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가 내관코스에 들어갔다. 부모님을 비롯해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철저하게 되돌아보는 장이다. ‘기억을 본다’고 하지만 실은 재구성된 기억 속에서 사실이라 믿고 있었던 장면들을 객관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장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게 한 실제의 것들을 살펴보는 장이기도 하다. 나는 정아가 코스에 들어간 일주일 동안 갓 돌이 지난 딸 여민이를 돌보았다. 여민이가 정아에게 가서 잠을 자는 밤시간을 제외하곤 하루종일 여민이와 함께 있었다. 혼자서 이렇게 길게 여민이를 보는 건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지 긴장이 되었다.
첫 4일을 정신없이 보냈다. 오전에 여민이를 데리고 와 옷을 갈아입히고 커뮤니티의 어린이집인 체리슈에 데려가서 돌보다가, 점심을 먹이고 돌아와 저녁시간까지 보고,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킨 후 정아에게 데려가는 일정이다. 버거웠다. 대부분의 시간을 안고 있느라 팔과 허리가 아프고, 화장실도 안은 채로 가고, 밥도 한 숟가락 편히 먹기가 어려워 늘 배고픈 상태가 이어졌다. 그나마 재원과 흥미가 아침과 도시락을 싸주고, 아카데미생들이 저녁밥을 해주어 밥하는 손이 안들었는데도 그렇다.
4일째가 되자 너무 지쳐버려 방에서 여민이를 내려놓으며,
“여민아, 아빠가 너무 힘들구나. 조금만 누워있을께.”
하고 여민이에게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머릿속으로는 여민이가 당장 자기를 안아달라고 울거라고 생각하면서 반쯤 포기한 상태로 뱉어낸 말이었다. 그런데 왠걸, 여민이는 나를 한 번 보더니 주변 물건들을 가지고 혼자서 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나한테로 기어와서 나를 타고 넘기도 하고, 알 수는 없지만 말을 걸기도 하고, 장난을 걸기도 하는게 아닌가. 마치 나를 위로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혼자서도 잘 노네. 어찌된 일이지??’
어리둥절하던 순간, ‘나는 그동안 여민이를 어떻게 보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는 기색이 있으면 당장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 여민이가 짜증이 나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 그 이면에는 내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 할거란 생각, 여민이는 엄마가 없으면 나만 찾는다는 생각, 너무도 나약해서 늘 지켜봐야한다는 생각 등.
여민이가 짜증날까봐, 다칠까봐, 외로워 울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며칠을 보냈구나. 그런데 여민이는 정말 그런 존재인가.
다시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내가 옆에 늘 따라다니니 나를 찾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잘가고, 자기 의사표시가 확실하다. 자기표현에 금기가 없으니 원하지 않는걸 하면 짜증으로 돌려주는 것이다. 먹고, 움직이는 것도 예상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오히려 자기 속도대로 세상을 알아가려는 것을 내가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마저도 든다. 어디까지 나의 손길이 필요한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구나.
여민이는 전전긍긍하는 아빠가 얼마나 딱하고 불안했을까. 내가 힘들다고 한 발 물러서자 그제서야 여민이도 마음이 놓였는지 자기 흐름대로 놀고 장난치는 느낌이 되었다. 아, 아빠에게 맞춰주느라 고생했다 여민아.
여민이가 눈에 들어오자 나도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진다.
“아빠는 지금 좀 쉬고 싶어.”
“그래도 너가 놀자고 하니 놀고 싶어졌어.”
“이제 목욕하러 갈까?”
“엄마한테 갈 시간이니 그만 놀고 가자.”
내 마음이 슥-하고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내 말을 다 잘 듣는다는 것이 아니다. 여민이는 언제나 그렇듯 자기 의사표현이 확실하다. 오히려 내쪽에서 그런 여민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느낌이다. 여민이를 움직이려고 꾀를 쓰고 싶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내 의사도 확실히 전하고 싶다.
그러고보니 내 의사를 내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듯 싶다. 아이를 잘 돌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눈 앞의 아이를 보는게 아니라 생각 속, 어디선가 보고 들은대로 아이를 돌보려 한다. 아이를 보고 움직이는게 아니라 생각에 아이를 맞추려한다. 생각과 실제가 다르니 끼워맞추려 애쓰게 된다. 살펴보면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도 똑같다. 생각으로 그려둔 나에 실제 나를 맞추려 애쓴다. 그러니 늘 탈이 난다. 내 마음도 안보이니 남의 마음이 보일리 없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목요 공부모임에 참가했다. 모처럼 나를 찬찬히 돌이켜보는 시간이다. 모처럼이라 했지만 실제론 5일 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만큼 생각에 정신이 푹 빠져 지낸 시간이었다.
본심
오늘 공부모임에서는 ‘본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본심(本心)이란?
일본어 표현에 혼네(本音)라는 표현이 있다. 보통 본심으로 번역하지만, 혼네는 자기 생각을 쉬이 드러내는걸 꺼리는 일본사람들의 속내를 표현할 때 쓰인다고 한다. 본심과 속내는 다를 듯 하다. 본심에 대해 궁리하다보니 본심에 대한 정의보다도 본심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마음인가.
본심은 어떤 특정 감정이나 기분 등에 붙는 이름은 아닐테다.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을 듯 싶다. 단지 본심이 아닌 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알아차릴 수 있을테다.
순수하지 못한 마음상태라면 본심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자신을 억누르는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라면 역시나 본심이 아닐 성싶다. 돌이켜보면 그런게 너무 많아서 본심이란걸 느껴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해야한다, 하지 않아야 한다, 이럴 것이다’ 등의 생각에서 나오는 판단과 기분이 일상생활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본심을 궁리하다보니 내가 어찌 살고 있는지 살펴진다. 이렇게 재고, 저렇게 조심하며 애둘러 살고 있지는 않았나.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구나.
스즈카에 온지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몇 년간 했던 공부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이번 방문의 주제였던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쉬이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금씩 갈피는 잡아가고 있다. 생각의 먹구름 너머엔 언제나 밝은 햇살이 있다.
다시금 힌트가 되는 질문을 되새겨본다.
“나는 무엇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실제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20대는 돈벌 궁리로 바빴다. 직장생활하며 주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었으나 실패했다. 대신 돈벌고 싶은 욕구의 바닥에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30대는 친구들과 우동사라는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10년 동안 커뮤니티를 주제로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40대에 들어서 다음 10년을 그리고 있다. 볼음도라는 섬을 오가며 농사짓고, 새로운 관계망 실험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환경으로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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