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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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작년에 벌어졌던 미얀마군부 쿠데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가 한국인들의 ‘혐중’ 혹은 근원적으로 ‘차이나포비아’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만은 감지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대통령거의 외교정책 TV토론이 트리거포인트일 것이다. 푸틴의 침략을 막지못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능을 거론하면서 사드추가배치 주장 등으로 중국을 자극하는 야당의 윤석열 후보가 같은 우를 범할 것이라는 지적이 이런 감정을 살살 표면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당사자인 이재명 후보는 나중에 부적절한 표현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많은 한국인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바라보면서,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두손을 맞잡은 푸틴의 ‘친구’ 시진핑을 떠올리고, 시진핑의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하는 것을 연상한다. 이런 연상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 불과 몇달전까지 중국의 타이완 침략설이 실질적으로 제기됐으니까. 일부 중국의 매파 네티즌들은 실제로 이거 보라면서 타이완에 눈을 부라리고 낄낄거린다. 

사진1) 시진핑과 푸틴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에 열린 회담에서 중러양국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심지어 이 당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계획을 이미 시진핑에게 털어 놓았고, 시진핑은 올림픽이 끝날때까지만 침공을 연기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조차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일 타이완 시민들이 이런 상황에 불쾌감이나 공포를 느낀다면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서 얼마나 공감을 하게 될까?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타이완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거나 국제 반도체 시장에서 TSMC와 삼성의 관계가 마치 제 집일인양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간단히 말해서 일본인들처럼 타이완을 절친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냉정하게 보아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하든 (물론 당연히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하지 않든, 무심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패권국가 중국이 타이완뿐 아니라 한반도조차 침략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는 제2의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일까? 이건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은 얘기다. 우리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고, 중국은 딱히 한반도를 탐내지도 않는다. 

물론, 지정학적 이유로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으니 중국과 미국의 갈등이나 분쟁에 우리가 휘말릴 수도 있고, 북한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건 어차피 한국의 외교국방 분야에서 상수에 해당한다. 이것을 혐중이나 차이나 포비아로 연결시키는 건 과도하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국방이나 외교를 최대한 잘하는 것으로 충분 것 같다. 나는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아서 장기나 바둑같은 전략적 게임에도 관심이 고, 고차원 방정식을 풀 능력도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일반론 이상의 언급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왜 한국인들이 굳이 중국을 끌어들여 이런 상상을 하는지 그 심리의 저변이 궁금하기는 하다. 작년 가을에 한 무크지에 내가 발표한 글이 있는데, 한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런 감정을 ‘르상티망(Resentiment)’으로 분석한 것이었다. 나는 특히, 중장년 세대의 ‘중화문명 예찬’과 그 동전의 반대면인 ‘르상티망’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중에 도올선생이 가장 솔직하게 이런 감정을 표현다. 오해를 피하자면, 나는 도올선생을 좋아하고 존경다. 하지만 도올선생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주장의 뿌리에는 중화문명에 대한 애증이 깔려있고, 이건 전형적인 르상티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청년세대의 혐중이나 차이나포비아는 이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청년세대의 경우, 삼국지나 영웅문처럼 중장년남성들의 로망이 깃든 전통 중화문명의 코드들에 대해서 관심도 지식도 적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중국인 네티즌 혹은 유학생 친구들과의 갈등을 통해서 직접 경험한 불쾌와 짜증 혹은 경멸의 감정이 이들의 심정을 더 잘 대변한다고 짐작했다. 시사인753호에 실린 굽시니스트의 만화를 보면, 이게 잘 드러난다. 그는 한국 청년세대가 일본에 대해서 르상티망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거의 순수한 혐오감 (절지동물 천마리)을 품고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사진2)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만평가 굽시니스트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을 르상티망, 중국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을 혐오와 공포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런 설명에 동의할 수 없다. 르상티망은 숙명적으로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상대에게 품는 원한이다. 그래서 “노예의 감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많은 면에서 한국이 일본과 대등하거나 일본을 추월한 상황에서 한국의 청년들이 일본에 대해서 여전히 르상티망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건 과거의 일일뿐이다. 늙고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조롱의 대상에 가까운 일본의 극우는 그렇다치고 일본의 리버럴이나 진보가 한국에 가지고 있던 우월감은 더 이상 우리가 르상티망으로 대해야할만큼 무거운 감정은 아니다. 역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여전히 한국이 일본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빨리 우리가 가해자-피해자의 이원론적 구도를 벗어나길 원한다. 한편으로는 솔직히 일본사람들의 ‘사토리(悟)’감각이 좀 부럽다. 한국인들의 극단적 혐오와 분열, 그 배경이 되는 경쟁심리, 우월감과 열등감을 보고 있으면 너무 피곤하다. 나는 요즘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보다는 부끄럽고 슬프다.

