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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서 ‘아시아학’을 전공했고, 대학원도 같은 전공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처음 뵙는 분에게 자기 소개를 하면 난감할 때가 있다. “명묵씨는 전공이 뭐라고 하셨죠?” “아 네, 저는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생소한 학부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하거나 호기심에 묻고는 한다. “그… 아시아… 거기서는 무엇을 가르치나요?” 듣는 쪽은 대부분 기억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성심성의껏 대답한다.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는 세부 전공으로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서아시아 전공이 있는데, 저는 서아시아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공 소개를 들은 분들 가운데서 나중에 “‘동아시아’ 언어문명학부 다니신다고 하셨죠?”라고 되묻는 경우도 왕왕 있다.

‘아시아언어문명학부’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게 어려운 이유는, 이름 자체가 길고 커다랗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라는 개념이 크게 와닿지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무엇이 아시아라고 정의하는 일은 간편하다. 우랄 산맥과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로 유럽과 구분되고, 수에즈 지협을 경계로 아프리카와 구분된다. 동쪽으로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 쿠릴 열도를 잇는 섬을 따라서 대양주와 아메리카와 구분된다. 터키와 러시아부터 이란과 인도를 거쳐 태국, 중국, 일본에 이르는 거대한 대륙이 아시아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정의를 넘어서, 정말로 ‘아시아’라는 지리적 단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어려워진다. 핵심적인 이유는 아시아라는 단위가 너무 거대해서 문화적으로 하나로 묶기 힘들 정도의 다양성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대륙과 비교했을 때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북미, 혹은 멕시코를 뺀 앵글로아메리카는 영국계 이주민들이 건설한 정착민 국가들인 미국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적 정체성이 확실히 있다. 남미, 혹은 라틴아메리카는 라틴계 이주민과 토착민의 문화적 유산을 흡수한 자신들만의 정체성이 있다. 아프리카는 훨씬 지리적으로 광대한 단위지만, 적어도 사하라 아프리카 이남을 관통하는 공통의 ‘아프리카 정체성’이 있다는 말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나는 이태원에서 나이지리아인과 함께 아프리카 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출신 국가가 명확하게 달랐음에도 그들 사이에는 공유되는 정체성이 있는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명확한 지리적 경계를 지을 수 없어서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유럽은 역설적으로 지역적 정체성이 가장 확실한 단위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그리스-로마 문명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전통을 공유하는 세계를 일반적으로 유럽이라고 한다. 비록 흔들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오늘날까지 가장 성공적인 지역 통합 프로젝트인 유럽 연합만 보더라도 유럽이라는 개념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이런 단위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지리적 경계 내에서 문화적인 공통점을 추출해 내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모형과 맞지 않는 예외들이 언제나 존재하지만 ‘대체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해주는 어떤 이미지는 존재한다. 발칸의 무슬림 국가인 알바니아는 일반적인 유럽의 이미지에 맞지 않고 터키가 유럽인지 아닌지는 훨씬 논쟁적인 일이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은 어떠한 ‘유럽성’을 체현하고 있는 국가들로 인식된다..

하지만 아시아는 전혀 다르다. ‘아시아성’을 체현하고 있는 지배적인 문화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게 잡아도 중동-이슬람 문화권, 러시아-유라시아 문화권, 인도 문화권, 동남아시아 문화권, 중화 문화권으로 5개가 자리하고 있고, 하나하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와 규모를 자랑한다. 독자적 전통과 강력하고 위계적인 국가 조직을 자랑하는 중국이 아시아를 대표하는가? 그렇다면 세계 최대의 민주 국가임을 내세우는 인도는 아시아를 대표할 수 없을까? 신을 통치의 근원으로 내세우는 게 진정으로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란은 아시아의 예외 사례일까? 세 나라는 어쩌면 위대한 문명이 발원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나라 중 한쪽이 유럽에서 그리스나 로마가 차지하는 위상을 주장한다면 다른 쪽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역정을 낼 것은 자명하다. 어쩌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개념은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하는 개념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나오는 주장이, 아시아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쩌면 아시아라는 공간은, ‘무엇이다’라는 명제가 아니라, ‘무엇이 아니다’라는 부정문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라는 말의 어원을 생각해보면 이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원래 아시아는 그리스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혹은 근동 지역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가면서 아시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발칸과 아나톨리아를 나누는 보스포러스를 경계로, 동쪽으로 뻗어 있는 모든 땅이 전부 ‘아시아’였다. 아시아는 그런 의미에서 유럽이 아닌 땅, ‘우리’라고 묶을 수 없는 ‘다른 이들’이 사는 땅을 뜻하게 되었다.

