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다.’, ‘기 막히다.’는 놀랍도록 멋진 일에 감탄으로 쓰인다. 거꾸로 ‘숨 막혀 살겠나.’, ‘기 막혀서 할 말이 없다’처럼 강렬한 부정의 탄식으로도 쓰인다. 한국인의 이런 말들은 이치의 성품인 이성이 아닌 영성차원의 말이다. 같은 말로 다른 차원을 표현하는 한국인들이다. 이치를 말한다는 ‘논리’로 즉 이성으로 드러낼 수 없는 차원의 무엇인가를 가르킬 때 ‘영성스럽다’, ‘신령스럽다’고 한다. 신령은 나와 동떨어진 초월자, 절대자의 그 어떤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되 근대이성에 갇혀서 활성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신령함은 감각, 감정, 정동, 이성 등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영성 또는 신령함은 그것들을 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의 질서로 이끈다. 근대는 주로 이성차원에 갇혀 있었다. 숨, 또는 기는 생명이라는 실체를 이루는 생성의 근본이다. 숨과 기가 활성화되면 영성적이라 할 수 있다. 숨과 기는 만인만물에 이미 다 모셔져 있다. 그것을 동학에서는 ‘시천'(侍天)이라 한다. 생명에서 비인격적 차원인 ‘숨’, ‘기’는 어떤 체(몸)나 바탕에서 활성화되어 인격적 차원이 된다. 요소니 부분이니, 즉자니 대자니, 정반합이니 하는 이원론이 아니라 비인격 차원과 인격적 차원이 일원론으로 통일된다. 모든 생명들은 공통의 숨과 기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성의 마음을 영성이라 한다. 앞질러 말하면 생명문명(공론장에서는 이병한이 처음 쓴 것으로 알고 있다.)이란 신령스러운 땅, 영성적인 지구, 신령한 삶의 원리를 찾는 일이다. 만든다기보다는 찾는 일이다. 지구를 만들 수는 없다. 고대 ‘신시’나 ‘마고성’의 현대적 부활이 필요하다.
위에서 숨은 목숨의 숨이고 정확히는 살아 있는 ‘산 목숨’ 줄여서 ‘산숨’이다. 산숨을 낳는 바탕몸을 현대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한 북한의 김봉한은 ‘산알’이라고 이름했다. 산숨을 다른 말로 하면 서양말 이름씨 ‘life’를 일본사람들이 번역한 ‘생명’이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을 받아들이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생명’을 필자도 즐겨 쓴다. 하지만 말만 놓고 보면 ‘산숨’과 ‘생명’은 느낌이 다르다. 필자 홀로의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산숨’이 ‘생명’보다 훨씬 더 일을 내는(생성) 느낌이다. 움직임은 사건을 일으키고 이름은 붙박이 느낌이 난다. 움직임으로 느끼면 온누리는 산숨들의 되먹임틀(생태)이다. 하지만 담론에서 이미 정착된 생명을 쓰는 것이 담론의 계승과 전진에 좋다. 하여 생명이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그럴 리(理) 없다.’의 이성은 불타는 아마존, 맹골수로의 304명의 죽음, 컨테이너에 깔린 청년, 전쟁이 난 우크라이나의 생명들이 내지르는 ‘살려줘’를 듣는가? 사람이, 숲과 강이 전쟁으로 죽는데 우크라이나 재건의 계산기가 더 바쁘다. 그 이성은 주식시장, 마천루의 공중주택, 자율전기자동차로 얻는 화폐의 소리를 즐겨 듣는다. 이성은 모두 듣기도 하고 한쪽만 듣기도 할 것이다. 컨테이너에 깔린 청년 노동자를 생각하는 이성은 착하고, 이윤만 찾는 메타플랫품 기업의 이성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성이 어느 한쪽의 소리만을 듣는다면 ‘이성이 아니다’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성 자체가 본디 그렇다. 이쪽과 저쪽의 이성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이성의 주류는 산업이성이다.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외쳐진 구호를 생각해보라. 거의 대개가 산업이성이다. 신령한 영성이 아니다. 컨테이너에 깔린 청년의 ‘살려줘’는 들으나 산업문명은 그대로 두면 ‘살려줘’는 영원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 산업문명에서의 평등이라니! 평등은 동등한 권리와 분배가 아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평등은 자기주체성, 자기통치, 자기생성이 자유롭도록 하는 일이다. 생명주체의 회복이 평등이다. 그것이 생명문명이라고 하고 싶다. 산업문명에서 생명문명으로의 전환이 괴뢰주체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생명문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밖이다. 필자가 사회주의라고 할 때는 모두의 공생으로서의 사회를 말하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온 들에 꽃을 피우는 꿀벌과 꽃의 상호부조 사회를 말할 뿐이다.
