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의 강도가 다르다. 나는 오늘도 서울과 정읍을 오가며 두 개의 코로나 시대를 경험한다. 동시에 유럽의 코로나 시대와 미국의 코로나 시대를 실시간으로 접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역사책을 통해서 읽은 조선 말 ‘괴질’ 이야기와는 또 다르다. 내 안에는 수많은 코로나 시대가 중첩되어 있다.
1. [세계감] 더욱 나빠진 세계
‘세계관’ 이전에 ‘세계감(世界感)’이 있다. 어떤 다른 느낌이 있다. 콧속 깊숙이 쳐들어오는 백신 검사용 면봉도 그랬지만, 뭔가 기분이 나쁘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세상은 늘 하던 대로, 아니 더욱 정교하게 기존의 질서를 재-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동산과 주식과 암호화폐는 그 표면일 뿐이다(개인적으로 봄에 딸들의 서울집 임대문제 때문에 부동산중개 사무소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위드 코로나, ‘코로나화’된 사회
정말 ‘코로나 시대’라고 말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코로나’가 우리 삶을 규정한다. 마스크와 거리두기, 재택근무, 일상화된 화상회의들만이 아니다. 경제시스템과 교육시스템, 복지시스템과 같은 거시적인 사회시스템들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코로나’라는 말이 그 이미지와 논리, 그리고 어떤 밀도로 우리를 감염시킨다. 코로나는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아직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치고 지루하고 지겨운 것도 사실이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작은 접촉사고 후에도, 혹은 누군가와의 헤어짐 뒤에도 이전으로 돌아간 적이 없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사건들은 업장처럼 내 몸에, 사회에, 우주에 남아서 후일을 기약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뭔가 끝나가는 느낌이 있다. 감염자가 발생하지 않거나,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해서거나 아니다. ‘코로나적인’ 어떤 것에 사회·문화적으로 감염된 느낌이다. 푹 잠긴 느낌이다. ‘코로나 이후’가 아니라 ‘코로나화(化)’된 삶과 사회라고나 할까. 사실 인간은 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왔다.
지난 해 봄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이미 ‘포스트 코로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뉴노멀’을 이야기했다. 나 역시 (오늘과 같은) 이런저런 자리에서 ‘위기는 전환의 기회’를 운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그렇고 그렇다. 여여(如如)하다. 뭔가 공기가 바뀐 것 같은데,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고 기득권자들은 더 큰 기득권을 누리는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뉴노멀은 이미 작동 중이다
수많은 전문가들과 미디어들이 뉴노멀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미 뉴노멀이 작동 중이다. 변화가 있으므로 분명 ‘뉴’는 ‘뉴(new)’다. 백신을 만든 기업을 비롯한 글로벌 거대기업들은 더욱 거대해졌고, 유일무이한 생명권력을 행사해온 국가는 더욱 강대해졌다.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고, 기후변화가 ‘더욱’ 악화되고, 대선 후보들에 대한 기대는 ‘더욱’ 더 줄어들었다. 구조는 바뀌지 않고 경계만 ‘더욱’ 선명해졌다. 선을 넘는 것은 고사하고 근처에도 가기 어려울 것 같다. 경제적 격차만이 아니다. 인심의 벽이 더욱 높아졌다. 나의 감각, 나의 관찰이다. 나에겐 이것이 포스트 코로나와 뉴노멀의 실체다.
사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사회적 척도’는 누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누가 거기에 이름을 붙이느냐이다. ”이것이 새로운 진리다“라고 선포할 수도 없거니와, 만약 누군가 그것을 강변한다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하나의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나의 감각에 전해지는 가장 확실한 우리 시대의 규칙들은 가차 없는 ‘능력주의’와 염치도 없는 ‘자본 숭배’와 능력자들에게는 한없이 열려있는 대장동과 같은 일확천금의 제도(시스템)이다.
