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근대, 혹은 근대성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는 것은 우선 제쳐두어야만 한다. 앞서 설명하였듯 ‘이것도 근대적이고 저것도 근대적’이라는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를 알기 위해서 그나마 해볼 만한 시도는 ‘그래도 이것 만큼은 근대적이다’라고 그나마 최소한도로 합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마저도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합의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개념의 수렁에서 잠시 빠져나오고,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니 말이다.
대체로 근대에 관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는 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근대가 과거와는 구분되고 단절적인 새로운 시대를 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근대가 단절이라고 해서 이전 세계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점진적이었으며, 새로운 것은 옛것에 뿌리를 두고 발생한 것이었다(이 주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다루어볼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변동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과거의 시대와 달리, 무언가 전에 없던 것들이 자꾸 새로 생겨나고, 변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과거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역사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감각은 ‘근대’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관점은 ‘서구의 부상’이다. 물론 서구의 부상을 평가하는 방식은 수없이 많다. 많은 학자들은 문명의 시작부터 서구는 단 한 번도 우위를 잃지 않았으며, 그 우위를 바탕으로 근대를 열었다고 주장했다. 주로 ‘캘리포니아 학파’라고 불린 다른 학자들은 서구의 우위가 1800년대까지는 가시적이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어쨌든 두 진영, 혹은 딱히 진영에 속하지 않은 논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19세기부터 서구가 다른 문명권을 압도하는 지구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것이고, 16세기와 17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그러한 힘을 얻을 수 있는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근대에 관하여 가장 일반적인 역사 서술은 ‘16세기부터 과거와 단절하는 빠른 변화를 겪은 서유럽이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여 나머지 문명권을 압도하는 힘을 얻게 되는 이야기’를 골자로 한다(물론 이 일반적 문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해석의 문제에서 수많은 학파들이 갈라진다). 그렇다면 서유럽은 어떻게 나머지 세계를 압도했고, 그들이 열어젖힌 새로운 시대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여기서는 근대에 대한 이 같은 일반론을 먼저 개괄한 뒤, 그 뒤에 일반론이 갖는 설명력과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몽골 제국이 무너지고 그 후계 제국들이 생겨나고 있을 무렵에,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서유럽이 유라시아의 나머지 지역을 모두 발아래 둘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이 힘들었던 것은 서유럽이 다른 지역보다 특출나게 못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유럽에는 물론 오스만이나 명, 무굴과 같은 거대 제국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플이나 항주 같은 학문과 기술의 중심지도 없었다. 서유럽은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유라시아의 국제 무역망에서도 지리적으로 가장 변방에 있었다. 이는 유라시아 각지의 특산물을 거래하는 장거리 무역의 거대한 부에 접근하기도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유럽이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들이 깨어나고 있던 500여년 전에 적어도 ‘가장 잘 나가고 있던 지역’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서유럽이 그 자체로 특별히 후진적이거나 취약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서유럽이 여러 불리한 조건이 있긴 했지만, 유라시아 문명으로서 다른 지역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더욱 많았고, 다른 지역이 없는 장점도 분명 갖고 있었다. 서유럽은 인근 동유럽이나 중동에 비하면 상당한 인구를 갖고 있던 유라시아의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의 문명 수준은 전반적으로 퇴보했지만,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유럽의 기후가 온난해지고 신형 쟁기와 같은 신기술이 보급되면서 추세는 역전됐다. 알프스 이북 지역의 드넓은 삼림이 농부들에 의해 개간되고, 마을이 생기면서 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의 참상에서 점차 회복하고 있었다. 알프스를 기준으로 남쪽의 지중해 세계와 북쪽의 발트해, 북해 세계를 잇는 대륙 규모의 무역이 탄생했고, 몇몇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와 수준 높은 지적 활동이 다시 등장했다. 