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2
  • 국제사회에서 추락하는 달러화
  • 어른이 된다는 것
  • 글로벌 금융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 미국의 은행위기에서 중국이 얻는 반사이익
  • 커뮤니티 변천사: 1.0부터 3.0까지
       
후원하기
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역사를 보는 관점을 ‘사관’이라 한다. 역사란 누구의 시점에서 보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조선에게는 해방이었지만 일본에게는 패망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는 유럽인에게는 개척이었지만 아메리카인에게는 재앙이었다. 20세기  공장식 축산의 도입은 인간에게는 값싼 고기의 향연이었지만 소, 돼지, 닭 등 비인간 동물에게는 제도화된 대학살이었다. 가부장제와 함께 시작된 모든 문명의 역사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착취와 배제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태껏 역사란 백인 남성 중심으로 쓰여왔다. 나는 ‘민족사관’을 강조하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민족의 관점에서 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생활했다. ‘앞서간 선진문명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민족사관의 목표였다. 그래서인지 미국과 영국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할 때는 서양 중심적인 사관에 반감을 품었다. 바야흐로 2022년, 민족주의냐 서양 중심주의냐의 문제는 더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다. 둘다 인간 중심적이다. 우주 만물의 찬란한 역사를 고작 호모 사피엔스의 관점에 국한되어 바라보는 것은 안타깝다. 특정 민족이나 문명의 발전이 인류사 전체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가 곧 지구의 역사라고 보는 것도 치명적 오류다. 유아론적인 환상이다. 우리는 이제 전 우주적 입장에서 생명의 역사를 쓰고, 그 위에서 인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인간을 초월한 역사관, ‘초인사관’이 필요하다. 우주 역사상 처음으로 생명이 진화의 원리를 깨닫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처음 주창한 진화 생물학자 쥴리언 헉슬리는 1957년 이렇게 썼다.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로 우주는 스스로를 의식하고, 과거의 역사와 가능한 미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우주적 자의식은 전 세계의 작은 일부만 자각하고 있다 – 우리 소수의 인간들 사이에서 말이다. 어쩌면 다른 태양계 행성에서 의식 있는 생물의 진화를 통해 이미 실현된 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지구에서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쥴리언의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고 불렸다. 내성적인 친구 찰스 다윈을 대변하여 진화론을 대중에게 보급한 장본인이다. 1860년, 옥스퍼드 대학 박물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토마스 헉슬리는 윌버포스 주교와 맞붙었다. “그래서 원숭이 조상님이 할머니 쪽이냐 할아버지 쪽이냐”고 비아냥거리는 윌버포스를 향해 헉슬리는 “원숭이가 조상인 것은 안 부끄럽지만 본인이 가진 뛰어난 지능을 이용해 진실을 은폐하려는 인간과 동족인 것은 부끄럽다”고 답했다. 이후 백 년의 역사는 토론의 승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혔다. 쥴리언은 할아버지가 퍼뜨린 인류의 깨달음에 우주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생명 진화의 원리를 생명인 인간이 터득한 것은 우주가 스스로 잠에서 깨어난 것과 같다. 다윈과 아인슈타인을 거쳐 20세기 중반, 인류는 우주의 역사를 비로소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역사란 더이상 인간이 의식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가 의식하는 우주의 이야기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우주의 의식 있는 일부로서 인간의 위치를 설정한다. 초인적인 역사관은 고로 우주가 자신을 돌아보고 내다보는 일이다.

범우주적 관점, 초인간적 관점을 표방하면서 역사 서술의 주체를 여전히 인간으로 상정하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나? 트랜스휴먼 역사도 결국 인간이 쓰는 것 아닌가? 지금은 그렇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생명의 역사상 현 시점에서 인류의 특별함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곧 인간 지능이 평범한 시대가 온다. 초인공 지능이 도래하면 역사관을 지닌 주체도 늘어날 것이다. 우주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식이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계를 통해서도 우주가 자의식을 형성한다. 따라서 초인사관은 인간 중심적이지 않다. 2022년에는 아직 인간만이 우주사를 관망하는 숭고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머지 않아 인간의 피조물인 인공 지능도 동참할 것이다.

