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우리는 두 번째로 다룰 발명품인 나침반이 화약과 어떻게 상승작용을 이루며 유럽을 변화시켰는지 살펴보았다. 나침반으로 대표되는 원양 항해술은 유럽의 강력한 화포와 결합하여 세계 바다의 지배권을 유럽인들에게 안겨주었고, 해양 무역에서 창출되는 이익은 유럽인들의 전쟁을 위한 장작과 연료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원양 항해가 만들어낸 변화는 분명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새로운 무역이 갖는 의미가 단순한 전쟁 자금 이상이었기에 유럽인들은 전혀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었다.
시작은 이번에도 단출했다. 다 가마의 함선이 인도양을 휘저으면서 현지 무역을 교란시켰고, 아스텍과 잉카를 파괴한 대가로 가져온 에스파냐의 은이 유라시아 경제 전체를 뒤흔들었지만, 몽골 후계 제국들은 여전히 유럽인들이 압도하기 힘든 강력한 경제적 구심점이었다. 남인도나 동남아시아의 해상 왕국들은 유럽인의 출현으로 고전하긴 했어도, 무굴 제국이나 명, 청 제국의 황제들이 유럽인을 두려워한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악바르 대제나 강희제는 바다에서 벌어지는 그런 작은 일 말고도 처리해야 할 커다란 일이 아주 많았다. 오히려 북방의 위협이 훨씬 큰 위협이라면 위협이었다.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새롭게 향신료를 자신들의 항구로 실어나르기 시작했지만, 인도양 무역 전체로 놓고 본다면 압도적인 수준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즉 여전히 대양을 건너는 무역은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아시아에서 비단, 도자기, 향신료 같은 유럽에서 구할 수 없는 특산품을 실어나르는 물류에 집중되어 있었다. 원양 항해의 기술 수준, 지구를 돌아야 하는 엄청난 거리, 해적과 경쟁국 함대의 위협을 모두 고려했을 때 이런 무역이 국가를 먹여 살리는 주력 사업으로 당장 자리 잡기에는 유럽에서도 이익은 작았고 위험은 컸다. 물론 은은 예외였다. 유럽인들, 특히 에스파냐인들은 강압적인 노예노동을 통해 신대륙에서의 은 생산 전반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것이 가져다준 경제적 영향은 유라시아 전체에 깊숙이 남았기 때문이다. 은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각 지역의 경제는 더욱 화폐화가 되었고, 상업화도 진전되었다. 한편 지역 간 연계가 활발해지고, 은을 매개로 각종 상품이 오가면서 유럽인들이 통제하는 교역 거점이 세계 각지에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유럽인들, 특히 이 경쟁에 처음 뛰어든 에스파냐인들이나 포르투갈인은 마닐라, 마카오, 아카풀코, 바히아와 같이 자신들이 통제하는 무역 거점을 두면서 물류 이동을 관리했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 강력한 화포로 무장한 선박들과 선원들이었음은 물론이다.
16세기 말에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네덜란드가 판에 뛰어들면서, 유럽인들이 주재하는 대양 무역은 다시 한 번 다음 단계로 도약했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자리한 저지대 지역은 유럽의 두 무역 네트워크, 북해와 지중해를 잇는 거점이자 번창하는 제조업 도시들이 집중된,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 중 하나였다. 강력한 해군으로 무장해 바다에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몰아내기 시작한 네덜란드는, 경쟁자들의 방법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을 넘어 무역을 관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국가가 독점권을 부여한 무역 회사를 두고 그 회사를 통해 자국의 무역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출범시키고, 회사가 ‘국가 안의 국가’처럼 각지에서 무역은 물론이고 전쟁까지도 수행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활동이 이전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면 무력을 통해서 생산 자체를 통제하려는 그 적극성에 있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동남아시아의 ‘향료 제도’인 몰루카 제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현지인들을 겁박하여 생산과 판매 모두를 자신들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만약 현지 생산자가 영국 같은 경쟁자에게 향신료를 팔 경우 잔혹한 응징이 이어졌다. 강압의 결과로 향신료 생산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해지면 노예를 투입해서 부족분을 메꾸었다. 