설령 당대 유럽이 당 제국이나 압바스 칼리프가 지배하던 유라시아의 더욱 거대하고 장엄한 제국에 비할 바는 못 되었더라도, 유라시아 네트워크 속에서 발전하던 전반적 추세는 유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유럽의 주요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지리적 고립성 또한 시대와 관점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서유럽이 유라시아 무역망의 변두리에 있어 그 혜택에서 어느 정도 소외된 것은 물론 맞았다. 게다가, 서유럽은 유라시아 스텝에 접하고 있지 않았기에 유라시아에 등장한 거대 제국을 형성한 정치적 응집력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유라시아 동쪽에서 지도를 큼직하게 채우고 있는 대제국들은 모두 정주민과 유목민의 치열한 항쟁 과정에서 등장한 산물이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에 극단적인 정치적 파편화가 뒤따랐고, 소규모 지역들 간의 무질서한 항쟁이 수 세기에 걸쳐서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스텝과의 이격은 파괴적인 초원 유목민과의 경쟁에서 거의 자유롭다시피 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유럽이 이민족으로부터 늘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과거 로마 제국부터가, 스텝 지역에서 일어난 인구 이동의 연쇄에 의해 몰락했다. 하지만 제국을 멸망시킨 그 야만인들이 알프스 이북에 정착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 서유럽 문명 사회는 이후 남쪽 북아프리카 건조 지대에서 건너온 무슬림들과 북쪽의 바다를 통해 침략한 바이킹들에 의해 위협받았으나, 그들이 서유럽 전체를 장악할 수는 없었다. 실제 이베리아의 무슬림 왕국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지 못했고, 바이킹들은 유럽 사회에 몇몇 중요한 흔적을 남기고 그대로 동화되었다. 암흑기가 수습되고 중세 유럽의 발전이 계속되었을 때, 서유럽은 유목민과의 소모적인 전쟁을 통한 인력과 자원의 파괴를 비껴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중세 유라시아 속에서 서유럽의 지리적 특성을 정의하자면 ‘적절한 연결과 적절한 고립’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유럽은 유라시아 네트워크 속에서, 특히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유라시아의 다른 문명에서 축적된 기술과 지식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이 그 네트워크에 수반되는 유목민의 침략과 파괴로 많은 고통을 겪은 것과 달리, 적어도 서유럽은 특정 시점 이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침략을 격퇴하고자 분투한 서유럽인들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지리적으로 고립된 점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근거가 많았다. 예컨대 역시나 분투했을 것이 틀림 없는 동유럽이나 중동의 여러 정치체들은 튀르크와 몽골과 같은 유라시아 유목민과의 계속된 투쟁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유럽은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바로 그 덕분에 얻은 이익도 막대했다.
서유럽의 부상에 관한 흔한 질문인, “왜 가장 불리해보이던 서유럽이 부상했는가?”는 그래서 부적절한 면이 있다. 서유럽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은 애초에 “어떻게 한 지역이 다른 지역을 모두 압도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는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유럽이 부상하기 전까지는, 몽골을 제외하고서는 그 누구도 유라시아 대부분에 걸친 지배력을 확보한 적이 없었다. 그 몽골도 1세기가 안 되는 짧은 시기만 안정된 지배력을 유지했을 따름이다. 몽골의 후계 국가들이 여럿 등장했지만, 그 누구도 과거 몽골이 했던 것처럼 대륙 전체에 걸친 패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오스만은 사파비나 러시아와 싸워야 했고, 청은 러시아를 의식했고, 무굴도 사파비나 마라타 같은 경쟁 세력을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서유럽은 비록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격렬한 경쟁을 하긴 하였으나, 어느새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대륙, 아니 세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지리적 광대함과 속도, 그 힘의 압도적 수준 자체가 인류 역사에서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고, 우리는 그런 시대를 ‘근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특정 시점이 되었을 때 인류 역사가 그런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 것일까?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여러 지역 중 하나’에 불과했던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명적 변화를 체감한 사람이자 그 변화를 가장 주도적으로 이끈 장본인인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이 일찍이 답을 내린 바가 있다. 베이컨은 그의 저서 ‘신기관’에서 ‘옛 조상들은 몰랐던 세 가지 발명품’의 힘과 파급효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그 발명품들이 상징하는 바가 결국 유럽의 경로를 이웃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베이컨에 따르면 그 셋은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었다. 이 세 발명품으로 상징되는 변화, 즉 군사적 변화, 경제적 변화, 사상적 변화는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며 질주해나갔다. 이 폭발적인 양의 되먹임 고리야말로 서유럽이 근대성을 탄생시킨 비결이었다.
