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음식이 결정한다. 약은 이미 몸이 잘못되었을 때 쓰는 것이다. 평소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밥이다. 그래서 밥이 보약이다. 지지는 원래 건강 때문에 채식을 시작했다. 나는 윤리적인 이유로 시작했다가 건강상의 혜택을 보았다. 평생 골치거리였던 등드름이 말끔히 사라졌다. 우유, 치즈, 계란을 먹는 베지테리언일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동물성 제품을 전혀 먹지 않는 비건이 되자 곧바로 사라졌다. 체질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젖과 소고기는 많이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 다 큰 어른이 인간의 젖을 먹는 것도 이상한데, 소의 젖을 먹는다? 포유류는 엄마 뱃속에서 다 자라지 않고 태어나서 갓난아기 때 급속히 성장한다. 그때 먹는 성장 촉진제가 젖이다. 송아지는 인간보다 3배 빨리 자란다. 따라서 소젖에는 인간 젖보다 인슐린성 성장인자-1(IGF-1)이 3배 많이 들어있다. 성장기 발달을 위한 세포 증식을 유도하는 물질이다. 그것을 성인이 매일같이 먹는 건 당뇨, 심장병, 뇌혈관 질환 등 성인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또한 소고기를 비롯한 적색육은 세계보건기구가 지정한 발암 물질이다. 대장암 발생률을 크게 높인다.
한국인이 이토록 소의 젖과 고기를 많이 먹는 건 유사 이래 처음이다. 박정희가 산업 역군을 기르기 위해 도입한 것이 우유 급식이다. 메이지 유신을 따라했다. 일본은 1200년 넘게 육식이 금지였다. 하지만 메이지 천황은 서양을 쫓아가기 위해 금기를 깨고 육식을 장려했다. 영국인처럼 소고기과 소젖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양인은 서양인과 다르게 유당을 분해할 수 있는 유전자가 없다. 나 역시 99%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당불내증을 갖고 있다. 불내증이라는 말조차도 젖당을 소화할 수 있는 서양인이 정상이고 그러지 못하는 동양인은 비정상이라는 전제를 내포한다. 나는 우유 급식이 싫었다. 맨날 변기에 버리거나 책상 서랍에 숨겨 뒀다. 까먹고 있다가 나중에 터져서 악취가 진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장 일변도의 국가는 국민을 빨리 키우기 위해 소젖을 먹였다.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여아의 초경 연령은 급격히 낮아졌고, 2차 성징은 빨라졌으며, 그만큼 발암률도 높아졌다. 국가는 국민이 먹을 것을 결정한다. 먹이고 싶은 것은 보급하고 먹이기 싫은 것은 금지한다. 지난 세기, 국가의 목표는 분명했다. 서양인처럼 먹어라! 서양을 따라잡아 서양을 뛰어넘고 싶은 열등감의 발로였다. 채식 위주였던 한국인의 식단은 반 세기만에 육식 중심으로 급변했다.
그래서 나는 어릴적부터 고기 중독이었다. 고기 없이는 식사가 성립하지 않았다. 술, 담배는 취미가 없었지만 고기는 계속 찾았다. 설탕은 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좋아했다. 식사를 할 때 탄산 음료를 꼭 마셨다. 중독이란 별 게 아니다. 무언가를 소비하지 않으면 일상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는 상태다. 현대인은 대부분 고기와 설탕 없이 못 산다. 사실 다 잘 살 수 있지만, 그것 없이는 못 살 것 같다고 고백한다. 나도 그랬다. 태어나서 20년 동안 사회가 주는대로 먹어왔기 때문에, 고기에 중독되었다. 스물 두살,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을 읽고 채식을 시작했다. 담배를 끊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끊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순으로 덜어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동물성 음식을 빼도 먹을 것은 참 많다. 오히려 고기의 기름지고 자극적인 맛 때문에 가려졌던 다채로운 미각이 새롭게 다가왔다.
