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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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이어짐)

 

5. 지구의 질적변이

인간의 행동은 분명 목적의식성이 있다. 그런데 이 목적의식성은 많은 경우 이념에서 주어진다.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고 욕망의 분출이기도 하다. 이 목적의식성조차도 사건들의 얽힘에서 변이를 겪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독립된 법칙으로 객관적 목적의식성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사건, 사물, 생명들이 서로 얽혀서 이루어지는 결과는 어떤 주의의 목적성에 따르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성공 사례는 나만의 목적의식성이 이룬 쾌거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얽힘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복잡계 전체의 질적 상태는 개개인의 목적의식성과 무관하게  형성된다. 다만 확률적으로 결과에 기여한다. 인간과 우주•자연을 함께 생각할 때에 목적의식성은 전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미래는 목적의식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지 않다. 미래는 방향이 없다.

시간은 직진이 아니다. 해석된 과거로서 역사는 있지만 역사 자체가 세계와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며 앞으로만 가는 것도 아니다. 역사주의란 허구다. 진보란 역사주의가 만든 허구다. 사물과 생명, 사회는 질적변이를 하지만 다만 그럴 뿐이지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칸트가 목적성을 설정한 것은 목적이 없는 질적 변이는 존재에 의미를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시간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하지만 세계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이 공허한 것이다. 왜 꼭 인간의 선택이 주도적이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이 목적성을 차용하여 코뮤니즘으로 가는 방향을 설정했다. 시장주의는 생산력 진보에 대한 시장의 성장을 목적으로 삼고, 코뮤니즘은 모두의 분배를 목적으로 삼았다. 이런 목적성이 과연 세계를 변화시키는가? 확률적으로 그럴 수 있다. 인간만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만 지구를 주체로 상정하면 인간들의 목적의식성은 확률적으로 기대되는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성을 논리화 체계화한 이데올로기 또는 이념, 사상, 철학은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지금의 사건이 개념들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 목적성에 실재(Reality)를 맞춘다. 인간이 작위적으로 만든 개념들에 실재를 맞추는 것이 전체주의가 아니면 무엇인가? 일부 코뮤니즘은 지금의 사건이라는 실재를 현실에 실재하지도 않는 코뮤니즘에 복속시키려 한다. 시장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왕국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개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개념에 실재를 꿰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앞서 자동차를 에로 들어 말한 사물의 다중상태에서 지금 전개되는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만이 실재라는 것이다. 이념, 목적성은 실재가 아닌 허구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사건의 실재에서 평화, 정의, 평등, 행복, 호혜성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생성이 필요하다. 필자는 그것이 상호부조성이라고 본다. 현실에서의 상호부조성이 필요하지 허구로서 개념의 코뮤니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상호부조성은 이념이 아니라 지구와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생각한다.

사건은 과정으로서 질적 상태의 변이를 일으키는데 여러 변이들 중에서 자연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택으로서 대를 이은 전개가 다윈 진화의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스럽다는 것은 인간의 목적의식성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자연스러운 선택이 비선택된 종들의 도태를 의미한다면 이처럼 불평등한 자연스러운 선택도 없다. 도대체 다윈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다윈의 약점, 또는 오독을 피하기 위해 일부 다윈주의자들은 공존•공생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박테리아가 없으면 생명은 살 수 없다. 사람도 엄청난 박테리아와 더불어 사는데 박테리아가 없으면 사람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자연도태든 공존공생이든 어쨌든 자연스런 선택이 일어난다면, 현실에 실재하는 여러 사건들의 여러 체계 중에서 특정 체계가 복잡계의 작동과정 중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살아남아 진화(발전이 아니라 질적 전개)한다는 것인가?

다윈의 진화론과 칸트의 자기조직화는 다르다. 칸트의 자기조직화는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고 목적성을 가진 것이다. 칸트에게 생명은 살기 위한 목적성의 존재고, 피리는 연주되기 위한 목적성의 존재다. 다윈의 진화는 자연스러운 선택의 결과이지 목적성의 결과가 아니다. 자기(自己)는 철학에서 주로 어떤 존재의 주체를 일컫는 말이다.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 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 반응, 체험, 사고, 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라는 개념은 세계와 연관되어 있어도 존재의 연속성과 단독자임을 전제한다. 이 자기는 스스로의 목적과 방향을 가지는 존재다. 인과율이라는 기계적 법칙에 완벽히 종속되는 것이라면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방향성과 목적성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사건과의 관계보다는 자기에 강조가 있다. 모든 목적은 미래에 있지 지금이라는 순간이 아니다. 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자연프로그래밍된 입력된 기계의 시간을 가지고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표상한 것이다. 여하튼 자기는 실재(Reality)다. 자기라는 실재는 스스로를 조직한다. 그것이 자기조직화(Self Organization)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기계는 단지 운동하는 힘(bewegende Kraft)만을 가지나 유기적 존재자는 자기 안에 형성하는 힘(bildende Kraft)을 소유하고, (…) 스스로 번식하며 형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힘은 운동 능력(기계성)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 『판단력비판』 65절,  칸트의 자기조직화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자기를 조직한다.

