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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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0.29도 괜찮은데 나는 숫자 기억력이 나빠서 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특별히 다른 뜻은 없다.) 발생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이를 참지 못해 최근 두명을 ‘페삭’했는데 이 분들은 수천명의 ‘페친’을 가진 중장년의 명망있는 시니어 활동가들이다. 이분들은 평소에도 좀 과격한 언사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는데 활동을 하면서 받은 여러가지 박해에 대해 분을 삭이기가 힘드셨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 분들의 활동과 가장 크게 대립하는 세력은 ‘국민의 힘’과 그 지지자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분풀이 대상을 따로 찾았다. 바로 문재인 전대통령이다. 이분들의 문재인 비판은 그의 퇴임이후 비난으로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행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아니니까.

비판이든 비난이든 제3자인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원색적 표현과, 세상 모든 문제가 전대통령 탓이라는 깔대기 논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 사람들이거나 현 여당의 열성 지지자들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이 늘 이야기하는 활동의 가치와 대의, 그리고 이와 어울리는 꽤 아름답기도 한 감성적 표현(예술적인 사진)이, 이따금 내비치는 방향을 잃은 분노의 무분별한 발산과는 너무 부조화하여 내게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이분들은 민주당 지지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분들의 행동을 이해한다. 문재인 전대통령은 대한민국 유권자의 1/3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여전히 가장 큰 도덕적 대의의 상징권력을 가진 부호이자 영웅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재인은 현재 당대표인 이재명과 현실권력이 아닌 상징권력의 경합상대이므로,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여전히 공격의 대상이다. 또 다른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재명을 일종의 ‘품성론’에 기대 거의 맹목적으로 저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해가 더 큰 관용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내 그릇의 한계이다.

샹뱌오는 중국사회의 영웅주의와 부호화 문제를 상당히 우려한다. 아시아에서 특히 정치가들이 특정 가치를 상징하고 쉽게 부호화한다고 말하는데, 거명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최소한 두명의 중국 정치가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미 혁명이라는 정치적 부호에서 종교적 부호로 승격된 마오쩌둥, 그리고 “위대한 신중국 100년사를 만들 영웅”으로 부호화가 진행중인 시진핑이다. 중앙무대 정치인의 부호화는 한국과 같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그리고 주로 미디어를 통해 정치인을 접할 수 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전통시대의 황제의 권위에 가까운 부호적 지위를 누린다. 중국의 보통사람들에게 최소한 당대에는 무오류의 존재로 비춰야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진영에 따라 어떤 정치 지도자는 비슷한 수준의 권위를 누린다. 한국의 보수유권자들에게 박정희는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반신반인이고, 상당수의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문재인은 도덕정치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윤석열도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공정과 상식의 대변자로 여겨지기도 했고,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그보다 긴 시간동안 지금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절대권력에 맞서는 용기를 가진 “여신 디케의 손에 쥐어진 정의의 칼”로 인식되기도 했다.