물론 유럽이 아닌 땅은 아프리카도 있다. 하지만 지중해를 경계로 지리적으로 명확하게 나뉘는 아프리카와 달리, 아시아는 유럽과 경계를 확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발칸과 아나톨리아는 보스포러스 해협과 에게해로 경계를 나눈다고 치더라도, 거대한 동유럽 평원에서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로 뻗어 나가는 지역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사라진다. 현대에 와서는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랄 산맥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삼았지만, 실제 기차를 타고 우랄 산맥을 넘어보면 경계를 넘는다는 어떠한 인상도 받을 수 없다.

유럽은 문화적으로 아시아와 구분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따지고 보면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유럽 문화를 그리스, 로마를 시원으로 삼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라시아 서쪽 지역의 문화라고 대략적으로나마 정의해보자. 이렇게 정의하면 유럽은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뻗어 나간다(실제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대유럽주의자를 자처한 파시스트들의 구호기도 했다). 러시아는 근대에 팽창했으니 예외라고 한다면, 캅카스 산맥 남쪽의 기독교 국가들인 그루지야나 아르메니아는 어떤가? 이 나라들은 명확한 유럽의 경계 안인 알바니아보다 ‘더 유럽적’인가? 아니면 아시아 서쪽의 기독교 국가들인가?

유럽의 정의를 훨씬 협소하게 잡는 방법도 있다. 유럽 연합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유럽은 단순한 지리적, 문화적 개념이 아니라 민주주의, 복지국가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개념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런 기준은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앞의 주장들보다도 더욱 말이 안 된다. 이 기준이라면 유라시아 동쪽 끝의 일본도 유럽이 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본의 아니게 핵심을 짚고 있기는 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것은 정말 자연지리나 문화지리적인 명확한 경계가 아니라, 자신과 타자를 나누는 인식 상의 경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발전시켜 나가고, 비서구 사회에 대한 종합적인 우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아시아’는 점차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무언가를 뜻하는, ‘문명적인 유럽’과는 대별되는 존재를 뜻하게 되었다. 이런 기준이라면 러시아와 터키는 명백한 아시아다. 러시아인과 튀르크인은 서유럽과는 다른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서유럽의 지식인들은 동유럽도 사실상 아시아로 취급했다. 가장 서쪽의 영국은 독일과 대립할 때 독일을 두고 ‘훈족’이라는 멸칭을 썼는데, 역시 독일인들이 야만적인 아시아인이라는 의미에서 쓴 말이었다. 독일인들은 반대로 동쪽의 슬라브인들을 아시아인 취급했다. 대륙으로서 아시아는 문명적이고 우월한 서구가 아닌 것, 즉 부정을 뜻하게 되면서 정착하게 된 개념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서구의 지배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아시아를 탈출하고 유럽에 합류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도 피어났다. 지금의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은 동쪽의 이웃을 배제하고자 하는 서유럽인과 유럽이라는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아시아인들 사이의 끊임 없는 협상의 결과물이다. 서구화 개혁을 통해서 유럽에 합류하고 싶었던 표트르 대제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즈음에 형성되어 있던 아시아와의 경계를 훨씬 동쪽의 우랄 산맥으로 잡자고 유럽 지리학계를 설득했다. 물론 서쪽의 돈강이나 동쪽의 우랄 산맥이나 대륙을 나누는 경계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심상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1923년에 오스만 제국을 폐하고 터키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도 유럽이라고 주장했다. 아타튀르크와 그의 후임자들은 오스만의 아시아적 유산을 묻어버리고 새로운, 계명된 유럽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에 속하고 싶다는 터키인들의 열망은 대단해서, 후일 ‘유럽의 자격’을 상징하는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터키의 숙원 사업이 되었을 정도였다. 일본은 아예 대놓고 유럽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탈아입구’라는 표어 하에서 수십 년을 노력했다. 탈아입구라는 표어 또한 유럽, 혹은 아시아의 개념이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성적인 것임을 웅변한다. 그 어느 나라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일본 또한,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대륙 반대편의 ‘유럽’이 될 수 있었다. 유럽이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후진적이고 미개한 아시아를 탈출한다는 의미였다.

