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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전 베이징에 살 때 갖고 있던 습관이 하나 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꼭 물어보는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 한국 어디서 왔냐고 내게 물어보면 조금 짜증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나는 서울 토박이라고. 하지만, 아마 모든 한국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자 정보값 높은 답은 얻기 힘들 것이라고 보충설명도 해줬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인들은 어느 곳 출신인가에 따라서, 말투, 생김새, 성격, 식습관 등이 천양지차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일단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사니, 죄다 중국의 시市 하나 정도 크기의 지역에서 온 셈이고 (행정구역상 성省의 아래 단위인 중국의 시는 한국의 도 정도 규모에 해당한다. 실제로 내가 사는 광저우시는 경기도만하다), 나머지 절반을 다 합쳐도, 중국의 성 한곳 규모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어느곳에서 왔든 중국의 일개 성 출신들의 편차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더구나, 지금처럼 서울중심주의가 강화되고, 수도권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상황에서 한국에 살지도 않고, 한국 전문가가 아닌 중국인이 보는 해상도 수준으로 한국인의 지역적 특성을 판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재미없는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 내 부탁이었고, 반대로 나는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중국인들의 출신지역별 다양성을 관찰하는 것이 퍽이나 재미있었다.
중국에는 한반도 혹은 남한 크기를 갖는 성급 행정구역이 31곳 존재한다. 인구도 14억이 넘으니, 면적이나 인구같은 단순체급으로만 따지면 30개의 한국을 합쳐 놓은 것이, 중국이라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일본과 비교하면서, 국토면적이나 인구로 볼 때, 상대적 대국에 속하는 일본을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기에 한국인들은 허풍이 센편이라고 농담삼아 얘기해왔다. 그런데 2~3배에 해당하는 일본이 아니라 하물며 그 열배가 넘는 중국과 비교 경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로는 제3자가 보기에 진짜 어이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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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중국을 바라보는 하나의 유효한 관점이 ‘another 유럽’에 대한 상상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지금은 EU라는 지역적 정치, 경제 공동체도 존재하지만, 그 역사는 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시절부터 따진다고 해도 100년도 되지 않는다. 또 2010년 PIGS등의 재정위기와 브렉시트 이후로는 그 지속가능성 여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그런데, 대안역사적 관점으로 조금 다른 유럽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중국은 고대문명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국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중화문명뿐이라고 강조한다. 만일 고대 그리스 문명을 계승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왕조를 교체해가며 존속했다면 지금 유럽공화국은 어떤 나라가 돼 있을까? 그들이 지금 공통의 표준언어와 단일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데다 근대국가로 전환하면서 ‘범유럽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면 그들에겐 얼마나 많은 이질성과 공통점이 존재할까? 물론, 게르만이나 골, 앵글로색슨과 라틴 등이 결합된 한족에 버금갈만한 규모의 ‘코어유럽’민족이 천년간 서서히 형성됐고, 다시 근대에 외연이 확장된 ‘범유럽민족’이 존재한다는 시나리오에 기초해야 한다.
터무니 없다 싶어 전혀 동의가 안된다면, 과거가 아닌 현재에 닻을 내리고 또 다른 시나리오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만일 미국이 불과 역사가 200년된 신생국이 아니라 천년제국이라면 어떠할까? 현재의 미합중국이 다수의 민족들이 오랜 기간 각축을 벌이며 하나의 정치문화 공동체를 형성해왔고, 지금의 미국민족을 만들어서 지난 200여년간 세계의 패권국 노릇을 해왔다면 그들은 지금의 미국과 얼마나 다른 문화와 정치적 양상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중국, 혹은 중화제국과 아주 많이 다른 나라일까? 너무 뜬금없이 들린다면, 의도를 바로 설명하겠다. 나는 지금 너무나 오랜 기간 이웃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히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불가해한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중국이 유럽처럼 수많은 나라로 쪼개져서 존재한다든가, 모든 성이 미국의 주와 같은 수준의 자치권을 갖고, 연방국가를 이루고 있는 상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반대로 유럽과 미국을 낯설게 보면서, 그들의 대안역사결과물이 중국과 얼마나 다를까 한번 상상해 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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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민족개념을 한번 정리해 보자. 근대 민족국가 형성의 기초가 되는 ‘민족’ 개념 인 Nation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우리 한민족과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Nation의 개념이 만들어진 유럽은 오랜 기간 소규모 지역단위의 봉건제를 유지하다가, 근대시기에 이르러서야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출현했다. 출판기술이나 미디어, 그리고 근대적 교육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반 대중에게도 민족이라는 개념을 심어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하지만, 중국, 한국과 같이 일찌감치 봉건제를 탈피하고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유지한 동아시아의 왕조국가는 중앙뿐 아니라, 지방의 엘리트들에게도 이미 근대 이전에 ‘왕조’를 넘어서는 민족의 개념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희姬씨와 강姜씨같은 특정 성씨들이 모든 지역과 온 나라를 지배하는 종법 제도가 서주西周시대 봉건제의 기반이 됐다. 공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유교이념을 만들어 가국家國이 국가國家로 자연스럽게 진화하면서, 국가와 가문의 윤리적 접점을 갖게 했다. 국가는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고,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와 군왕에 대한 충성은 같은 이념적 뿌리를 갖게 됐다. 국가와 가문, 중앙과 지역의 제도적 접점은 과거제도였다. 정부의 관료가 되기 위한 과거시험을 준비시키기 위해 지역에 유교 교육기관이 들어서면서, 이런 이데올로기가 매우 체계적으로 지역의 엘리트들에게 주입되었다. 이런 역사가 500년에서 1000년가까이 유지됐다.