많은 이들이 청년세대의 중국 혐오를 여러가지 현실적 이유때문이라고 분석을 하고 있는데, 당연히 맞는 말들이다. 이를테면 소위 핵쟁이라 불리는 게임 해커들이 대부분 중국인들이다. 이들은 자국내에서뿐 아니라, 여러나라의 게이머들이 함께 참여하는 게임신에서 공공연하게 해킹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매너없고 불법적인 행위를 벌임으로써 한국뿐아니라 전세계 게이머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이런 게임에선 실제 금전적인 보상이 따르기도 하고, 게임 아이템들은 현실세계의 화폐로 거래가 되기도 한다. 또, 메타버스, E2P게임들, 가상화폐나 NFT 핫한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에서 갈수록 이런 행위의 범법성은 현실 범죄에 버금가게 무거워진다. 정의당 류호정의원의 과거 게이머 경력 문제가 수많은 청년들의 분노를 유발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한국의 청년세대가 게임윤리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한지도 짐작할 수 있다. 

사진3) 중국 게이머들의 무분별한 해킹프로그램 사용 관행은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게이머들의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https://namu.wiki/w/PUBG%20%ED%8C%8C%ED%8A%B8%EB%84%88%20%EB%A6%AC%EA%B7%B8%20%ED%95%9C%EC%A4%91%EC%A0%84%20%EC%A4%91%EA%B5%AD%20%EC%84%A0%EC%88%98%20%ED%95%B5%20%EC%82%AC%EC%9A%A9%20%EC%82%AC%EA%B1%B4)

그런데, 나는 수많은 표면적인 이유들 외에도 어떤 심층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다시 르상티망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와는 지리적으로 꽤 거리가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사태가 이웃 패권국 중국의 무력사용 위협에 대한 공포감으로 연결되는 것을 관찰하면서 가진 의문이다. 르상티망은 도저히 뒤바꿀 수 없는 숙명속에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군림하는 강자에 대한 원한과 원망이 섞인 감정이다. 그러니 르상티망의 타겟은 당연히 약한 의미의 중화민족주의 혹은 강한 의미의 중화중심주의일 것이다. 한반도의 엘리트들 2천년 혹은 그 이상 길게 이런 감정을 간직해 왔을 것이다. 