노동력과 토지라는 핵심적 생산 요소를 장악한 네덜란드는 정향, 육두구, 메이스와 같은 값비싼 향신료 생산 과정을 통제하면서 사실상의 가격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향료 제도에서 네덜란드의 활동은 상업적 이득을 위해 유럽인들이 전체적인 생산 과정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강압적으로 근대 경제를 만들어나갈 미래를 보여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후 인도 무역에 개입하면서 향후 유럽, 나아가 세계 경제 전체를 바꾸어나갈 면직물 무역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네덜란드는 아직 향료 제도와 달리 생산 과정 전체를 통제할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유럽인이 생산 통제를 어느 정도로 할 수 있느냐는 현지의 정치적 권력과 전통적 사회관계가 얼마나 견고한지에 달려 있었다. 예컨대 유럽 바깥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자랑한 중국과 일본에서 유럽인들은 오직 물건을 실어나르는 무역에만 가담해야 했고, 그 조건도 상당 부분은 중국과 일본의 현지 권력자들이 정했다. 유럽에게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기 전의 오스만 제국도 비슷했다. 반면 여러 부족으로 권력이 파편화되어 있던 인도양 제도는 상대적으로 유럽인의 침투가 쉬웠고, 현지인들을 강제 노동으로 밀어 넣고 현지 지도자들의 판매 경로를 제한하는 등의 강압적 조치를 취하는 것도 수월했다. 해양에서는 아니었지만, 러시아도 시베리아의 수렵채집민을 상대로 모피를 구하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런 강압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인구의 90% 가량이 전염병으로 제거당한 신세계였다. 정치적 지도력이나 사회관계망 모두가 치명적으로 약화 된 이곳 원주민들은 토지를 무력하게 수탈당했고, 혹독한 광산 노동이나 가혹한 조건의 소작으로 내몰렸다. 상업보다는 약탈에 치중한 에스파냐도 아메리카에서는 이런 생산 관계를 구축하여 막대한 이득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 상인들, 특히 소규모 거점 위주로 식민지를 만든 에스파냐 이외의 국가는 은이 아닌 다른 품목을 통해 아메리카에서 이득을 뽑아내야 했다. 그리하여 원주민을 쫓아내고 무주공산으로 만든 아메리카의 토지에,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노동을 결합하여 유럽 시장에 내다 팔 상품 작물을 생산하는 새로운 경제가 탄생했다. 대서양 연안의 아메리카는 이전까지는 유럽인들이 접하기는 힘들었던, 혹은 그 전에 알려지지 않은 상품을 대량으로 경작해서 가공하는 생산 기지가 되었다. 얼마 안 가 미국 남부에서 경작된 담배와 카리브해 전역에서 경작된 사탕수수가 가장 대표적인 상품으로 떠올랐다.
단맛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설탕은 그중에서도 단연 왕좌에 오를 만했다. 카리브해의 농장에서 생산된 사탕수수는 제당소로 보내져 당밀이 되고 하얀 설탕으로 변해 각지로 실려 나가 단맛을 공급했다. 일부는 럼으로 주조되었는데, 이 술은 카리브해에서 악명 높은 해적들이 애용한 술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이미지를 획득했다. 영국의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 프랑스의 아이티와 같은 주요한 생산 기지에서는 무역을 통한 부가 축적되면서 신흥 상인 계층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아름다운 과정이 아니었고, 오히려 추악한 과정에 가까웠다. 열대 지방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일을 하려는 유럽인은 아무도 없었고, 원주민 인구는 이미 질병으로 몰살당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은 대신 열대 질병에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갖춘 아프리카인을 잡아 와 강제로 생산에 투입해 노동 대비 과다한 토지를 적극 활용하는 길을 택했다. 대서양 건너편 유럽인들이 즐긴 달콤함, 카리브 상인들이 축적한 부는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고통받으며 노동한 아프리카인들의 눈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현지에서도 노예 공급을 통해 이득을 얻는 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악명높은 대서양 노예무역은 거의 3세기 가까이 이어져 대륙의 인구 구성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잔인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그만큼 잔인한 덕분에 카리브 연안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소모’되는 노예는 대서양 건너편 아프리카에서 계속 건너왔고, 노예 공급책인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판매할 각종 제조업 생산을 자극했다. 북아메리카 연안에서는 귀중한 사탕수수 생산에 투입될 노예들에게 공급할 식량 생산지가 개발되었다. 아메리카에서는 새로운 제조업 기지도 들어서고 있었다.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기엔 기후가 너무 추웠던 북아메리카 북부 뉴잉글랜드의 경우이 대표적 예시였다. 풍부한 목재를 바탕으로 영국 해군을 위한 선박을 만들어주는 조선업이나 각종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고래 기름을 확보하는 포경업이 발전했다.