지난 해 봄 어느 절집에서부터 이런저런 수많은 화상회의들까지, 함께 나눈 소소한 ‘전환 이야기’가 쑥스러워진다. 백신을 맞을 것인가 맞지 않을 것인가 외에 다른 선택지가 전혀 없는 조건에서, 최고지도자와 직접 거래하는 글로벌 백신 제조기업의 강력한 존재감이 나를 무기력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탄소중립 목표를 호도하는 정부의 문제가 아니다. 탄소중립이라는 의제 자체가 기업과 정부가 아니고서는 접근조차 어렵다는 현실이 문제적이다. 시민사회는 단지 위원회의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거나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점은 그들의 뉴노멀은 이미 진행 중이라는 말이다.
(만약, 포스트 코로나의 뉴노멀이 있다면, 딱 하나는 인정할 수 있다. ‘확실성의 종말과 열린 미래‘. 30여 년 전 노벨화학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은 일찍이 『확실성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결정론 및 기계론과 결별케 해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또 다른 ‘미래들’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최근 물리학자이자 신유물론적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케런 버래드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들인 ‘불확실성(uncertainty)’과 ‘비결정성(indetermiacy)’을 구별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불확실성이 아니라 비결정성이라는 개념을 취한다. 그렇다면, 열린 미래란 사실은 ‘비결정성’ 이야기이다. 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 즉 ‘미(未)결정성’이기도 하다.)
자기성찰의 함정
그렇다. 팬데믹이든 기후위기든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정부와 기업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맨손의 민초(民草)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로 웨이스트’나 ‘종이컵 안쓰기’ 정도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수없이 듣게 되는 것이 ‘성찰’이다. 인류의 자기-파괴적 행동을 반성하며, 이분법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또 자기-비판한다. 그런데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이분법으로 살 일이 없다. 매일 천변과 공원을 산책하고, 몸에 좋고 나쁜 것을 가려먹고, 매일매일 미세먼지를 피해가며 비-인간 및 비-생명적인 것들과의 관계를 체감한다. ‘몸-생/명’들의 삶은 철학자들이 ‘선험적’ 생활세계’라고 말했던 그 세계가 늘 ‘경험적’임을 보여준다.(그런 점에서 민중 개념을 소환하고 싶다. 나에게 민중이란 무엇보다 ‘몸의 인간’이다. ‘몸-생/명’이다. 더욱이 최근의 어떤 철학과 이론들도 사회와 환경, 자연과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구별할 수 없다. 단 인식론적 범주화와 구별은 불가피하다. )
인류, 문명, 생태와 같은 지구적 차원의 담론들은 책임을 져야 할 존재들의 책임을 면피하게 해준다. 예컨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경제학의 논리를 생산하는 지식인과 기술자들이나 자연 파괴 기술을 남용케 하는 기업들, 특히 모든 생태적, 사회적 가치를 자본의 증식으로 환원하는 자본가들의 책임을 호도한다. 자본주의 기업들이 병 주고 약도 주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물론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모를 수도 있고, 그런 맥락에서 마땅히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도 짓을 했다는 것을 고백받을 필요는 있다. 피해를 끼쳤다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제도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을 철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툰베리와 청소년 기후변화 활동가들이 주장하는 ‘uproot the system’이라는 구호가 의미심장하다.
(그런 점에서 문명담론, 생태담론에 대해서도 재고가 필요하다. 예컨대, 문명담론과 생명담론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만주국 설립기에 민족적 탄압을 호도하는 이데올로기로 생산되었다. 문명사적 통찰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적인 고통을 외면하면서 전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전환담론 자체에 대한 재논의도 필요하다.