아마 한국인과 가장 비슷하게 이런 감정을 공유하는 나라는 베트남이 아닐까 싶다. 중화의 변방에 위치하며, 조선과 함께 가장 가까운 번속국이었고, 천하시스템의 우등생이었던 나라. 이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10~30년내에 베트남에서 중국 혹은 한국과의 관계속에 어떤 사회적 심리현상들이 벌어질지 대충 짐작이 간다. 얼마전 중국이 베트남에게 패배한 월드컵 예선 축구경기후의 소란을 떠올려보라. 하필 그 베트남의 감독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더 기이한 인연인가. 사실 중화권내의 타이완과 홍콩은 한국이나 베트남과 일정부분 이런 정서를 공유한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근대 이전에는 가장 늦게 한화(漢化)한 중화의 변경지역인 남(南蠻)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범한족에 대한 소속감과 남만독립의 분열적 정서를 공유한다. 이건 단순히 혈연이나 생물학적 유전자가 아닌 문화적 밈(meme)에 해당한다. 그래서 나는 중화권 남방지역중에서도 특히 홍콩/광둥이나 타이완지역 사람들이 이따금 내세우는 중화정통 정체성을  ‘내부소중화’ 의식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광둥지역 출신이면서 동시에 중앙의 엘리트였던 량치차오(梁啟超)이다. 이들은 어떨 때는 화인(華人)정통성을 매우 강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역주의적 변방의식이나 독립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사진4) 중화를 중심으로 그 변경에 위치한 조선반도와 베트남, 혹은 중국 남방지역의 관계는 중앙과 주변이 공유하는 문명의 전파에 의한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유발하는 긴장관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하지만 이 감정은 르상티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노예가 가진 열등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의 혁명정신, 반골기질이기도 하다. 이 패권 혹은 “추상적인 거악”에 대한 반역과 저항으로 드러난다. 80년대부터 운동권에 공유되다가 2000년 ‘미순효순사건’을 거쳐 2008년 광우병 파동에서 전국민에게 확산됐던 한국의 반미정서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반역 혹은 혁명의 정서는 그 대상이 미국이 될 수도 있고, 일본이 될 수도 있고, 중국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중국 혹은 중화에 대한 감정은 아주 오래되고 ‘찐득한’ 것이다. 베트남의 미국이나, 프랑스, 중국에 대한 감정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감정을 여기서는 ‘르상티망 플러스’ 정도로 명해 보자. 

공교롭게도 언급한 지역들이 근대화 시기에 모두 식민지의 운명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패권에 대한 이들의 저항정신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이다. 이들은 중화라는 전통적 패권뿐 아니라 식민종주국이었던 일본, 프랑스, 영국의 (혹은 타이완의 기구한 역사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조차 아우른다) 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반감을 지니고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정부state나 권력에 대해서도 조건반사적으로 보이는 골수에 사무친 반감과 의심, 저항의 태도는 중국대륙의 보통사람들이 혁명주체였던 공산당 중앙정부를 상당부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양상과 사뭇 다르다.       

이런 반골기질이 꼭 정의롭거나 정확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추상적인 거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광우병 파동처럼 매우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반발은 추상적인 게 아니다. 그런데 모호한 연상이 작동할 때는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혹은 미얀마사태가 그러하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러시아이고, 미얀마에서 시민들을 탄압한 것은 미얀마의 군부독재자들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구체적인 “거악”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인들이 덩달아 미워한 중국의 존재는 무엇일까? 조금 더 세분해서 볼 수도 있다. 러시아나 미얀마와 비교했을 때  형태와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독재정’을 구사하는 시진핑과 중국의 공산당 고위층, 그리고 이들과 완전히 분리해서 보기 어려운 중국의 엘리트나 보통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이들을 싸잡아서 ‘거악’이라고 얘기해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이들은 무고하고, 러시아나 미얀마의 독재정부에 대해서 “지지를 표명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반대하지도 않고 모호한 입장을 취한 시진핑과 중국정부는 과연 거악인가? 

