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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이중섭, <다섯 아이와 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연필,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미래에서 온 포옹 

 “너를 안아주려고 왔어.” 그러나 내 앞의 ‘미래에서 온 소년’은 방금 저녁밥을 같이 먹고 나온,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의 친구다. 시간은 마침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그때의 감성적인 분위기에 취한 건지 자신이 준비해온 대사에 취한 건지 친구는 내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벌인다. 그리고 다음 대사. 미래의 나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빌었어.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나는 너를 꼭 안아줄 거라고 맹세했어…. 그 맹렬한 선의의 기세에 나는 당황해서 무장이 해제되었다. 친구에게 꼭 안긴 그 소년은 그날 친구가 등을 두드려주었는지 아니면 다른 말을 더 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 

얼떨결에 포옹에 휩쓸린 나는 그때의 감정만을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미안하게도 떨떠름하고 머쓱한 기분이었다. 나 개인의 성격이 유난히 차갑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인터넷 검색창에 ‘접촉’ 두 글자를 검색해보아라.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지 않은 어휘임에도, ‘접촉사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한) ‘밀접접촉자’ 즉 기피대상을 뜻하는 연관검색어가 나온다. 비슷한 단어를 입력하면 어떨까. ‘터치’는 접촉하는 기계인 ‘터치스크린’이, 스킨십은 사적인 연인 간에 통용되는 최대 관심사인 ‘스킨십 진도’가 자동완성 목록에 뜬다. 이 시대는 무생물 혹은 친밀한 애인이 아니면 만지지 않는 것이 ‘매너손’으로 각광받는 ‘노터치’의 시대인 것이다.

이런 예민한 시기에 ‘만진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독일의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의 퍼포맨스 <feet washing>(1971)</feet washing>은 성경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세족식’을 재현한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에는 예수님의 어떤 고귀한 뜻이 담겨있을까? 누군가[1]는 ‘높은 자가 낮아지고 연장자가 어려지며’[2] 모두가 동등해지는 행위라고 해석하며 ‘사랑’이란 심오한 의미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보이스가 “모든 인간은 예술가다”라고 외칠 때의, 모든 사람 안에 담겨 있는 창의성과 그것이 발현되는 사회적 맥락을 연관 짓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친구가 선사한 포옹으로부터 어떠한 터치의 의미와 미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터치는 어떻게 머쓱한 것이 되었나

레베카 뵈메의 『휴먼 터치』는 그동안 인간을 둘러싼 담론에서 배제된 ‘촉각’의 필수성과 사회적인 터치인 ‘스킨십’의 중요성을 다룬다. 그 결론에 이르기 전에 먼저, ‘터치가 왜 이처럼 몰이해되고 평가절하 되었나’ 하는 점을 살펴보자. 그것을 알면 더 살갑고 따듯한 사회인 ‘터치의 시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폭넓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털 없는 원숭이’인 인간은 다른 유인원과 달리 유일하게 털을 벗어버렸다.[3] 털은 개당 1억 5천 개의 수용기[4]가 달려있는 촘촘한 더듬이인데 말이다. 인류가 털을 벌거벗은 이유로 추측되는 유력한 이유는, 사냥을 위해 오래 달리기 위해서이다. 체온을 빠르게 낮추기 위해 인간은 천연 보온재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유독 터치를 좋아한다는 설명이 있다. 서로와 피부를 맞대고 체온을 보존하면, 그만큼 발열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5] 이에 맞춰서 인간은 스킨십을 하면 신체 안에서 보상을 얻게 되는 기제를 진화시켰다. 몸 안에 세로토닌은 늘어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졸은 감소한다. 또한 옥시토신이 분비되는데, 이로 인해 사회적 유대감이 늘어나고 정서적인 안정이 이뤄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터치를 줄이는 방면으로 문명의 방향을 틀었다. 그나마 몇 신체부위에 남아있는 체모를 깎고 매끈함을 유지하고자 마음 먹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이 현상이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넘어가는 특수한 기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사람은 나무 위에서 정착해서 살아가던 시절의 ‘계급 내 지위 투쟁’ 본능도 남아있고, 들판 위에서 이동하며 살던 ‘영역 내 텃세 보존’ 본능도 남아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인구가 한 곳에서 도시를 형성해 살아가는 것은 또 하나의 본성을 형성한 생물학적 대사건이라는 것이다. 작은 단위의 집단으로 살아가던 우리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익명의 대중과 교류해야 하는 상황에서, 털을 깎고 타인과 접촉하기를 자제하는 것은, 서열 경쟁을 피하고 생활 영역을 확보하며 가족 집단을 유지하는 ‘문명인’의 전략인 것이다. 

 

