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근대라는 거짓말」의 12회 연재글의 마지막이다. 필자는 대안을 제출할 능력이 없다. 다만 함께 고심하고자 했다. 그간의 논의는 정리되어 명쾌하지 않고 좌충우돌했다. 이 마지막 글도 마찬가지다. 문제의식을 가진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고 마무리하기 위해 길어졌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1. 다시-우형(又形), 구조와 사건
인간문명이든 지구이든 사건의 과정으로서 그 실재를 보여준다. 교통사고라는 사건(event)에서 자동차는 살상무기일 뿐이다. 물리적 공간의 이동이라는 사건에서 자동차는 편리하고 유익한 도구다. 하지만 자동차는 지구의 기운을 해치는 유독가스를 뿜는다는 사건에서 맹독물질 살포기다. 독가스 없는 수소로 자동차가 달린다고 해도 자동차는 무질서 에너지인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이 점에서 자동차는 무질서도의 혼돈 발생기계다.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다면 그냥 쇳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전세계 자동차의 대다수는 하루 24시간 중 최소 12시간은 쇳덩어리일 뿐이다.
위 자동차 예처럼 사물은 다중상태에 있고 어떤 사건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실재(reality)는 다르다. 동학의 말로 하면 사물은 사건관계에 따라 다시-우형(又形)이다. 우형은 다른 실재다. 여기서 다름은 동일한 사물에서도 사건 생성의 차이로 실재가 다르게 나타남을 말한다. 위 자동차에서처럼 동일물에서 다른 실재가 나타나는 것은 사건의 생성관계에 따른다. 이는 곧 관계의 다시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있어 자본제적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들의 사건행동이 자본주의적 관계를 형성한다. 구조가 사건을 만들어 지배한다면 동일물의 실재는 항상 같아야 한다. 다시-우형일 수 없다.
24시간 인간들의 행동이 자본주의 구조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우정, 이웃에 대한 상호부조의 협동, 뉴스의 자기희생적인 미담사례, 익명의 기부 등은 자본주의 구조와 무관하다. 구조는 인간들의 이데올로기에서만 존재한다. 구조는 내재화된 관념체계 즉 신념이고 이 신념에 따라 인간은 행동을 한다. 결국 인간은 이데올로기적 존재다. 자본주의 구조, 사회주의 구조는 감각되거나 만질 수 있는 실재가 아닌 이데올로기 구조일 뿐이다. 구조는 실재하지 않는다. 자본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인간들이 자본주의적 행동을 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이 약육강식이라면, 자본주의에 사는 인간들이 항상 약육강식의 행동과 사건만을 내지는 않는다. 국지적으로 인간들은 자본제적 사건이 아닌 호혜적 상호부조적 사건을 내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구조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부조적 행동이 필요하다. 지구는 지구에 거주하는 뭇 존재들이 상호부조로 얽힌 자기생성체다. 물, 바람, 햇볕, 뭇 동식물, 인간 행동이 상호부조로 얽히지 않으면 지구는 지속 생성되어 유지될 수 없다. 벌 없는 꽃의 만개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관점은 작은 지역에서라도 상호부조의 생성체를 만들고 이를 확산하는 일이 필요함을 말한다. 이것이 후술할 지역화의 의미다.
그런데 이제 자동차라는 사물은 자율자동차 – 사물컴퓨터로 진화하여 ‘반사물(反事物)’(이는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의 견해다.)인 정보네트워크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일부 인간들은 이것을 4차산업혁명이라 부른다. 심지어는 ‘화려한 공산주의’라는 이름까지 붙이며 유토피아로 선전하고 있다. 블록체인 숭배자들은 그것이 민주를 확대할 수 있는 기술이라 말하지만 인간과 지구 살림이 그런 블록체인까지도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블록체인이 필요한 경제, 정치라면 그런 경제, 정치체제가 왜 필요할까? 그렇다면 블록체인이 필요한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전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구 2~3만 명의 군 단위 지역이 자립 가능한 지역 선순환 경제와 상호부조성, 자기생성력(자생력), 자기 통치력(자치력)을 가진다고 전제하면 과연 블록체인이 필요할까? 나아가 거대 지구네트워크의 정보 지배 통치체제에 편입되어야 하는 것인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지구 경제체제와 지구 정보네트워크는 지구의 시장화라는 근대 자본생산의 지배체제에 불과하다. 지구 경제체제와 지구 정보네트워크를 그대로 두고 태양광, 풍력, 수소 등의 이른바 청정에너지만으로 기후변동에 대응할 수 있을까?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생산관계를 지구의 생태수용력 한도내에서 질적 변화를 추구하는 탈성장의 생성관계로의 전환 이동이 필요하다.