사진5) 저항과 반역의 주체는 항상 명확하지만, 그 상대가 되는 거악의 실체가 항상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적(敵)/악(惡)’의 친구는 ‘적(敵)/악(惡)’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리고 “추상적인 거악”을 정의감에 기대 반대하는 것과 매우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거악으로 지정해 혐오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념적 정의감이나 악에 대한 의분과 나의 삶과의 구체적 연관성이 유기적으로 통합할 수 있을 때 그게 “진짜 우리 삶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만일 전자만 앞서고, 후자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면, 오지랍넓은 ‘완장질’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아주 쉽게 “내로남불”의 이중잣대에 빠지게 되고, 자기가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바쁜 생활에 쫓겨 금새 잊어버릴 수 밖에 없다. 고통과 고민은 결국 “머나먼 타자”들과 전문가나 활동가들의 몫으로 남고, 내게는 “추상적인 거악”이라는 적과, 이를 미워할 줄 아는 정의감을 빙자한 자기만족감만 남는다. 여기서 ‘르상티망 플러스’는 그래서 원래 부정적인 의미의 르상티망과 비교하자면 중립적인 감정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중국대륙사람들도 이런 감정의 상대방으로서 함께 느끼는 감정이 있다. 중국의 저명한 원로 역사학자 거젠슝(葛劍雄)의 대표작인 <통일과 분열>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거젠슝은 조선반도와 베트남이 한(漢)왕조 이후에 한번도 중화왕조국가에 속한적이 없는 독립국이었음을 매우 명확히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신장이나 티벳같은) 중국 변강지역 소수민족보다 훨씬 중화문화를 잘 수용한 나라였음에도 말이다. 실은, 지리적인 여건만 따지면, 한반도와 베트남이 왜 중화왕조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는지는 중국 역사학자들이 답할 수 없는 난제라고 말한다. 아마 내가 위에 언급한 일종의 혁명정신/반기질 같은 요소가 있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차마 학자로서 그런 문화본질주의적인 얘기를 할 수 없으니 그냥 커다란 의문부호 하나 정도만 남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 누리호 발사나 K-무기개발에 관한 중국 뉴스들이나 최근의 한국 하드SF영화등에 대한 중국내 평을 살펴보면 유독 비꼬는 댓글들이 많다. 바로 한국인들이 분개하는 소분홍 관점들이다. 그런데, 가만히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중국인들이 이걸 상당히 껄끄러워하고 부담스럽게 의식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중에 조금 천박한 수준의 중화중심주의를 가진 사람들 (소분홍)이 앞서 말한 댓글을 다는 것이다. 아예 관심을 둘만한 가치도 없다면, 굳이 뉴스를 들여다보거나 댓글을 달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분홍의 이런 행위는 한국의 반중주의자들이 차이나포비아와 무거운 르상티망에 잠겨 반응하는 것의 거울이미지이다. 

사진6) 중국관객들은 한국의 하드SF 제작 시도에 대해 유독 박한 평가를 내린다. 대국만이 추진할 수 있는 우주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한국의 하드SF 작품의 수준이 높을 수 없다는 본질주의적 선입견을 내보인다. 한편으로는 전반적으로 대중문화 수준이 우위에 있는 한국이지만, 하드SF나 스페이스 오페라와 같은 영역만은 중국이 앞서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한국이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문화본질주의로 보지 않고, 물리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강력한 중앙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만큼 강력히 저항하는 (사실은 굉장히 동질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변방의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화라는 문명의 중심과 중화내부의 변방인 남만지역, 천하체제에 속하지만 중화의 외부인 조선과 베트남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남만, 조선, 베트남이 중화에 대해서 품고 있던 감정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반면 중화의 북방변경은 농경이 중심인 중화문명이 전파될 수 없는 이질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에중화와 이런 정치적정서적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조선과 베트남을 거쳐 너무 먼 곳에 위치한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중화제국이 조선과 베트남을 자국 영토로 복속시키지 못한 것은, 이런 반골기질을 장기적으로 동화시키고 복속시키는 비용이 제국의 확장을 통해 얻는 수익을 능가하거나 심지어 제국의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는 계산에 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상당한 문화적 동질성에 기반한 조공체제는 제국과 번속국사이에 윈윈의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르상티망 플러스의 또한가지 요소로 들고 싶은 것은 팬데믹 국면을 통해 등장한 ‘위대한 K-서사’다. 르상티망을 열등감이라고 봤을 때, ‘위대한 K-서사’는 열등감과 함께 동전의 양면이라 볼 수 있는 우월감이다. 이런 우월감은 급속한 경제나 사회제도의 발전과 함께 선진국이 된 한국이 갖게 된 후발도상국이나 중진국에 대한 차별적 감정이다. 한국은 92년 대중 수교후 “가난하고 낙후한” 중국에 대해서 줄곧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이주해 주로 육체노동에 종사했던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우월감이나 주로 전근대적인 모습의 중국을 희화화하는 ‘대륙의XXX’밈들은 이런 감정을 잘 드러내는 현상이나 코드들이다. 2000년대 초반 중국과 중화권에 불어닥친 1차한류붐은 이런 우월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계가 됐다. 