부호화가 되는 순간 부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존재했던 모든 실천과 그 의미의 디테일이 사라진다. 바꿔 말하면 그 부호를 지지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그 부근의 존재들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오로지 거대한 부호와 부호를 넋놓고 바라보면서 의미를 모두 그에게 양도한 초라한 자기만이 남는다. 그래서 자기는 더 이상 스스로 사고하고,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언어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어진다. 매번 부호의 발화를 ‘리트윗’하고, 나와 같이 균질하게 축소된 자아들과 함께 덩어리를 이뤄 부호가 이끄는대로 몰려간다. 정치적 참여이든, 소비이든 상관없다. 그리고 부호와 내가 끊어졌다고 느낄 때, 허무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간다. 이 우울과 모호함을 이기기 위해 새로운 부호를 발견해야 한다. 중국 사회에서 국가와 민족을 아이돌로 삼은 신세대 애국주의가 만연한 이유중 하나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영웅을 만드는 부호화에 참여하는 것과, “깨어있는 시민”이 되는 과정이, 자기반성을 놓칠 때, 정반대 방향의 운동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샹뱌오는 자신을 포함해서 리더쉽과 사상가가 부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민감하다. 그래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이 있다. 리더쉽은 늘, 추구하는 가치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것을 경계하고, 이를 객관화하여 실천의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진짜 영웅은 세상을 바꾸는 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매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무대위에 서 있는 사람과,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각기 역할이 다를뿐,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싱가폴국립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으로 지낼 때의 구체적인 경험을 들어서 이를 설명한다. 학계의 대가들이 (예를 들어 프라센지트 두아라) 전세계에서 모여든 영민한 연구자들과 함께 훌륭한 연구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운영하는 사무행정직의 평범한 싱가폴인 직원들이 자신의 일을 프로페셔널하고 성실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일상을 영위하는 보통사람 영웅관”은 도덕적 선언이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석사 논문인 저장촌 연구의 관찰에서 시작됐다. 그는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의례, 그리고 사람들간의 관계라고 믿는다. 그들은 지식인들이 생각하듯 동정이나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혹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 사고방식으로 대리자의 입을 빌어서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서벌턴도 아니다. 그가 관찰한 것은 자신의 곤경을 충분히 이해하는 동시에 그 곤경을 벗어나고 더 나은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일상의 행위를 통해 다양한 노력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베이징의 기층공무원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압력을 가하면서,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쟁취하기도 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역시, 글로벌라이제이션에 참여하는 인도의 IT엔지니어와 그들의 가족들이 어떻게 글로벌라이제이션 자체에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현실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유토피아로 묘사하는 글로벌리스트 관점과 이를 거대하고 악한 음모로 묘사하는 좌파의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보통 사람들이 “구조적 악에 저항한다”거나 “세상을 진보시키겠다는 위대한 이념”같은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 취하는 작은 합리적 행동들이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의 흐름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동적으로 진전된다는 것이다. 이는 약자의 행위중에서 수동적인 저항을 묘사한 제임스 스코트의 <약자의 무기>의 관점과도 조금 다르다. 중요한 것은 강자와 약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행동을 엔지니어링하고 통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약자들은 댓글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시해서, 여론을 바꿔 놓기도 한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자유로운 공론장을 통제하고 봉쇄함으로써 지식인과 언론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다수의 보통사람들의 여론을 살피며 눈치를 본다. 그래서 그는 2021년 독일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연구소 소장으로 임용된 후, 새로운 학과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작은 일상적 행동이 어떻게 큰 역사의 패턴을 만드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상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인용하는 것은 페르낭 브로델의 정화(鄭和)의 대항해에 대한 설명이다. 정화가 중국의 쑤저우(蘇州)에서 출항해서 아프리카 대륙의 동해안에 이를 때까지, 그의 선단은 긴 세월동안 한뼘한뼘 나아가야 했다. 해안선을 따라 필요한 기항지 모든 곳을 들렀다. SF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워프항법으로 공간을 구부리고 웜홀을 통과하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이 역사적 사건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루하루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대선단의 수많은 선원들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기 때문이지, 정화라는 한명의 영웅이 자신의 꿈을 머릿속에서 그리는 것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호화와 우상의 문제는 정치영역뿐 아니라 한국의 대중문화, K-컬쳐와도 연관시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또, 경제문제에서도 같은 현상이 드러난다. 이 글에서 이 문제들을 자세히 다룰 여력은 없다. 하지만, K-팝 아이돌문화, 그리고 삼성, LG, 현대자동차가 우리의 문화적, 경제적 일상을 지배하면서 우리의 ‘부근’에 대한 주의력을 떨어뜨리는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나마 이제 수없이 많은 아이돌이 등장하면서 기호와 취향을 다양하게 분할하고 있고, 유튜버나 인터넷 매체가 역시 다양한 주장과 정보를 퍼뜨려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제공하지만 (물론 플랫폼이 알고리듬을 통해 이를 왜곡시키거나 집중화하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경제 아이돌’의 독점적 속성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재벌집중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의 IRA 법안문제라든가 미중의 칩4 갈등을 둘러싸고,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그리고 삼성전자의 문제를 마치 자신의 살림 문제인 양 노심초사해야 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상태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것이 정보의 편중과 왜곡때문이든 (한 언론인이 IRA때문에 한국경제가 망할 수도 있냐고 물어보니 경제전문가 주진형은 가볍게 웃음지으며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아니면 정말 그런 문제가 있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샹뱌오는 진영논리를 이야기한 적은 없다. 투표를 통한 정치적 선택지 같은 것이 없고, 공론장에서의 도를 넘는 토론이나 분쟁이 허용되지 않는 중국 사회에서 표면적으로는 진영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깥의 적이나 내부의 약자를 공격할 수는 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도덕주의이다. 그는 작금의 도덕주의를 잔혹하다고(Brutal)고 표현한다. 젊은 애국주의자들인 소분홍이나 남권주의자들이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는 진실하고 너는 위선적이다.”라고 말하고, 여기서 위선이라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상대의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표현이다.