의식이 음식을 바꾸기도 하지만, 음식이 의식을 바꾸기도 한다. 고기만 끊어도 피가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산뜻하다. 밀가루를 줄이면 식곤증이 덜해진다.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려진다. 무엇을 먹냐에 따라 마음 상태가 바뀌는 것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국가는 인간의 의식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물질을 허락하기도 하고 금지하기도 한다. 소젖을 보급했던 박정희는 대마를 금지했다. 한반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소를 가족으로 여겼다. 농경 사회는 유목 사회와 다르게 소의 노동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먹기 위해 기르는 게 아니라 함께 일하기 위해 길렀다. 소고기는 거의 먹지 않았고, 소젖은 당연히 송아지의 것이었다. 대신 대마는 많이 피웠다. 양반들이 곰방대로 무엇을 피웠을 것 같나? 박정희가 갑자기 대마를 금지하고 예술가를 잡아 넣은 것은 우유를 급식한 것과 같은 이유다. 국민을 통제하여 부지런한 산업 역군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당시 리차드 닉슨이 미국에서 정치적, 인종적 이유로 대마를 금지했고, 미군 통제를 위해 한국 정부를 압박했던 이유도 컸다. 대마는 중독성이 없다. 대신 사람을 행복하고 게으르게 만든다. 조국 근대화에 방해가 된다. 양반들이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 대마를 안 피우고 커피를 마셨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최근 미국에서는 다시 대마가 합법화되고 있다. 의료용으로도 널리 보급된다. 한국에서도 안동시를 중심으로 합법화 운동이 퍼지고 있다. 안동 하회탈이 왜 그렇게 해맑게 웃고 있을까? 국가가 어떤 식품을 허락하냐에 따라 국민의 정신 상태가 결정된다. 식구의 입에 무엇을 넣느냐가 그 집안의 분위기를 바꾼다.
선사 시대 부족장, 추장, 샤먼의 역할도 그러했다. 자연에 대한 풍부한 지혜를 바탕으로 무엇은 먹어도 되고, 무엇은 먹으면 안되는지 판단해주는 사람이 우두머리였다. 식구의 식사를 결정하는 것, 먹는 입에 무엇이 들어갈지 통제하는 것이 곧 권력이다. 특히나 섭식이 건강과 생존으로 직결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똥인지 된장인지 안 먹어봐도 알지만, 가끔은 헛갈린다. 그럴 때는 권력자의 말을 일단 따르게 된다. 인간은 뭇 생명과 마찬가지로 인풋에 따라 아웃풋이 도출되기 마련이다. 오늘날은 국가가 생물 의학 전문가의 권위를 이용해 인풋을 설정한다. 고기, 우유, 생선, 계란 등의 소비를 장려하고, 술, 담배, 커피, 설탕 등의 중독을 용인한다.
지금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식품 급여 체계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통해 카페인을 주입하여 출근하게 한다. 맨정신으로는 버티지 못할 학교, 군대, 직장 등에서 버틸 수 있도록 담배를 통해 니코틴을 주입한다. 담배는 막대한 중독성을 가진 발암 물질이지만, 국가가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한다. (뉴질랜드는 2027년부터 청년 층에 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한편, 대마초 상용화를 추진 중이다.) 점심에는 단짠단짠의 향연을 선사한다. 식곤증에는 또다시 카페인으로 응대한다. 저녁 회식은 삼겹살에 소주다. 귀가 후에는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자극적인 배달 음식으로 푼다. 치맥이 대표적이다. 밤에 마시는 술은 무엇보다 하루의 짜증을 잊게 해준다. 대한민국의 건실한 일꾼은 카페인으로 정신을 차리고 알코올로 아픔을 씻는다. 각성과 망각의 무한 반복이다. 어릴 때는 우유를 마시고 쭉쭉 자라야 하는 것처럼, 어른은 커피를 마시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나는 고기보다 커피를 끊기가 훨씬 힘들다. 일단은 차를 대신 마셔본다. 녹차는 커피에 비해 카페인 함량이 3분의 1 정도다. 나는 고기, 설탕, 담배, 술 없는 일상은 가능해도 카페인과 글루텐은 못 잃는다. 누구나 약점은 있지 않은가? 국수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탄수화물 폭탄을 먹고, 그에 따른 졸림을 방지하기 위해 차를 마신다.
근대인을 만든 식단은 고기, 우유, 설탕, 카페인이다. 모두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고기와 우유는 동물 착취, 설탕과 카페인은 식민지 착취로 가능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 역사는 사실상 사탕수수와 차 밭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한국도 근대화 과정에서 그러한 식습관을 그대로 답습했다. 쇠고기를 날로 먹는 것이 최고의 보상이 되었고, 아이에게 모유 대신 소젖을 먹이는 것이 정상이 되었으며, 커피와 콜라를 마시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약도 과하면 독이 되고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굉장히 최근의 변화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우리 세대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1991년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고기를 실컷 먹고 우유를 강제로 마시고 커피와 설탕에 중독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국가 정책의 결과다. 내가 먹는 것이 먹이가 아닌 끼니가 되려면, 체제가 급여하는 식품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과연 이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으며, 나의 몸에 들어가면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육체와 정신 건강에 해롭지는 않은가? 비인간 동물을 대량 사육하는 국가는 같은 방식으로 인간도 사육한다. 양계장의 닭이 비대해질수록 국민 비만율도 높아진다.
먹이와 끼니의 차이는 먹는 입에 달렸다. 주는 대로 먹을 것인가? 따져보고 먹을 것인가? 정답은 없다. 독과 약의 구분, 마약과 약의 구분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그 결정을 권력에게 맡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먹이 대신 끼니를 식구와 함께 먹을 수 있다.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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