사진7) 위대한 K-서사는 팬데믹에 상당히 잘 대처한 K-방역과 함께 한국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2008년 중국이 하계올림픽을 펼치며 “중국굴기”를 선포했을 때,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됐다. 장이머우라는 세계적 거장이 연출한 중화스펙터클 개막식은 경제중국뿐 아니라 문화중국의 잠재력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2008~2010년경은 중국의 대중문화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시기인데, 일본의 오타쿠문화, 서구문화, 그리고 한국 인터넷 게임문화 혹은 한류의 영향을 받은 중국80허우 세대가 주도하는 서브컬쳐가 웹소설 진쟝(晉江)이나 비디오 플랫폼 비리비리(嗶哩嗶哩) 통해 만개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당시의 수많은 B급문화들이 지금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속에서 풍부한 상상력과 중국 전통문화의 코드를 바탕으로 전개됐다. 이 인재들은 자연스럽게 중국 콘텐츠산업의 핵심으로 자라나게 되는데, 한한령 등을 계기로 자국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본격적으로 상당한 기술수준과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가진 웰메이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물론, 예능같은 특정 분야는 여전히 한류문화를 과도하게 모방하는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한국 네티즌들이 이를 근거로 중국의 대중문화를 비아냥거리는 일들이 벌어진다. ‘별그대’를 중심으로 하는 2차한류붐의 ‘코인’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된 한한령 한국의 서민경제에 상당히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한국의 보통 사람들이 중국에 대한 반감을 서서히 키워가는 계기가 됐다. 

한류는 서민경제와 직결되는 소비재 수출이나 서비스업, 관광상품과 관계가 많지만, 한한령과 무관한 반도체 등의 지속적인 대중국수출 호황처럼, 삼성재벌등의 대기업이 누리는 특수가 트리클다운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재벌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한국의 보수매체나 경제지들이 혐중감정 확산에 앞장서는 것이 자해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물론, 자신들과 한통속인 국민의 힘과 같은 극우정치세력의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의 높은 대중화권경제의존도라는 비단주머니를 흔들어도 이제 청년들이나 서민들의 반중감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은, 한한령이 지속되는 한, 실제로 이런 경제관계의 수혜를 누리는 사람들은 경제엘리트들뿐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인식했기 때문이다. 마치 영국의 노동자나 농촌 사람들이 시티의 글로벌 금융엘리트들에게 반대하며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것처럼 중국의 영향권에서 분리되기를 원하는 코렉시트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네티즌들은 이미 진흥하기 시작한 자국 대중문화에 대한 한국 네티즌의 공격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들이 한국네티즌에게 반격할 소재는 전통문화였다. 한국이야말로 중국 전통문화의 대표적 수혜국이니, 모방, 짝퉁문화의 원조가 아니냐는 주장이다. 중국 정부가 고무하는 중국 자체의 애국주의 열풍과 소분홍의 형성은 한국 네티즌 (혹은 전세계의 매체나 네티즌)과 “싸우는 주체”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소위 ‘한복공정’, ‘김치공정’은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해프닝에 가까운 현상이다. 여기서, 한복이나 김치, 혹은 특정한 전통문화의 종주국이 어디냐 하는 논쟁은 그래서 별로 의미가 없다. 문화는 일방적으로 수출, 수입되는 상품이 아니라, 영향을 끼치는 쪽이나 영향을 받는 쪽이나 상호 작용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대화’의 과정이자 산물이기 때문이다. 제로섬 상품경제와 달리, 대화를 통해 무한히 확장되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가깝다.        

