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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1년 12월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녹색정치대화모임에서 발제문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녹색정치를 진보정치로 바꾸어도 논지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대선판을 바라보면서, 이른바 진보-녹색 활동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 글을 다시 떠올렸다. ‘생/명’ 관점에서의 정치적 제언이기도 하다. 키워드는 ‘감응(정동)’과 ‘역설’이다. 녹색당에 대한 짧은 제안이 담긴 5절의 내용은 대부분 삭제했다. 정동이론가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정치』라는 책에서, 좌파의 위험에 대해 “강직함과 옳은 판단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역설의 사상가인 체계이론가 니클라스 루만이라면 아마도 이 말을 경구로 보냈을 것이다. “사회는 너무 빨리 바뀌어서, 보수 세력은 기회주의자로서만 버틸 수 있는 반면, 좌파들은 실현되지 못한 이상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5절에 조금 더 논의한다.

 

1. 녹색정치는 녹색정치들이다

녹색정치는 항상 ‘녹색정치들’이었다. 환경운동연합의 녹색정치, 녹색연합의 녹색정치, 환경정의의 녹색정치도 있다. 물론 녹색당이 한국의 녹색정당의 간판이지만, 정당정치 안에도 수많은 녹색정치들이 있다. 민노당의 녹색정치, 진보신당의 녹색정치, 민주당의 녹색정치 등이 그것이다. 수많은 이념형 녹색정치들도 있다. 사회주의 녹색정치, 자유주의 녹색정치, 아나키즘 녹색정치에다가 최근에는 포스트모던 녹색정치, 포스트휴먼 녹색정치, 신유물론적 녹색정치, 정동적 녹색정치, 개벽적 녹색정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간적으로도 녹색정치는 녹색정치들이다. 더욱이 그 역사를 살펴보면 아이러니를 실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녹색정치에 참여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2002년 지방선거였는데, 그때 녹색평화당의 전라북도 광역선거 득표율이 4.8%였다. 이는 이후 녹색정당이 넘볼 수 없는 대기록(?)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이미 녹색정당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해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런데, 같은 선거에서 환경운동연합도 녹색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독자적으로 녹색후보를 출마시켰고, 고양시장 후보 등 전국적으로 50여명의 후보를 냈으며 기초의원 15명이 당선되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역설적으로 두 개의 녹색정치가 각개 약진했던 2002년도가 한국녹색정치운동사의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물론 여기에는 기초의원 정당공천 배제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으나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후 당선된 기초의원들을 중심으로 초록정치연대가 결성되었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10여명의 현역 지방의원을 포함해 21명의 풀뿌리 후보를 내었지만 2명 만이 당선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2012년 녹색당이 창립되고 그해 4월 총선에 참여하며 녹색당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선거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이다.)

요컨대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녹색정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것이다. 더욱이 녹색정치를 비-실체적인 것으로 본다면, 녹색정치는 그때그때 녹색정치화(化)하는 변화무쌍한 사회적 흐름들의 출몰을 의미한다.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정치적 실체의 선형적 전개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녹색정치에 관한 나의 첫 번째 문제감각이자 문제의식이다. 단수의 녹색정치 이미지(像)에서 벗어나기. (그런 점에서 녹색당이라는 서구형 당명도 문제가 된다. 동아시아에서 녹색은 굳이 말하면 동쪽의 색, 靑이다. 오방색의 중심은 황색이며, 동아시아에서 생명세계는 오방색의 조화로 잠재의식화되어 있다.)

녹색정치를 ‘녹색정치들’로 바라보는 효과는 엄청나다. 2021년 오늘 한국에는 비-정당적 녹색정치들이 무수히 많이 재-발견된다. 그리고 그들 사이는 종횡으로, 좌우로, 상하로, 전후로 연결되고 또 재-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떻게 현재의 정치체계 내에서 ’공동의 행위자‘로 진입 혹은 재-진입시키느냐이다. 예컨대 현실로 엄존하는 페미니즘 녹색정치, 포스튜휴먼 녹색정치, 아나키적 녹색정치, 생명운동적 녹색정치 등을 어떻게 재-연결하느냐이다.