흔히들 근대 국민국가는 근대이성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니 국가의 사람인 국민도 근대이성의 산물이다. 시민이라는 말도 있다. 시민은 시장의 사람으로, 시장에서 권리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대다수 사람들은 시장에서 권리를 얻지 못한다. 노동자라는 말도 있다. 노동력을 파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아닌 산업전사라고도 한다. 국민, 시민, 노동자는 생명들을 영과 기의 담지자로서 영성적 생명으로 만들지 않고 국가이성, 시장이성에 가둔다. 생명은 ‘자기통치’, ‘자기주체’, ‘자기생성력’을 가진 존재다.(이하 생명의 자기본질로 표현) 자기(自起)는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다는 뜻이지 개인을 말하지는 않는다. 개인뿐 아니라 이웃, 마을, 사회, 식물계, 동물계처럼 각각의 범주에는 상보적인 자기원리들이 있다. 낱낱의 자기범주들은 단독성의 원리만으로는 활성화되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괴뢰주체’를 화두로 삼았다. 간혹 페이스북에서 쓰기는 했지만 본격 공론장에서는 ‘다른백년’이 처음이다. 필자가 만든 말이다. ‘괴뢰주체’란 자신이 이데올로기화한 비생명적 허상의 괴뢰인지도 모르고 비생명적 허상을 주체성으로 하여 나서는 것을 말한다. 얼핏 자본의 괴뢰를 떠올리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데올로기 사회주의의 괴뢰도 많다. 근대는 생명을 국가, 국민, 시민, 노동자, 산업의 괴뢰주체로 만들었다. 국민, 시민, 노동자 등은 ‘괴뢰주체’의 다른 이름이다.
근대인으로서 호모사피엔스는 호모셀프우스(Homo selfus) – 주체인류였을까? 호모파펫트(Homo puppet) – 괴뢰인류였을까? 괴뢰라면 무엇의 괴뢰였을까? 근대는 산업문명이 핵심이다. 근대 산업문명은 사람과 뭇 지구살이들의 생명원리로서 한계에 도달하고 이제 그것의 비생명성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산업문명은 상품 또는 물건의 생산과 교환이 핵심이다. 사회주의라하더라도 생산, 소유, 교환방식이 다를 뿐 산업문명체제다. 산업문명체제는 그대로 두고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다툼은 ‘낱낱이 주식회사버스를 타느냐’, ‘모두들 프롤레타리아당과 프롤레타리아국가의 버스를 타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한 마디로 근대인들은 좌와 우 양쪽에서 산업문명의 괴뢰주체였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표현한 유태인 학살 나치스트로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곳곳에 있다. 스탈린은 아이히만이 아닌가? 아이히만은 사회주의에도 있고, 혁명가에도 있고, 동학에도 있다. 학교에도, 예술에도 있다. 자기 말은 없고, 자기혁명은 없이 데카르트니, 칸트니, 헤겔이니 마르크스니, 공자니, 예수니, 수운이니 한다. 담론권력의 못된 행태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괴뢰다. 사람은 사람이어야지 호모 레이버(Homo labor)인가? 노동자를 노동으로 구원할 수 있는가? 도대체 사회주의 노동자와 자본주의 노동자가 무엇이 다른가? 사회주의에서 정치와 노동의 의사결정자가 당과 국가가 아니고 노동자라고 하자! 하지만 그 노동자는 여전히 사회주의적 산업문명의 괴뢰주체다.