이런 긴장관계속에 혐중이 갑자기 돌출한 것은 팬데믹 국면에서 위대한 ‘K-서사’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BTS, 기생충의 성공이 오징어게임으로 이어지면서 K-문화가 서구 주류세계 나아가 전세계의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됐고, K-방역은 문화를 넘어선 정책, 행정, 기술, 시스템과 제도에 대한 인정 내지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표현은 5년전 ‘촛불혁명’에 의해 등장한 문재인 정권 혹은 이를 창출한 한국의 시민사회가 일회적 해프닝인 ‘혁명’뿐 아니라 제도적, 시스템적 성과를 안착시킨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이 갖게 된 자부심은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만하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K-서사로 비대해진 한국인의 자아가 보편의 전유 나아가서는 과거 소중화의 현대버전인 ‘리틀아메리카’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한겨레21에 역사 서평을 연재하고 있는 유찬근 선생의 설명을 빌었다). ‘성리학’이라는 성배가 이번에는 ‘자유민주주의’로 탈바꿈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반중/혐중’ 정서인 것으로 보인다. 굽시니스트의 만화에서 보듯 ‘자유민주주의’의 적인 중국에 대한 혐오는 그래서 “정당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위대한 K-서사의 어떤 측면들이 사실은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있다거나 상반된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K-방역정책의 효율성과 성과는 서구사회가 택한 정책들의 ‘생명경시’와 대비되어 칭송되는데, 놀랍게도 이런 설명은 중국정부와 주류매체의 그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얼마전 이탈리아 언론이 실패한 자국의 방역정책때문(덕분?)에 다수의 노년층이 사망했고, 덕분에 천문학적 숫자의 연금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는데, 중국관방 미디어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 서구와 달리 중국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보호할 수 있었는지 자랑을 늘어놨다. 지난 2년간 중국민들이 국내 혹은 성(省)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고, 제조업 등이 위축되지 않았던 것도 객관적인 성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사진8) 이탈리아 언론들은 팬데믹에 의한 노년 사망자수의 급증으로 인해, 천문학적 연금을 아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2022년 현재 각기 100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한 유럽과 미국에 대해 연금과 국가재정을 고려한 고의적인 책임의 방기가 아니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런데 서구사회에서 벌어진 논쟁들이나 서구인들의 선택을 곰곰히 되짚어 보면, 결과로서의 정책실패와는 별개로, 그들이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존중이라는 가치사이에 상당한 고민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자신의 관점으로 K-방역의 성공을 평가할  중국의 성공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관점을 취할 수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방역의 성공은 “개인의 자유”vs “생명존중에 기반한 시민들의 연대와 절제”라는 가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택했다는 점을 평가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사인이 팬데믹 국면에서 이런 점을 북유럽 사회와 비교하면서 분석해낸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 연대의식이 우월감에 기반해서 타국의 성과에 대한 폄하(타이완,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나 비판(중국)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시민의 연대의식”과 “민족주의로 뭉치는 정치적 부족주의 동맹 구분하기 힘들어지는 지점이 있다. 더 나아가 성과의 제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이것이 생명존중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살린 목숨의 숫자”라는 성과에 대한 집착이었는지 설명에 곤란을 겪게 되는 지점도 있다. 만일 후자에 방점이 있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상대적으로 많은 노년층을 구한 덕분(때문?)에 K-연금의 재정상태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는 순간을 맞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극우언론이나 경제지들이 이점을 파고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글의 주제가 흩어지는 감이 있지만, 그래서 정웅기 교수 한겨레21에 기고던 K-방역의 민주적 과정에 대한 여러가지 지적과 분석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K-서사의 의미를 다시 충분히 점검해 볼 필요성을 꼼꼼하게 제기하고 논증한다. 위대한 K-서사에서 비롯한 혐중의 이유 하나를 르상티망 플러스에 추가하는 것이 상당히 무리하게 느껴지지만 일단 이렇게 두루뭉수리하게 묶어 본다. 

부연하자면, 어제 한 페친이 올린 최재천 교수의 CBS인터뷰를 보고 위대한 K-서사와 혐중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 방송을 가끔 재미있게 보는데,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단정적으로 편파와 국가주의로 얼룩진 최악의 행사로 평가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미국 전문가 김지윤 박사의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숏트랙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과 중국의 애국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이번 동계올림픽이 그 정도로 악평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있다. 

