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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전이 있는 나주혁신도시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호텔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농시를 구상했다. 필자가 가 본 진주, 나주, 김천, 원주, 전주 등의 혁신도시는 그 설계가 모두 같았다. 지역색도, 전통의 현대화도 무엇보다도 새로운 삶의 원리를 느끼지 못했다. 상업, 사무, 주거가 자동차 동선을 따라 배치된 혁신도시는 거기가 거기였다. 호수공원이 있다고 혁신도시가 생명도시, 생태도시인 것은 아니다. 그냥 작은 강남이다. 건축, 토목, 혁신도시를 만든 정치인, 공무원, 전문가들은 그렇더라도 인문사회학과 담론가들과 시민들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여전히 ‘조국근대화’이고 따라잡기다. 수 많은 철학과 사상, 전환론이 있지만 세상을 만드는 것은 자본과 국가다. 도대체 무엇을 바꿔서 혁신도시일까?

팬옵티콘(panopticon, 1791)이란 것이 있다. 인터넷 사전에 의존에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면 이렇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르미 벤담((Jeremy Bentham)이 설계한 팬옵티콘은 감시자 없이도 죄수들 자신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감옥(체제)을 말한다. 벤담이 설계한 뒤에 1975년 푸코(Michel Foucault)가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에서 팬옵티콘의 감시체계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어 규범사회의 기본 원리인 팬옵티시즘(panopticism)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근대이성이 만든 도시를 도시민 스스로 감시, 규율, 처벌하는 감옥으로 봤다. 도시는 영성의 감옥일 뿐 아니라 이성도 감시, 규율, 처벌하는 감옥이라 주장했다. 이는 단지 디지털 장치에 의해 시민들의 감시가 용이하다는 빅브라더 체제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과 국가가 ‘진행되는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곳이 도시다. 공리주의자인 벤담의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 및 감시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팬옵티콘’을 근대도시의 원리로 제안했고 실현되었다. 푸코는 팬옵티콘을 통해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것이며,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권력행사방식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혁신도시를 좋게 말하면 결국 단위 지역 도시들의 지역중앙으로서 선도역할을 부여한 개념이다. 여기에 여야, 보수,진보할 것 없이 동의했다. 혁신도시의 명분은 지역균형발전이다. 박정희 조국근대화론의 노무현 판, 민주화한 조국근대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혁신도시는 팬옵티콘의 중앙감시탑 역할이다. 그리고 지금 더 많은, 더 큰 혁신도시를 만드는 것에 여전히 여야, 보수, 진보할 것 없이 동의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도 반대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역시 도시를 거부하지 않는다. 푸코에 따르면 도시란 감시, 규율, 처벌을 하는 권력이 생산되는 곳이다. 분배가 좀 평등하다고 해서 권력 생산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뜻에서 근대도시들은 파시즘 체제다. 파시즘이 몽둥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원리만이 강요되는 넓은 의미다. 도시에서 진정 자유롭고 평등하고 진보하려면 그는 감시, 규율, 처벌을 피할 수 없다. 화폐로 도시와 시민을 통제, 조종하는 곳이 금융도시인데 전주혁신도시를 금융도시로 만들지 못해 민주당 전북정치인들은 안달이 났다. 그들이 하는 일은 팬옵티콘의 간수 역할이다. 영남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혁신도시는 자율화된 근대파시즘 체제의 연장이자 성장이다. 천지인(天地人) 생명의 성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 도시다. 도시(都市)라는 말 자체가 도읍 도(都)라는 권력과 시장 시(市)가 결합된 말이다. 도시라는 개념을 탈주하지 못한다면 도시계획은 언제나 권력과 시장의 계획이고 근대산업문명의 연속일 뿐이다. 자유, 평등, 진보라는 근대의 구호가 구현된 곳이 도시다. 도시는 근대이성의 정수다. 도시는 지배세력의 권력전략이 공간화된 곳이다. 다시 푸코 투로 말하면 도시는 정치, 경제 권력이 감시, 처벌, 규율로서 작동하는 감옥이다. 노동자 공동 주택지 아파트, 병원, 보호시설, 감옥, 학교, 업무시설 상업시설 등의 도시에는 자본과 국가에 의한 규율과 감시가 담겨 있다. 공장과 사무실의 규율인 노동법이 설령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산업문명의 징역형을 사는 죄수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규율은 효율과 같은 말이다.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효율을 달성할 수 없다. 자율은 규율의 하위 행동양식에 불과하다. 그 감옥의 죄수들이 시민들이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 투로 말하면 학교도 병원도 없다. 모두 감옥이다. 마르크스 투로 말하면 시민은 도시라는 성안의 사람이라는 뜻인 부르주아지와 다르지 않다. 시민은 시장에서 다투는 사람들이기에 시민이 시장권력 공간인 도시에 저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시민(市民)은 도시를 전제할 때만이 성립한다. 시민이 도시에 저항한다면 그는 더 이상 시민이 아니다. 시민은 스스로 감옥의 죄수를 자처하고 내면화하며 파시스트가 된다.