복잡계의 자기조직화는 다윈처럼 자연스러운 선택으로서의 목적성이 없는 변이도 아니고, 칸트처럼 자기 목적성을 가지고 사건을 내는 것도 아니다. 생명을 포함한 것으로서 사물은 사건관계, 사건얽힘의 전개 과정에서 질적으로 도약한다(창발, 떠오름)는  것이다. 창발은 복잡계 얽힘의 필연적 결과이지 여러 개 중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윈과 다르고, 목적성과 방향이 없다는 점에서 칸트의 자기조직화와도 다르다. 소멸한 것은 도태가 아니라 새 질서에 내재화, 맥락화 된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자기전개다. 창발은 자기복제 생성을 하는데 그것을 프렉탈이라고 한다. 이것들의 체계가 복잡계다. 복잡계의 창발로서 자기조직화는 다시 말하지만 다원처럼 자연스런 선택의 결과도 아니고, 칸트처럼 목적성을 가지고 목적을 이룬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내재한 질서의 자기생성 결과인데 목적성이 없기에 불확정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세상은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가 있다. 세상은 필연적으로 코뮤니즘사회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과학 또는 진리는 점쟁이가 아니다. 코뮤니즘은 목적성의 세계가 아니라 기대되는 사건이다.

 

6. 동학(東學)과 지구 자기이화(自氣而化)의 종착지

동학 창도자 수운의 무위이화는 지기(至氣)들의 활동 관계와 과정(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관계 과정)이 사건의 생성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를 조화(造化)라고 하는데 이 생성은 정(定)에 부합해야 하기에 ‘조화정(造化定)이라고 한다. 수운은 ‘정(定)’을 “정자 합기덕정기심야 定者 合其德定其心也”라고 하였다. 수운의 ‘정’은 칸트의 목적성과 같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르다. 그럼 합기덕정기심은 무엇인가? 여기서 ‘기其’는 분명 ‘천天’인데 그 천은 조화의 근본 동력이다. 조화의 근본 동력은 모든 존재에 있다고 말한다. 모든 존재들은 시천자(侍川者)다. 조화(생성)의 근본 동력을 인격화 하면 천주, 우리말 한글로는 ’한울님‘이다. 동학의 시천주가 ‘시천/주 – 시천한 님’인지, ‘시/천주 –천주를 모심’인지는 논쟁적이다. 김지하는 합기덕을 “생명활동의 본성적 전개에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천을 “생명의 질서”라고 본 것이다. “정기심”은 생명의 질서를 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지하의 생명의 질서가 즉 단백질이 생명이 되는 근원, 생명 변이의 근원은  생물학, 의학 물리학에서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동학에서는 사건의 질서든, 사물의 질서든, 생명의 질서든 ‘자기이화自氣而化’라고 할 수 있다. ‘자기’는 앞서 말한 자기조직화에서는 자기(自己)이고 ‘자기이화’에서는 자기(自氣)임을 유의했으면 한다.

자(自)는 사건, 사물, 생명 자체를 말한다. 동학에서는 모든 사건, 사물, 생명의 근원에는 ‘기(氣)’의 활동이 있다고 본다. ‘영(靈)’은 기의 밝은 활성화 상태다. 신령하다는 것은 긍정어로서 “기 막히다”와 같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而)’는 말미암을  ‘이’인데 ‘~으로부터 비롯한’, ‘지금 상태 이전의 상태로부터’를 말한다. ‘화(化)’는 상태의 질적 이동 또는 도약 과정을 말한다. 무위(無爲)’란 사물, 사건, 생명의 질서에 부합하는 자기自氣 작동이라 할 수 있다.