사진9) 유튜버로도 활동하는 한국의 ‘셀럽지식인’들은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후에 한국의 미디어 보도에 대한 적절한 평가없이 베이징동계올림픽을 ‘최악’이라고 규정하고 그 원인을 중국의 국가주의 탓으로 돌렸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내 생각을 좀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원래 국가대항전인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민족주의가 최고치로 분출하는 스포츠 이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 당시, 조금 소원했던 한 중국인 친구가 문자를 보내서, 중국이 차기 개최국임을 알게 됐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을 축하하고 이런 분위기가 베이징올림픽으로 이어지는 것을 자축하는 우정의 메시지였다. 개인적으로는 고마왔지만솔직히 중국이 무리하게 서둘러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중국은 동계스포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인데,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정치적 목적에 부합할 뿐이라고 느껴졌다. 물론,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 중국시민들의 관심이 급증했다는 뉴스를 보면, 이를 통해서 동계스포츠를 진흥시키고, 경제에도 보탬이 되게 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설명에도 동의하기가 힘든데, 중국에서 동계스포츠가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에는 단순히 경제수준뿐 아니라 지리와 기후적 요소가 있기때문이다. 경제가 발달한 연안지역이나 베이징과 같은 내륙도시에서 눈을 보기가 힘들다. 

중국에서 아마 가장 자연스럽게 동계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지역은 둥베이일 것이다. 한국인들의 (그리고 역시 이곳에서 중국 선수들과 함께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아 이 지역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화교출신 헝가리 선수의) 억장을 무너지게 한 중국출신 숏트랙 금메달리스트가 바로 이 지역 출신이다. 둥베이지역은 동계스포츠에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력을 포함한 기반시설이 매우 취약하고, 인구가 급감하는 곳이기도 하다. 만일 중국이 동계올림픽을 통해, 동계스포츠 문화활성화와 경제의 효익을 함께 누리고 싶었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마땅히 둥베이 지역을 중국 동계스포츠의 메카로 활성화시키는 노력을 먼저 취했어야 한다. 중국 전역의 관광객들이 둥베이로 가서, 동계스포츠를 즐기면, 그 지역 경제에도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이런 준비가 이뤄진 후에 둥베이지역과 베이징 등을 엮어서 올림픽 경기를 치뤘다면,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베이징에서 100% 인공설을 이용해 만든 스키경기장을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올림픽을 전후해서 둥베이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평창올림픽 직후나 베이징올림픽을 전후해서 이런 분석을 하는 한국 매체를 나는 본 기억이 없다. 평창올림픽이 남북관계의 긴장완화에 도움이 됐고, 중국이 이를 간접지원했기 때문에, 베이징 올림픽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여론이 오히려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여론이 작년중반까지도 이어졌고, 실은 올림픽에 임박해서는 대선정국을 비롯한 한국뉴스에 묻혀, 한국사회는 베이징 올림픽에 완전히 관심을 끄고” 있었다.

그리고 한복과 숏트랙 사건이 터졌다. 그 이후 한국 매체의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보도 태도에 나는 상당한 실망감을 느꼈다. 한쪽에서 중국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한국 선수들의 메달 소식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기에 중국 정부가 셀링포인트로 삼았던 하이테크 올림픽의 상징인 로봇식당의 음식이 맛없다고 불평하는 모습은 정말 최악이었다. 특히 동아시아인들의 정서상 이웃집 잔치에 덕담은 못할망정 재를 뿌리는식의 행동이 개최국인 중국시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불을 보듯 훤했다. 한국언론은 베이징올림픽의 모든 면이 최악이라고 주장했는데, 주의깊게 영어권 매체들의 보도를 검색해본 결과 한국 언론의 보도는 상당한 혐중편향이 들어있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서구 언론들은 올림픽 개최전 외교적 보이콧의 원인이 된 인권문제나 환경문제(인공눈 스키장)그리고 다소 과도하게 느껴지는 중국식 방역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유지했다하지만,  올림픽이 개최된 후에는 경기나 행사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이었고, 큰 탈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운영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미디어의 보도 태도에 실망을 하고 있는 와중에 유명 유튜버이기도 한 두 지식인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다시 저런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왔다. 더구나 두 사람은 국내여론뿐 아니라 해외의 시각을 함께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만한 위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위대한 K-서사가 쌍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불편부당한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유튜버로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해야 한다는 의도와 중국에 대한 자신들이 가진 혐중정서나 편견이 부지불식간에 콘텐츠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끝으로 중국인들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어떻게 보는지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 앞서 밝혔듯 중국내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매파들이 타이완에 대한 협박을 일삼고 있다. 또, 중국 정부의 모호한 태도나 해외에서 중국을 러시아와 한통속으로 보는 관점에 스스로 동화돼, 러시아를 응원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들어 전쟁을 반대한다고 선언하며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중국 정부가 후자의 주장을 인터넷 상에서 제한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뿐이다. 