필자가 페이스북에 거칠게 쓴 두 편의 글을 인용해본다. 어색한 곳은 고쳐서 인용한다.
“광주에서 ‘동학과 현대과학’을 주제로 말씀을 드렸다. 폐쇄적 지역주의가 아닌 “호남론”을 결론으로 말씀드렸다. 미처 말하지 못한 “신농사론”은 호남론의 핵심이다. 19~20세기가 지하석유산업문명이고 근대가 산업문명이라면 기후위기 시대에 신문명의 핵심은 바다, 지상, 천상농사다. 산업이 아니라 신농사다. 산업체제는 그대로 두고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는 쌍팔년도 말이고 동학의 삼경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나의 스승이지만 그는 산업문명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사회주의를 수용하지만 보다 더 문명전환주의자다.
신산업이 아닌 신농사론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인여물(事人如物)이요. 경천, 경인, 경물이다. 지하, 지상, 천상농사론! 그 신주체가 호남이어야 한다. 도시가 아닌 농시, 숲시, 바다시가 호남 한해륙의 알기다. 뭍은 강으로 갱번(바다)에 닿고, 갱번은 강으로 뭍에 닿는다. 갯벌은 갱번과 뭍을 연결한다. 그것처럼 도시와 농촌은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다른 것으로 전환한다. 그래서 신농사다.
지금 동학의 ‘다시개벽’은 산업문명에서 ‘신농사문명’으로의 전환이다. 경물해야 경천, 경인을 할 수 있다. 경물은 모든 삼라만상이 자기생명의 본질을 펼치게 하는 일이지 좁의 의미의 환경보호나, 물건을 소중히 쓰거나, 똑같이 나누자는 말이 아니다.
천상농사라니! 우선 하늘은 독점할 수 없다. 바람과 태양! 빛의 입자와 파동을 독점하다니! 호남 한해륙(남도의 이윤선은 한반도가 아니라한해륙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인 신안 앞바다, 새만금바다를 신재생에너지재벌에 내주면서 정의, 민주, 평등, 사회주의는 말짱 꽝이다.
경물! 당신이 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라면 태양과 바람을 독점하려는 기술환경주의와, 신재생에너지재벌과 싸워라! 기술은 모든 사람과 뭇 지구살이들을 생명이게 하는 것에 쓰여야 한다. 기술은 혹자가 말한 ‘부르주아지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좌파진보라면 땅을 독점하는 온갖 개발주의, 도시재생사업과 싸우고 민법 275조의 총유적 소유를 위해 싸워라.
석유화학이 아닌 자연화학에서는 농지와 바다와 숲이 도시문명을 대체한다. 바다시, 농시, 숲시가 신문명으로 가는 경물의 핵심이다. 바다시, 숲시, 농시는 19~20세기의 산업론을 대체하는 신농사의 알기다. 지역소멸의 대안이 산업기업유치인 것은 아니다.
목재만으로 30층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 굴껍데기 같은 패각류는 시멘트를 대체한다. 석유화합물 섬유는 다시금 천연섬유로 대체된다. 기술이 천연섬유를 석유섬유보다 더 싸게 만든다. 액화목재가 출현한다. 이것만으로도 19~20세기를 포획한 철강•콘크리트를 대체한다. 이것이 신농사론이다. 이것이 생태문명이지 전라북도가 2,000억 원을 들여 만드는 ‘생태문명원’이 생태문명이라니 부박하다.
경물하지 않으면서 경인, 경천만 말하면 허무지설이다.