자기이화하는 사건, 사물, 생명의 최종 도착지는 없다. 최종 도착지 없이 생성되거나 소멸한다. 존재하는 것은 사건, 사물, 생명들의 자기이화 관계의 질적 변화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 진보, 보수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자연계는 자기조직화, 자연스러운 선택, 자기이화이든지 간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영역이다. 지구•자연, 사회까지도 그렇다. 그렇지만 이들이 대상이 아니고 자체존재로서의 역할은 분명한 것이고 그것은 단독자로서가 아니라 관계자로 작동하기에 ‘자기이화自氣而化’라 할 수 있다.

최종도착지가 없다면 얼마나 공허한가? 존재의 불안이 엄습한다. 도착지가 없다면 사상과 철학은 불안하기 그지없는 언어가 되고 만다. 그렇지 않다.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상태에서의 행복, 정의, 평화, 호혜성을 추구하면 된다. 미래는 늘 지금으로 존재한다. 최종도착지는 지금이다. 우리는 언제나 최종 도착지에 있다.

 

7. 지구 상호부조의 담지자 경농시민(敬農侍民)

이전에 프롤레타리아가 진보의 주체였다면, 진보가 폐기될 수 밖에 없는 기후변화 시대, 지구의 시대, 생산관계가 아니라 생성관계로의 탈성장 시대에 새로운 주체개념이 제시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주체는 없다. 주체는 정태적이고 고정된 존재로서의 계급이 아니다. 지구와 사람과의 상호부조 생성의 사건을 일으키는 자가 주체다. 사건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사건의 담지자가 주체다. 모든 존재들은 모두 사건을 일으킨다.

필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농민이라는 멸종된 천민(賤民)을 천민(天民)으로 재탄생시키고 싶다. 지구 상호부조의 생성자로, 불평등과 억압의 해방자로 다시–우형(又形 – 동학의 말로 또 다른 세상)의 주체, 다시개벽의 사건을 일으키는 생성자의 지위를 부여하고 싶다. 멸종한 농민이 해방자라니? 이 때 농(農)은 식량생산, 작물 생산의 뜻이 아니다. ‘농’은 지구의 질서 – 땅의 질서를 기르는 것을 말한다. 해월의 양천(養天)과 같은 뜻이다. 앞서 생성의 근본동력으로서 천(天)을 말했다. 천은 곧 지구의 질서다. 땅의 질서는 상호부조 생성의 질서다. 상호부조하지 않으면 지구는 존재할 수 없다. 인위선택으로 멸종된 자연스러운 상호부조 생성을 일으키고 기르는 것이 필자가 말하는 ‘농’의 새로운 개념이다. 굳이 ‘농’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은 생산관계의 공업적 이미지가 아닌 지구 생성관계에 ‘농’이 더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이 ‘농’을 식량생산의 ‘농’과 구분하여 ‘경농(敬農)’이라고 하겠다. 경(敬)은 동학의 경천, 경인, 경물에서 가져왔다. 여기서 경천, 경인, 경물의 내용을 더 언급할 여유는 없다. 경농의 담지자로서 경농시민(敬農侍民)이 필요하다. 시장 시의 시민(市民)이 아니라 경농을 모시는 시민(侍民)이다. 경농시민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구분되는 계급이 아니라, 지구 생성관계에 의해 활동하는 모든 존재를 말한다. 인간, 강물, 바다, 소나무, 토끼, 박테리아, 바이러스, 돌, 철 등 지구 생태계의 모든 존재들은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편의상 이들에게 즉 지구에게 ‘경농시민’이란 인격화한 이름을 줄 수 있다. 이병한이 활물(活物)이라 이름한 인공지능체(AI – Artificial Intelligence)가 지구의 상호부조 생성관계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활물도 경농시민으로 부를 수 있겠다. 사물컴퓨터 – 사물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상호부조의 지역화와 지역연합 – 지구경농시민의 출현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일은 공장, 활물, 시장이 경농시민으로 질적변이를 할 수 있는 관계방식을 찾는 것이다. 그 출발은 지역화다. 지구적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담지자로서 성장만을 추구하는 근대국가와 기업이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다만 성장을 위해 지구를 관리하려고 할 뿐이다. 기대할 수 없다.

경농시민이 상호부조적으로 작동하는 곳을 기존의 도시와 대칭하여 농시(農侍)라고 할 수 있다. 농시는 앞서 말한 농의 원리, 지구의 자기생성 질서가 실현되는 곳이다. 도읍도 시장 시의 도시(都市)라는 말 자체가 권력화의 상징이다. 도시는 곧 권력의 존재와 불평등한 지역을 전제로 성립한다. 도시가 아닌 농시에서 자치민은 단지 거주하는 주민(住民)이 아니라 지구와 더불어 주민(主民)이 될 수 있다.