“생산문명에서 생성문명으로 이동해야 한다.”(강주영, 「시작된 개벽 – 생산문명에서 생성문명으로의 이동」 『다시개벽 2022 가을호』, 통권 8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 근대가 한 일은 인위선택의 멸종
근대는 인위선택에 의한 멸종의 역사다. 중세 신성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서구적 근대이성이 지구의 자기개벽인 기후변동에 허둥댄다. 기후변화는 거대한 지구정치의 가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산관계와 지구의 생성관계가 대립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아니다. 인간들끼리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지구라는 생성체와 호모사피엔스 종 자체가 충돌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인간들의 무제한 생산에 대항한 지구기운(氣運) 변화의 급진화이다. 동학의 기화(氣化) 관점에서 지구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기기운(自己氣運 – 이하 자기自氣로 줄임) 생성을 하는 생명체다. 기후변화는 지구 자기생성(自氣生成)의 거대한 급진적 가속화를 말한다. 지구개벽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의 점진적 진화 과정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들의 인위선택으로부터 촉발되었다. 생산은 지구에 대한 인간의 인위선택 과정이고, 생성은 지구의 자발적 진화 과정이다. 인간의 생산관계와 지구의 생성관계가 급진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지구 생성질서(땅의 질서로도 표기)에 따르며 인류의 신진대사를 유지해준 농민은 이제 더 이상 생명의 수호천사가 되지 못한다. 농민은 지구 생성관계로부터 이탈하여 인위 생산관계로 편입된 지 오래다. 농민은 더 이상 작물생산자로 부를 수 없다. 바이엘, 몬산토, 신젠토, 듀퐁, 카길, 한국의 주식회사팜한농(LG), 농우바이오(농협)를 어찌 농민이라 하겠는가? 세계 곳곳에서 땅의 질서에 따르는 소농, 가족농이 남아 있지만 유전자 편집과 바이오화학으로 무장한 농기업에 의해 농민은 멸종되었다. 지금 농민, 농촌, 농업(삼농)은 자본을 위한 산업으로 존재할 뿐이다. 근대농업은 산업이지 농사가 아니다. 근대농업은 프롤레타리아의 값싼 노동력을 유지하고, 생산의 원재료 동원체제였을 뿐이다. 삼농은 이미 완벽히 자본과 도시가 장악해서 균열이 났다. 생태농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윈의 자연에서의 선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농민은 인위선택에 의해 멸종했다고 선언해도 좋을 지경이다. 더 많은 수확량을 내는 벼, 밀, 콩, 옥수수, 포도, 감자 종자만이 인위선택으로 살아남고, 수확량이 적은 벼, 밀, 콩, 옥수수, 포도, 감자 종자는 인위선택으로 멸종하고 있다. 어디 종자뿐이랴? 동물, 가축, 기계, 호모사피엔스의 어떤 종족까지도 인위선택으로 멸종되었거나 멸종하고 있다. 식민지 개척과 세계화는 상호부조의 세계화가 아니라 특정사물과 생명, 인간 부족들의 멸종 역사였다.
마차의 자동차라는 기계로의 대체는 편리한 것이지만 그 대가는 참혹하다. 마차를 자기생산할 수 있었던 자치민들은 공장의 노예가 됨으로서 자기통치, 자기생성의 기반을 잃었다. 자치민들은 스스로 자동차를 자기생산할 수 없다. 자동차는 지구적 협업과 분업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 이제 자동차라는 기계는 지능형자율자동차가 되었다. 자율자동차는 정보와 컴퓨터가 지배하고 있다. 자연선택도, 인위선택도 사라지고 정보알고리즘의 선택이 인류의 미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보알고리즘은 자본기획자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들에서 선택하지 자치민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물컴퓨터 – 사물인터넷이라는 지구적 네트워크는 민중들이 자기통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자기통치할 수 없다면 어떻게 자유와 평등이 있겠는가? 전세계의 자율자동차 네트워크를 들여다볼 수 있는 CIA 등의 정보기관과 구글은 지리산, 몽골 초원, 알티프라노 고원의 자율자동차에 있는 당신을 몇 분 안에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의 정치도, 사물의 정치도 아닌 정보의 정치다.
필자는 지금 자율자동차에서 마차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율자동차를 개발하되 자율자동차, 인간, 정보네트워크, 지구가 관계 맺는 사건관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이 점은 뒤에서 더 상세하게 말할 것이다.) 이런 근대 생산문명에 의해 소수 부족은 멸종되었거나 멸종되고 있다. 개천절을 모시는 인구 8천만의 하늘족들은 위대하게도 살아남았지만 1860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제국인 청나라를 경영했던 만주족은 만주에 가도 만나기 어렵다. 아메리카의 잉카족, 마야족 등 다양한 부족의 아메리카 선주민은 이종교배나 유럽인이 가져온 질병 등에 의해 멸종되었다. 그것은 모두 인위선택이었다. 인간과 자연이 다른 것은 인간은 욕망에 의해서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에 따른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그 선택은 여러 사상, 철학에 의해 밑받침되었다.