아시아라는 개념이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 혹은 서구가 아닌 문명을 통칭하는 의미일 따름이면 아시아라는 말을 쓸 이유가 있을까? 그런 차원의 ‘아시아 무용론’도 분명 존재한다. 내용이 없는 아시아라는 개념을 쓰기보다는, 지역적,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훨씬 실제적인 단위로 나눠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역 지리학(Regional geography)에서는 사실상 이런 분류를 더 선호한다. 유라시아를 몇 가지 문화권으로 나눈다면, 서유럽, 동유럽, 러시아와 그 인근 지역을 뜻하는 ‘유라시아’,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한자 문화권)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별 지역 안의 국가들은 서로 동질감을 훨씬 더 많이 느낀다. 예컨대 터키, 이란, 이집트는 이슬람 문명의 핵심 국가라는 데서 중국이나 인도보다 서로 더 많은 동질감을 느낀다.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은 종교가 다르지만 소비에트 문화권이라는 데서 큰 동질감을 느낀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특성을 모두 갖춘 경계 지대다. 동남아시아는 하나의 지역이기도 하지만 그 내부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와 해양부 동남아시아로 나뉜다.

잠시 ‘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몇 가지 지리적 지식을 정리해보자. 첫째, 대륙으로서 지리적 실체가 있는 단위는 유럽이나 아시아가 아니라 그 둘을 통합한 ‘유라시아’다. 둘째, 유라시아 내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아시아는 유럽이라는 자아 정체성의 거울쌍이자 ‘비유럽’의 상징으로서 심상적으로 구성되는 단위다. 셋째, 유럽과 아시아라는 개념 대신에, 문화적 공통점과 사람들의 소속감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지역 지리학의 문화권(cultural area) 구분이 기본적으로 유용하다. 공통점을 통해 특정 공간을 하나의 지역으로 묶고, 차이점을 변별하여 지역 간의 경계를 긋는 것은 공간과 지리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따라 달려 있는 문제다. 그래서 특정 지역이나 국가가 어떤 문화권에 속하는지를 정의하는 것은 어떤 지리적 지식을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서 유동적이다. 이런 문제는 경계 지역일수록 더 첨예하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이자 동북아시아다. 아프가니스탄은 남아시아이자 서아시아이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의 핵심 국가지만 이슬람 세계의 핵심 국가이기도 하다.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는 유럽이기도 하고 중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아시아는 무엇인가?’ 정말 유럽이 타자를 규정하는,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의 집합에 불과한가? 아시아 지역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시아는 이것이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 아시아처럼 거대한 다양성을 품고 있는 공간에서 의미 있는 공통점을 추출하고 규명하기 극히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아제르바이잔과 베트남, 중국과 카타르, 말레이시아와 네팔을 묶을 수 있는 ‘아시아성’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시아의 밑바탕이 되는 공간, 유라시아를 살펴보아야 한다. 정확히는 유라시아라는 공간 위에서 어떤 역사가 펼쳐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앞에서 열거한 문화권들이 자리 잡았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지리 공간 위에서 역사의 전개를 좇다보면, 아시아란 무엇인지, 그리고 아시아의 부상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2편에 계속)

사진 출처 : Harvard Business Review

임명묵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대학원생.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하고 있다. 서아시아 '본토'보다는 러시아 문명과 서아시아 문명의 접경 지대에 더 관심이 많다. 유라시아의 근대화와 냉전 정치가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과학기술, 문명사, 대중문화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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