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8년생, 이른바 MZ세대 –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밀레니얼 세대 – 에 속한다. 나는 국민 학교를 입학하여 IMF로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를 겪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등교육 의무화는 내 다음 학년부터 적용이 되었고, 고교 평준화가 되었어도 선을 넘는 체벌과 촌지문화가 여전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되자 사회는 우리들을 ‘88만원 세대’ (90% 이상이 비정규직의 세전 소득이 월평균 88만원), ‘3포 세대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 넘어서 ‘N포 세대’라고 정의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낙오자가 될까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고, 그 불쌍한 세대에 속하지 않기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열심과 성실이었다.
얼마 지나지않아 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부모의 능력과 형편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로 계급을 나누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극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스스로 흙수저라며 자조할 수 밖에 없었다.
IMF 때 위기를 겪은 나의 부모는 내게 늘 제 때 월급을 따박따박 받는 공무원이 최고라며,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기대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 바람과는 다르게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겠다며 호기롭게 음대에 진학했다. 대학에 입학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 같았는데 문제는 그 후였다.
가정경제가 좋지 않아 전액 학자금 대출을 받아 입학을 했는데, 등록금이 타과에 비해 유난히 높았다. 결국 나의 대학생활은 캠퍼스의 낭만은 커녕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만 하다 끝이 났다. 매 시험기간이면 일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연습을 했다. 좋은 연주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장학금이 목적이었으니까. 졸업 후 유학은 꿈도 못꿨고, 별다른 스펙이라 할 것 없는 나는 결국 제대로 된 입사를 해보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비정규직을 떠돌며 88만원 세대에 입성했다. 사실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 주변 친구들을 봐도, 설령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온 친구들을 봐도 아주 오랫동안 취업준비를 하며 지쳤다.
졸업 후 볼품없는 나를 포장하기 위해 나는 소비력을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비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여러 일용직 알바를 했다. 그러던 중 몸과 마음에 적신호가 켜지며 결국 나는 모든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어렵게 얻은 직업은 요가강사.
그동안 일상이 괴롭고 답답할 때마다 도피처로 삼았던 것이 요가였다. 요가를 할 때면 모든 것에서 편안해졌다. 내 인생에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위대한 위인도 희망찬 이야기를 하는 명사도 아닌 동네 요가 선생님이었다. 경쟁가도를 달리는 삶에서 항상 낙오자였던 나에게 ‘나만의 속도를 존중하며, 매 순간과 과정을 소중하게 대하라’는 요가 선생님의 이야기에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 결국 그 길을 따랐고, 처음으로 이게 나의 천직이라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고 의미있는 일을 하며 마음은 충만했지만,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요가강사는 비정규직 프리랜서였다. 물론 일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적은 시간 근무하다보니 통상적으로 근로계약서를 쓰거나 그것에 대해 보호받기도 어려웠다. 수업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하루 아침에 요가원(사업장)이 사라지며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성과급이나 휴가 등의 복지는 꿈도 못꿨고, 연차나 경력을 인정받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최소 아침, 저녁으로 수업해야했다. 그래야 수도권 대졸자가 받는 평균 초봉정도의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생계 이상의 취미와 배움을 이어나가려면 더욱 많은 수업을 해야했다. 대학 시절, 학교공부와 아르바이트를 전전긍긍 하던 시절이 자주 오버랩되었다. 심지어 십 년전과 지금의 수업료 시세가 크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나에게 많은 것을 포기하게 했다.
하지만 진짜 시련이 닥친건 2020년. 코로나-19가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부터였다. 정부는 코로나 19 확산방지를 위해 헬스장 등 체육시설에 집합금지 명령을 지속적으로 내렸다. 모두가 한 달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는데, 너무나 길어졌다. 많은 체육시설들이 문을 닫고, 직업을 바꾸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결혼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는데, 수입이 없는 나는 당장의 살림을 살펴야했다. 몇주 전, 폭설에 출근길이 막혀 수업을 하지 못한적이 있었는데, 그 눈을 뚫고라도 돈벌이를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들만큼 아쉬웠다.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는 남편의 수입으로 생활하기란 턱없이 부족해서, 결국 만기가 되지 않은 적금을 깨고야 말았다. 이 상황이 얼마나 갈지 모르니 나는 돈을 쓸 수가 없었다. 당장 먹는 사는 것부터 허리띠를 졸라 매며 근근이 생활했다. 대파 한 단을 사는 것도 고민하다 내려놓곤 했고 (심지어 이 무렵, 작황으로 인한 대파가격이 급등했다.) 먹고싶은 음식이 아닌 저장성과 가성비가 좋은 음식들 위주로 장을 봤다.
수업은 그 후로 진행되었다가 중단되기를 여러번 반복했고, 나는 마치 5분 대기조 같았다. 천직이라고 믿었던 나의 직업이 나의 미래는 커녕 지금 당장의 생계조차 책임질 수 없음에, 현타가 오는 시간들이었다.
이 전염병이 끝난다한들 내 직업은 안전할까?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상황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유사전염병이 또 발발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점점 가속화되는 기후위기에 내 직업은 유효할까? 지난번처럼 출근에 제약이 걸리는 일은 얼마나 잦아질까?
이제는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해야 함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해 여름 나는 모든 수업들을 정리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상황이다. 나는 이 상황이 가담하지 않고 어떻게 내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나아가 내가 하는 일이 사회와 환경을 이루는 가장 필수 단위인 개인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필요했던 마음가짐은 사회가 규정짓는 OO세대, 특정계급에 나 자신을 대입하지 않는 것.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나만의 신념을 단단하게 다지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고민하며 2020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약 20개월동안 다양한 돈벌이를 시도해보고 있다. 모든 일의 전제조건은 나에게도 사회에도 환경에도 무해할 것.
결과는? 먼저 내 소득은 1년새 10배 이상 불어났고, 개인 시간 또한 충분히 확보됐다. 코로나 이전보다 삶의 질이 무척 좋아졌다. ‘가당하기나 할까?’ 했던 일들이 돈이 되는 경험을 통해, 돈과 업에 대한 시선과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나의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크고 작은 좋은 변화들 – 특히나 무해한 삶의 방식을 노력하는- 을 바라볼 때면 안도하게 된다. 나의 일이 좋은 선례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무해한 돈벌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글에서부터 하나씩 소개해보겠다!)
요가를 수련하고 나누는 일과 더불어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건강한 문화를 만듭니다’라는 모토로 친환경 라이프를 제안하는 웰니스 커뮤니티 를 기획하고 운영합니다.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잔디에 누워 땅의 온기를 수용하며 구름을 관찰하는 일, 신선한 채소와 과일의 촉감을 느끼고 맛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사람과 자연의 연결성을 탐구하고, 사이좋게 공존하기 위한 지속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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