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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이미지

“그 비밀은 문학의 기원이 모방에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에서 시작된다. 우리 조상들은 새소리를 모방하여 초기 시 음악을 지어 냈다. 영원히 살 수 없는 인간의 갈망을 모방하여 신화의 초기 캐릭터들을 고안했다. 삶의 웃음과 상실을 모방하여 희극과 비극의 초기 플롯을 짜냈다.” –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앵거스 플레처, 651p

문학이 모방에서 비롯되었듯이 이미지도 감각 모방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어. 이미지 모방의 가장 대표적인 매체는 사진이야. 약 200년 전까지는 어떤 장면을 기록하고 싶을 땐, 탁월한 모방 능력을 가진 예술가의 팔에 의존해야만 했어.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손가락만 까닥하면 누구나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는 사진 기술이 있지. 사진과 그림은 이미지 매체로서는 유사하지만 언어적 행위 측면에서는 본질적으로 달라. 사진은 본 것을 그대로 찍지만 그림은 본 것을 나름대로 그리지. 그래서 그림은 사진보다 작가가 개입할 여지가 높아. 사진작가는 멋진 장면 포착하기 위해 부지런히 다녀야 해. 반면 화가는 다니기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요소들을 선택하고 배경과 전경을 구분하는 등 장면 포착보다는 요소 편집이 중요하니까. 언어적 행위로 볼 때 사진은 속성통합체이고 그림은 요소결합체야. 물론 요즘은 포토샵 기술이 대중화되면서 점차 요소결합체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본래 사진의 근본적 바탕은 감각 모방에 가까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려는 취지에서 사진 기술이 발명되었으니까.

사진은 특별한 노력 없이 시각적 이미지를 손쉽게 모방할 수 있어. 하지만 작가의 자율성이 낮지. 사진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피사체와 프레임 선택 정도뿐이니까. 물론 사진기를 제대로 다루려면 고급 기술이 많이 필요하지만 그 기술적 어려움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 비할바가 아니야. 그림의 도구는 사진보다는 훨씬 단순하거든. 사진처럼 그림을 그리려면 모든 것을 숙련된 팔과 손에 의지해야만 해. 모방하는 시간도 아주 오래 걸리고, 디테일한 표현에도 한계가 있지. 그럼에도 그림이 매력적인 이유는 작가의 자율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야. 장면이 없어도 상상력만으로 그릴 수 있고, 어떤 장면을 보고 그린다고 해도 그 장면을 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으니까. 이렇듯 사진과 그림은 표현하는 방식과 태도가 달라.

조작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그림 그리기는 디자인(de+sign)의 시각언어 행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 요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의도에 따라 조작과 편집을 할 수도 있으니까. 코끼리의 실상을 그대로 묘사할 수도 있고 코끼리에 날개를 다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 때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대상을 창조하기도 해. 영화감독 스필버그가 창조한 외계인 ET처럼 말이야. 네덜란드의 르네상스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의 지옥편을 보면 괴상한 이미지들이 많이 나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그림보다 더 초현실적이지. 또 작가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는 다른 요소보다 크고 자세히 그릴 수 있어. 덜 중한 것은 생략하기도 하지. 어린아이들이 사람을 그릴 때 머리 부분을 크고 자세하게 묘사하고 몸통은 대강 그리는 것처럼.

20세기 들어와 미술가들은 새로운 요소를 하나 더 추가했어. 바로 ‘추상’이야. 현대 미술이 어려운 이유는 추상적인 요소들 때문이야. 말레비치나 칸딘스키의 작품처럼 모든 요소가 추상적인 그림들은 도통 의미와 의도를 알 수 없지. 우리는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갖고 있어. 호기심을 갖거나 관심을 두지 않지. 그래서 현대 미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두 가지로 뚜렷이 구분돼. 찬양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중간은 별로 없어.

