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배후’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뇌가 배후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2022년 9월 6일 오전 11시 13분에 친구를 생각하는 것일까? 부모도, 자녀도, 아내도 아닌 친구일까? 생각도 사건(Event)이다. 세계는 사건을 통해서 실재(Reality)를 드러낸다. 아직 사건의 배후를 명쾌하게 말한 철학, 사상가, 물리학자, 생물학자를 만나지 못했다. 종교는 하늘이 품부했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필자의 집에 책상이 있다. 책상은 내가 느끼고 관계할 때만 실재한다. 책상이 나하고 관계하지 않는다면 책상이라는 실재는 없고 단지 특이성 없는 사물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성은 특이점들이다. 책상은 나하고 사건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관계의 사건은 불연속적이다. 직선이 아닌 점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만의 현재는 없다. 현재로부터 비롯된 것으로만의 미래도 없다. 이것이 가지는 실천적 의미는 이렇다. 어떤 대안은 반드시 과거로부터 이어 온 어떤 국면이나 단계에서만 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거리를 멀리 해 보자. 필자가 집안에 있는 책상에서 공부라는 사건을 생성했다고 하자. 필자의 공부라는 사건을 통해서 책상은 실재가 된다. 정읍에 있는 친구에게 책상은 실재하는 것일까? 실재하지 않기도 하고, 실재하기도 한다. 필자가 책상에서 공부하면서 친구에게 전화로 통화할 때 책상은 친구가 감각하든 못하든 어떤 행동에 관계하여 사건의 연쇄고리를 타고 친구에게 영향을 미쳐서 실재할 수 있다. 필자의 행동에 책상은 관계를 하고 있고, 필자가 정읍의 벗에게 하는 전화 통화 사건은 책상과 관계된 사건의 네트워크를 만든다. 이 사건에서 책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화기, 전파도 사건에 관계한다. 하지만 책상은 정읍의 친구에게 아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 관계 형성의 사건이 없으면 책상은 친구에게 실재가 아니다. 양자역학에서 실재는 측정이라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난다고 한다. 책상은 책상의 용도로서만 자신을 규정하는 유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름은 용도의 가능성이지 확정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지속적으로, 유일하게 책상으로서만 기능하는 고유 독립성은 없다. 빈 교실에 있는 어떤 사물은 책상으로, 밥상으로, 땔감으로 쓰일 수도 있는 가능성의 존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라는 실재론은 허구다.
‘현실’은 ‘실재’하지 않는다. 과거, 현실, 미래가 연속된 원인과 결과로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는 뜻이다. 새로 시작될 수 있다. 필자의 친구가 어떤 연구로 학술상을 받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기쁜 마음으로 KTX를 타고 수상식장에 가다가 태풍 힌남노를 만나 열차가 탈선하는 불행을 만났다. 친구가 KTX를 타지 않았어도 열차는 탈선할 수 있다. 친구가 열차에 탄 행동이 열차탈선이라는 사건의 원인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열차탈선은 친구와는 인과관계 없이 새로이 떠오른 사건이다. 친구는 사건의 지휘자나 조직자가 아니라 사건을 만났을 뿐이다. 어떤 생성(Becoming)은 관계자에게 그냥 떠오른다. ‘떠오름 현상’을 물리학에서는 ‘창발’(創發 Emergence)이라고 한다. 창발은 사건의 관계자에게서 원인과 결과로서 생성되기도 하고, 관계없이 발생하기도 한다. 수상식장에 가기 위해 행동하는 것과 열차탈선은 불연속적이다. 직선이 아니라 점이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온 경로의존성에만 규정당하지 않는다. 현재는 관련 사건의 지속성과 단절만이 있다. 사건을 통해서만 어떤 존재는 실재가 된다. 실재는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필연과 우연이 얽힌 사건의 관계에서 생성된다. 사물과 세계는 생산되지 않고 생성된다.