1. 화약과 세금 : 근대 국가의 탄생
나침반이나 인쇄술도 그랬지만, 화약은 유럽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화약은 몽골이 펼쳐 놓은 네트워크 전역에서 널리 활용되었으며, 후에는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처럼 몽골과 직접적 연이 미약한 곳에도 전파되었다. 오히려 유럽인들은 대규모의 화약 보병을 운용하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감내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약을 가장 애정하면서 그것을 열렬히 발전시킨 사람들은 결국 페르시아인이나 오스만인, 혹은 중국인이 아닌 유럽인들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훗날 머나먼 중국에서조차 유럽인들을 통해 들여온 신형 대포를 ‘프랑크인들의 대포’라는 뜻의 ‘불랑기포’로 불렀던 것은 다른 문화권도 확연히 유럽산 화포의 우위를 인정했다는 좋은 증거다.
몽골 후계 제국들이 화포의 유용성을 알았음에도 그것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 국가를 위협하는 가장 주된 전장은 광활한 스텝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유목민 전사들을 제압하는 데 화포가 유용하긴 했지만, 사파비나 무굴이 보여주었듯 전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기병들의 몫이었다. 청 또한 준가르 정벌 시에 화포에 의지한 바는 생각만큼 결정적이진 않았다. 화포는 많은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포보다 중요한 것은 대군을 동원할 수 있던 정치적 카리스마와 중앙집권적인 제도였다. 따라서 이 제국들은 구태여 화포에 강하게 의존하지 않고도 정치적 통일과 안정을 구가해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화포의 발전도 유럽의 지리가 규정하는 전장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서유럽은 그런 스텝 지역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대신 바다에 넓게 면해 있고 내륙에는 삼림과 강, 구릉 등이 계속되는 복잡한 지형이 펼쳐져 있었다. 유럽의 전장에서 성과 요새, 이들을 둘러싼 공성전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벽을 뚫을 수 있는 잠재력을 본 유럽인들은 유라시아 대륙 정반대편에서 등장한 이 무기를 신속하게 채택하여 상대편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요새를 쌓는 이들도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대포의 등장 이후 축성 기술자들은 포탄 공격에도 버틸 수 있도록 벽의 높이를 낮추고, 대신 요새에서도 다양한 방면에서 포탄을 발사할 수 있도록 별 모양의 윤곽을 갖춘 새로운 요새를 선보였다. 이탈리아식 요새(Trace Italienne)로도 알려진 이 같은 성형 요새로 인해 방어자 측이 다시금 주도권을 잡았다. 이처럼 유럽이 화포 발전을 선도한 것은, 그들 자신이 전쟁에서 성능 좋은 화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도 화포의 확산은 유라시아 동편처럼 중세의 분열을 극복해나가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렸다. 화포가 도래하기 수 세기 전만 해도, 유럽은 로마 제국 이후 펼쳐진 분열상을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국과 왕국은 응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여러 도시국가나 공국들로 쪼개져 끝없는 이합집산과 내분을 벌이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나 중국 또한 이 시기 분열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분열을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나 중국에서 종종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등장해 지역 대부분을 통일하고 번영의 기틀을 제공한 것과 달리, 유럽의 분열상은 더 심했고 오래 갔다. 이는 지역 간 통행이 어렵고 스텝과 맞닿아 있지 않은 유럽의 지리적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뿌리 깊은 유럽의 분열은 몽골 제국이 무너지고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해서 인구의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무렵부터 반전의 기미를 보였다. 이런 변화는 화포의 유입과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오래 이어진 전쟁과 전염병은 유럽 내 엘리트층의 숫자를 확연히 줄였으며, 주요한 민족적, 문화적 단층선에서 지속된 갈등은 통일의 기틀을 제공할 정치적 응집력을 형성했다. 이 응집력이 유럽 대륙을 통일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봉건적 분열을 초월하여 종족성, 왕조에 대한 충성 등 더 넓은 기반을 가진 국가를 만들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이미 15세기가 되었을 때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질 유럽 국민 국가들의 기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프랑스 영토를 둘러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갈등은 백년전쟁으로 이어져 근대 영국과 프랑스를 형성했다. 남쪽의 무슬림에 맞서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기독교인들도 여러 정치체를 형성했고, 이 역사는 오늘날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만들었다. 탁 트인 동유럽의 경우는 제국의 영향이 서쪽보다 더 강했으나 유사한 경로를 걸었다. 러시아인과의 투쟁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을, 폴란드와의 투쟁은 독일 동쪽에서 프로이센을 만들었다. 발칸에서 이어진 오스만의 북상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기독교계 제민족을 통합한 제국을 이끄는 구심점을 형성하게끔 했다.