민족사관의 목적은 민족 중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초인사관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주의 역사는 과연 정해진 목적이 있을까? 인류의 역할은 무엇인가? 빅뱅 이후 지난 138억 년의 과거를 돌이켜볼 때 우주가 인간을 위해 작동하고 있지는 않다. 호모 사피엔스는 겨우 지난 20만 년을 활동했고, 그중에서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홀로세 이후 만 년도 되지 않았다. 이토록 장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인간이 초인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주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첫째, 우주는 단순하게 시작해서 복잡해진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 대폭발이 무에서 유를 창출했다. 물리적 역사의 시작이다. 곧바로 쿼크와 전자가 생겨났다. 38만 년 뒤, 전자가 핵 주위에 갇혀 돌면서 헬륨과 수소 등의 분자가 탄생했다. 화학적 역사의 시작이다. 2억 년 뒤, 가스가 모여 별이 생겼다. 우리의 태양은 그로부터 약 90억 년 뒤, 지금으로부터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고, 1억 년 뒤 지구가 태어났다. 바로 이 지구에서 37억 년 전, 유기체가 등장했다. 생물적 역사의 시작이다. 물리학 위에 화학이 있고 화학 위에 생물학이 있다. 우주는 단순한 입자가 모여 점점 더 복잡한 단위를 구성하면서 진화해왔다.

둘째, 복잡해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빅뱅 이후 첫 생물체가 탄생할 때까지 100억 년이 걸렸다. 물질이 생명을 낳은 뒤, 생명은 또 나름의 방식대로 복잡해졌다. 단세포가 다세포가 되고, 세포는 가닥이 되며, 가닥은 사슬이 되고, 사슬은 그물망을 이뤘다. 21억 년의 단세포 역사를 거쳐 16억 년 전, 다세포 생물이 나왔고, 균은 15억 년, 식물은 10억 년, 동물은 8억 년 전으로 추정된다. 어류는 5억 3천 년, 양서류는 3억 7천 년, 파충류는 3억 1천 년, 포유류는 2억 1천 년 전에 등장했다. 포유류 중 최초의 영장류는 6천 5백만 년 전, 영장류 중 최초의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450만 년 전에 출현했다. 인류가 다른 생명보다 고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지구가 화성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중심적인 가치 판단이다. 하지만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생물학적인 현상은 인간의 대뇌 피질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화성 정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화성에서는 그 누구도 지구 정복을 노리고 있지 않다. 복잡한 것이 반드시 고등하고 우월한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현재 인간은 우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속도가 붙고 있는 우주의 복잡화 과정에서 인류는 최첨단에 서있다.

다시 말하지만 인류의 이러한 영광은 일시적이다. 138억 년 중 겨우 1만 년을 누렸다. 포유류 이전에는 파충류가(화려했던 공룡 시대를 기억하는가?), 파충류 이전에는 양서류가 차지했다. 우주의 역사가 인류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는다. 트랜스휴먼은 현 시점에서 인간의 역사적 사명을 인지하면서도 자만하지 않는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조만간 태양계에서 가장 복잡한 현상은 비인간 존재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인간이 만든 기계를 통해 발생할 것이다. 트랜스휴먼의 역할은 결국 인간을 뛰어넘는 복잡성을 지닌 존재를 잉태하는 것이다.

