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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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 사상의 과제는 6차 생물대멸종, 기후위기, 불평등과 억압, 문명우울증(자살, 공황장애, 팬데믹 같은 자연의 역습)에 대응하는 것이다. 멸종 또는 파국이라지만 지구에게는 거대한 6차 전환이고, 현생 문명의 파국일 뿐이다. 특이점은 5차까지는 우주와 지구 자체의 순환이었다면 6차는 인류가 재촉하고 있다는 점이다. 6차 생물대멸종과 기후위기는 우주 자연 지구의 되먹임 과정이다. 멸종, 파국보다는 ‘거대한 전환’으로 불러야 맞다. 거대한 전환이라는 말은 기성 지배 세력에게는 위협적인 말이므로 그들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지구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 자연과 현생 문명이 다른 생태와 문명으로 6번째 이동하는 것이다. 쿤의 말을 빌려서 하면 기틀변환(paradigm shift)의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 임계점을 지났는지도 모른다. 역사가 앞으로만 나간다는 진보주의 입장에서는 직선인 앞이 아니라 되먹임의 거대한 전환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곤혼스러움이 있다. 지금까지의 것이 그대로 다른 것으로 진보 또는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의 파국과 종말을 동반한 거대한 전환이라니!

전환을 한국말로 하면 ‘다시개벽’이다. 지금 전환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종(種)들과 현생문명의 전환을 준비하는 것이라 기존 철학이나 사상으로 말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인류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수운이 말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비밀이기도 하다. 수운의 무위이화를 여러 사람들이 각기 해석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무위이화는 나와 동떨어진 천명이나 신으로 부르던 것의 간섭이 없는 존재 자체의 스스로의 자기조직화와 되먹임, 물리학에서 말하는 프랙탈(fractal) 같은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 아무리 개입해도 지구는 자기 길을 간다. 유일한 길은 지구의 자기조직화에 인간들이 순응하는 것이다. 모든 사건과 생성의 주체는 생명 그 자체지 생명 밖의 신, 천명, 국가, 화폐, 사회계약 이런 것이 아니다. 지구자연을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면 지구는 인간에 의해 우여곡절을 겪을망정 자기조직화의 길을 간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무위이화는 주체 밖의 다른 주체들과 상보적으로 연관되어 있어도 자기 조직화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생명 스스로의 자기조직화 질서를 말한다. 때문에 무위는 인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직화의 길과 어긋난 인위를 적극적으로 없애는 유위(有爲)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는 ‘무위가 유위’라는 역설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

과정철학의 거두인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 유명한 것이 모순률, 동일률, 배중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과 다르게 동양에서는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부분이다”는 역설의 논리 패러독스(pardaox)가 있다. “아주 미세한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 대표적인 역설의 논리다.

병이 나면 서(西)의학에서는 선택과 집중으로 도려내는 수술과 약물을 투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충실하다. 참이 아니면 거짓이기에 의학의 눈으로 거짓을 도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동(東)의학에서는 부분으로 전체를 살리고 전체로서 부분을 살리기도 한다. 참이면서 거짓이고 거짓이면서 참이기도 하다.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위장만 치료하지는 않는다. 대체적으로 서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동의학은 ‘역설의 논리’에 충실하다.

“참은 참이다”는 동일률,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모순률,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하여야 한다.”가 배중률이다. 변증법은 참과 거짓의 양단 중에서 하나가 이겨서 지배하는 것인데 이것을 한국말로는 ‘정반합’이라고 한다.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생철학』의 저자 윤노빈은 변증법을 “분리하고 지배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헤겔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모순률을 인정하여 하나의 사물을 대립하는 두가지 규정의 속성을 가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고도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벗어났다고도 한다. 하지만 한 사물에 있는 A(정)와 B(반)가 상호 투쟁하여 C(합)로 간다고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모순이기에 서로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변화가 생겨 A도 B도 아닌 다른 것인 C로 간다고 하여도 그것은 A와 B 어느 한쪽의 속성이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이 과정에 흘리는 피는 불가피하다고 하여 ‘이성의 간계’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사적 소유와 사회적 노동의 모순이 충돌하여 사회는 다른 사회로 이행한다고 하였다. 자본과 노동이 싸워 노동이 이겼다고 하자. 노동자 승리의 세상은 결국 주인만 달라진 노동 세계일 뿐이다. 그게 자본제보다 더 평등하고 자유로울 수도 있지만 문명의 전환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모순이 없는가? 결국은 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인민들을 속도전과 영구혁명으로 내몬다. 혁명을 한 체제가 다시 혁명의 대상이 된다.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혁명가여야만 한다.

변증법이 현생문명의 파국을 막으며 거대한 지구의 전환에 대응할 수 있을까? 지금 이 파국에 대비한 주인공들은 부르주아지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탄소중립성에 의심이 있지만 일단 인정하다 하더라도 태양광과 전기차의 주인공은 부르주아지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종이컵 안 쓰고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고, 최대한 플라스틱 사용을 억제하지만 사실은 이 전환의 하위주체에 불과하다. 파국에 대응하는 준비는 부르주아지가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파국 대응책이 거대한 전환 준비가 아니고 기술력으로 환경과 생태를 관리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지구의 순환을 기술력으로 관리 가능할까?

아리스토텔레스나 변증법을 적용하면 “진보는 진보이면서 보수일 수 없다.”, “진보이든지 보수여야 한다.” 이 논리에서는 진보와 보수는 서로 이율배반이기에 양립할 수 없어 싸워야만 한다. 부분은 부분(요소)이어야지, 전체일 수 없고 전체는 전체이어야지 부분일 수 없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요소)의 합이다. 이것이 기계론, 요소론이다. 변증법은 기계론과 요소론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다.

