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석탄을 동력으로 전례 없던 힘을 공급해주는 기계는 단순히 전쟁이나 무역을 많이 한다고 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기계를 얻기 위해서는, 석탄에서 끓인 물인 증기가 힘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그 증기의 힘을 동력으로 전환하는 각각의 기계 장치의 역학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개별적 지식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자연을 분석해 지식을 얻어내고, 그 지식을 권력과 부로 전환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이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북대서양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을 그토록 게걸스럽게 추구하도록 만든 주인공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지식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런 새로운 접근법은 증기기관에서 그치지 않는 숱한 발명품을 창조했고, 끝내는 다른 지역에 대한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를 형성했다.
지식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어떤 면에선 인간 지능의 본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장인과 학자들이 18세기 유럽인들이 몰두했던 기약 없는 탐구와 발명에 매진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덧대기보다는 오랜 기간 사회가 축적해온 전통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고, 여의치 않을 때 부분적으로 개량하는 길을 택했다. 이런 인식이 견고하게 유지되었던 이유는, 새로움을 향한 지적 탐구 활동이 주는 위험 대비 수익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다. 전통에 도전하는 지식은 사람들의 인식을 교란해 정교하게 유지되는 사회적 안정을 해칠 수 있었던 반면, 그것이 가져다줄 이득은 명확하지 않았다. 물론 고대 그리스나 중세 아랍은 전근대에도 새로운 지식을 위한 과학적 탐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중요한 예외였다. 하지만 이 사회들에서도 새롭게 획득한 지식을 권력과 부로 전환해 이득을 얻는다는 인식은 크지 않았기에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사회적 환경이 변하면서 과학 활동은 빠르게 활력을 잃게 되었다. 이런 답보 상태는 베이컨이 언급한 마지막 발명품인 인쇄술이 유럽에 도달하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실 화약이 도달하기 이전부터 유럽에서 정치적 통합이 새롭게 진행되고 있던 것처럼, 유럽에서도 사고의 전환은 인쇄술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중세의 발전을 거치며 유럽에서는 상업 네트워크가 발전했고, 중요 교역 도시들이 생겨났으며, 독립적 교육기관으로서 대학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몽골 네트워크를 통해 동쪽에서 찾아온 흑사병은 발전 도상에 오르던 유럽을 초토화하긴 했지만, 서유럽에서는 흑사병의 충격이 영주나 교회가 가졌던 전통적 권위를 약화시켜 오히려 새로운 사고가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다. 그렇게 흑사병이 지나간 뒤, 유럽에서는 상업이 가장 발달했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당대의 지배적인 인식과 거리를 두는 일련의 지적, 문화적 조류가 발생했다. 이 조류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 중심의 관념을 인간 중심의 관념으로 전환하고, 중세의 어둠을 고대의 빛으로 몰아낸 지적 전환인 ‘르네상스’로 잘 알려져 있다.
사실 르네상스는 중요한 발전이었지만 세간의 인식에 비하자면 그렇게까지 혁명적 전환은 아니었다. 르네상스 학자들이 중세의 관념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성격을 파고들면 인습타파적이기보다는 복고적인 면이 더 많았다. 그들이 감히 중세 대학의 보편적 교리를 비판할 수 있던 이유는, 그들이 목표로 했던 바가 애초에 전에 없던 새로운 지식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지금은 잊혀졌지만 더 발전된 지식인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복원해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고대인의 권위를 끌어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고대인의 권위였다. 따라서 과학적 탐구가 만개했던 고대 그리스나 중세 아랍의 지식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자 노력했던 것은, 그 이전 중세적 세계관보다는 분명 진일보한 면이 있었지만 분명 세상을 뒤흔들 대변혁과는 거리가 있었다. 르네상스는 분명 변화를 추구한 운동이었지만 여전히 기존에 자리 잡은 전통의 권위를 흔들지 않으려는 강한 관성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그 전통의 권위,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고대인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침반이 먼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럽인들은 원양 항해에 나서면서 중동, 인도, 중국을 통해 접한 새로운 문물이나 기술을 들여왔다. 신기함과 유용함에 대한 이끌림은 고대인의 권위에 기대고자 하는 보수성을 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를 비롯한 ‘미지의 지역’에 대한 발견 또한 고대인의 권위를 크게 위협했다. 그 어떤 고대인도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밝힌 바가 없었고, 일찍이 접해보지도 못한 동식물과 그곳 사람들의 존재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에 더욱 불을 지폈다. 게다가 이 새로운 문물은 모두 그렇지는 않았지만 막대한 상업적 이익이나 유용함을 동반한 경우가 많았다. 이제 지도의 빈 부분을 적극적으로 채워 넣을 동기가 전통이 주는 편안함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당대 사람들은 지적 발견이나 발명이 지리적 탐험과 유사한 맥락 위에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탐구 대상만 다를 뿐, 인체나 천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아메리카의 동식물이나 인도의 직물과 향신료에 대한 지식만큼이나 유용한 지식을 제공해줄 것이었다. 