 

2. 정치의 최종심급은 ’감응‘이다

그런데, 앞에서 2002년 이후 녹색정치의 시간적 흐름을 살펴봤거니와, 또 다른 맥락에서 2002년 이후 녹색당을 비롯한 녹색정치들은 왜 표가 점점 떨어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세먼지와 기후재난, 코로나 팬데믹 등 생태위기는 더욱 심각해지는데 왜 생태정치(녺색정치)는 왜 더 많은 표를 얻지 못할까?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인들과 네거티브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진보정치를 대표하는 정의당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객관주의 및 이성주의적 정치관 때문이다. 이념과 가치를 앞세우다, 표심을 움직이는 ‘서사(narrative)’ 혹은 이야기(story)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서사’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에 붙어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서사보다는 감응(感應) 혹은 정동(情動/affect)이 그것이다. ‘비-의식적인’ 몸-마음의 흐름이 표심을 움직인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여성학자 정희진이 정치의 최종심급은 ‘감정’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이를 빌려 말하면, 정치의 최종심급은 감응(정동)인 것이다.(‘감정’과 ‘감응’은 구별된다. 감정이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이라면, 감응은 ‘생각 없는 비-의식적인 몸의 반응’이다. 감응은 ‘생/명의 세계관의 제1 명제다. 이를테면 “나는 감응된다 고로 살아있다.”)

‘서사’를 강조한다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객관주의, 본질주의를 떠났다는 것이다. 서사는 진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정동‘을 말한다는 것은 이성(합리성) 중심주의에서 떠났다는 이야기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의 명령에 따른다는 뜻이다.

결론은 ’감응적 이야기‘, 혹은 ’정동적 서사‘다. 감응적 서사가 오늘 우리시대 정치적 소통형식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본질주의 정치, 비-객관주의 정치, 비-이성주의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주류 정당들은 ’욕망정치‘, ’감각정치‘, ’마음정치‘를 하는데 반해, 진보정치들과 녹색정치들은 ’진리정치‘, ’이념정치‘, ’가치정치‘를 해왔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진보-녹색정치의 ’자기-기만‘을 아프게 실감한다.)

그런 맥락에서 기후정치에 대해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기후변화의 위험을 인식했다고 해서 곧장 녹색정치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식의 배후를 봐야한다는 말이다. 문제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문제감각이다. 문제감각은 문제의식에 선행한다. 느낌은 생각에 선행한다. 물론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했다면 더 이상 말이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인식은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욱 많은 이들이 아파한다. 아픔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녹색정치는 ’기후변화‘와 함께 ’기후우울‘에 더욱 더 많이, 최소한 같은 비중으로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지적 불안 이전에 정동적 불안감이 선행한다. 녹색정치는 티핑포인트의 지구 온도만이 아니라 (인간) 생명들의 부정적 정동과 불안과 우울에 응답해야 한다는 말이다. 좁혀 말하면, 유권자라는 정치적 행위자들의 정동과 감정에 유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이때 ’정동‘이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정동이론에 의하면, 정동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 영향을 주고받는 비-의식적인 생명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후우울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진 직전 현장을 피하는 동물들의 내적 감각, 동식물을 포함한 생명체들의 내적 움직임과 그 상호작용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응적 관계는 나아가 (생명체와 생명체 사이 뿐만 아니라) 물질과 인간의 사이의 일이기도 하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의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앞으로 80년동안 바다의 수소이온농도는 지난 5,000만 년보다 더 많이 변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고 주게 될 것이다. 초미세먼지가 그렇듯이. 80년 동안의 인간 활동은 업보가 되어 지구 전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인간의 신체와 심성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감응의 생명학, 정동적 생태학

감응(정동)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감동(感動)‘을 주는 정치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감동은 오히려 그 효과이다. 느끼어 움직이는 것은 진동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진동을 일으킬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것이 감동이라는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정치의 최종심급은 ’감응‘이다. 아니다.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이다. (여기에서는 유기체적 생명의 욕망과 비-유기체적 생명의 영성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서구의 생태학과 동아시아의 생명학의 관심이 ’마음(heart)‘으로 수렴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감응의 생명학