샹뱌오는 대학시절부터 도덕주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중국 5.4운동의 시대정신이었던 과학과 민주에 ‘도덕’을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덕을 모자에 비유해서, 머리에 쓰고 다닐 수도 있지만, 항상 벗어서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이게 무엇인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의 도덕주의는 과거에는 주로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정부의 선전선동 도구로 사용됐는데, 그는 일찍부터 그 부조리함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사이 공격적 애국주의와 안티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이들이 인터넷상에서 도덕주의를 사용하는 자발성이 두드러져서 그를 근심하게 만든다. 사회주의 이념과 같은 이상이 사라지고, 경제성장도 정체되는 가운데, 개개인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성장하는 것은 이런 맹목적인 본질주의적 주장들이다.

그런데 이 도덕주의는 한국사회에서는 진영주의와 결합해 중국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서로 다른 도덕을 내세우는 진영간에 가장 높은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도덕지상주의’ 혹은 ‘도덕지향성’은 문화적으로 그 뿌리도 매우 깊다. 조선의 사상을 연구한 일본 학자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혹은 예일대학의 역사학자 오드 아르네 베스타드가 저술한 <제국과 의로운 민족>이 모두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도덕지향성은 객관적으로 제3자가 볼 때 항상 도덕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도덕이라는 대의를 매우 중시하고 그 명분을 쟁취한 편이 상대방을 압도하기 때문에, 모두가 대의명분의 전쟁터에 뛰어들고 그 승패에 따라 사회적 담론권력의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진영간, 집단간, 개인간 공히 발생하는 일이고, 하다못해 연인이나 친구, 가족사이에도 이 투쟁은 항상 존재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도덕지상주의의 기원을 논하고자 함은 아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다.

이태원참사는 과거 세월호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깊은 트라우마 상태에 가두고 있다. 와중에 민들레라 불리는 한 인터넷 언론이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한 사건때문에 벌어진 논쟁을 보면 한국사회가 PC에 대해서 보이는 중국사회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태도와 함께, 진영간  도덕지상주의의 경합 양상이 잘 드러난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왜 많은 사람들이 권유하는 것처럼, 희생자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노력을 취하지 않고 서둘러 명단을 발표해야했을까? 그들은 이 행위에 대한 비판자들의 생각처럼 특종에 눈이 먼 ‘기레기’이거나 정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 패스’였던 것일까? 실은 그들은 정반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 전직 언론인의 설명을 듣고 이해가 갔다. “이분들은 윤석열 정부와 야합한 기레기들이 악의적으로 숨기고 있는 명단을 우리가 용기있게 보도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이태원 참사는 아직 그 진상이 제대로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이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벌이는 여러가지 행태는 이들의 열성 지지자인 30%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한국민들을 분노하게 하고 있다. 정부가 희생자들의 이름과 존재를 의도적으로 가리는 것은 희생자 가족들의 연대를 막고, 개개인의 구체적 서사가 사람들의 공감과 더 큰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그래서 국민의 힘과 그 지지자들이 민들레의 행동이 “패륜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도덕적 우위”를 표현할 수 있는 선언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한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한다. 과거 이들이 세월호 유족들을 대하던 반인륜적 태도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기 때문이다.

