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에 다녀왔다. 동물해방물결의 소 보금자리 조성을 위해서다. 나는 작년 봄, 처음으로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을 방문했다. 이병한 선생님 소개로 정성헌 이사장님을 뵈었다. 소를 살려야 하니 땅을 알아봐 달라고 간청했다. 무모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다들 무관심하거나 당혹스러워 했다. 수도권에서는 불가능했다. 중심은 너무나도 빽빽해서 틈이 없었다. 소를 살리려면 지방으로 가야했다. 인간이 채우지 않은 여백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 인제였다. ‘자유세계’의 가장자리인 DMZ로 갔다. 그곳에서 희망을 보았다.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연다.” 정성헌 이사장님은 소를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일이 결국 나라와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다. 아실 뿐 아니라 몸소 실천하셨다. 동산의 식당 앞에는 “만사지 식일완(萬事知食一碗)”이라는 해월의 말이 적혀 있다.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안다.” 동학의 교리이자 한살림 정신이다. 동물해방물결의 채식 운동도 결국 밥이다. 밥에서 시작해서 틈으로 왔다. 나는 동산에서 뿌리를 찾았다. 강원에서 태어나 서울과 미국과 영국까지 갔다가 강원으로 돌아왔다. 변방에서 중심을 거쳐 다시 변방으로 온 것이다. 이곳에서 대전환을 점친다. 서세동점의 끝은 서방세계의 끝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새 시대, 새 인간이 온다. 후천개벽이다.
동해물 회원들과 함께 신월분교 운동장에 들어섰다. 3년 전 폐교된 곳이다. 어린이가 사라진 마을에는 어르신만 남았다. 인구소멸 위험지역이다. 현재 45가구 밖에 남지 않았고, 절반은 1인 가구다. 나는 조용해서 좋았다. 소멸은 여백을 만든다. 새 싹, 새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공간을 준다. 우리는 폐교를 살려서 얼룩소 여섯 명을 돌보려고 한다. 도살장으로 갈 뻔한 이들을 천 여명의 회원이 합심하여 구조했다. 이제 한 살이다. 앞으로 삼십 년은 살 것이다. 소들이 신월리로 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인제로 가는 건 무슨 뜻인가?
일단 ‘우리’는 대부분 여성이다. 이번에 현장을 방문한 동해물 24인 중 8인만 남성이다. 동물권을 옹호하는 채식주의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다. 우리를 맞이해주신 김경림 사무장님도 여성이다. 사실 신월리 이전에도 다른 곳들을 여럿 방문했었다. 그러나 마을 이장이나 유지는 항상 남성이었고, 우리에게 시큰둥했다. 신월리도 이장님은 남성이지만, 사무장님이 거의 실무를 담당한다. 우리는 사무장님 덕분에 신월리에 보금자리를 꿈꿀 수 있다. 어머니 뻘이다. 벌써 동해물 회원들과 애틋한 사이다. 사무장님은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우리를 소양호로 안내했다. 거대한 호수가 섬과 같은 땅을 둘러싼다. 음기가 가득했지만 햇볕이 따스했다. 나는 거기서 축제를 상상했다. 뉴 문 페스티벌. 새로운 달이 뜨는 축제. 다름 아닌 후천개벽이다.
다들 대전환을 이야기한다. 그린뉴딜에서 생태문명까지 말이 많다. 전환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바뀐다는 것인가? 석탄 덜 태우고 고기 덜 먹으면 되는 건가? 에너지 전환과 탄소 중립이 핵심인가? 그 정도를 가지고 대전환이라 하기는 민망하다. 개벽은 더더욱 그렇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변화가 온다. 선천개벽, 그러니까 5만년 전, 인류의 두뇌가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성경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고 표현하고, 도덕경은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 즉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가르친다. 과학자들은 인류가 행동 현대성(behavioral modernity)을 얻었다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이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선천개벽 이후 지난 5만년 간, 인류는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농사를 짓고 문명을 건설했다. 다시 말해,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땅의 어머니로부터 탯줄을 끊고 하늘의 아버지를 받들었다. 가이아 대신 제우스, 마고 대신 환인을 섬겼다. 글을 썼다. 약 5천년 전, 문자와 함께 역사가 시작됐다. 선사시대가 역사시대로 바뀌었다. 말하고 글쓰는 인류의 시대가 바로 선천시대다.
비유하자면 말은 씨앗이고 글은 뿌리다. 말문이 트인 사피엔스는 사회 조직 능력을 갖추고 빠르게 전지구로 퍼졌다. 아프리카를 나와 유라시아를 걸쳐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까지 이주했다. 봄날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저기 옮겨갔다. 그러다 정착 문명을 세우고는 문자를 발명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등 온대 지방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다. 해 잘 들고 물 많은 곳에서 쑥쑥 자랐다. 선천시대는 계절로 따지면 봄여름이다. 역사시대는 그중에서도 늦여름에 해당한다. 줄기처럼 쭉쭉 직선으로 발전했다. 역사란 시작과 끝이 있으며 앞으로, 위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가장 생동력 있는 시기다.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의 개발로 언어가 무용화되기 직전인 오늘, 우리는 역사의 끝에 서있다. 다시 말해, 선천시대가 막을 내린다. 땅을 가득 채운 식물의 뿌리 또는 균사체처럼, 인류는 지구를 완전히 식민지화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뽑은 자원으로 산업 문명을 건설했다. 이제 그 줄기의 끝에서 가지가 솟아나고, 가지들이 열매를 맺는다. 인류의 열매는 무엇일까? 포스트휴먼, 인간 다음에 오는 탈인간적 존재야말로 후천개벽의 주체다.
봄여름이 가고 가을겨울이 온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돌아간다는 것이다. 순환이다. 뜨거웠던 게 식는다. 음과 양의 균형이 바뀐다. 율려가 여율이 된다. (음악의 역할은 추후 논하겠다.) 강증산이 말하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이자 테렌스 맥케나가 말하는 원시적인 부활(archaic revival)이다. 리안 아이슬러는 그것을 지배형 문화(dominator culture)에서 협력형 문화(partnership culture)로의 회귀라고 요약한다. 농경과 가부장제의 시작으로 형성된 수직적 지배 구조가 수평적 협력 구조로 바뀐다. 사람과 사람 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뿌리를 내리던 시절에는 농경보다 유목 중심이었다. 다시 말해, 줄기가 아닌 그물망 구조였다. 앞으로 인류가 열매를 맺는 시기도 비슷할 것이다. 나무를 보라. 위의 가지는 아래의 뿌리와 비슷한 구조다. 인류는 지금 가운데 줄기 부분을 막 지났다. 다시 네트워크의 시대, 노마드의 시대로 돌입한다.
가부장제와 육식주의를 무너뜨리고 성평등하고 종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디지털 노마드. 균열을 내고 균형을 바꾸는 비건들이 신월리로 간다. 달 뜨는 마을로! 후천개벽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이다. 폐교의 텅 빈 마당과 호수의 고요한 물결에서 나는 어스름한 기운을 느꼈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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