도시를 대체하는 숲시, 농시, 바다시가 경물이요, 생태문명이요, 다시개벽이다. 그 일들은 바다(갯벌의) + 총유적 소유 + 자치관리노동 + 마을연금을 실시하는 서해의 섬 ‘장고도’ 및 갯벌 등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이제 그것을 도시로 가져와서 도시를 농시로 전환해야 한다.
새것이 낡은 것을 대체하는 것은 필연이다. 500여 년된 산업체제는 자본이 가지고 있지만, 신농사체체는 결코 자본에 뺏겨서는 안 된다. 새로 나는 것들 만큼은 그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동학 경물이요, 생태문명이요, 생명사상이요, 비자본제라고 믿는다.”
“괴뢰주체에서 생명주체로 가자.
‘생명사상연구소 – 우형’이 주최한 <‘또 다른’ 생명 운동 함께풀기>(워크숖)에 다녀왔다. 주제 ‘또 다른’은 동경대전 논학문의 ‘우형(又形)’에서 가져왔다. 우형은 ‘또 다른 세상’ 영어로 하면 Another wrold라고 할 수 있겠다. 20대에서 60대까지 남녀가 함께해서 좋았다. 비판과 성찰 그리고 전망을 함께 심고했다. 청년들은 갈 길을, 노장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함께 살폈다. 생명生命은 명命이 살아있는 존재다. 천명, 운명, 숙명, 사명, 존재 그 자체의 명이든 그 명은 모두가 다르지만 서로 상보적이며 ‘자기주체’, ‘자기생성’, ‘자기통치’를 가진다. 생명은 우주적 조화생성에 참여하는 존재다. 돌도 우주 조화생성에 참여하니 생명이다. 생명이 생명이기 위해서는 갖은 죽임과 허상에 침몰한 상태의 ‘괴뢰주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수련•수양하며 그에 머물지 않고 경물하며 행동한다. 경물(敬物)해야 시천(侍天)이 활성화된다. 조화란 이미 내 안에 모셔진 ‘천’을 활성화하여 창발에 참여하는 일이다. ‘만사지’란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주조화생성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지금 그것은 다시개벽 문명전환에 참여하는 일이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산업문명 내의 체제 선택이 아니다. 그 밖이다. 우형이다. 생명문명이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을 담는 되먹임틀(생태)의 단위체인 지역 또는 마을이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 통치체제인 국가의 괴뢰주체 마을에서 생명주체 지역과 마을로 해방되어야 한다. 괴뢰주체에서 생명주체로서 전환하는 마을의 내용을 알뜰히 오늘 쓰기에 글이 길어진다. 다음을 기약한다.
‘근대이후’라고도 하고 ‘후기근대’라고도 한다. 지금 시대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역사적 특성을 가지는 고유명사로서 ‘근대’ 산업문명을 생명문명으로 전환하는 동력은 사람이 아니라 지구다. 지구가 자기생성력을 활성화시켰다. 근대문명의 주체로서 호모사피엔스는 무엇으로 전환되는가? 전환은 우주적 얽힘에 있기 때문에 인류의 이러저러한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지구의 자기생성력 – 지구마음에 합류해야 한다. 기술로 생태를 관리하려는 어설픈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삶과 문명의 원리를 보다 급진적으로 생각하고 생명의 자기전개를 보다 급진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의지적 참여는 가능하고 영향을 미치지만 지구생성력을 무시하고 사람의 의지대로 된다고 생각하면 이른바 에코파시즘이 되고 만다.
도시(都市)는 권력체다. 산업권력, 정치권력, 교육권력의 집합체다. 생명문명은 도읍 도(都) 시장 시(市)의 도시 이후의 길 도(道), 모실 시(侍)의 도시(道侍)다. 그 도시는 농시, 숲시, 바다시다. 저자 시(市)의 시민(市民)이 아닌 모실 시(侍)의 시민(侍民)이다. 다음에는 그 이야기로 만나고 싶다. 도시(都市) 다음 도시(道侍)다. 시민(市民) 다음 시민(侍民)이다.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50454458316482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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