매끈하지만 납작한 화면

 ‘물리적 거리두기’가 과밀한 인구 환경에서 해소책이 되어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끝내 상실되는 것이 지대한 것 또한 사실이다. 앞서 언급된 모리스는 전세계적인 인구 증가가 인류를 멸망시킬 치명적인 요인이라고 본다. 비인간 동물이라면 적당히 해소하고 넘어갈 수 있는 갈등이 임계점 이상으로 자극되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예를 들어 ‘복종과 지배’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는 사회집단이 다 함께 특정 대상에게 복종을 수행하는 의례이다. 하지만 추상적인 언어와 전자신호를 통해 교류하는 세계인들은 복종의 신호를 읽지 못하고 상대편을 ‘비동물적으로’ 살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모리스가 핵공격으로 인한 멸망을 우려한 시점을 지나 문명은 또 하나의 탈출구를 개발했다. 그것은 디지털 기술로서 우리를 물리적 공간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텔레비전이 (포유류의 영역 본능을 위협하는) 획일적이고 좁은 아파트 주거양식에서 우리를 웃고 울리며 재충전시키듯, 스마트폰과 이동통신 기기는 오밀조밀 빽빽한 도시환경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만든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며 현실 속의 상황을 잊는다. 이에 대해 티비 문화를 사람들에게 정동 노동을 시키는 통치술로 보는 비판[6]과 같이, 고개를 숙이고 서로 간에 교류를 일절 하지 않는 현대인의 각박한 문화를 짚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감각을 점차 잠식해오는 가상현실 기술이 터치를 대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터치스크린은 매끄럽다.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거칠지 않은 질감을 선호하는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보편적인 매력이다. 하지만 매끄러운 화면은 또한 평면적이다. 이는 몇몇 장기와 거의 모든 조직에 퍼진 10억개 이상의 촉각 수용기[7]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기의 경우는 스마트 기기가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촉각을 통해서 세상을 입체적으로 탐색하는 아기에게 대상의 물리적인 특성, 사회적 맥락, 전신을 통한 상호작용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을 만질 것

기술이 인간의 터치 본능을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모자란 시점이다. 이는 그만큼 촉각의 존재가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촉각은 시각보다도 훨씬 이른 시점에 완성되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다. 시각은 영유아가 촉각-운동 체계로 세계를 탐색하며 얻은 정보를 ‘다중모드 전송(Multimodaler Transfer)’으로 물려받음으로써 지각 체계에 편입된다. 촉각은 태어나기 전 배 속에서부터 갖춰지는데, 배냇솜털을 통해서 외부 환경을 감지하고 자신의 몸을 만짐으로써 ‘신체 지도’를 작성하는 데 활용된다. 신생아는 ‘전신 자극’을 받아야만 세포를 분열 복제하는 생화학적 신호를 공급받아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내부 체계(근육, 관절, 힘줄, 피막)의 촉각을 통해 ‘자기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이전 『움직임의 뇌과학』 서평에서도 살펴봤듯이, 이러한 ‘고유수용감각’은 ‘내수용감각’과 함께 (‘내가 지금 살아서 존재한다’는 믿음을 비롯한) 자아의식과 자아정체성의 내용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또한 피부 바깥으로부터 입수한 외부수용 촉각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독일의 햅틱 연구소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촉각 마케팅’을 제안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요거트를 판매하는 업체는, 각 문화권마다 다른 ‘식감’을 선호하기 때문에 맛과 영양성분은 유지한 채 나라별로 농도만 달리한 제품을 출시하라는 식이다.

이렇게 기본적이고도 인간성의 근본이 되는 촉각을 미래의 기술이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른쪽 두정엽 피질 문제로 자신의 신체를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못하는 정신질환 중 ‘거식증’은, 네오프렌 소재에 자극을 전달하는 특수 의류를 통해 증상의 개선을 확인한 실험적인 연구가 있다. 친밀한 관계를 원거리로 매개하기 위한 ‘접촉 시뮬레이터’가 개발되어 시판되고 있고, 급증하는 반려동물의 숫자도 동반자 생물을 통해 터치를 확보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터치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기술적인 접근과 함께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사람은 사람의 손길을 인식하는 데 특화된 수용체(‘C-촉각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 사이의 ‘스킨십’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이에 대해 현재의 상업적 ‘마사지 샵’ 그리고 조금은 음울한 미래의 ‘AR(증강현실) 스킨십’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후자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주인공이 반려자로 여기는 인공지능을 다른 사람 위에 빔으로 투사하여 성관계 하는 장면에서 착안했다. 어찌됐든 이렇게 쓰고 보니, 터치의 부활을 위해 꼭 거창한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중섭의 그림 <다섯 아이와 끈>에서 아기들이 서로를 꼭 안고 있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이 ‘활성화’되는 우리 인간은, 그저 터치에 대한 거리감과 거부감을 내려놓는 태도변화(마인드셋)만으로도 더 따듯하고 살 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친구야,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시 한 번 너를 꼭 안아주고 싶어! 

 

 

[1] Smarthistory, Joseph Beuys, Feet Washing and Conceptual Performance, 2022.11.8.

[2] 누가복음 22장 26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개역개정)

[3] 데즈먼드 모리스, 『털 없는 원숭이』, 김석희 옮김, 문예춘추사, 2020.

[4] 마르틴 그룬발트, 『손가락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강영옥 옮김, 자음과모음, 2019.

[5] 레베카 뵈메, 『휴먼 터치』, 안미라 옮김, 새로운봄, 2022.

[6] 신승철, 『지구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 모시는사람들, 2021..

[7] 털 한 개당 2억 5천만개 수용기, 1억 개의 ‘자유신경종말’, 표피와 진피 사이 1억 개의 메르켈 소체, 진피층의 6억 개 마이너스 소체. 이밖에도 50개의 다양한 촉각 수용망으로 구성된 모낭, 피하 조직의 파터 파치니 소체 그리고 루피니 소체가 있다. (마르틴 그룬발트, 『손가락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마카야(배선우)

책읽기를 좋아해서 대학교에 진학한 신분. 전공책보다 소설과 미래학 책으로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를 즐겨하던 학생. 올해 졸업을 앞뒀지만 ‘좋아하는 철학자’는 없고 대학원은 안 갈 예정. 부모님의 주52시간 근무는 그저 존경스러울 뿐, 트렌드에 따라서 프리랜서로 생활하고 싶은 바람. 다행히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일감은 하나 둘 늘어나는 나날. 선한 영향력, 세상으로 뿜어대는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지만 SNS는 하지 않는 모순. 일상 속에서 심신을 가다듬고 내 일을 사랑하면, 큰 꿈은 없지만 지구살림에 보탬이 될까 싶어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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