추상 요소는 대중적인 디자인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어.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추상적 이미지가 깊숙이 들어와 있지. 우리가 전 세계 어딜 가도 크게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전 세계 도시 이미지와 생활양식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야.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고 인류 문명들은 제각각 나름의 지역 이미지와 독특한 생활양식을 갖고 있었어.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대부분의 문명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버리고 추상적인 생활양식을 도입했지.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기 문명을 다른 문명과 구별하고 싶을 때 늘 100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곤 해. 가령 한국문명의 이미지를 찾으려면 늘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자신들이 버린 이미지와 생활양식을 주섬주섬 챙겨 오는 거야. 국가와 문명의 정체성을 구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접근이랄까.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문명들이 그래.

현대 문명의 이미지와 생활양식의 바탕에는 추상적 이미지가 있어. 추상 요소로 현대 문명을 디자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럼에도 우리는 추상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어. 추상적 이미지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추상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지. 시각언어 관점에서 볼 때 현대인들은 현대 미술만이 아니라 현대 디자인과 생활양식 나아가 현대 문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야.

그럼 도대체 추상 요소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어떻게 인류의 오랜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을까? 왜 인류 문명은 모두 이런 생활양식으로 통일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현대 미술과 디자인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나아가 현대 문명과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길이지. 이를 위해 우리는 시각언어 요소들인 사진과 그림, 특히 추상 요소의 차별적 특성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어.

 

02) 추상의 등장, 본질에서 구성으로

샤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고 말했어. 여기서 ‘본질’은 과거지향이고, 실존’의 미래지향이란 생각이야. 경험으로 축적된 기억을 떠올리고 살피고 정리하는 과정 ‘본질 찾기’라면, ‘실존하기’는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하고 선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샤르트르의 저 유명한 실존 명제가 과거의 발목에 잡히지 말고 미래를 개척하라는 디자인적 조언으로 느껴졌지.

철학의 역사에서 본질주의(Essentialism)와 구성주의(Constructivism, Composition)는 늘 갈등해 왔어. 갈등의 승자는 언제나 본질주의였지. 아무래도 예측 불가능한 미래보단 과거에 기반한 본질이 훨씬 상식적이었으니까. 게다가 대상을 단순하게 만드는 본질주의적 접근이 원시적 뇌의 작동방식과 더 가깝기도 해.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어.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면서 전통적 규범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졌거든.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 사람들은 비로소 본질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과거의 본질에 집착하기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미술가들은 추상 요소를 재발견했어. 미술가들의 실존적 현실 자체가 추상적이었니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현실에서 추상 요소는 어떤 본질도 어떤 해석도 가능했지. 아무튼 현대 미술가들은 자신들 그림의 실존적 요소로 추상을 선택했어.

추상 요소가 등장하면서 과거와 미래의 관계, 본질과 구성의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했어. 추상 요소는 ‘구축주의(Constructivism)’ 혹은 ‘구성주의(Composition)’라는 새로운 미술 제작 방식을 낳았고, 이 방식은 현대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어. 독일의 공예미술학교였던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의 디자이너들은 추상 요소를 갖고 산업생산에 적합한 제품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냈지. 이들은 추상 요소의 조합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 당시 산업 자본가들은 디자이너들이 만든 프로토타입으로 대량생산을 했고 대중은 저렴한 가격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지. 추상 요소 덕분에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졌다고 할까.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과거의 상징적 이미지가 사라진 추상적 상품에서 새로운 시대상을 만끽할 수 있었어. 추상 요소의 등장이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셈이지.

이제 우리는 ‘본질’과 ‘구성’의 경쟁을 끝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어. 이 둘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순서의 문제’란 생각이야. 사람의 신경망 프로세스는 사람의 시간 인식 프로세스와 유사해.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가 시간의 순서인 것처럼 나의 신경망을 중심으로 지각 다음엔 생각이 일어나지. 본질은 감각-모방이 지각-재현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야. 여러 감각 기억 중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선택하는 과정이랄까. 그림에 비유하면 얼굴 사진을 단순하게 그리는 과정에 가깝지. 사람의 얼굴에는 눈, 코, 입, 귀, 머리카락, 콧구멍, 땀구멍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요소들이 있어. 사진을 찍지 않는 한 이 모든 요소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 그래서 우리가 사람 얼굴을 그릴 때면 눈과 코, 입 등 몇 가지 요소만 사용하고 다른 요소들은 생략하는 경향이 있어. 이때 선택된 요소들, 즉 눈과 코, 입은 우리고 보통 상식으로 생각하는 얼굴 개념의 본질이야. 물론 어떤 사람에겐 귀와 코가 본질이 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얼굴 그림이 단순해질수록 얼굴 개념의 본질만 남게 돼. 그래서 아래 그림처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얼굴 아이콘에는 사람 얼굴의 본질(얼굴 형태, 눈 2개, 입 한 개)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

