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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한국의 대표적 저항시인 김지하.” 언론들은 그의 생애를 한 줄로 요약했다. 보도지침이라도 받은 것처럼 한결같았다. 또 다른 버전이 있었지만,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적(五賊)의 시인 김지하.” 1941년생인 그의 생애 전반부 40년만이 의미 있는 삶으로 규정되었다. 1982년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서를 기초한 이후 생명사상가, 생명시인으로 살아왔던 그의 후반기 생애 40년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김지하는 생명 시인이자 생명사상가다. ‘타는 목마름’의 대구(對句)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명’이다. 나에게 김지하는 감탄사 같은 존재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첩첩산중이었다. 가끔은 불편함이었지만, 자주자주 놀람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말들을 토해냈지만, 어떤 말로도 포착되지 않았다. 지난 5월 8일 그의 부고를 전해 듣고, ‘아아~’ 나도 모르게 소리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찢어진 사람입니다

“나는 찢어진 사람입니다.” 나에게 김지하는 무엇보다 ‘찢어진 사람’이다. 30여년 전 한 강연에서의 자기고백이 비수처럼 나의 가슴에 박혀 있다.

1990년, 한살림선언이 발표된 이듬해 여름, 김지하는 수운회관에서 긴 강연을 한다. 제목은 ‘개벽과 생명운동’. 생활협동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과 구분되는 생명문화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의 큰 틀을 밝히는 시간이었다. 한살림선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생명운동 선언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그는 장대한 개벽적 생명운동의 서사를 ‘찢어진 나’로 시작했다. 그리고 “생명력을 상실하고, 생명이 파괴된 사람”이라며 자신의 속살을 드러낸다. 생명사상의 창시자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생명이 파괴된 사람’이라니. 이어서 이렇게 고백한다. “지난 5년 동안 혹독한 병에 시달리면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산속으로 들어가 중이 되든가, 자살을 하든가 두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는 찢어진 생명이었다. 그렇다. 그의 삶은, 그의 생명사상은 통합적이지 않다. 분열적이다. 파괴적이다. 그는 모순과 딜레마의 생명시인이었다. 그는 전일성의 생명사상가가 아니라, 역설의 생명사상가였다. 그는 고통과 죽음의 생명시인이었다. 이듬해 1991년 봄, ‘죽음의 굿판’에 대한 단호한 부정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개벽통

그의 ‘생명사상’은 ‘생명철학’이 아니다. 그의 생명사상은 형이상학적 질문과 탐구의 결과물이 아니다. 철저하게 체험적이다. 신체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죽음 같은 고통의 체험이었다. 그의 생명사상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생명사상’이었다. 위기의 ‘세계감(世界感)’보다 더욱 뼈아픈 종말의 ‘세계통(世界痛)’이었다. 정동이론가들의 비유대로 신체를 ‘공명(共鳴) 상자’라고 말한다면, 그의 신체는 세계의 고통과 공명하는 ‘고통상자’였다. 그러므로, 6년여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한 소식 민들레 꽃씨와 개가죽나무의 빛나는 생명체험은 (어느 시인이 표현대로)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의 끝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김지하는 스스로 ‘개벽통’(開闢痛)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말 그대로 ‘개벽의 고통’이었다. 산통(産痛), 출산의 고통이었다.

그렇다. 개벽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고통과 포한의 결과물이다. 물론 고통의 질감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김지하의 고통감은 특별한 것일 수도 있고,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통이 없이 개벽도 없다는 것이다. 상상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도 없고, 또 다른 세계를 탄생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서사이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존재”이며, 그리하여 그 “고통을 서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지하가 말하는 ‘인간의 사회적 성화’는 초월적이지 않다. 신체적이다. 세속적이다. 생명사상가 김지하를 만나기 위해서는 생명으로 추상화되기 전 신체와 의식과 그것들 사이의 물리적, 물질적 상호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오랜 독방 감옥 안에서 기어이 살아남았던 한 인간, 한 생명체의 고투와 갈등과 분열과 거듭남과 자기-서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거룩한 육체론’, ‘영성의 그물로서의 신체’를 관심해야 한다. 그는 사상가 이전에 수행자였다. 나름의 수련체계와 수련법을 창안했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치유의 생명사상’ 이전에 ‘깨달음의 생명사상’이다. 깨달음이라는 말 그대로 깨어지고서야, 깨버리고서야 다다를 인간 생명의 또 다른 경지 말이다. 생명체는 고통을 피하도록 습관화되어 있다. 안전과 안락과 안심을 향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생명의 지혜다. 그러나 안락과 치유의 약속은 흔히 덫이 된다. 나에게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웰빙의 사상이 아니라, 전투적인 깨달음의 사상이다.