사물은 여러 상태를 중첩해서 가지고 있다. 이 중첩성의 어떤 질적 특성이 필자와 친구에게 관계되는 어떤 사건의 방식에서, 어떤 질적 속성을 보인다. 필자와 책상의 관계사건은 5분 전과 10분 전이 다르다. 부딪혔을 때 정강이가 매우 아프기에 책상은 흉기의 질적 속성을 드러낸다. 책을 놓고 공부하면 책상이 된다. 밥을 놓으면 밥상이다. 걸터앉으면 의자가 된다. 사물의 ‘다중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건에 따라서 다중상태의 어떤 질적 특성 발현은 다르게 나타난다. 모든 사건 관계자들이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특정 사물에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미시적 나노초단위에서 사건은 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며칠, 몇 날, 몇 월, 몇 년이라는 거시세계에서는 사건이 분명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라도 사건의 관계는 모두에게서 동일하지 않기에 공유된 것으로서의 동시적 현실은 없다. 공유된 시간은 없다.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자, 유일성, 동일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나노초 단위에서 정읍의 친구와 필자는 다른 시공간에 있다. 양자역학에서 사물은 다중상태에 있는데 현실의 사건에서는 한 측면만 드러난다고 한다. 하여 실재는 그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주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있다고 한다. 그 놈의 실재가 오리무중인 것이다. 때문에 어떤 사건에서 다중의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의 팽창가속 때문에 대략 160억 광년의 어느 지점에서는 빛이 도달하지 못해 정보를 전달할 수 없는데 이 지점을 사건의 지평선이라 한다. 그 너머는 알 수가 없다. 우주의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에서 원인과 결과가 아닌 사건이 생성될 수 있고, 그 때 그것을 ‘사건의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는 ‘사건생성’이라는 동사이지, 있는 것들의 명사 집합 즉 사물 집합이 아니다. 독립적인 실재는 없다. 사물은 사건에서만 실재성을 가진다. 즉 생성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사건의 연속성을 말한다. 사물은 사건의 연속성에서만 실재성을 획득하고 우주 창발에 참여한다. 사건을 통해서 사물은 발언을 한다. 실재는 사건에서 생성된다. 사건이 끝나면 실재는 사라진다. 사건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차이(difference)는 존재들 간의 다름을 뜻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생성에서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사건의 차이다.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다. ‘차이생성’은 변동하고 움직이는 사건속에서 존재를 포착한다. 세계는 확정된 존재가 아니라 생성되는 사건들의 얽힘이다. 차이생성을 부정하고 동일성의 체계를 세우고자 한 사유들이 한국에서는 ‘빠’들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주의나 이즘(-ism)은 동일성의 사유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경향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서의 주의다. 동일성의 사유 ‘빠’는 파시즘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이런 파시즘은 극우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특정 경향만을 고집하는 극좌에서도 나타난다.
노동계급은 가능성의 이름이지 동사가 아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반드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부여한다. 노동계급으로서만 규정하는 유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성의 존재를 유일성으로 내세우는 것은 가능한가? 노동계급 유일성은 결코 혁명의 와중에 연인과의 달콤한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혁명투쟁만이 요구된다. 그는 다양한 사건들의 네트워크 생명체가 아니다. 생성자로서의 생명은 사라지고 전체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닥터지바고’다.
미래는 직선의 철로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사건 입자들의 확률구름이다. 시간은 철로처럼 정해진 궤도의 직선이 아니다. 그렇게만 생각할 때는 전체주의가 되고 만다. 시간이 시장의 궤도를 타고 직선으로 간다고 하면(성장주의) 시장전체주의가 된다. 국가사회주의로의 혁명만이 있다고 하면 국가사회주의 전체주의가 된다. 시간의 방향이 있어야 진보와 보수가 있는데 시간이 양자처럼 입자(알갱이)이고, 방향도 없다면 진보와 보수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시간은 한 지점이 아닌 다차원에 존재하는 점들이다. 시간이 점이라는 것은 시간은 불연속적이라는 뜻이다. 시간은 사건들의 생성관계다. 생산이 인간들의 작위라면 생성은 사건들의 얽힘이다.
속도가 빠른 KTX는 정읍서 목포까지 1시간이다. 걸어서는 몇 날이 걸릴까? 질량이 무겁고, 속도가 빠르면 시간은 지연된다고 한 것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더 놀랍게도 시간 자체가 사물과 동떨어진 실재로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방향성도 없고 오로지 사건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고 한다.
생성철학은 여기서 근거를 얻어 근대를 축조한 ‘생산함으로 존재한다’는 실재론을 논파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학적 유물론(시장유물론이든, 사회주의유물론이든)은 없으며, 당연히 과학적 시장도, 과학적 사회주의도 없다는 말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필연이 아니며 확률적이다. 세계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결정되어 있지 않기에 사건 생성의 자유의지는 그만큼 더 풍부하다. ‘사회주의’면 사회주의지 ‘과학적 사회주의’일 수 없다.
생성철학은 마르크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한 사회혁명은 필연이 아니며 확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의 사건 생성이고, 이것들의 얽힘이다. 생성철학에서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다만 필자는 모두에게 호혜적인 사건들을 생성하고 싶을 뿐이다.
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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