양비론을 공격하는 이들은 역설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충실하다. A, B, D, C…,Z 다수 중에(양비의 양은 둘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만 옳다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인 역설의 논리에서는 A~Z가 모두 옳기도 하고 동시에 틀리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포접(包接)한다. 맞다 동학의 그 포접이다. 역설의 논리가 드러난 동학의 사고는 ‘무위이화’(無爲而化),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불연기연(不然其然), 오심즉여심을 손병희가 해석한 인내천(人乃天) 등이 역설의 논리다. 여기서는 스스로의 존재가 스스로를 자기조직화하고 창발한다. 없는데 무엇인가 된다의 무위이화는 무와 유의 공존, ‘내가 곧 너고 네가 곧 나다’의 오심즉여심, ‘그렇지 않다’의 불연과 ‘그렇다’의 기연 즉 반대일치의 논리인 불연기연, 하늘(하늘을 영어의 신God로 해석하지 말기를)이자 곧 사람이며 사람이자 하늘인 인내천은 다 역설의 논리다. 진보이면서 보수이고, 보수이면서 진보다. 그런데 사실은 진보와 보수는 논리적으로 구분이 어렵다. 앞으로 나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모두 다 진보다. 경제발전 이윤 동기만을 중시하는 보수진보와 분배를 더 중시하는 급진 진보로 불러야 마땅하다. 근대에 만일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기획에 의한 것이다. 진보라는 말을 쓰는 한 결코 부르주아지를 포접해서 포월(包越)할 수 없다.

수운의 무위이화와 같은 “A이면서 B이고, B이면서 A다”는 역설의 논리를 컴퓨터에 적용한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는가? 컴퓨터는 and, or, if then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수운의 불연(숨은질서, 그렇지 않다)과 기연(드러난 질서, 그렇다)을 컴퓨터는 다룰 수 있는가? 카오스이론은 수운의 불연기연을 증명하고 있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는 것은 반대일치의 논리 즉 수운의 불연기연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깬 것이다. 불연기연은 상보성, 유기체성의 원리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중첩성의 원리가 컴퓨터 논리에 적용된 것이 Qubit다. 양자컴퓨터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역설의 진리, 반대일치의 논리가 수학으로도 표현가능하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무색하게 하였다. 수운의 동학은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데카르트와 뉴턴을 논파하고 있었다. 여기서 ‘역설의 논리’가 ‘양자 중첩성의 원리’, ‘불확정성의 원리’ 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의 모든 논리는 단적으로 사람과 자연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윤을 만드는 요소였지, 주체생성자가 아니었다. 자본제 노동은 주체생성자의 지위를 만들 수 없다. 기존의 국가사회주의 역시 당과 국가를 앞세웠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돌아가셨다’, ‘환원하셨다’, ‘소천하셨다’고 한다. 아사달에 내려와 도읍한 환인은 아사달에서 신선이 되었다. 나뭇꾼과 선녀에서 선녀는 하늘로 갔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살다가 자신이 산 곳으로 되돌아가는 자기 되먹임의 자기조직화는 앞에서 말한대로 생명의 본질이다. 이는 현대물리학의 ‘프랙탈’, ‘자기조직화’, ‘되먹임 현상’을 한국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기조직화의 순환을 통해 우주는 전환한다. 아주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계승한 근대의 기틀(paradigm)은 전환 가능한가?

진실은 간단하고, 허구는 긴 말을 필요로 한다. 답은 간단하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피하려 하지 말고 인정해서 거대한 전환을 준비하는 일이 지금 철학의 임무다. 이 전환기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과 생태계다. 태양광이나 전기차로 종말을 피할 수 없다. 미사일 한 방 쏘면 헛것이 되고 만다. 7차 지구와 현생 호모사피엔스의 평화로운 되먹임고리를 최대한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 국가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모두 생산력 진보를 핵심으로 삼았고, 인간이 인간과 자연을 수탈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것은 요소들의 합을 전체로 본 데카르트 기계론의 필연적 귀결이다. 본디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고 요소화한 것이다. 근대는 비인격적 요소가 인격적 요소들을 지배했다. 그래서 무력하기만 하고 쓸모도 없는 인격적 신의 죽음을 니체는 선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대안을 말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근대 인간들은 주식회사라는 비인격적인 물격에 인격을 부여한 법인을 만들고 법인의 지배하에 인간을 노동력이라는 비인격적 요소로 전락시켰다. 국가사회주의도 자연과 분리된 인간 노동력을 동원하는 체계였다. 좌파나 우파 모두 지구 순환 재촉과 현생 문명 파국의 공범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좌파냐 우파냐, 보수냐 진보냐 하는 물음은 필요하지 않다. 그릇 위에 사과와 배를 올려놓고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보다는 그릇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혁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혁명 품은 다시개벽이어야 한다. 필자가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할 때에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에 대칭되는 말일 뿐이다. 개인주의가 문제지 개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개인 없는 사회는 없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실체 없는 관념이 실체자들을 요소화하고 지배한 역사였다.(실재론, 요소론, 기계론) 근대 이전에는 실체 없는 천명과 신권을 빙자하여 왕권과 교회가 지배했다. 근대는 계약한 적도 없는 비실체인 허구의 사회계약에 근거하여 계약의 대리권자로서 국가와 종이에 불과한 화폐에 법인이라는 인격을 부여한 자본의 연합체인 자본국가가 지배하고 있다. 역사에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국가와 당이 노동자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당의 사회노예로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다. 그 사회가 다시 혁명의 대상이 되고 만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진보와 보수의 선택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를 모두 무위(無爲)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의 담론을 만드는 적극적 무위를 통해 이화(而化)하기를 심고하고 또 심고한다.

청년들아 근대를 무위하고 이화하라!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22447698133743884/

강주영

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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