3. 인류세의 빈 구석 – 진보제국세
필자는 인류세담론을 인위선택이 지구의 역습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류세담론은 무시당한 거대종족연합체인 지구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인류세’라는 이름은 빈 구석이 있어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위선택은 인류 전체가 동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빈 구석이다. 인위선택은 근대의 사회계약이 기만인 것처럼 자본생산문명의 주체들이 무수한 멸종과 학살을 통해서 이룩한 일이다. 근대는 지구를 착취하기 위해 인류 전체가 똘똘 뭉친 시대가 아니라 인간종들에서 특정 진보족들이 인류 전체를 지배한 시대다. 근대는 모든 호모사피엔스종들의 인류세가 아니라 인류의 일부인 진보족들의 세계였다. 진보족들에 의해 이른바 야만족, 미개족, 재래종, 자치민들의 자기 기술과 선택권은 멸종되었던 것이다. 근대 진보족들의 인위선택으로 발생한 기후변동으로 근대 산업 생산문명의 파국을 염려하지만 이미 파국은 근대 초기부터 거대하게 발생되었다. 사라진 인종, 생물들에 대해 인류세담론은 지구와 대칭할 뿐 명확히 인류세의 핵심주체를 묻지 않는다. 사라진 인간 종족들이, 소농들이, 종자들이, 동물들이, 어찌 인류세의 주역이겠는가? 진보제국의 책임을 모든 호모사피엔스종에게 물을 수는 없다. 사라진 종족과 소농이 더 많지 않겠는가? 그들에게까지 파국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인류세의 주역은 진보제국을 형성하는 자본족과 국민국가다. 근대는 ‘진보제국세’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부르주아지적 진보인 자본주의든 프롤레타리아적 진보인 사회주의든 무한한 진보의 유토피아는 영원할 것이라고 진보족들은 착각했다. 문제는 인류가 아니라 진보족이다.
세계, 사회, 자연, 생명, 사물들은 어떻게 질적 변화, 이행을 하는가? 이행에는 방향이 있는가? 없다. 진보는 근대의 거대서사였다. 유토피아를 향해 달려가는 지구호의 승객들은 이성의 승리를 찬미하며 샴페인을 마셨다. 불평등은 사회주의로 해결하면 되었다.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나 진보족들이다. 그들은 생산력의 증진이 진보의 기반이라고 믿었다. 진보열차는 전쟁으로, 불평등으로, 식민지로 철로를 깔았으나 궤도를 받치는 지구는 영원히 건강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생산이 자연의 생성물을 인공화하는 것이라면, 생성물은 인간까지도 포함한 지구의 작동물이다. 생산은 생성에서 비롯하는데 생산의 시간이 생성의 시간을 추월하자, 지구와 인간의 시계가 달라졌다. 시간에 균열이 났다. 생산의 시간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는 진보동맹을 구축했으나 분배에서 적대했다. 분배의 평등이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인류 파국의 기후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생산을 통해서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문제다.
4. 진보는 지구의 아편
유럽에서 신성과 이성, 봉건세력과 신흥부르주아지 세력이 국민국가, 민족국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매시 매초마다 피를 흘리는 시절, 식민지에서 수탈한 부의 수취를 두고 다툴 때, 정반합의 변증법은 그럴싸했다. 합은 진보였고, 생명의 피는 자유, 평등, 욕망의 성취 진보의 낙원 유토피아로 위로되었다. 말이 정반합이고 변증이지, 제국은 식민지를 수탈하고, 부르주아지는 봉건귀족을 타도함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를 공장의 노예로 만든 것이 정반합이다. 변증법은 1974년 34살의 윤노빈이 외친것처럼 “분리하고 지배하라.”는 전체주의의 서사이다. 전체주의는 불평등과 멸종을 전제로 한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양질전화’, ‘부정의 부정’이라는 유물변증법, 그것의 역사화인 사적유물론은 진보의 주인을 자리바꿈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하면서 코뮤니즘이라는 진보의 종착역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달리는 열차의 종착역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모두의 파멸이다. 진보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동방에서는 진보가 아니라 당대의 수준에 걸맞는 태평성대, 태평천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진보의 종착역인 코뮤니즘 Communism을 공산주의共産主義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공산주의는 한국, 중국, 일본에만 있다. 서구의 Communism을 말할 때는 원어대로 코뮤니즘이라 해야 옳다.)
현실의 비참함, 불평등으로터 탈주하기 위해서, 자유와 평등을 이루기 위해 인간은 ‘진보’를 고안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진보는 지구와 자연친화 인종(이른바 미개족)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다. 우연하게 기계문명에 먼저 도달한 인종들은 진보라는 허구를 고안하고 기꺼이 진보의 괴뢰주체가 되었다. 근대는 인간들만의 인위적 선택의 목적의식적 문명을 구축하고, 자연스러운 선택을 무시해버렸다. 인간사회의 인위적 선택이 즉 인간이성이 자연스러운 선택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코뮤니스트당선언문’ 또한 다른 방향에서 인간 이성의 승리에 대한 헌사이자 인위적 선택이다. 시장자유주의적 이성이나 코뮤니스트적 이성이나 생산력 진보에 대한 믿음은 같았다. 생산관계란 인위적 선택이 전부라 할 수 있고, 생성관계란 인간이 지구의 자기생성에 전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다만 보완하는 정도의 자연스러운 선택관계다. 자연스러운 선택이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선택을 말한다. 시장자유주의나 코뮤니즘이나 둘 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진통제다. 보수적 진보는 지켜서 불안을 떨치고, 급진적 진보는 바꿔서 불안을 떨치려 한다. 진보는 지구의 아편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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