옛날이라고 다르겠는가? 조선의 도읍들은 도시권력인 관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토지와 곡식에 제를 지내는 사직단 동쪽으로는 공자와 유교 성현을 모시는 문묘, 향교를 두었다. 관청은 정청의 뒤에 내아를 둔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이라 한다. 향교는 공자와 성현을 모시는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으로 구분된다. 대성전이 앞에 있으면 전묘후학(前廟後學)이요, 뒤에 있으면 전학후묘(前學後廟)라고 한다. 객사는 도읍의 중앙에 위치해 동헌보다 격이 높았다. 삭과 망에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곳이다. 조선의 도읍들은 철저한 유교 파시스트 체제였다. 주례(周禮)를 어기는 공간구성은 반역이다. 이런 도읍 구성을 통해서 지배이념은 내면화되었다. 서울의 명동성당은 경복궁을 내려보고 전주의 전동성당은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를 동과 서의 공존공생이라 할까? 아니면 제국주의의 오만방자함이라 할까?

시민(市民)이 아닌 시민(侍民)이 아주 조금 늘고 있지만 다수 시민들에게 생태문명, 개벽, 전환, 모심, 한살림이 얼마나 와 닿을까? 생태문명이거나 생명문명이거나 현실에서 최대치는 결국 강물이 깨끗해지고, 숲이 울창해지고, 플라스틱 덜 쓰고, 전기차와 태양광일 뿐이다. 이산화탄소를 줄여 근대 산업문명 파국을 조금 늦추자는 말 이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생태도시, 생명도시란 바람 잘 통하고, 덜 뜨겁고, 숲이 있고, 에너지 적게 쓰는 곳, 결국 감옥 안의 조경이 아닐까? 콘크리트 감옥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감옥은 감옥이다. 아래로부터든 위로부터든 방향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바라며 쓰레기 분리수거라도 잘 해보자고 하지만 세상을 만들고 이끌고 변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자본과 국가다. 생명문명의 구체적 실체를 보여주고 확인시켜 확신으로 이끌지 못하면 문면전환은 없다.

귀농귀촌이 실패로 끝난다하더라도 도시로부터의 탈주는 근대이성이 만든 감옥으로부터의 탈주이고 탈주가 꿈꾸는 그 어떤 정신의 재영토화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서 자연농하며 살자는 환상(?)에 도전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귀농귀촌이 늘더라도 5% 정도인 농촌 인구가 10%를 넘어서겠는가?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삶이어서 응원하지만 도시라는 팬옵티콘을 부술 수 있을까? 근대이성의 정수인 산업문명을 생명문명으로 바꿀 수 있을까? 도시에서 생명문명을 창발하는 일이 중요하다. 생명문명은 좁은 의미에서의 녹색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큰 지구적 전환의 개념이다. 근대이성이 팬옵티콘이라는 실체를 조성했듯이 생명문명은 도시에서 도시를 해체하는 실체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도시 내부의 생명과 외부의 농촌 생명이 연합하여 도시를 해체해 나가야 한다. 필자는 생명문명의 관점에서 도시 다음에는 농시(農侍)다고 말하고 싶다. 농은 농사 농이라 읽지만 기를 농이다. 생명문명을 기르고 모신다는 농시다. 농시에서는 시장의 사람인 시민(市民)이 아니고 서로 모시는 사람들인 시민(侍民)이다. 팬옵티콘의 죄수로 거주하는 주민(住民)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主人), 주민(主民)이 되어야 한다. 농시는 도시에 대안하기 위해 동학의 모실 시(侍)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농시는 경천, 경인, 경물하는 시민들의 공간이다.