때맞추어 등장한 망원경이나 현미경 같은 새로운 관측, 측정 수단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수단들은 항해에 있어서 지도와 나침반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식의 확보와 검증을 위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이 모든 혁신이 고대인의 권위를 침식했다. 17세기가 되었을 때도 고대의 지식은 여전히 상당한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탐구와 탐험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는 적극적 타파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세상에 전에 없던 지식을 창출해내는 것이었고, 수학적으로 검증되고 실험을 통해 입증되는 자연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엄청난 확산을 이룬 인쇄술은 새롭게 형성되는 지적 조류에 기름을 부었다. 정보 소통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인 인쇄술이 지식의 누적적 발전을 자극한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인쇄술은 필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보의 손실과 변형을 방지하고, 고정된 정보와 지식을 대륙 전역에 재빠르게 보급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반항적 개인이 제기한 지적 도전이 지배적 관념의 압력을 뚫고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도 훨씬 쉬워졌다. 물론 일차적 지식 생산과 교류는 여전히 서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쇄술이 이런 변화를 이끈 절대적 동력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먼저 살펴본 화약이나 나침반과 마찬가지로, 인쇄술 또한 그것이 처음으로 발명된 중국에서는 결정적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중국에서 인쇄로 출판된 책들도 나름 지식의 보급을 추구했지만, 그 내용은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고 고대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쇄술은 화약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분열적이고 경쟁적인 정치 지형과 상호작용했을 때 그 효과가 가장 확실했다.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으로 알려진 17, 18세기의 범유럽적 지식인 공동체가 그 주역이었다. 편지 공화국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국적이나 종교를 어느 정도 초월한 엘리트 지식인 집단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 집단 내에서의 인정 욕구는 중요한 동기였는데, 그를 충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에 없던 새로운 지식과 원리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발전된 도시를 중심으로 논쟁적인 지적 교류가 서간 형태로 활발히 오갔으며, 널리 인정받은 지식은 출판을 통해 더 널리 보급되어 추가적인 논쟁이나 발전을 자극했다.
편지 공화국에서 생산되는 지식이 모든 사회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이 일각에서 싹튼 것은 사실이나, 유럽 사회는 여전히 농업에 근거한 전통 사회였다. 국왕, 교회, 농민처럼 늘 ‘어제의 지식’을 믿고 싶은 이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국가의 힘이 강해지면서 상황은 과학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중세 교회는 어쨌든 유럽 전역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유럽의 정치적 분열 때문에 국왕은 오직 자신의 나라만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였다. 그리고 국왕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을 필요로 했는데, 자연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이런 이해를 생산, 소비, 유통하는 집단이 상공업과 금융에 능통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지적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해준다면 이들이 창출해내는 부에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었고, 다른 국가를 상대하는 데도 더 유리할 것이 분명했다. 16세기에는 유명한 갈릴레이를 포함해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몸을 사려야 했지만, 17세기에 탄압을 예상하는 학자들은 자신을 환대해줄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프랑스의 위그노와 같은 부유한 신교도 집단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네덜란드나 영국으로 옮겨 이단적 지적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예 18세기가 되었을 때는 그런 억압이 이전에 비하면 거의 의미 없는 수준까지 떨어졌고, 이제 지적 탐구는 격렬히 경쟁하는 국가들 사이의 자존심 문제로 번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왕립 학회를 설립해 과학자들을 후원하면서 이런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처럼 과학혁명은 근대 국가나 상업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3세기에 걸쳐 대륙 일각에서 일어난 변화의 누적으로 출현했다. 국가와 상업의 발전과 그에 따른 경쟁은 지식과 사상의 변화와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빠르게 가속했다. 지리적 지평의 확대로 약화된 고대인들의 권위, 새로운 것은 곧 유용한 것이며, 지식은 곧 힘과 부를 의미한다는 인식의 출현, 인쇄술의 확산과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초국적인 토론장의 등장은 그런 배경 속에서 믿음의 변화를 초래한 직접적인 힘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베이컨, 데카르트, 호이겐스, 뉴턴, 라이프니츠 등은 이 서사시의 주인공들이었다. 