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관점을 ‘사관’이라 한다. 역사란 누구의 시점에서 보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조선에게는 해방이었지만 일본에게는 패망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는 유럽인에게는 개척이었지만 아메리카인에게는 재앙이었다. 20세기 공장식 축산의 도입은 인간에게는 값싼 고기의 향연이었지만 소, 돼지, 닭 등 비인간 동물에게는 제도화된 대학살이었다. 가부장제와 함께 시작된 모든 문명의 역사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착취와 배제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태껏 역사란 백인 남성 중심으로 쓰여왔다. 나는 ‘민족사관’을 강조하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민족의 관점에서 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생활했다. ‘앞서간 선진문명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민족사관의 목표였다. 그래서인지 미국과 영국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할 때는 서양 중심적인 사관에 반감을 품었다. 바야흐로 2022년, 민족주의냐 서양 중심주의냐의 문제는 더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다. 둘다 인간 중심적이다. 우주 만물의 찬란한 역사를 고작 호모 사피엔스의 관점에 국한되어 바라보는 것은 안타깝다. 특정 민족이나 문명의 발전이 인류사 전체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가 곧 지구의 역사라고 보는 것도 치명적 오류다. 유아론적인 환상이다. 우리는 이제 전 우주적 입장에서 생명의 역사를 쓰고, 그 위에서 인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인간을 초월한 역사관, ‘초인사관’이 필요하다. 우주 역사상 처음으로 생명이 진화의 원리를 깨닫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처음 주창한 진화 생물학자 쥴리언 헉슬리는 1957년 이렇게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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