김지하의 생명학은 이를테면 감응의 생명학이다. 천지공심(天地公心), (비-의식적인) 하늘-땅 마음의 생명학이다. 특히 김지하는 생태학과 생명학을 애써 구분한다. 김지하에 따르면, 생명학이란 “생태학의 객관적 관찰체계와 그 생태 물질 내면에 숨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마음’과의 여러 상관관계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다. 생태정치학자 문순홍과 대담을 통해 생명학을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는 『생명과 자치』(1996)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김지하의 생명학은 분명 서구의 생태학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로 보인다.

김지하는 줄곧 “생명은 곧 기(氣)”라고 말했거니와, 동아시아에서 감응은 무엇보다 ‘기의 감응’이다. 이를테면, (넓은 의미에서) 생명세계의 소통형식은 감응이다.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을 아울러 ‘감응되는’ 생명세계 속에서 무수히 많은 다양한 모습으로, ‘또 다른 생명형식들’(又形)이 태어났다 사라진다.

이때 감응은 주관적 감정이입과 구분되는 깊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물질과도 소통되는 우주적 마음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통감(痛感), 아픔을 느끼는 마음이다. 연민(憐愍)이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자비심이나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다. 김지하는 ‘변혁적 생명학을 위하여’(2012)라는 강연에서 서구 생태학과 서구 녹색당의 한계는 ‘마음의 부재’라고 단언한다.

 

2)정동적 생태학

그러나, 오늘날 생태학은 김지하가 비판하는 대로 그저 객관주의의 학문만이 아니다. 위대한 생태 인류학자 그리고리 베이트슨의 책 제목처럼 ‘마음의 생태학’이다. 펠릭스 가타리의 환경, 사회, 정신의 세 가지 생태학도 그렇거니와, 최근 정동이론을 접목한 ‘정동적 생태학(Affective Ecology)’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생명애’ 혹은 ‘녹색애’로 번역되는 biophilia도 같은 맥락에서 재-조명할 수 있다. 생기적 유물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과 삼재론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정동적 생태학의 관점에서, 예컨대 4대강 사업은 “정치경제적, 환경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감정사회학적 측면에서, 재현될 수 없는 정동들이 생성된 정동적 사건(affective event)”이다. 정동적 생태학은 “다양한 환경 서사가 생태적 감수성과 실천을 목적으로 공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용자의 신체에 정동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참여를 구성하는 전체적인 서사 방식을 포괄하여 일컫는 말”이다.(신진숙, 2018)

여기서 정동은 개체적인, 주관적인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한다. 마수미는 강조한다. “우리가 정동 안에 있는 것이지, 정동이 우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정동정치』) 다시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생태계 안에 있는 것이지, 생태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 안에도 생태계가 있다.)

‘감응의 생명학’과 ‘정동적 생태학’은 생태민주주의, 생명공동체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정동이론에 ‘정동적 소외’라는 개념이 있다. ”정동공동체로부터 바깥으로 내몰리는 것“을 말한다. 생태적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살림선언은 인간의 소외 대신에 ‘생명의 소외’라는 말을 하고 있다. 정동적 소외를 빌려 말하면, ”생명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리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녹색정치란 무엇보다 정동적 소외, 생명의 소외에 맞서 싸우는 것이 된다. 그리고 감응과 정동의 관점에서 재-공동체화한다.

나아가 감응의 생명학과 정동적 생태학은 생태민주주의의 근거가 된다. 라투르가 말하는 ‘사물들의 의회’, 제인 베넷이 『생동하는 물질』에서 말하는 ‘벌레들의 의회’가 그것이다. “인간의 신체, 바이러스의 신체, 동물의 신체, 기술적 신체 사이의 ‘내적-상호작용’과 ‘번역’의 대전제가 된다.