논쟁의 여지가 여전히 있다지만, 과학혁명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지식을 추구하는 목적, 지식이 누적되는 속도 면에서 혁명적 변혁을 초래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수 있다는 ‘진보’의 관념을 갖춘 사람들이 출현했고, 이들은 지식의 발전이 초래할 변화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치우는 것을 추구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을 파괴하는 새로운 발견은, 사회적 안정을 해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견고한 지지대를 얻었다. 새롭고 정확한 지식이 주는 이익은 더 클 수 있었기에, 나중에 가면 지식은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인습은 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했다. 제대로 근거를 마련하는 방식은 실험과 측정이었다. 이런 새로운 인식이 물론 하루 아침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고, 1800년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모든 영역에 대해 과학적 접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진화론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에서 드러나듯, 근대 과학을 선도한 유럽인들 중 많은 수는 여전히 과학적 발견이 갖는 함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시적 추세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이미 뒤집혔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더해 지식인들은 그들의 예리한 눈으로 자연뿐 아니라 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고대인의 권위나 신의 말씀을 배제하기 시작했으니, 사회나 국가 또한 몇 가지 역학적 법칙에 의해 운영되는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여전히 무엇이 올바른 통치인가에 대한 질문은 지식인들을 사로잡았지만, 점차 고대인과 신을 끌어들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대신에, 지식인들은 군사 혁명과 대서양 경제를 경험하며 급변하는 북대서양 사회의 신질서를 적절하게 설명할 새로운 사상을 탄생시켰다. 급성장한 상공 계층과 그들이 후원하는 지식인 사이에서 퍼진 이 새로운 사상은 신과 고대인을 개입시키지 않고 통치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해서, 왕과 성직자가 주장하는 생득적인 고결함을 조심스럽게 부정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과거 축의 사상들, 즉 군사적, 경제적 변화로 인해 촉발된 인간 평등에 대한 혁신적 사상을 한 차원 확대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18세기가 되었을 때, 소위 ‘사회계약론’으로 불리는 불경한 사상들이 대서양까지 확대된 편지 공화국과 출판 제국을 통해 유통되었다. 마녀사냥을 비롯한 각종 미신적인 관습부터 노예제와 같은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제도까지 모든 영역에 걸친 문화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적 전통과 인습은 자연과학의 경우도 그랬듯 19세기, 혹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어쨌든 단순히 예전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계몽주의’라고 불린 조류는 그렇게 편지 공화국을 따라 유럽 전역에 확산했고, 그중에서도 정치, 경제적 변화의 최전선에 있던 북대서양 연안을 따라 거대한 파도로 발전했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기계적 접근, 진보에 대한 강한 믿음이 만들어낸 파도 중에는 산업혁명도 있었다. 사실, 과학혁명 시기 자연과학의 발전이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를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과학과 기술이 19세기 중반에 통합되면서 물질문명의 진정한 대폭발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기술적 개선 속도는 천체의 운동에 대한 놀라운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었을 때는 그 속도 또한 새로운 차원으로 깨어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높아진 임금에 대응하여 면방직기와 방적기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기계의 채택은 기계에 공급할 동력원을 탐색하도록 만들었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물을 끓여 그 에너지를 기계의 동력으로 삼는 증기기관이었다. 그다음 문제는 증기기관에 채워 넣을 연료였다. 목재, 이탄, 토탄과 같은 에너지원이 시도되었지만, 어느 것도 영국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석탄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과학적 지식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정도가 생각보다는 작더라도, 몇 가지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기술을 끊임없이 개선하려는 인식이 필수적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마침내 권력과 부와 지식의 3세기에 걸친 상호작용에 힘입어, 영국인들은 수억 년에 걸쳐 누적된 화석연료의 에너지를 해방시켰고, 서유럽은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서쪽 변방에서 진정한 인간 사회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몽골이 유라시아를 제패하고 서유럽을 본격적으로 유라시아 네트워크에 연결시킨 지 500년 만의 일이었다.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대학원생.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하고 있다. 서아시아 '본토'보다는 러시아 문명과 서아시아 문명의 접경 지대에 더 관심이 많다. 유라시아의 근대화와 냉전 정치가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과학기술, 문명사, 대중문화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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