민들레의 행동은 자신들만이 도덕적이고 정의롭다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여기서 물론 가장 부도덕한 세력은 윤석렬 정부이고 그와 야합한 레거시 언론들의 책임도 이에 못지 않다. 그렇다면 레거시 중에서도 진보언론들, 혹은 민주당보다 진보성향이 강한 소수정당들이 유족의 동의없는 일방적인 명단 공개에 반대한 것은 어떻게 봐야할까? 이에 대해서도 전직 언론인의 설명을 참고하기로 한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의 눈치를 살핀 것이 아니라 바로 과도하게 설정된 ‘기레기 프레임’때문에 몸을 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정치가와 ‘기레기’들은 타인의 비극을 정쟁의 도구나 선정적 보도의 재료로 삼는다”라는 자기 검열에 걸려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도덕적 우위’설정이 된다. 우리가 이해하는 PC 관점의 섬세한 고려이다. 그렇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도해야 한다”라는 도덕적 대의와, “유족들 개개인의 아픔과 상처를 살피지 않는 대의는 충분히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보도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도덕이 정면 충돌했다. 조선일보와 같은 국민의 힘 지지성향의 언론뿐 아니라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 언론과 지식인들도 민들레의 보도를 비판했다.

여기서 진(真), 가(假), 허(虛), 성(誠)이라는 한자어의 깊은 뜻을 빌어 PC와 관련한 문제를 풀이하는 샹뱌오의 설명이 우리가 처한 이 곤경을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가’와 ‘진’은 가짜와 진짜를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쌍을 이룬다. 뭐가 진실인지 어느정도 알고 있을 때, 거짓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가짜와 진짜를 경중을 가려 분별 하지 못하면 ‘허’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지금 사람들이 PC를 공격하는 것은 ‘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PC가 내세우는 가치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 도덕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나 솔직한 자아와는 동떨어진 “한가한 소리”일뿐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직한 자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성’이다. ‘성’과 ‘진’이 크게 갈라진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그리고 이 정직한 자아를 가장 극단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도덕적 이념에 구애 받지 않는 현실주의자들, 소위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다. 이를테면 안티페미니스트들은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본질이자 자아이고, 그래서 나의 본질을 비판하는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것도 솔직한 나의 표현이라”고 이야기한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 지지자들은 지금 ‘가’의 상태에 있다. 진실은 이들이 도의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 서슴없이 ‘가’를 행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패륜’이 가짜 도덕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현실주의자로서 최고 수준의 ‘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민들레와 민주당의 열성지지자들에게 명단의 공개에 앞서 유족들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은 ‘허’로 들린다. 명백한 ‘가’를 품은 거악이 눈앞에 있고, 이들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진’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 몇몇 고위관료와 정치가는 사법적 책임도 지게 할 수 있으면 좋고, 이를 기화로 동력을 얻어 윤석열을 탄핵한다면 금상첨화이다. 민들레는 이렇게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망에 충실한 나의 ‘성’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허’에 뒷다리를 잡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샹뱌오가 (그의 논리를 빌어서 내가)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의 솔직한 마음, 즉 ‘성’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성’만을 서둘러 추구한다고 해서 과연 쉽사리 ‘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태원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보다 심층적인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8년전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그래서 수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한 끝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다. 그렇게 ‘촛불정부’가 집권해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에 대한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팬데믹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이 설득력있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올초 대통령 비서실이 엮어 낸 문재인 대통령 문집의 제목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였다. 안정된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정권이 바뀌고 나자마자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중간 과정에서 조국 사태와 공수처, 검찰관련 입법논쟁 등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윤석열과 한동훈을 이용해서 박근혜를 탄핵시켰고,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임명한 것도 문재인 정부였다. 그래서 되묻게 되는 것이다. 윤석열만 물러나면 과연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말이 정말로 ‘진’이냐고. 조금 더 ‘한가한’ 질문을 던져 볼 수도 있다. 자연재해도 아니고 테러와 같은 특별한 사고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많이 몰리고, 이를 통제하는 공권력이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길을 걷던 사람들이 수백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초거대도시에서 삶의 안전이 담보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 아니 행복을 추구하며 이 초거대도시로 몰려든 삶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제 PC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도덕주의의 고지전, 도덕지상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국의 상황은 샹뱌오가 설명한 중국의 상황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극소수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을 제외한 주류 사회에 의해 PC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중국과 달리, 한국 주류정치의 한 축이자, 지금 민들레를 중심으로 결집한 민주당 지지세력은 PC를 상당히 의식하는 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박원순 서울시장의 자살사건이다. 인권위원회의 판단에 의해 성희롱으로 결론이 났지만, 박시장 자신이 영원히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법정다툼과 같은 매우 공적인 화법체계 바깥에서 공개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고 있다. 공적인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은 대개 2차가해로 해석되고 진보진영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의 희생자 명단공개도 비슷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내가 처음에 사태의 발단을 보면서 매우 놀랐던 것은 진보 성향의 20대 언론인들 일부가 페이스북에서 민들레를 비판하는 강도의 격함이었다. 민들레나 민주당 지지계열의 언론들이 이야기하듯이 세월호 사태를 포함해서 과거에는 언론에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기레기적’ 보도 행태가 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차분히 무엇이 문제인지를 설명하는 글들을 읽고 수긍이 됐다. 분명히 시대가 변하면서 언론 보도의 윤리적 기준도 변화한 것이다. 나는 PC적 설명을 상당부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언론인이 아니라 뉴스소비자이니 아무래도 피해 당사자의 입장을 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명단공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전체 희생자 유가족의 동의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더라도, 민들레가 그중 일부의 이야기라도 충분히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기울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도  민들레를 가열차게 비판하는 대열에 동참해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전직 언론인의 결론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민들레의 행위는 적절한 것이 아니었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만큼 그들의 행위에 분노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이 분의 입장에 매우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민들레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지만, 과연 지금 명단을 공개하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는 흑백논리로 가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도덕과 정의에 대한 관념과 기준이 우선 순위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우선 유가족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들이 2차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염려해야 한다”라는 PC적 설명은 원칙적으로 대단히 정당하게 들리지만, 여기에는 다른 반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과연 몇명의 동의를 구해야 공개가 가능한가?”, “그렇게 한명한명씩 동의를 구하고 있는 동안, 윤석열 정부는 다른 사회적 이슈를 이용해 서둘러 이태원 참사를 덮으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레거시 미디어는, 왜 명단공개는 고사하고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사연을 보도하려는 노력조차 제대로 취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언론인들에게는 도덕뿐 아니라 가치와 성공의 추구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 어려운, 특종에 대한 애착과 같은 현실주의적 고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밥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 ‘먹고사니즘’은 도덕으로 비판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배재할 수 없는 우리 생존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같은 이유 때문에 국민의 힘 지지자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박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나는 민들레이든 레거시 미디어이든 실은 물밑에서는 적지 않은 취재노력을 취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한명 한명의 사연이 공개되고, 또 동의하는 유가족이든 동의하지 않는 유가족이든 그들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고 고민을 한 언론인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임계점에 이르렀다고 판단이 돼 명단을 공개했다면, 우리는 이들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도 이미 이 과정에 동참했기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윤석열 정부의 ‘가’를 물리치기 위해서 함께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충분히 독자들에게 알리지 못한 모든 언론에 아쉬움을 느낀다.