과거제도를 포함한 교육과 관료선발 시스템이 완성된 것은 중국의 경우 북송시절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일천년전이다. 민족이 혈통과는 무관한 문화적 개념이었다는 사실이 반론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 중국인들의 전통적 천하관에서 화華와 만이蠻夷를 구분하는 것은, 중국 왕조들의 핵심이념인 유교와 이에서 파생한 생활풍속을 받아들여서 감화됐느냐 아니냐가 관건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과 같은 명확한 국경과 영토개념이 확립되기 전에는 강역疆域이라는 넓은 스펙트럼의 회색지대 혹은 완충지대를 사이에 두고 중화제국과 오랑캐들의 땅이 구분되었다.
그래서 과거에 중국인들이 가졌던 민족 아이덴티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뒤에 언급하게 될 구졔강의 중화민족 단일론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천하, 중화/만이에 대한 통념과는 달리, 북송시기의 정치적 환경이 중국인들에게 한족중심의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일찌감치 형성시킨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유는 북송이 한이나 당과 같이 대륙을 독점하는 ‘천하제국’이 아니었다는 역설 때문이다. 즉, 중국 역사에서 문화적으로 중원왕조의 적통성을 갖는 송은 상대적으로 무력이 취약한 인문국가였기에 서쪽의 서하나 동북지역의 요와 금이라는 이민족 왕조와 대등한 혹은 열세적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념적으로는 몰라도, 외교적으로는 사방의 만이를 복속시키는 천자의 위엄을 갖출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런 이웃나라들과 명확히 구별되는 “한족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송”이라는 일종의 민족국가 아이덴티티가 중앙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리고, 중앙뿐 아니라 지역의 엘리트들도 이런 개념을 점차적으로 수용하게 됐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비슷한 시기에 고려왕조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내의 단일한 왕조국가와 민족에 대한 개념이 중앙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교를 중심이념으로 삼고, 과거제도를 통해, 전국의 엘리트를 선발하는 제도가 확립된 것은 조선 왕조이니, 송과 유사한 수준의 민족국가 아이덴티티가 형성된 것은 조선왕조시기정도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이런 형태의 민족개념을 근대 국가의 기반이 되는 nation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nation 개념이 일반인들, 즉 평민들의 의식에 심어진 것은, 당연히 신분제가 철폐되고 의무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한국과 중국 특히 생산력과 경제의 발전으로 송대이래 신분제가 사라져 거의 모든 사람이 과거에 참여할 수 있던 중국의 경우에는 “일종의 민족 공동체” 개념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일찍 왕조국가 전역에 확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nation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정치 문화 공동체를 뜻하는 ethnie개념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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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가 되는 한족뿐 아니라 56개의 민족을 통합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한국과 같은 소위 단일민족 국가와 달리,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는 state nation 국족國族이라는 별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연유이든 복수의 민족이 하나의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반도의 남북한과 같이 하나의 민족 nation이 복수의 근대 국가 혹은 정치 공동체 states를 형성할 수도 있다. 물론 중국은 실제로는 별개의 정치공동체 state가 돼버린 타이완에 대해 하나의 민족국가nation state라는 주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원주민인 소수민족을 제외하고도 수백년간 대륙남부에서 이주한 본성인과 국공내전 이후 이주한 외성인 모두를 포함해서 한족이 다수이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라고 본다. 또, 대륙과 마찬가지로 소수민족을 포함해 중화민족인 하나의 국족 state nation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타이완 정부가, 중국내 최초의 공화국이며 유일한 state였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선대라고도 볼 수 있는 중화민국을 계승한 또다른 정부라는 점도 이유가 된다. 여하튼 이와 같이 민족과 국가는 다양한 정의와 형태를 갖을 수 있다.