 

4. 생·생정치: 재-발명을 위한 아이디어들

그렇다. 정동적 생태학과 감응의 생명학은 우리를 몸-마음의 정치로 안내한다. 동아시아의 한끝 한반도에서 동학과 서학이 만난다. 생태와 생명이 만난다. 생태주의운동과 생명평화운동이 만난다. 생명의 마음과 생태적 마음이 만나 또 다른 차원을 태동시킨다. 한국 녹색정치에서 그 이름은 ‘생생정치’다. 풀어 말하면, ‘생명-생태’ 정치다. 물론 살아있는(living), 생생한(lively) 정치이기도 하다. 주역에 나오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의 그 생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음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의 ‘정치적 형식’을 발명되어야 한다. 기후우울이 곧바로 녹색정치로 작동될 수는 없다. 생명세계의 감응은 사회적 형식, 정치적 형식으로 재-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생생한’ 정당 만들기와 ‘생생한’ 정당 활동으로 요약된다.

체계이론가 니클라스 루만의 정치이론을 따르면, 정치 역시 하나의 사회적 체계이다. 루만에게 정치체계의 기능은 ‘집합적으로 구속하는 결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이다. 녹색문화, 녹색시민사회, 국토환경, 기후재난 등 녹색정치의 잠재적 토대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관심사는 아니다. 오히려 ‘반정당의 정당’에 대한 교조적 해석이나 정치적으로 실패할 때마다 개인적 성찰과 정치문화로 후퇴하는 습관이 더욱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정치체계 안에서는 정당이 아니고서는 체계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 정당에 대한 고려 없이 정치를 말할 수는 없다. 진보정당이든 녹색정당이든, 혹은 생명정당이든 지역정당이든 정당이 필요하다. 물론, 정당과 함께 유권자라는 정치적 행위자도 물론 중요하다. 평소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유권자는 투표를 통해 다시 정치체계에 재-진입한다. 정치시스템과 재-접속한다. 그리고, 기존 정당들은 2022년 3월과 6월 투표를 통해 정치체계에 재-진입하는 유권자의 마음의 움직임에 사활을 건다.

요컨대, 생생정치는 활력을 필요로 하지만, 활력에만 그칠 수는 없다. 새로운 정치형식의 발명 및 재-발명과 정치체계에 대한 진입 및 재-진입이 중요하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3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1)어울림 정치

정동이론가 브라이언 마수미(『정동정치』)에 따르면, “정치의 목표는 차이 나는 그대로 다사다난한 사이-내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강렬함을 가지고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이다. 이를 녹색정치에 적용하면, 수많은 녹색정치들의 강렬함이 어울려 살아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그것은 ‘정책연대’와 구별된다. 기후정치는 정당간, 정치세력간의 연대로 가능하다. 또한 그것은 ‘가치연대’와 구별된다. ‘정동적 어울림’이다. 한자로도 적절한 말이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 그것이다. 어울리되 똑같지 않다. 특히 이때 ‘화’는 화(龢)의 약자로서 ‘다발 피리의 하모니’를 의미한다. (그러나, 구동존이(求同存異)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절실하게 구해야 할 것은 ‘공통성’이 아니라, ‘잠재성’이다. 이를테면 ‘구공존이(求空存異)’의 감각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획에.)

‘강렬한 공존’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과거에도 존재했다. ‘전선당(front party)’ 개념이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거대정당들인 민주당과 국민의힘도 사실은 전선당에 가깝다. 민주화 전선과 산업화 전선, 혹은 진보주의 전선, 보수주의 전선이 그것이다. 일본의 자민당도 마찬가지다. 팬데믹-기후우울시대, 우리에게는 생명, 생태의 ‘생·생 프론트’가 요구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녹색정당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소설 『에코토피아』에 나오는 생존당(survival party)이 떠오르기도 한다.)