2. [분석] 문제는 자본주의다
“우리는 우연히 자본주의로 살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표면의 세계가 일상적인 깊이의 세계에 양보할 수 있는가?”(브루노 라투르, 2021 : 93) 라투르가 코로나 이후를 진단하면서 쓴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우리는 ‘우연히’ 자본주의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일상적인 깊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우연한’ 자본주의
그렇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인 것 아니다. 우연적이다. 다시 말하면, 얼마든지 또 다른 경제체계가 선택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자본의 자기생산과 재생산체계가 현재 압도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지만, 사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엉성하고 무질서하다. 생각만큼 치밀하지 못하다. 또한 기후변화와 같은 자연환경의 충격에 매우 취약하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관념이자 이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제도이다. 생명의 기쁨과 활력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물질적 풍요를 선물한 자본주의는 사회적으로 그 사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생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경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시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자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생각해보면, 자본의 숭상을 공동체의 핵심 이념으로, 중심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생명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본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제다. 자본주의 제도가 문제다. 대장동을 보자. 한국사회 최고의 기득권자들인 대법관과 언론인과 공무원들이 스스로 밥상을 차리고, 스스로 다 해 먹는다. 대장동 같은 합법적(으로 보이는) 약탈 사건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탐욕이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다. (정읍에서도 강남의 투기꾼들이 와서 임야 수십만 평을 사서 개발하는 프로그램이 착착(?) 진행 중이다. 물론 주민들의 저항을 받고 있지만.)
오늘날 팬데믹과 기후재난을 싸잡아서 인류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개인적인 탐욕 탓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자기생산체계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사회경제제도가 진짜 문제인지도 모른다.
탈-신체화, 보이지 않는 몸 잘라내기
그렇다면, ‘일상적 깊이의 세계’란 무엇일까? 아니 왜 일상적 깊이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라투르의 깊은 생각을 알 수 없다. 나의 짐작일 뿐이다.) ‘일상의 깊이의 세계’가 ‘표면의 세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일상적 깊이의 세계는 ‘살아있는 몸’이다. 많은 철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생활세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차적으로 ‘몸-생/명’이다. 그것이 가장 깊은 세계이다. 시장을 움직이고, 정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청년들의 영혼마저 들썩이게 만든 주식시장과 암호화폐시장과 부동산시장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몸 사회학’에서는 사회의 원천을 몸이라고 했거니와, 정동 이론의 관점에서는 ‘비-의식적인 몸의 감각’이야말로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어느 정동 이론가의 표현을 빌자면, “시장의 변동은 근본적으로 비경제적인 요인인 정동(affect)에 따라 일어난다. 시장들은 공포와 희망, 확신과 불안정 위에서 돌아간다.” 또한, 체계이론의 ‘공생 메커니즘’ 개념에 의하면, 근대적 경제체계는 신체의 ‘필요’와 공생적 상관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미 경험한 사실들이다. 그런 점에서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몸-생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탄생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과 시장은, 어쩌면 국가마저도 자신의 토대인 몸-생명을 배제하려 한다.
독문학자 김누리가 소개한 영상이 인상이었다. 지난 해 시위를 벌이는 독일 학생들의 손에 들려있던 현수막에 내용이다. “life vs capital”, “생명이냐 자본이냐‘를 묻는다. (베를린의 엄청난 부동산 가격 급등 뉴스가 생각난다. 나의 1인 시위가 또 생각난다.) 생명(생활)과 자본은 공생은커녕 적대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자본주의 경제체계가 탈-생명화, 탈-신체화되었다는 것이다.
위드 코로나와 재-공생화, 재-신체화
그렇다. 이제 다른 삶의 양식을 ’재-발명‘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의 관점에서 그것은 경제의 ’재-신체화‘, 혹은 경제와 생명의 ’재-공생화‘이다. 그것이 이를테면, 위드 코로나 시대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위드 코로나를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이미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왔다. 코로나 이데올로기와는 다르게, (사실은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바이러스는 인체의 외부에서 돌아다니다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내 몸 안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면역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이다.
그렇다. 경제와 ’몸-생/명‘을 재-연결해야 한다. 경제를 재-신체화해야 하고 경제체계와 생명 활동이 재-공생화 해야 한다. 이때 재-공생화 과거로 돌아가기가 아니다. 돌아갈 수도 없다. 또 다른 공생의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발명은 항상 ’재-발명‘이다.