그런데 ‘얼굴’이라는 언어 개념에는 사람의 얼굴만이 아니라 곤충과 자동차 등 모든 존재가 가진 공통의 영역으로서의 얼굴 범주를 포함하지. 이런 점에서 사람의 얼굴을 단순화한 아이콘은 ‘얼굴’이라는 말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 얼굴의 시각적 이미지의 본질만을 가리킬 뿐이야. 어쩌면 ‘얼굴’이라는 언어 개념을 본질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라.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고 할까. 그만큼 이미지에 비해 말과 글의 추상도는 아주 높지. 여기서 시각언어(사진, 그림, 추상 이미지)와 청각언어(말과 글)의 간극이 생기는 것 같아. 말의 추상성이 이미지의 추상성을 훨씬 상회함에서 오는 간극이지. 그래서 시각언어의 역할은 청각언어의 추상도 낮추기라고 볼 수 있어. 시각언어의 편집으로 청각의 추상도를 조율해서 미래 예측과 소통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지. 나는 이 간극을 줄이는 신경망 과정이 ‘생각’이라고 여기고 있어.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구성하기 방식이지. 즉 ‘지각(과거)’에서 ‘생각(미래)’으로 나아가듯 본질에서 구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어린아이는 다양한 사람의 얼굴을 감각-지각적으로 경험하면서 ‘얼굴’이라는 말의 원형 개념(prototype)을 획득하게 돼. 이 원형 개념이 ‘얼굴’ 개념의 본질에 해당되지. 처음 얼굴의 원형 개념은 사람 얼굴의 단순한 아이콘을 본질로 두지만 점차 다른 대상에도 확대 적용하게 돼. ‘얼굴’이라는 말이 개나 곤충, 자동차 등의 다양한 대상의 특정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면서 ‘얼굴’ 개념이 점차 확대되지. 원형 개념에 다양한 얼굴 범주들이 추가되면서 기존 ‘얼굴’의 본질적 개념이 재구성된다고 할까. 이때부터 생각에 의한 편집과 욕망의 구성 과정이 일어나는 거야. 이렇게 편집된 욕망 구성은 다시 감각-지각에 영향을 주겠지.

어쩌면 우리는 본질주의와 구성주의를 놓고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만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지도 몰라. 사실 둘은 모순적이지 않아. 맥락에 따라 혹은 인식 순서에 따라 달라지는 판단 기준일 뿐이지. 얼굴에 대한 원형 개념이 본질이라면 다양한 범주 경험에 따른 개념의 변화, 즉 다양하게 상상되는 얼굴들이 구성이라고 볼 수 있지.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감각-지각되는 범주(범주화)가 본질이라면, 생각-욕망의 개념(개념화)이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

본질과 구성은 상호적 순환 과정이야. 우리는 지각을 기반으로 생각을 하듯, 본질을 기반으로 구성하는 경향이 있어. 디자이너가 생각을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듯, 구성을 통해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내지. 완전히 새로운 구성을 하려면 기존의 본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본질 자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만 해. 가령 얼굴 아이콘을 동그라미와 점, 선으로 해체하듯이 말이야. 이렇게 구상적 얼굴이 추상적 요소로 뜯어지면 우리는 ‘사람 얼굴’이라는 본질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 새로운 구성을 위한 요리 재료가 준비되었다고 할까. 이제 우리는 추상 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해 독특한 얼굴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어. 새롭게 구성된 얼굴 이미지가 기존 얼굴 개념을 바꿀 수도 있겠지. 이게 구성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야.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지. 일종의 자기 효능감이랄까. 이런 방식을 미술과 디자인에선 ‘컨포지션(Composition)’이라 말해.