 

2)감응적 서사 만들기

이데올로기적 거대담론과 구별되는 가슴 뛰는 빅 히스토리 만들기다. 정동적 서사 만들기다. 토마스 베리 신부의 지구의 꿈도 있고, 동학의 다시개벽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으로 접하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의 수많은 영웅담이다. 그리고 게임들이다. 메타버스와 가상체험을 비롯해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적‘이라는 점이다. 신체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설레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경영이론가들은 ’경험경제‘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경험정치가 필요하고 그 출발점이 새로운 삶의 경험을 예감케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관점에서 그 경험은 이중적이다. ’감각적 경험‘과 ’감응적 경험‘이 그것이다. 그런데 감응 혹은 정동의 의미는 그것은 ’욕망‘의 충족이기도 하지만, ’이상‘의 실현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금기의 파괴‘이기도 하다. 금지된 사랑의 경계를 넘고, 국경과 지구의 경계를 넘는다. 그리고 새로운 유토피아가 창조된다. 요컨대, (새로운 경제 트렌드로 지목되는) ‘경험경제’에 대응하는 ‘경험정치’의 발명이 요구된다. 특정한 지방정부, 지역공동체에서 ‘정동적 서사를 경험할 수 있는 정치적 실험과 정치적 실행이 절실하다.

(이는 사회운동 일반의 과제이기도 하다. “신명과 영성, 감응의 사회적 경험 형식 만들기가 또 다른 생명운동의 핵심적 활동과제가 된다. 자기-창조적 생명활동의 열망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 생명의 리듬과 결에 맞는 사회를 다시 꿈꿔야 할 일이다. 『모든 것은 느낀다』의 저자 안드레아스 베버(2013)는 이를 ‘생동화(enlivenment)’라고 말한다.”)

 

3)돌봄 이니셔티브

감응-정동의 관점과 기후우울의 입장에서, 그리고 ‘저출생-고령화사회’의 현실과 전면적 생태위기의 현실에서 녹색정치의 제1의 키워드는 이제, ‘돌봄’이 될어야 할 것이다. 자기-돌봄이자 서로-돌봄이다. 인간과 인간의 돌봄이자, 생명-공동체 돌봄이다. 무엇보다 ‘돌봄함’에 앞서 ‘돌봄됨’에 대한 자각이 중요하다. 우리는 항상 생명세계의 ‘돌봄됨 안’에 있다. 그러므로 ‘돌봄함-돌볼됨’의 자각, ‘돌보아지는 나, 인간, 사회에 대한 자각’이 중요하다.

그렇다. 오늘날 녹색정치는 곧 돌봄정치다. 정동이론에서 (정치의 목표가 그렇듯이) 돌봄은 “차이와 이질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태적 돌봄’과 ‘사회적 돌봄’의 연결이 핵심이 된다. 정책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동적 서사’과 ‘경험정치’의 구현이 중요하다. 그리고 정책적 경험적 매개체는 ‘돌봄’이다.

 

5. 그리고 2022년 오늘

“사회는 너무 빨리 바뀌어서, 보수 세력은 기회주의자로서만 버틸 수 있는 반면, 좌파들은 실현되지 못한 이상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니클라스 루만이 68혁명 직후 당시 유럽사회를 관찰하며 1971년도에 한 이야기다. 루만은 세계의 역설에 대한 통찰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녹색정치는 어떤 모습일까? 기회주의자일까, 보수주의자일까? (사실은 오늘의 생명운동을 경험하고 다시 관찰하며 가졌던 질문이다.)

그렇다. 보수의 잘못도 아니고, 좌파의 잘못도 아니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살아남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뿐이다. 그것은 체계(system)의 속성이기도 하다. 다만, 루만은 그에 대한 성찰과 자각을 촉구할 뿐이다. 루만은 이를 ‘사회학적 깨달음’(sociological enlightenment)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도 이에 대한 답이 준비되어 있다. ‘중도’가 그것이다. 혹은 시중(時中)이 그것이다. 동학의 언어로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일 수도 있다. 나의 언어로는 ‘생/명’이고, 감응과 우형의 생명운동이다.

2022년에는 2022년의 녹색정치가 요구된다. 또 다른 녹색정치를 발명하고 재-발명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결단이 늦으면,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이 강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녹색정치도 마찬가지고, 진보정치도 마찬가지다.

주요섭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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