그렇게 대서양을 분주히 오가는 무역선은 항구에 들어설 때마다 다른 곳으로 팔 수 있는 물건을 가득 실었고, 물건을 수출한 항구에 유입된 자본은 생산량을 더욱 늘리기 위한 자본재를 추가로 갖추기 위해 투자되었다. 앞서 서유럽, 특히 영국의 정치를 바꾼 상인 집단이 부상하게 된 동력은 대서양을 끝없이 회전하는 무역선에서 나온 셈이다. 결정적으로 무역을 통해 영국이 벌어들인 돈은 무역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제해권을 갖추는 데 흘러 들어가며 영국 우위를 또다시 강화했다. 당연하게도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이 흐름에 올라탔으나 역시 가장 선도적인 국가는 영국이었다.
유럽이 실시한 생산과 교역 통제는 18세기가 되면서 그 품목과 지리적 범위를 확대해갔다. 이번 주인공은 설탕과 마찬가지로 역시 ‘하얀색 황금’이라 할 수 있는 면화였다. 사실 면화와 그로 만든 면직물은 높은 기능성에 힘입어 유럽이 인도양에 진출한 이래로 줄곧 중요한 무역품이었다. 이 무역품의 세계 최대 생산 기지는 오랫동안 축적된 생산 노하우와 값싼 노동력, 광활한 면화 산지 등, 모든 유리한 조건을 갖춘 인도였다. 유럽 상인들은 인도에서 확보한 면직물을 각지로 팔았는데, 유럽의 소비자들만큼이나 중요한 구매처는 아프리카에 있었다. 상인들은 면직물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교환했고, 그 노예를 카리브해나 브라질 등지로 실어날랐다. 대서양 무역과 인도양 무역은 그런 면에서는 한 몸으로 움직였다. 각국의 동인도 회사가 취급하는 주력 상품도 시간이 흐르며 점차 향신료에서 면화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면화는 생산 통제의 난이도에서는 향신료나 설탕과는 달랐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주된 요인은 역시 생산지의 정치, 사회적 환경에 있었다. 인도는 아메리카와 같은 무주공산도 아니었고, 다소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향료 제도 같은 수준도 역시 아니었다. 인도 내륙과 항구를 오가는 복잡한 현지 상인 네트워크가 이미 존재했고, 생산자들도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판매할지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생산과 무역 네트워크를 모두 유럽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면 강력한, 아니 더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다. 때마침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인도 아대륙이 정치적 혼란기로 진입한 것은 유럽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다 가마가 진출한 이래로 유럽인들은 꾸준하게 막대한 부의 원천인 인도로 접근해왔고, 무역 권리를 독점하기 위한 기나긴 투쟁을 거쳐 18세기가 되었을 때는 숙적인 영국과 프랑스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최종적 승자는 영국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벵갈-프랑스 연합군을 격퇴하면서, 세계 최대의 면직물 생산 기지 중 하나인 벵갈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한 영국은 이제 현지 상인 네트워크를 우회하면서 면직물 생산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점점 현지 생산자들의 자율성을 박탈해가면서, 생산과 판매 과정에서 통제력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전의 여러 다른 상품을 다루던 경험을 활용해 영국인들은 인도의 면직물을 빨아들이는 파이프라인을 개설할 수 있었다. 유럽이 장악한 교역품 목록에 면직물이 추가되자, 면직물을 매개로 지역 간 교역 자체가 탄력받았다. 과거 에스파냐가 주도한 은 유통처럼, 영국이 확보한 면직물 유통은 아프리카와 카리브해를 잇는 상품과 사람의 이동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도산 면직물은 막상 영국과 그 식민지로 향하지는 않았다. 영국이 인도산 면직물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물리면서 사실상 수입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이웃 유럽 국가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유는 인도산 면직물이 너무 강력한 경쟁력을 갖고 있어서, 자국 면직물 생산자들은 도저히 그에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랭커셔를 중심으로 활발한 면공업 클러스터를 갖춘 영국에서부터 면직물 제조업자들이 정부에 강한 압력을 가했다. 이제는 결코 함부로 다룰 수 없던 상인의 이해관계는 물론이고 면직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안정도 고려해야 했던 영국 정부는 인도산 면직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제조업자들은 국가가 제공해주는 관세 장벽으로 보호받으면서 본국과 식민지라는 안전한 시장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영국 면공업에 필요한 것은 안전한 시장뿐이 아니었다. 면화가 나지 않는 유럽 본토에서 성장한 면공업은 당연하게도 외부의 원료 공급처 또한 요구했다. 유럽 상인들은 이미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능숙했다. 아메리카의 토지에 아프리카인 노예를 투입하여 한층 발전한 근대적 생산관리로 최대한의 생산량을 뽑아내는 일이 그것이었다. 사탕수수에 뒤이어 면화 농장이 카리브해와 아메리카를 뒤엎기 시작했고, 더 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실려 와 그 농장을 채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 노예를 구매하는 데 쓰인 물품은 인도산 면직물이었다는 약점도 있었다. 