이번엔 단순히 필요와 생존에 머물지 않는다. (인류 전체가 그렇지는 않지만), 인간의 몸도 사회와 함께, 의식과 함께 진화하고 있다. 예컨대 신체와 재-연결된 경제에서 이때 신체는 보다 섬세해진 신체다. 새로운 경험을 요구하는 몸이다.
‘몸-생/명’의 관점에서 몸은 ‘생(生)의 몸’, ‘명(命)의 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생의 몸’이 ‘유기체적인 몸’이라면, ‘명의 몸’은 ‘비-유기체적인 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체험의 순간이 있다. 문득 자신(自身)의 몸이라는 의식이 사라지면서 하나됨을 느끼기도, 아득한 평화의 순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요컨대 몸은 때때로 일상적 경험의 몸 이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몸의 우주성’이라고 말한다. ‘신령한 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주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몸의 생태적 연결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날씨가 조금 추워지면, 몸이 무겁고 비가 오려면 몸이 찌뿌둥하다. 위드 코로나 시대, 우리는 바이러스와 함께 살면서, 보이지 않는 생명을 더욱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3. [응답] 다시 개벽, 예감과 가정법의 전환운동
예감은 최소한 중력만큼은 실제적이다. 이야기는 최소한 메아리만큼은 실제적이다. 뉴노멀이나 (‘가짜 뉴스’에 맞서는) ‘진짜 뉴스’가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예감’, ‘또 다른 세상의 서사’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나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렇다. 치유는 항상 ‘자기-치유’였다. 구원은 항상 ‘자기-구원’이었다. 이야기는 항상 ‘자기-이야기’였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몸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
시인 김지하는 ”생명의 본성은 저항“이라고 말했거니와, 들뢰즈는 ”레지스탕스 생명“을 천명한다. 그리고 또 다른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몸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몸은 매우 전술적이다. 회복 탄력성이 높다. 감응(感應)의 능력이다. 몸은 끈질기다. 과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40억 년의 시간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생/명’하는 몸은 매우 탄력적이다. 매 순간 변신한다. 나는 나의 몸을 잘 모르지만, 몸은 자신의 몸과 타자의 몸을 더 잘 안다. 자신(自身)의 의지대로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절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민중들에게 믿을 것은 몸뚱이밖에 없다. (수련 판에서는 몸과 몸뚱이를 구별한다. 대략 유기체적 체계와 그 질료인 살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 몸뚱이는 부서지지만 무언가 다른 유기적 몸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최근 여기저기서 조금 뜨는 개념이 하나 있다. ‘암시감응성(suggestibility)’이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종을 보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회성도 합리성도 아닌 바로 암시감응성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암시감응적 동물(suggestible animal)”이다. 동아시아적 전통에서는 ‘감응’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그리고 인간과 다른 생명체나 다른 존재와의 감응에는 인간의 염원, 기도, 열망이 함께 작용할 것으로 믿어진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몸과 정동과 영성적 체험을 지배한다. 정묘한 신체적 경험을 제작하고, 생산하고, 또 판매한다. 아마존과 테슬라가 무서운 것은 “우주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체험의 매력은 (자본이 아닌) 돈을 뛰어넘는다. 새로운 체험을 위해 얼마든지 돈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자본은 체험 기계를 발명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성형적 몸 자본주의’는 ‘인지적 몸 자본주의’를 지나, 감정 자본주의를 거쳐, 정동과 영성의 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그날을 예감하기, 새로운 거대담론 만들기
뉴노멀, 새로운 규칙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감응의 능력과 암시감응성을 이야기했거니와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삶의 원천은 규칙이 아니라, 염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염원은 ‘보이지 않는 몸의 깊이’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런 맥락에서 ‘몸-생/명’ 관점의 전환 운동의 방법론적 키워드는 ‘가정법’과 ‘예감’이다.