중화민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앞에서 설명한 한족중심의 민족개념과 달리 이런 오래되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갖는 중화민족의 개념이 설득력있게 정리된 것은 백년이 채 되지 않았다. 가장 정교한 개념인 <중화민족다원일체론>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공개됐다. 그 주인공은 중국 사회학과 인류학의 비조인 페이샤오퉁費孝通이라는 학자이다. 청말과 신해혁명 직후인 민국시기 초기까지 이런 개념들은 반전을 거듭해왔다. 캉유웨이같은 복벽파 사상가들은 여전히 청왕조가 중화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의 근대국가로 이행하기를 바랐지만, 쑨원과 같은 국민당 혁명가들은 당초에 청과 만주족을 배격하고, 한족 중심의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원했다. 그들중 일부는 지금의 동북지역인 만주땅을 떼어, 이미 한반도를 병탄하고 만주를 노리던 일본제국에 할양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까지 주장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각 성이 독립된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지금의 미국과 같은 중화연방을 구성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마오쩌뚱 자신도 젊은 시절에 이런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국민당은 나중에 한족과 다른 소수민족의 연합체로서의 중화민국 개념을 승인하게 됐고, 이는 중국 공산당 정부로도 이어지게 된다. 이들은 초기 공산주의의 국제주의적 이념에 입각해서 민족을 초월한 무산계급의 연대를 강조하기도 한다. 일본이 동북지역에 만주국을 수립했던 1930년대에는 구졔강顧頡剛이라는 역사학자가 한漢족과 滿蒙回藏을 떼어내 중국을 분리해서 통치Divide and conquer하려한 일본에 맞서기 위해, 민족의 혈통과 풍속의 개별성보다는 문화전통을 강조하여 중화민족을 단일한 고도의 유기적 통합 공동체로 주장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국족state nation개념의 원형에 해당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당시 말리노프스키의 제자로 런던정경대 인류학과 박사학위를 받고 갓 귀국한 청년 인류학자 페이샤오퉁이 이에 반대하며 일대 논쟁을 벌이게 된다.
페이샤오퉁은 이런 양 극단의 관점을 벗어나, 역사적인 시각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중화민족의 형성을 설명한다. 삼천년전 황하중류 유역을 지배하던 화하華夏족에서 출발하여 서주, 춘추전국 시대와 진한제국의 통일을 거치며, 서서히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을 통해 한족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통해, 북방 유목민족이 다시 대거 유입되고, 당과 송을 거치며 이런 과정이 반복돼 남북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특성을 가졌지만 문자를 포함한 핵심문화와 정치이념은 하나로 통합된 한족이 생겨났다. 명시기에 서남의 산악 지역이나 남방의 소수민족이 기미羈縻제도를 통해 자치권을 인정 받으면서 다시 제국에 통합됐다. 비교적 통일성을 가진 왕조국가와 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만주족인 청이 마지막 왕조를 이어받고 제국의 판도를 넓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에서도 주변부에 해당하는 내몽골, 티벳이나, 신장, 만주족의 땅인 동북지역이 모두 중원제국에 속하게 됐다. 자연히 이 지역에 거주하던 비한족들도 중화민국수립 이후에는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다른 지역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한화된 지금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신장과 시장의 화근은 이때 생겨난 것이다. 페이샤오퉁의 설명과는 별개로 지금의 광둥과 같은 최남방지역의 민중들이 유교국가질서 그리고 토지소유권의 국가인정에 대한 댓가로 조세와 부역제도에 편입되면서 한족의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명나라 시기로 보는 역사인류학 연구결과도 존재한다. 중화민족은 단순한 근대적 상상의 결과라기 보다는 삼천년에 걸쳐서 서서히 몸집을 불려간 역사적 실체가 있는 공동체라는 설명이다.
(2)편으로 이어짐)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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