화포가 온전히 이런 정치적 통일의 연쇄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백년전쟁만 하더라도 영국이 수행한 가장 인상적인 전투인 아쟁쿠르 전투의 승리를 이끈 주역은 궁병이었다. 로마나 그 이전의 마케도니아 사례에서 보이듯, 화포가 없이도 유럽인들은 제국, 혹은 영토 국가를 건설해냈다. 15세기는 어쩌면 그런 주기가 다시 한 번 찾아온 시기에 불과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화포가 이 과정을 가속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치 오스만 제국이나 청 제국이 요새를 파괴하고 상대방 기병대를 분쇄하면서 그들의 천하를 빠르게 통일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같은 근세 유럽의 강국들은 유라시아 동편의 국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럽의 지정학적 상황은, 적어도 17세기부터 화포의 의미를 그 이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유럽이 유라시아 동편의 국가들과 달리 일정한 수준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주요한 영토 국가들이 통일을 이루면서, 마치 중국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지속적인 국가 간 경쟁이 펼쳐진 것이다. 이 국가들은 상업적 이익, 종교적 명분, 군주의 야심, 종족적 요구 등 각양각색의 이유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상대편을 제압할 전쟁을 이어갔다. 이런 연속적인 전쟁은 각국으로 하여금 군사적, 재정적, 정치적 혁신에 대한 끊임없는 압박을 제공했다. 유럽의 국제질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국가는 전술적 이점을 지닌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해야 했다. 전술적 이점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군사적 혁신이었고,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한 돈을 가져다주는 것이 재정적 혁신이었으며, 더 많은 돈을 위한 재정에 필요한 더 넓은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정치적 혁신이었다.
화약 혁명으로 이미 기미를 보이던 유럽의 군사적 혁신은 16세기와 17세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군사 혁명’을 맞이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나사우의 마우리츠 대공이나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푸스 왕은 대열을 형성한 화약보병의 일제 사격을 통해 전술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많은 군사 지도자들이 이런 대표적 혁신들을 차용하고 변형, 개량하면서 대응했다. 근대적 제식이나 강도 높은 훈련 같은 근대군의 기초적 구성 요소가 발전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보병들이 사용할 총이나 뒤에서 화력을 받쳐줄 대포의 발전이 동반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 내에서 촉발된 군사적 혁신은 유럽 바깥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면서 다시금 유럽 내부의 갈등 구도도 변화시켰다. 이 변화는 후술할 또 다른 발명품, 나침반과 연계되어 이루어졌고, 군사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인 재정적 혁신을 촉발했다. 유라시아 서쪽 구석에 있어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유럽의 지리는 원양 항해가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이점이 되었다. 그간 유럽과 타지역의 교류를 막던 바다가 거대한 고속도로로 변모하여 유럽을 세계 각지와 이어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움직인 국가는 포르투갈로,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에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향료 제도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 인도양에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던 무슬림 상인들과 해군을 우수한 화력으로 제압한 포르투갈 함대는 곧이어 유럽의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릴 만한 각종 상품을 실어날랐고, 이는 신흥 포르투갈 국가의 발전을 위한 연료가 되어주기 충분했다. 얼마 안 가 대서양에 인접한 국가들이라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이런 종류의 원양 무역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가 포르투갈과 거의 동시에 수행한 ‘아시아를 향한 경주’는 그리고 엉뚱하게도 아시아와 전혀 관련 없는 곳에서 가장 큰 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1492년에 대서양 건너편에 자리한 ‘신대륙’, 아메리카에 에스파냐의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당도한 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나름의 복합 사회와 발전한 문명을 건설했지만, 유럽인들의 총포와 철제 무기, 그리고 농경과 목축을 통해 발전시킨 전염병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드넓은 대륙 전체가 유럽인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아메리카와 유럽의 연결은 질병과 작물을 비롯한 생물학적 교환, 유럽과 아프리카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인구 이동을 촉발해 세계사의 새로운 분수령을 마련했다.