 

03) 묘사에서 구성으로

앞서 우리는 신경망의 흐름을 바탕으로 시각언어 요소들을 살펴보았어. 정교한 모방 요소는 감각적이고, 단순한 재현 요소는 지각적인 특징이 있었지. 이 둘은 모두 범주에 해당돼. 지각 다음 과정이 생각이야.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데카르트의 오류(Decartes’ error)』에서 ‘사람은 이미지로 생각한다’라고 말해. 다마지오가 말하는 생각 이미지는 지각적으로 재현된 요소들이 편집된 상태가 아닐까 싶어. 생각과 욕망에 의한 개념화 과정이지. 그리고 과정 사이사이에 기억들의 채워 넣기가 일어날 거야. 정리하면 재현된 범주가 다양한 개념을 만들고, 다양한 개념들이 편집되어 욕망을 구성해. 이 과정은 대체로 모방과 재현에 의한 구상적 이미지에 근거했는데, 20세기 초에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추상 이미지가 추가된 것이지.

그럼 생각과 욕망에서 추상 이미지가 하는 역할을 무얼까? 나는 가장 주요한 역할로 의미 소통을 꼽아. 개념적 이미지는 의미를 함축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어. 이미지가 복잡할수록 특정 대상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지가 단순할수록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경향이 있지. 매체로 치면 전자는 사진이고, 후자는 단순한 추상 이미지라고 볼 수 있어. 그리고 둘 사이에 그림이 있는 거야.

나는 그림 이미지에 보편적인 개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 여기서 보편적 개념이란 일종의 사전적 의미야. 사진이 객관적 의미에 가깝고 추상 이미지가 주관적 의미에 가깝다면, 그림의 사전적 의미란 객관적 해석과 주관적 해석의 사이의 그 중간 어디쯤에 해당되겠지. 즉 의미적 차원에서 그림은 사진과 추상 이미지 사이의 의미 간극을 좁히고 소통시키기 위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어.

‘점선면’처럼 아주 단순한 추상 요소는 의미가 불분명하기에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어. 또 가장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 추상 요소는 쪼개기(해체)에 의한 산물이야. 속을 알려면 대상을 쪼개서 분해해야 하고, 더 알고 싶어서 계속 쪼개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점선면’처럼 아무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순한 형태를 만나게 되겠지. 그럼 우리는 거꾸로 생각할 수 있어. 단순해진 추상 요소를 가지고 뭐든 만들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하는 거지. 마치 유전자의 단백질 구성을 알게 되면 그 단백질 구성을 바꾸어 유전자 조작을 할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하듯. 또 원자들의 특성을 알게 된 과학자들이 원자들을 조작해 새로운 분자를 구성하듯이 말이야.

본래 고전 미술은 ‘선(線, line)’이라는 추상적 요소를 근본에 두었어. 선으로 그려진 소묘가 미술의 근간이었지. 이건 모든 문명이 동일해. 유럽의 미술아카데미에선 소묘를 가장 중요시 여겼고 중국 청나라 초기 미술가였던 석도(石濤, 1642~1707)는 모든 그림은 하나의 획(一劃)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지. 그런데 20세기 초 미술가들은 추상 요소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어. 선보다 한발 더 나아간 새로운 추상 요소를 발견했지. 그건 바로 ‘점(點, dot)’이야. 선이 점으로 한 단계 더 해체된 셈이지. 이 흐름은 인상파 이후 시작되었어. 인상파 화가들은 소묘를 중심으로 한 그리기 방식이 아닌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어.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소묘가 아닌 색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렸어.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는 점을 찍어 형태를 표현했지. 선이 아닌 점들의 조합으로 의미 있는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지.

이렇듯 인상파 미술가들은 선으로 그려지는 객관적 묘사에 구속되지 않고 색과 점 등을 활용해 마음껏 자신의 지각과 생각 그리고 욕망을 표현했어. 그림의 소재만이 아니라 요소, 표현 방식 등 모든 전통적 억압에서 벗어났지. 그림을 그리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할까. 이후 네덜란드와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가들이 발견한 추상 요소는 그림에 의한 소통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어. 작가의 일방적 메시지가 아니라 독자들에게 해석의 자유를 주었지. 언어와 소통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갔다고 할까. 추상 요소는 그리기 방식도 완전히 바꾸었어. 감각-지각의 묘사에서 생각-욕망에 의한 구성으로 전환되었지. 300년 전 데카르트가 주장한 요소결합체적 태도와 분해-조립의 방법론이 현대 미술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지.