명단공개 결정에 동의하는 측이든 반대하는 측이든, 지나치게 격하게 상대방을 ‘기레기’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만이 진짜 도덕과 정의를 전유하고, 너는 거짓 도덕의 탈을 쓴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도덕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이러한 도덕의 상대적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네가 나의 도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는 매우 ‘잔혹한 것’이라고  샹뱌오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현실은 이렇게 복잡하기 때문에 여러 측면의 입장을 섬세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도덕은, 자기가 속한 진영을 쉽게 만족시킬 수 있을진 몰라도, 다른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공감도 얻을 수 없다.

사실 이런 일들은 지난 몇년간 한국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졌다. 과거 민주 대 독재의 대결을 연상하게 하는 초기 페미니즘과 일베의 대립같은 비교적 선명하고 단순한 갈등도 있었지만, 정체성 정치를 중심으로 도덕의 가치와 언어, 그 실천행위가 다양화하면서, 도덕의 전선도 다각화 됐다. 공수처 설치를 포함한 검찰권력에 대한 견제 시도와 조국 사태처럼, ‘성’과 ‘허’가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가’가 어부지리를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 결과가 윤석열 대통령의 등장이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진보적 이념이나 PC와 페미니즘 등의 정체성 정치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나 리버럴, 민족주의, 현실주의, 좌우파와 같은 다양한 이념도 문제가 아니다. 원래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과 입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 진영만이 도덕과 정의를 독점한다는 아집과 도덕지상주의이다. 이것은 중국과 중화권의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매우 한국적인 특성이다.

(다음편에서 이어짐)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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