다만 이런 변화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그보다 직접적으로 아메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라면 역시 그곳의 광물 자원이었다. 아메리카에 최초로 이해관계를 마련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아메리카에서 발견한 금과 은을 노예노동을 통해 개발했다. 이 귀금속은 주로 인도양이나 태평양에 접하고 있던 아시아 제국들로 향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게는 기존의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에서 비교우위를 가질 마땅한 상품이 없었다(물론 고성능 대포는 전혀 다른 얘기였지만). 그러나 문화권을 막론하고 가치 평가의 잣대가 되어주는 금과 은의 효과는 확실했다. 에스파냐의 경우, 남아메리카 포토시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은을 태평양 건너편으로 실어날랐고, 그 은은 다시 중국으로 가 비단과 같은 고급 상품으로 교환되어 유럽으로 향했다. 몽골 후계 제국들이 정치적 안정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장엄한 건축물들을 지어 후세에 남길 수 있던 데는 이처럼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귀금속의 힘도 중요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자본이 점차 중요해지는 시대에서, 대외무역을 통해 자본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군대를 더 오래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 대륙의 패권을 노렸던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는 신대륙에서 얻은 이익을 자국의 군대를 동원하고 용병을 모집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유럽 바깥에서 들어오는 부는 유럽 안에서 전쟁의 불꽃을 계속해서 태우는 장작과 기름이 되어준 셈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를 얻고도 합스부르크는 유럽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지는 못했는데, 합스부르크를 견제하고자 수많은 강국들이 공동 전선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저지대의 반란군, 독일의 신교도뿐 아니라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과 같은 강국을 모두 상대로 하기에는 그들이 관여해야 할 전선은 너무 넓었고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 많았다. 통일을 가로막는 지정학적 분열은 합스부르크 이후에도 유럽 지정학의 중요한 특징으로 남았으며, 국가 간 경쟁을 계속해서 부추겼다.
합스부르크가 한 세기 반에 걸쳐 자국의 인력과 신대륙의 자원을 모두 탕진하고 다시는 과거와 같은 위치에 올라서지 못하게 되자,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새로운 후보들이 등장했다. 이 후보들은 북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잉글랜드였다. 이 시기 유럽 안의 패권투쟁에서 우세를 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임이 드러나면서, 전장은 지구적인 범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삼국은 인도양과 대서양의 바다에서, 북아메리카의 초원이나 숲에서, 인도의 평원에서 격돌했고, 전투의 결과는 유럽 대륙에서 진행되는 전투의 향방은 물론이고 이후의 세력 구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는 단연코 프랑스였는데, 이는 프랑스가 서유럽의 가장 황금 같은 땅과 커다란 인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프랑스는 숱한 군 혁신을 선도했고, 거대한 육군 전력을 유럽 각지에 파병해 군사적 위용을 한껏 보여주었다. 유럽 내부만 보자면 패권국에 가장 근접한 국가는 누가 뭐라 해도 프랑스였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대국을 진짜 이끄는 국가는 네덜란드와 영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는 외부의 전쟁을 위해 내부의 국고를 끝도 없이 퍼다 쓴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에스파냐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프랑스를 막고자 형성되는 유럽 국가들의 공동 전선을 뚫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는 소득이 의문스러운 전쟁을 위해 국고를 계속해서 탕진했고, 수차례 파산하면서 악순환을 거듭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다른 경로를 밟았다. 이 두 국가가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화약 시대가 열리며 전쟁의 공식은 대체로 간단해졌다. 더 많은 자원을 적절히 퍼붓는 국가가 전쟁에서 이긴다는 공식이 그것이었다. 따라서 이 두 국가가 승기를 잡을 수 있던 것은 전쟁을 위한 돈을 더 많이 끌어다 썼기 때문이지 반대는 아니었다. 