이제 사람들은 그림 그리기보다는 사진 찍기를 선호해. 모방과 묘사에 힘을 들이기보다는 편집과 구성에 집중하지. 아날로그 미술세계에서 편집과 구성은 여전히 전통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지만, 디지털 가상 세계에서만큼은 완전히 자리 잡았어. 현대 디자이너들은 거의 묘사를 하지 않아. 사진이든 그림이든 필요한 감각-지각 요소를 찾아 구성하기를 즐기지. 이미 디지털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에서는 회화(2D)나 조각(3D), 책(말과 글) 등 감각에 따른 전통적인 매체 구분도 사라졌어. 영상 매체는 시각과 청각을 대변하는 이미지와 소리가 특별한 구분 없이 편집과 구성에 동원되거든. 대상을 해체(분해)하고 레이어로 구분해 콜라주(조립)하는 현대 미술의 조립방식이 영상 매체의 편집에 그대로 적용된 셈이지.

디지털 세계의 편집과 구성 방식은 UX(User Experience)나 UI(User Interface)라는 새로운 용어로 통용되고 있어.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용자의 입장을 배려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야. 이런 접근은 추상 요소로 이루어진 미술 작품이 제목을 ‘무제’라고 함으로써 관람자의 자유로운 해석과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과 유사해. 점과 색의 추상 요소가 과학기술과 만나 구성된 디지털 플랫폼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인류는 하나의 디지털 문명을 공유하게 되었지.

 

04) 생활양식과 생활방식

요즘 국제 관련 뉴스 등을 보면 세계화와 지역화에 대한 논란이 많은 듯싶어. 난 이 논란은 생활방식과 생활양식으로 개념을 나누어 살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지역은 각각의 고유한 생활방식이 있어. 여기서 ‘생활방식’이란 언어와 종교, 의례, 정치와 경제 체제 등 특정 공동체가 살아가기 위한 시스템이지. 반면 ‘생활양식’은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처럼 생존에 필요한 삶의 패턴을 말해. 생활방식과 생활양식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야. 비슷한 의식주 생활양식을 공유하고 있더라고 종교와 언어 등 생활방식이 전혀 다를 수 있지. 즉 생활양식이 같다고 해서 생활방식까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야.

현대 툰드라 지역은 다른 기후 지역의 사람들과 생활방식이 전혀 다르지만 의식주 생활양식은 크게 다르지 않아. 툰드라 지역 사람들도 도시의 사람들처럼 오토바이나 차를 타고, 태블릿 PC 등 모바일 기계로 소통하지.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생활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어. 그들은 과거의 전통적 유목형 생활을 고수하고 있거든. 이곳에서는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와 같은 정치나 경제 체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자유나 인권 같은 사회 윤리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굳이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아도 오랜 시간 유지해온 나름의 체제와 생활방식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래서 이곳에서는 현대적 이념보다는 오래된 관습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어. 가령 자신의 집에 온 사람은 무조건 하루를 대접해야 한다는 오래된 초원의 관습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지.

반면 툰드라 지역의 의식주 생활양식은 크게 변했어. 툰드라 지역의 자녀들은 학교 갈 나이가 되면 가까운 도시에 나가 기숙학교를 다녀. 학교를 다니면서 현대식 교육을 받고 도시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지지. 컴퓨터와 인터넷 등 디지털 세계는 문화와 문명, 기후와 지역을 초월해 우리 삶의 유용한 도구로 쓰이고 있어. 언제 어디서든 와이파이를 이용해 정보를 검색하고, 공유하는 등 각종 문화 콘텐츠를 즐기지. 이렇듯 툰드라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별개로 현대인의 생활양식에도 이미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어. 생활방식의 다름을 유지하면서 생활양식은 다른 지역과 동일해졌지.

