그렇다. 몸의 정치학과 몸의 사회학의 유행이 괜한 것이 이니다. 마음-사회학이 예사롭지 않다.
체계이론가 루만은 스피노자를 인용해 말한다. “다른 것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다. ‘자신(自身)’, 자기의 몸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대선 결과를 궁금하거든 먼저 자신에 주목해야 할 일이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도 스피노자와 비슷한 이야기를 남겼다. “도를 안다 함은 곧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니…“ 이때의 자기 역시 출발은 자신의 몸-생명이다. 다음 구절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자기를 알고자 하니하고 먼저 남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야 가히 민망치 아니하랴.“
투표장에 들어가기 전에, 생명에 깨어있기를 연습해본다. ‘attention to life’를 떠올리려 한다. 살아있는 몸을 느끼보려 한다.
그러나, 생명에 깨어있기 만으로 정치가 제대로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투표를 한다는 정치체계 안으로 재-진입(re-entry)하는 일이다. 재-진입하지 않으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물론 특별한 경우, 정치파업과 같은 다른 수단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마음은 마음 그대로 정치화되지 않는다. 안철수의 고뇌가 그대로 합의서가 되지는 않는다. 안철수의 심리적 복잡성이 몇 줄의 합의문으로 담겨질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체계는 합의문을 기초로 작동된다. 안철수의 고뇌는 정치체계 외부의 일이다.
이점 또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체계는 항상 체계/환경이다. 정치는 항상 ‘정치체계/정치환경’의 통일이다. 생명은 항상 ‘생/명’의 통일이다.
몸-생명의 감응적 체험과 감각적 경험은 뭐라고 정의할 수 없이 복잡미묘한 것이지만, 나의 정치적 의사는 찬반으로 표시된다. 사지선다로 강제된다. 그것은 사회의 생존기술이자, 사회의 딜레마이다. 정확히 말하면, 딜레마가 아니라 역설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택할 것이다. 생명에 깨어있되, 정치적 행위의 좁은 선택지에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물론 그 선택지에는 4개의 선택지 외에 무한한 잠재성의 No도 포함된다.
세월호의 마지막 발신, attention to life. 그러나 이번엔 더욱 깊다. ‘생/명’에 깨어있기.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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