 

종말이 개벽이다

“나는 긴 감옥의 추운 독방에서 바로 이것, 종말이 다름 아닌 개벽이며 그 개벽은 곧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모두 다 제 나름의 모습으로 달리 비치는 만물해방의 날이 열림이고 세계가 세계 스스로를 인식하는 대화엄의 날이 열림임을 알았다. 나는 화엄세계를 개벽하는 종말 앞에서의 선(禪)적 결단이 바로 동학의 제1원리인 ‘모심(侍)’임을 알았다.”(『아우라지 미학』)

“절망은 새날의 시작이다.” 그의 통절한 깨달음이다. 종말이 개벽이다. 역설이다. ‘개벽하는 종말’이 경구가 되어 자기-보존의 습에 경종을 울린다.

김지하는 한 발 더 나간다. 명개(冥開), 지옥문이 열려야 천국문이 열린다. 그의 마지막 10년을 천착한 생명미학은 지옥문을 여는 ‘명개의 미학’이었다. ‘흰 그늘의 미학’은 명개의 미학으로 더욱 광대해졌다. 더욱 심오해졌다. 김지하는 돌아가기 전, 이미 지옥문에 들어선 셈이다. 그것은 “역사 속에 감추어진 ‘冥(명)’”이었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커먼 선방(禪房)’ 같은 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시커먼 선방에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김지하의 모심은 ‘허(虛)를 모심’, ‘공(空)을 모심’이다. 도덕적 규범은 물론이거니와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도 가차가 없었다. 백척간두, “감히 허공을 딛는 것이 바로 모심이다.” 그에게 생명의 본성은 저항이며, 생명의 반대말은 약동하는 생명을 격자 안에 잘라 맞춘 ‘이념’이었다.

그의 깨달음은 명료해진다. “풀 끝 흰 이슬에서만 아니라, 시드는 춘란 잎새에서도”, “파릇파릇한 상치싹에서만 아닌 흩어진 겹동백 저 지저분한 죽음에서도”(애린45) 새 생명은 태동한다. 아니다. 오히려 ‘시드는 잎새’에서만, ‘지저분한 죽음’ 속에서만 생명은 ‘다시개벽’ 할 수 있다. 생명의 역설이다.

그의 생명사상의 ‘상생(相生)의 생명사상’이 아니었다. 그의 전환은 ‘상극(相剋)의 시대’에서 ‘상생의 시대’로의 전환이 아니었다. 상생/상극, 역설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었다. 김지하는 일찍이 1999년 어느 글에서 ‘역설의 영성’과 ‘역설의 생활화’를 강조하며, “21세기는 역설의 시대”라고 선언한다.

 

신명

”카오스모스만으로는 절대로 아름다운 문화와 아름다운 미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지 못합니다.“(천지공심)

그러나 ‘혼돈적 질서의 역설’에 대한 통찰만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태동시킬 수 없다. 김지하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태동하는 생명의 자기조직화, 그 배후를 묻는다. 미적 성취의 근원을 탐색한다. 감옥에서, 혹은 수행 중에, 혹은 일상에서 아마도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체험했을 것이다.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감응(感應)을 경험했을 것이다. 김지하는 단언한다. ”보이지 않는 질서의 안에 움직이는 어떤 신령한 생성이 있어야 한다.“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다. 어쩌면 정동(affect) 이론의 그것일 수도 있다.

요컨대, 김지하의 깨달음은 인식론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릍테면, 그의 생명사상은 에너지적이다. 신령한 힘, 신명의 힘에 대한 체험적 확신이 있다. 세포 하나하나에도 신명이 있다. 무기물 안에서 신명이 있다. 동학의 개념을 빌려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를 말하기도 하고, 천부경을 빌려 ‘묘연(妙衍)’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최근 사상계의 유행으로 말하자면, 신유물론의 ‘생동하는 물질’에 대한 체험적 통찰일 수도 있다.