무엇을 기르고 모신다는 것인가? 노동 대신에 이루는 일을 기른다. 경쟁 대신에 협동을 기른다. 관료 결정 대신에 자치결정을 기른다. 하숙하는 주민이 아니고 주인을 기른다. 직업정치 대의제가 아니라 직접행동 자기통치를 기른다. 필자는 농시의 3대 원리로 자기주체성(영성), 자기생산성(살림의 바탕), 자기통치성(피통치자 국민이 아닌 주인)을 생각한다. 필자는 공동체라는 어감이 주는 전체주의성이나 규율성, 반생명으로 오염된 공동체의 존재로 농시를 제안한 것이다.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 세월 공동체 활동을 해온 강화도 벗에게 물었다. 그는 영성, 생산, 영성과 생산이 작동하는 체제 이 3박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건강한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생산과 체제가 없으면 영성은 공허하며, 영성 없는 생산과 체제는 근대도시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그의 견해를 적극 지지한다. 그 날 그는 마을의 집수리를 일당을 받고 하고 있었다. 재능기부! 아니다. 보상이 없는 공동체는 희생일 뿐이다. 호혜적 교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일방적 희생이다. 그런 희생은 사라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보상과 보호 없이는 결코 농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헌신에는 반드시 보상과 돌봄(보호)이 있어야 한다. 담론이 담론으로 끝나는 것은 담론이 돌봄을 이룰 생산수단을 확보할 방책이 없기 때문이다. 항산항심은 분리할 수 없다. 담론가들 보다 망치를 들고 못을 박으라는 말이 아니다. 담론가는 담론가로서 자기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담론을 받아서 실체로서의 세상을 만드는 또 다른 사람 우형자(又形者)들이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며 사는 곳으로 작동하는 농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깊고 넓은 전환이 자발적 진화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런 농시를 만들려는 시도는 이미 많았다. 흔히들 공동체라고 한다. 몬드라곤 협동도시, 스페인의 마리넬레다, 인도의 오르빌, 미국의 아미쉬, 일본의 야마기시, 한국의 이러저러한 공동체와 그 시도들, 마을만들기, 도시재생센터, 대안학교,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들이 있는데 왜 도시는 해체되지 않고 더욱 커지는 것일까? 그 일들의 수행자들이 사상과 철학이 철저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룩한 성과와 아픔의 바탕에 서 있다. 이제 또 다른 우형자들이 시작하면 된다.

사람들은 공동체, 공동체하면서 자기부족의 삶의 원리를 지키며 자발적 진화의 문명을 유지해 온 전통부족마을에는 왜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 볼리비아 고원 사막과 페루 산골의 잉카 마을, 중국 윈난성의 소수민족 마을, 아말반도의 순록 마을, 몽골의 유목, 아프리카의 부시족….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생명문명, 생태문명을 말하지만 가난한 부족민보다야 서울시민이 나은 것은 아닐까? 국제 거주이전의 자유를 준다면 쿠바나 부탄을 칭송할지언정 선택은 뉴질랜드를 할 것이다. 무엇이라고 말해도 필자가 가 본 쿠바 농촌은 그 지겨운 한국의 70년대 농업노동 풍경이다. 생명문명, 생태문명은 헬레나 호지(Helena Norberg-Hodge)의 라다크일까? 부탄의 마을이나 코스타리카 마을인가? 산업문명을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인데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현실치로서는 몬드라곤이지 않을까? 그 몬드라곤도 자본화 물결이 거세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래도 뉴욕보다는 몬드라곤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농시는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담론에 불과한가? 다만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자는 발버둥일까?

그렇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다음 글에서 도시를 벗어나 농시로 뚜벅뚜벅 들어간다.

강주영

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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