영국산 면직물이 시장과 원료를 확보하며 크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축적된 기술, 무엇보다 값싼 노동력으로 무장한 인도산의 경쟁력을 뛰어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기술의 경우는 그래도 쉬운 문제였다. 부족하나마 유럽 상인들이 인도 장인들의 기술을 차용해서 자국 상품의 질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임금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금까지 주로 살펴본 것은 서유럽과 영국 자본이 유럽 바깥에서 벌인 사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숱한 사업들의 영향력은 본토 역시도 뒤흔들며 커다란 사회변동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아메리카와 인도양이 열리고, 대서양 경제가 펼쳐진 3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며 북대서양 경제는 이미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모해있었다. 당시까지 세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는 철칙은 ‘맬서스의 법칙’이었다. 생산성 향상분을 인구 증가가 순식간에 상쇄해버리는 역학을 설명한 이 법칙은 절대 다수의 인구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바닥 수준의 소득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북대서양 지역, 특히 영국의 사정은 전혀 달랐는데, 영국인들은 인구가 늘었음에도 여전히 높은 소득을 올리며 단순 생계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은 더 넓은 시장, 값싼 금리와 높은 신용, 양질의 노동력, 원료와 토지에 대한 국가의 보장 등을 이용할 수 있었고, 단순 생계를 위한 몫 이상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농업 또한 큰 발전을 이루어 마찬가지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게 확보한 높은 소득은, 무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물산을 소비하는 데 적극 사용되었다. 영국인들은 이제 틈틈이 차와 커피를 즐겼고, 거기에 설탕을 넣어서 마셨으며, 휴식 때는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며, 면직물 옷도 이전보다 더 많이 살 수 있었다. 소비의 변화는 노동의 변화도 촉발했다. 소비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남는 시간에 농촌 공업에 참여하는 등 부업을 늘렸으며, 많은 농민이 새로운 기회를 잡고자 런던과 맨체스터 같은 도시로 향했다. 일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영국 바깥의 더 넓은 세계로 나갔다. 이렇게 늘어난 수요는 다시금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오는 공급을 늘렸고, 같은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높은 임금과 그에 수반되는 소득은 대서양 경제 전반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는 결정적 요소였으나, 영국의 면공업자들에게는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결국 영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영국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국인 사업주들은 아프리카 노예에게 하듯이 영국인 노동자의 인신을 구속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밥을 주며 쉼 없이 일하라고 채찍을 휘두를 수 없었다. 랭커셔는 자메이카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플랜테이션의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서는 여전히 맬서스 함정에 빠져 신음하는 거대한 인도 노동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영국의 면공업자는 고임금이 특징인 영국 안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영국은 이 과제를 풀어야만 했다. 면직물 생산에서 인도를 이기지 못해 세계 시장 장악에 실패한다면, 네덜란드나 프랑스와 같은 경쟁국이 언제든 그 자리를 위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기업가들이 본국과 식민지 시장을 넘어서, 전 지구적 면직물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짜에 가까운 비용으로 군소리 없이 끊임없이 면직물을 생산해주는 새로운 노동력이었다. 그리고 18세기 말이 되었을 때 기업가들은 마침내 새로운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의 높은 임금을 무력화시키고, 인도의 저임금마저도 압도할 이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었다. 새로운 일꾼은 곡물 대신에 석탄의 불꽃과 증기의 힘으로 움직였고,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내내 일을 해도 끄떡없었다. 증기기관, 나아가 기계가 마침내 인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대학원생.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하고 있다. 서아시아 '본토'보다는 러시아 문명과 서아시아 문명의 접경 지대에 더 관심이 많다. 유라시아의 근대화와 냉전 정치가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과학기술, 문명사, 대중문화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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