김지하가 들뢰즈에 감동해 눈물을 흘린다. ”역사로부터 시작되고 역사로 돌아가지만 역사가 아니고 역사에 반대되는 민중적 삶의 내면성의 생성으로서의 새로운 시간“을 모신다. 생명의 담지자인 민중의 시간, 신명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다시, 김지하의 모심은 허공을 모심이다. 그의 모심은 미결정의 생성을 모심이다. 역사적 종착점이나 이념적 진리가 아니다. 텅 비어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무궁한 잠재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혁명으로, 혹은 촛불로, 어느 날 문득 만물해방으로 ‘다시개벽’ 한다.

 

남조선 뱃노래

나에게 김지하의 ‘우주생명학’은 ‘환상’의 생명사상이다. 환상은 망상과 구분되어야 한다. 수많은 환상 문학들만이 아니다. 토마스베리 신부의 『지구의 꿈』이나 『우주 이야기』 뿐만이 아니다. 최근에 접하게 된 목사 이신(李信)(1927-1981)의 ‘환상의 신학’이 생각난다. 영화로 만난 SF소설 ‘듄’이라는 또 다른 우주 이야기의 환상적 장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온 세상을 살릴 계책이 조선 남쪽에 있다. ‘살아남은 남쪽 사람들’에게 있다. 그리고, 나에게 그 남쪽은 정읍이었다. 그 사람들은 정읍사람들이었다. ”정읍이 우주의 배꼽이다.“ 20대의 나를 정읍으로 이끌었던 것은 김지하의 환상적 다시개벽 서사였다. 생명운동은 철학과 방법론이기에 앞서, 민중적이면서도 영성적인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서사였다.

김지하는 신령한, 큰 이야기꾼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담시 오적(五賊)은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이다. 40여 년 전 1984년에 출간된 ‘대설(大說) 남(南)’을 통해 김지하는 우주생명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를 교직해 말 새로운 차원의 큰 이야기를 지어낸다. ‘만국활계남조선과 ’우주의 배꼽‘과 당대의 사회적 현실과 저자거리 민중들의 삶이 어우러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2022년 오늘 우리는 “변하지 않고서는 도리 없는 땅끝”에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 삶의 의미, 인간과 사회의 존재 이유, 그리고 진선미의 토대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변하는 것은 세상만이 아니다. 세상 안의 ’나‘의 눈동자도, 심장도, 손발도, 신체에 부착된 기계들도 변화하고 있다. 진화하고 있다. 기후변화가, 팬데믹이, 인공지능이 돌이킬 수 없는 새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제 각각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김지하의 생명사상도 하나의 사상이고, 생명운동도 하나의 사회적 서사라면 이제 새로운 서사는 우리의 몫이다. 사실은 다양한 모습으로 이미 진행형이다.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또 다른 이야기들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 이번에는 이야기임을 알고 이야기를 함께 만든다. 자각적 이야기 만들기이다. 감응적 서사 함께 만들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도저한 신령함을 되살린다.

그것은 미학적 형식일 뿐 아니라, 사회운동의 형식이 된다. 김지하는 이를 생명문화운동이라고 말했다. 이론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우리시대의 사회운동은 미학적이며 윤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40년 전 만국활계남조선의 예감적 자기-계시는 남조선뱃노래로 문화(文化)되었다. 오늘날은 어떤 무늬의 이야기가 다시 태어날까.

몇 주 전 조선 남쪽 곡성의 한 청년으로부터 ‘배 타고 베트남 가기’ 10년 프로젝트를 함께 들었다. 나에겐 2022년 버전의 남조선뱃노래로 들렸다. 6월 어느 날 갑오년 동학혁명의 진원지 동진강에 배를 띄우자고 한다. 그리고 엊그제, 순창에서 벗들과 밤을 지새우며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곡성의 청년들과 함께, 전라북도의 지역사람들과 함께 새만금에 배를 띄우자고 함께 약속했다. 그렇다. 신령하고 환상적인 새로운 차원의 거대담론을 생산하는 MZ세대들을 기대한다. 인생 2모작으로 또 다른 해방 서사를 지어내는 586세대를 소망한다.

40여년 전 “변하지 않고서는 도리 없는 땅끝” 해남(海南)에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애린 연작 마지막 50번째 시를, 다시, 읽는다. 또 한 척의 배를 띄운다. 만국활계남조선, 남조선뱃노래 이야기가, 자각적으로 다시 시작된다. 애린으로부터.

 

땅끝에서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그 소, 애린 50. 『애린2』 전문.)

 

사진 출처 : 미주중앙일보

주요섭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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