20세기 이후 전 세계의 생활양식은 점차 하나로 통일되고 있어. 더불어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바뀌었지. 삶의 선택지가 넓어졌다고 할까. 같은 생활양식을 추구하면서도 각자 살아가는 생활방식은 다양하지. 과거엔 생활양식과 생활방식이 서로 연동되어 있어서 어떤 생활양식에 익숙해지면 반드시 관련된 생활방식을 따라야만 했어. 자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부모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이어 살았지. 하지만 생활양식이 동일해진 현대인들은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생활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어. 툰드라 지역의 학생들은 도시에서 학교를 마치면 자신의 삶을 결정해. 다시 돌아가 가족의 업을 이을지 아니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지 고민하지. 삶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다고 할까. 이런 인식 변화는 생활양식이 통일되었기에 가능한 상황이야. 아마 고향과 도시의 생활양식이 전혀 달랐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몰라.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생활양식대로 살아가길 선호하니까.

나는 가끔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등 이념이나 체제가 세계화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어. 과연 어떤 이념이나 체제 중심으로 세계화가 진행될 필요가 있을까?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이념과 체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구성하면 되지 굳이 누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신념과 책임감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튼 세계화를 언급하기에 앞서 현대의 기술적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어.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역사를 돌이켜보면 생산기술의 변화가 생활양식과 생활방식의 변화를 이끌어 왔거든. 그렇다면 우리에게 닥친 기술의 변화, 구체적으로는 디지털 기술의 변화가 새로운 변화의 모멘텀이 되겠지.

산업혁명 이후 현대인들은 거의 비슷한 생활양식을 갖게 되었어. 구한말 대한제국의 모던보이나 모던걸처럼 자발적이든 반강제적이든 대부분의 문명들이 오래된 생활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했지. 이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아닐까 싶어.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체제, 생활방식도 강요했지만 많은 문명들이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어. 크게 반발하고 저항했지. 물론 이들의 강요가 여러 문명의 국가 이념과 체제에 있어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은 오래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포기하지 않았지. 일제 강점기 한국사람들이 한국말과 한글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앞서 나는 디자인의 부모로 두 사람을 얘기했어. 윌리엄 모리스와 르네 데카르트지. 모리스는 시대를 대표하는 생활양식을 제안했고, 데카르트는 시대를 대표하는 생각방식을 제안했어. 현대인들은 모리스 덕분에 시대를 대표하는 생활양식의 통일성을 인식했고, 데카르트 덕분에 삶을 선택하는 생각의 다양성을 갖게 되었지. 나는 이것이 우리 문명의 현재이자 미래가 아닐까 싶어. 현대 문명이 양식과 방식, 두 갈래로 나누어진 것이지. 생활양식에 있어서는 동일함을 유지하면서, 생활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지. 이 구분은 세계화냐 지역화냐 논쟁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해. 모든 것을 세계화하거나 지역화하기보다는 무엇을 세계화하고, 무엇을 지역화하면 좋을지 구분할 필요가 있지.

생활양식의 세계화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생활방식의 지역화는 새롭게 개척할 수 있는 문명이야. 나는 문명 지역화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언어’를 꼽아. 다양한 문명의 언어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지. 인류의 미래는 언어를 통한 개념 구성 능력과 소통 능력에 달려있어. 그래서 멸종되어가는 지역의 각종 언어들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지. 말과 글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비언어로 취급해왔던 이미지나 몸짓 등 새로운 언어 매체도 탐구할 필요가 있고. 이 매체들 또한 우리의 개념 구성 및 소통 능력과 관련이 깊거든. 화살이 많아야 과녁에 맞힐 가능성이 높아지듯이 언어의 종류와 매체가 많을수록 좋아. 언어 범주가 많아야 개념 구성 능력도 좋아지니까. 개념이 다양해지면 소통도 잘되고 인류의 상상력도 향상될거야. 나는 미래 인류가 향상된 상상력을 통해 더욱 다양한 생활방식을 개척해 나갔으면 좋겠어.

 

05)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언어

공동체(community)와 사회(society)는 근본적으로 바탕이 다른 집단 개념이야. 공동체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속하게 된 집단을 말해. 가족 등 혈연 집단이 대표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지. 반면 사회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내 의지로 속하게 된 집단이야. 학교나 회사 등 어떤 규칙과 계약이 있는 집단이지.