그런데이런 한쪽 편들기나, 보편가치를 따르는 평가, 혹은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국제 정세에 기반한 신중론뿐 아니라상당수 중국 사람들이 판도를 보는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도 있어서 소개하고 싶다. 

이들은 일단 뒤통수를 맞은 것 때문에 러시아가 괘씸하게 느껴진다. 안그래도 동계올림픽때 조마조마했는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고, 심지어 항저우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벌어진 이런 복잡한 국제 상황이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짜증을 내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과 국가 주민이나 유학생들이 일찌감치 대피한 것과 달리, 중국 유학생 수천명은 키이우/키예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에 묶여서 발을 동동구르고 있다. 중국 정부도 모르고 뒤통수를 맞았거나, 아니면 알고도 기민정책을 취한 것인데, 어떤 경우이든 중국 시민들 입장에서는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를 중국, 타이완과 미국의 관계로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우크라이나는 타이완, 서우크라이나는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미국이다. 일찌감치 독립을 선언한 동우크라이나의 두 공화국이 지금 독립을 주장하는 타이완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미국/러시아가 이들의 독립을 승인하거나 지지하고, 나아가 러시아의 서우크라이나 침공과 비슷하게 중국 대륙을 침공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가진 아메리카포비아 혹은 미국에 대한 애증 (앞서 언급한 무크지에 발표한 글은 한국의 르상티망보다는 중국의 미국에 대한 정신분열적 감수성이 주제였다.)을 아마 한국인들은 잘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020년 하반기 트럼프의 재임시기 미중갈등이 격화됐을 때 우연히 엿듣게 된 이웃 초등학교 어린이들 놀이터 대화가 잊혀지질 않는다. “미국이 중국을 공습하거나 미사일 공격을 가하면, 어디로 대피해야하지?” 참고로 이 아이들은 반미주의자가 아니라 미국과 서구문화를 매우 좋아하는 (그러니까 기회만 되면 아이들 영어권으로 유학보내고 싶고 온가족의 이민도 고려하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중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모호한 태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서구의 일방적인 러시아 비판 담론에 편승하거나 직접적인 경제재제에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전쟁에 반대하는 최소한의 원칙적인 윤리적 태도는 표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중국 정부의 이런 태도를 좇는 중국 시민들도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침묵하는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인류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G2대국으로서의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회피할 수 없고, 자신들이 자랑하는 위대한 중화문명의 보편가치가 인류의 보편가치와 부합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더욱 그러하다. 

사진10)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잉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문제의 역사적 맥락이 매우 복잡하고 양측 모두 무력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기계적인 중립입장을 유지했다. 또, 서방 언론이 과거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에 대해서 관대했던 반면,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즉각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항변했다. 입장을 밝히는 것을 회피하는 중국정부에 집요하게 러시아를 비판할 것을 요구하는 서방 기자들의 태도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든 점이 있었다. 하지만, 명백한 불의앞에서조차 불간섭원칙에만 집착하며 최소한의 윤리적 태도도 표명하지 못하는 중국 정부의 태도는 G2 대국의 자격을 의심받게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이다. 혐중이나 차이나포비아에서 비롯해, 문제의 당사자가 아닌 중국정부와 중국시민을 비난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니다. 이런 처사는 중국인들이 외부의 공격에 대한 방어기제를 발동시킴으로써, 비판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적으로 사유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줄인다. 우리의 기대나 희망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혐오를 위한 혐오”, 르상티망이 아니라면 말이다.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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