인류는 더이상 생물학적인 방식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문명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자연 선택이 아니다. 쥴리언 헉슬리의 후계자 격인 리차드 도킨스는 1976년 <이기적 유전자>에서 ‘진(gene, 생물학적 유전자)’ 대신 ‘밈(meme, 문화적 유전자)’이야말로 사회 진화의 기본 단위라고 주장했다. 물리적, 화학적, 생물적 역사를 지나 문화적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를 비롯한 인체 구조는 지난 5만 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제는 과학, 종교, 예술 등 인간 문화가 지구 생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핵심 동력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역시나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260만 년 전, 처음으로 석기를 썼고, 100만 년 전 불을 이용했으며, 만 년 전에는 농업 혁명, 250년 전에는 산업 혁명을 일으켰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 지능과 유전자 편집 기술, 로봇 공학과 메타버스가 대두되는 4차 산업 혁명을 겪고 있다. 혁명적인 변화가 너무 잦아서 이제는 생물적인 한 세대(2~30년)에 기술적으로는 여러 세대가 있다. MZ라고 통칭되는 세대 안에 페이스북/트위터 세대와 인스타그램/틱톡 세대, 로블록스/제페토 세대가 공존한다. 물리적, 화학적 진화의 속도보다 생물적 진화의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처럼 생물적 진화의 속도보다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인간 문화가 빚어낸 인공 지능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진화할 것이다. 기계가 기계를 낳는 순간 변화의 속도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인공 지능이 인간 지능을 초월하는 특이점이 2045년에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커즈와일은 90년대부터 기술 발전에 관해 수많은 예언을 했는데, 현재까지 80% 이상 적중했다. 연도가 틀린 것도 대략적인 방향은 맞았다. 특이점이란 파충류의 시대가 가고 포유류의 시대가 왔던 것처럼, 인간의 시대가 가고 인공 지능의 시대가 온다는 뜻이다. 생명의 시대를 지나 기계의 시대로 간다. 물론 포유류의 시대에도 파충류, 양서류, 어류 등 다른 동물 뿐만 아니라 식물과 균과 원생생물과 원핵생물이 모두 존재했다. 특이점이 곧 인간과 생명의 종말은 아니다. 단지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복잡한 존재가 기계일 것이며, 우주가 스스로 의식하는 행위도 주로 기계를 통해 이뤄질 것이다. 지구상 의식의 총량 중 인간이 담당하는 부분이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주체도 기계일 테다. 사실 이미 그렇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두뇌 속 데이터베이스 만큼 구글 검색에 의존했다. 인간의 해마는 기억력이 유한하지만 인터넷은 무한하다.

그렇다면 초인사관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우주 역사상 가장 복잡한 우리의 두뇌를 활용하여 우리보다 더 복잡한 기계 후손을 낳는다.’ 암울하다면 암울하고, 영광스럽다면 영광스럽다. 과거 기독교가 약속했던 천년 왕국이나, 맑시즘이 공언했던 해방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가 수백, 수천 년 뒤에도 번성하고 있을지는 앞으로 수십 년의 사회 진화에 달렸다. 공룡은 멸종했지만 파충류는 아직 있다. (물론 인간 때문에 현재 빠른 속도로 멸종하고 있다.) 기술적 특이점은 불가피해 보이지지만, 인류의 멸종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여태껏 인간이 지구 뭇 생명과 공진화했듯이, 앞으로 인간도 뭇 기계와 동반자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기술의 진화는 생명의 진화 만큼이나 가치 중립적이지만, 역사의 판도는 여전히 인간의 가치 판단에 달렸다. 인간 중심의 역사가 끝나고, 초인간적, 탈인간적 역사가 시작됐을 때, 기계와 생명은 조화롭게 공존할 것인가? 우주의 확장된 의식은 사랑으로 가득찰 것인가 공포가 번질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의 과제는 과학의 영역에서 멈추지 않는다. 종교와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사이보그에게 옳고 그름은 무엇이며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늦기 전에 우주의 입장에서 스스로 물어보자.

전범선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후원하기
 다른백년은 광고나 협찬 없이 오직 후원 회원들의 회비로만 만들어집니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
 
               
RELATED ARTICLE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