우리는 살면서 공동체와 사회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어. 공동체에선 사회성을 요구하고, 사회에서 공동체성을 요구하곤 하지. 일단 두 집단이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계약’이야.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계약이 있으면 사회이고 계약이 없으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 국가는 일종의 ‘법’이라는 계약을 바탕에 둔다는 점에서 사회라고 할 수 있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헌법이라는 계약에 의해 형성되었으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 같은 언어를 쓰면서 살아온 한민족 개념에서 볼 때 한국은 일종의 공동체라고 볼 수도 있어. 즉 ‘대한민국’이란 말은 사회를, ‘한국’이란 말은 공동체를 대변하는 단어인 셈이지. 가족 내에서도 부부 관계와 부모 자식 관계를 사회와 공동체로 구분할 수 있어.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선택해 법적 계약으로 맺었다는 점에서 사회관계에 가까워. 반면 부모와 자식은 서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동체 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앞서 생활양식과 생활방식을 기준으로 현대 문명을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공동체와 사회를 구분해서 현대 문명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200년 전에는 사회보다는 공동체가 강했어. 종교와 정치 등 집단을 이루는 이념과 체제가 공동체에 근거했지. 그래서 공동체에 종속된 개인은 어떤 선택을 내리기 어려웠어. 주어진 생활양식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라야만 했지. 시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사회적 선택이 가능했지.

산업혁명을 전후로 공동체와 사회는 뒤바뀌었어. 산업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시장이 기존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했지.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가 진단했듯 공동체 속에 있던 시장이 뒤집혀서 시장 속에 공동체가 있는 상태가 된 거야. 이후 집단의 생활문화와 체제의 중심은 공동체가 아니라 시장 중심으로 전환되었어. 본래 시장은 개인들의 계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공동체보다 사회에 가까워. 그래서 폴라니의 말한 전환은 ‘공동체 경제’에서 ‘사회 경제’로의 변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즉 폴라니가 말한 ‘거대한 전환’은 공동체와 사회의 스위치가 아닐까 싶어.

우리는 이 시대를 ‘현대 사회’라고 말해. 아무래도 ‘현대 공동체’라는 말은 어색하니까. 그만큼 집단을 대하는 기준도 ‘사회’에 있다고 할 수 있어. 현대인은 개인(individual)과 계약(contract) 등 공동의 규칙을 아주 중요시 여겨. 특히 공동체 개념이 아예 없는 디지털 사회는 더욱 그렇지. 우리는 아날로그라는 실재 세계와 디지털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동시에 살고 있어. 아날로그 세계는 공동체와 사회가 공존하고, 디지털 세계는 순수 사회집단이지. 그래서 디지털 플랫폼은 암묵적 코드(code)가 있어. 일종의 약속이자 계약이지. 하지만 이 코드는 아주 명확해서 아날로그 세계의 계약처럼 해석의 여지가 많지는 않아.

얼마 전 ‘다오(Dao)’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어. 동시에 이 다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규약’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 게임 세계에 규칙이 있듯이 말이야. 흥미로운 점은 이 규약이 아날로그 세계의 규약과 유사하다는 점이야. 명확한 디지털 코드 위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또 다른 규약이 생겼다고 할까. 마치 규정된 몸과 변화하는 마음의 관계처럼. 이는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반증이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왜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에 관심을 두는지 이해하게 되었어. 200년 전 시작된 거대한 전환을 한번 더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200년 전 시작된 거대한 전환이 아직 끝난 게 아닐 수도 있고.

계약은 서로의 경계를 나누는 행위야. 나는 우리 시대가 ‘구별 짓기’를 넘어 ‘경계 짓기’에 진입했다는 생각이야. 국가의 경계처럼 규칙이 다른 집단 경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200년 전 공동체에서 사회로의 전환은 영토 국가라는 새로운 경계를 낳았어. 그렇다면 디지털 사회는 어떤 경계를 낳을까? 내가 궁금한 메타버스의 미래가 바로 이거야. 현대 문명의 통일된 생활양식처럼 디지털 세계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있어. 그런데 디지털 세계는 공동체 개념이 없는 순수 사회야. 즉 메타버스의 경계 짓기는 개인의 선택과 계약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같은 생활양식을 공유하면서 다른 생활방식을 선택하는 현대인의 태도와 아주 유사한 상황이랄까.