대신 네덜란드와 영국은 전쟁에 필요한 재정을 동원하는 전혀 다른 방법을 개발했다는 데서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양국에서는 무역을 통해 부상한 상인 집단이 군주권에 대한 우위를 차지하고 정치적 권력을 확보했다는 데서 여전히 군주와 귀족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프랑스와는 달랐다. 상인들은 이제 의회라는 대의제 기관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정치에 표출할 수 있었고,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었다. 프랑스 상인들에게 프랑스 국왕의 전쟁이 ‘남의 일’일 수 있던 데 반해, 네덜란드나 영국 상인들에게 국가의 전쟁은 곧 ‘자신의 일’이었다. 이로써 양국은 더 폭넓은 과세 기반을 확보해냈고, 프랑스에 비해 부족한 생산력을 자발적 동의와 정치적 대표권에 기반한 더 높은 세율로 보강해 승기를 따낼 수 있었다. 대표권에 입각한 고세율의 힘은 세금 그 자체보다도, 정부가 저금리로 자금을 차입할 수 있는 데서 나왔다. 예컨대 네덜란드가 만든 국채 시장은 영국에서 중앙 은행으로 꽃피웠으며, 의회가 승인하는 예산과 세금이 국채 이자 상환에 대한 안정성을 보장하자 이자율은 더 낮아졌다. 프랑스도 전쟁을 이기고자 열심히 자금을 차입했지만, 파산을 일삼는 프랑스 정부를 신용하지 않은 금융가들은 고이율을 책정해 프랑스 재정에 갈수록 더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반면 네덜란드와 영국은 세입을 충실히 이자 상환에 투입해 신용을 확보했고, 끝이 안 보이는 적자 재정을 운용해 체급보다 더 거대한 군대를 만들 수 있던 것이다. 재정-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의 탄생이었다.
자본 동원력으로 구축한 군사적 우위는 무역의 우위를 강화해주면서 다시금 더 큰 군사적 우위를 가져다주었다. 더 큰 돈으로 만들어낸 더 강력한 군대는 유럽 바깥에서, 특히 바다에서 경쟁국 함선을 격침시키는 데 아주 유용했기 때문이다. 아시아 제국들의 함대가 더이상 진지한 경쟁 상대가 아니게 된 상황에서 유럽의 제해권은 곧 전 세계 해양 무역의 주도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영국은 더 큰 체급과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활용해 마침내 네덜란드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영국이 유럽 대륙과 세계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할 실력자가 되기에는 부족했지만,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 떠오를 기초만큼은 충분히 마련한 셈이다.
과세 기반의 확대, 제해권 장악, 무역과 제조업의 번창, 상인 집단의 영향력 확대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선순환을 통해 국가와 정치마저도 영구히 변했다. 이런 변화가 전혀 진통 없이 수반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재정과 세금을 둘러싼 군주와 상인의 갈등이 17세기 내내 지속되었으며, 끝내는 17세기 말의 명예혁명으로 해소되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거의 존재할 기미도 안 보이던 다른 국가에 비하면 이는 놀라운 진전이었다. 과세 기반이 확대되면서 정치적 대표권을 가진 이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국가 기구가 더욱 강력한 것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꼼꼼히 세금을 걷기 위해서 중앙 정부는 점점 지방의 독자적인 조세 제도들을 통폐합하기 시작했고, 지방 각지의 독자적인 무력들도 중앙 정부가 통제하는 무력으로 합쳐지거나 해산되었다. 그 후에는 세금 확보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서류로 정리하는 일을 맡은 관료들이 지방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국가의 상비군이 ‘폭력의 독점체’로서 내부의 다른 모든 경쟁자를 제거해나갔다. 중앙과 지방을 오가는 이 시끄러운 사람과 정보의 교류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더 거대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갔고, 평민들조차도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자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도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집단 간 경쟁이 제공하는 압력과 그에 따른 시스템의 고도화는 고대 국가와 제국의 성립 때부터 늘 반복되어온 이야기였다. 하지만 네덜란드, 그리고 특히 영국이 수행한 작업은 그 정도와 범위에 있어서 이전과 차별화되었다. 바야흐로 대중이 정치적으로 각성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의 무력을 형성하는, 근대 민족 국가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대학원생.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하고 있다. 서아시아 '본토'보다는 러시아 문명과 서아시아 문명의 접경 지대에 더 관심이 많다. 유라시아의 근대화와 냉전 정치가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과학기술, 문명사, 대중문화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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