뉴노멀이 아니라 새로운 가정법이 필요하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도 그 중 하나이다. 조선 말 대환란기, 대전환기에 수운 최제우가 선포한 ‘다시 개벽’도 그 중 하나이다. 수운 최제우의 다시 개벽은 뉴노멀이 아니다. 새로운 서사다. 또 다른 거대담론이다. 물론 시천주(侍天主)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자각한 거대담론이다. 단, 유기체적 신체와 우주적 신체와 연동된, ‘몸-생/명’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흐름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을 생성시킨다. 내 생애 안에서 다른 생애가 살아나도록 도와준다. 이를테면, ’호랑이와 토끼가 함께 뛰노는‘ 또 다른 천국 만들기 프로젝트다. 선형적 시간을 초월하는 일종의 가정법적 활동이다. 자기-계시, 자기-형성, 자기-기술(記述)이다. 위협감이 위협을 만들고, 희망의 예감이 희망을 만든다. 그렇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민주화가 된다면‘이라는 가정법과 염원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만든 것 아닐까. 민주화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로 믿어진 것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희망을 실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실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듯 제도화, 실체화되었다. ’그날이 오면‘이라는 염원이 보이지 않는 힘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행복회로나 심리적 자기-기만이 아니다. 정신승리가 아니다. 그 이상의 실제적인 사건이었다. 그 힘은 미결정의 잠재력에서 나온다.
팬데믹-기후재난 시대에 필요한 것은 뉴노멀이 아니다. 새로운 가정법이다. 뉴노멀은 없다. 뉴노멀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질 뿐이다. 지금 만들어가야 할 ’과정기획‘이다. 이제 우리는 먼저, 자신(自身)의 욕망과 소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니다’라고 말하기로부터
나는 실제로, 이미, 그날/그곳에 살고 있다. 정읍 이야기다. 정읍 천변을 걸으며, 매일 멀리 내장산에서 떠오르는 태양 빛을 안으며, 아침밥을 주라고 다가온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그날/그곳을 산다.
사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저항들’을 수행하고 있다. 수많은 ‘또 다른 삶들’을 살고 있다. 비업, 비혼, 방콕, 폐인, 낙향, 귀촌, 백신 거부 등등이 그것들이다. 수많은 또 다른 ‘또 다른 시-공간들을 탄생시키기’고 있다. 어느 새벽 하늘의 시간, 고양이와 함께 하는 시간, 순환하는 시간, 끝없는 시간, 시간 없는 시간, 숲 속을 걷는 시간,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하는 시간, 천제 지내는 시간, 다시 개벽의 시간 등등.
그리고 지금 행동하고 싶은 나의 사회적 염원은 ’비-자본주의‘ 네트워크다. ’만인-만국의 비-자본주의여 연대하자!‘이다. 자본주의 아닌 것, 그것을 꼭 집어서 하나를 말하라면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수많은 비-자본주의를 살고 있다. 친구 밥 사주기, 공짜로 잠 재워주기, 연애하며 무조건 선물하기, 고향에서 삼촌한테 고추 받고 용돈으로 돌려주기, 협동조합 만들기, 공동체 가입하기 등등. 또한 수많은 비-자본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개인주의, 정신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영성주의 등등.
수운 최제우의 ’각비(覺非)‘와 ’불연기연(不然其然)‘의 깨달음이 떠오른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담론적 실천이기도 하지만,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를 실감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지평을 여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던, 언제든지 ’현재화(顯在化)‘될 준비를 하고 있던 ’잠재성‘의 세계다. 수많은 ’기연들(이러함들)‘로 나타날 준비가 되어있는 ’불연(아직 아님)‘의 세계다. ’아니다‘의 세계엔 무궁무궁한 또 다른 삶들이 있다.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에 있었고, 있을 예정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다시 개벽‘이라는 어마머마한 거대담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꿈은 이어져 동학의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은 30년간 도바리를 치면서도 ‘궁을(弓乙)이 문명을 돌이킨다(弓乙回文明)’고 선언한다. 또 다른 동학을 이야기한 강증산은 일제강점기를 앞둔 시절에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을 꿈꾼다. 그리고, 가톨릭 사제 토마스 베리는 ‘지구의 꿈’과 ‘우주 이야기’라는 또 다른 어마어마한 거대담론을 펼친다. 그리고 예감한다.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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