나는 현재의 디지털 혁명이 어떤 경계를 낳을지 예측하고 설명할 능력은 없어. 디지털 메타버스 세계는 누구도 가보지 않았기에 역사적 추론조차 불가능하지. 가상 세계는 실재 세계와 시공간 개념이 완전히 달라. 메타버스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시공간을 선택할 수 있지. 집단만이 아니라 시공간조차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디지털 메타버스라고 할 수 있지. 즉 메타버스의 경계는 시공간을 초월한 개념이 될 수도 있어.

그럼에도 확실한 건 하나 있어. ‘선택’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이야. 과거 공동체 시대에는 선택보다는 노력이 중요했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이 최대의 결실을 낳았지. 하지만 이젠 노력보단 선택이 중요한 상황이야. 그럼 우린 이런 질문을 해야만 해. “좋은 선택을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이 질문이 우리 시대의 화두라고 생각해. 여기서 ‘좋은 선택’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좋은 생활방식’을 의미하겠지. 어차피 생활양식은 이미 선택되어 있으니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래 고민해 왔어. 맥락에 따라 그 답은 계속 바뀌어 왔지만 최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생활방식’은 ‘좋은 커뮤니티’야. 커뮤니티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다시 공동체를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지. 우리 시대는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어. 사회 개념이 너무 확장되어 매번 제대로 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흔히 말하듯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할까. 선택의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공동체가 일부라도 부활되어야 해. 우리에겐 굳이 선택이 필요 없는 공동체 집단이 필요하지. 가령 재벌가에서 태어난 사람은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생존에 위협이 없듯이, 내가 속한 공동체 집단이 그 자체로 좋다면 생존에 대한 두려움도 덜할 거야.

그럼 좋은 커뮤니티란 뭘까? 이 기준은 ‘커뮤니티’란 말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 커뮤니티의 명사형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즉 소통이야. 즉 좋은 소통을 하는 집단이 좋은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지. 좋은 소통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두고 존중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어.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집단이지. 한국말에서 소통은 ‘사무침’이야. 사무침이란 ‘서로 묻는다’ 혹은 ‘서로 깊이 스며든다’는 의미지. 서로 묻고 깊이 스며들려면 반드시 언어를 거쳐야 해. 여기서 언어는 말과 글만이 아니라 표정과 몸짓, 이미지 등을 포함하지. 그래서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좋은 언어를 쓰려고 노력해야 해. 더불어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

현재 디지털 세계의 게시판이나 댓글을 보면 참담해. 최악의 언어들이 오간다고 할까. 뭔가 언어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야. 언어가 무너지면 소통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공동체까지 무너지는 줄도산이 일어나지. 계속 이런 상황으로 간다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아날로그 공동체조차 모두 파괴되고 말 거야. 이런 점에서 나는 이 연재를 읽어준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싶어. 언어에 관심을 두고, 언어의 잠재된 가치를 인식하라고. 나아가 자신이 쓰고 있는 언어를 사랑하고 되도록 좋은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라고.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사랑하고 디자이너는 시각언어를 사랑한다면, 좀 더 좋은 한국공동체와 디자이너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항상 느끼지만 소통은 늘 어려워. 특히 디자이너처럼 소통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지.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언어를 이해하고 사랑할 때 그나마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하다는 생각이야.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소통은 참 어려운 것이란 걸 이해해 주었으면 해. 소통과 언어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면 더 좋고. 이런 마음에서 지금까지 연재를 해 왔던 것 같아. 아무튼 그간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안녕~

윤여경

그래픽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이다. 그린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이 사람과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과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디자인 공부 공동체인 ‘디학(designerschool.net)’에 참여한다. 쓴 책으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X축》(스테파노 반델리, 2012) 《런던에서 온 윌리엄모리스-그는 왜 디자인의 아버지인가》(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이 있으며, 공저로 《디자인 확성기》《디자이너의 서체 이야기》(지콜론북)가 있다. 이 외 〈다른 백년〉, 〈디자인 평론〉, 〈경향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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