앞서 경(敬)은 동학의 삼경 경천, 경인, 경물에서 가져왔음을 밝혔다. 잠시 해월의 말을 들어 보자.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으니……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치리라.(해월법설 대인접물)

물건을 공경함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최고경지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물건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느니라.(해월법설 삼경)

천지만물이 다 시천주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해월법설 영부주문)

 

경물은 지구에 거주할 수 있는 인간, 사물, 생물의 조건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성환은 이렇게 썼다.

 

해월은 보다 구체적으로 천지를 부모의 포태(胞胎)에 비유하였다. 여기서 ‘포태’는 만물을 생성하고 길러주는 어머니의 ‘품’을 상징한다. 산모가 태아를 뱃속에 품고 있듯이, 천지도 만물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시스템과학으로 말하면, 이것은 ‘거주성(habitability)’ 개념에 해당한다. 지구시스템과학은 “지구는 어떻게 생물을 살 수 있게 하였는가?”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생물이 어떤 조건에서 살 수 있게 되었는가?”라는 생존 조건 내지는 거주 조건을 연구한다. – 조성환, 「기후변화 시대 근대의 종언」, 『다른백년 기획칼럼 K-사상사』, 2022.09.30

 

경물의 현실적 모습은 지역의 생태수용력 안에서 호혜적인 상호부조의 원리를 발견하고 기르는 일이다. 국가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집권하거나 혁명을 해야만 한다. 집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주의 – 에코파시즘이 되기 쉽다. 상호부조 원리는 일상 생활에서 인간적 규모의 교환에서 실천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지역화다. 지역화는 호혜적 상호부조, 자기통치(자치), 자기생성(자생)을 핵심원리 한다. 이 원리들이 어떤 지역에서 선순환을 하는 체계를 만드는 일은 지금 즉시 할 수 있다. 생협, 환경단체,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에 참여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의 관계망을 만드는 일이 지구 거주조건의 경물 실현이다. 경농시민이다. 이런 지역을 창발하고, 지역의 연합의 연합을 이룰 때 국가는 통치기구가 아니라 연합의 연합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행정연합 서비스기구가 된다.

발달된 첨단 기술,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은 지역 경농시민들의 공유재가 되어야지 지구적 플랫폼 기업의 소유가 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소유권을 가져오자는 불가능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의 경농시민이 공유하는 3501개의 읍면동 마을작업장(Smart Micro Factory)에서 활용할 때에 그것들은 독이 아니라 꿀이 된다. 골방에 앉아 컴퓨터 광산에서 블록체인 코인을 채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작업장에서 서로 마주보며 감응하면서, 인간의 정서와 함께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에 과학기술은 이병한이 말한 지구, 인간과 더불어 함께 하는 활물이 될 것이다. 자치민들의 생태적 생존기술은 오늘날 수공예로 대접받고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과 수공예의 상호부조적인 관게를 상상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다. 만일 어떤 마을에서 수공기술만으로도 마을의 기본 필요를 채울 수 있고, 그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면 수공기술은 낡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새로움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이용방법을 바꾸는 것도 경농시민이 할 일이다. 우버 같은 이윤을 위한 짝퉁 차량공유가 아니라 마을공유차량제를 실시할 수 있다. 할 수만 있으면 걸어서 한 시간 이내의 지역이 자립성을 가지는 지역선순환 경제가 필요하다. 지구자원의 이용이 획기적으로 줄 수 있다. 윤리적으로, 식품 안정성이 보장된다면 줄기세포를 이용한 대체육이나 식물육은 권장될 수 있다. 생산, 가공, 교환에서 기존의 농민과 도시민이 함께 책임지고 운영하는 연합농 3501개 읍면동의 농어민과 함께 하는 연합농사체제를 실현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이미 되어 있다. 도시민과 농어민이 농협에 참여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이 바뀌면 연합농 체제는 이미 물리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농협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다. 하나로 마트로 대변되는 농협의 경제사업과 금융사업인 농협은행의 양자가 지역성, 상호부조성, 생태성, 공공성, 참여민주성을 확보하면 연합농 체제는 곧바로 실현된다. 연합농체제어 모든 국민은 곧 경농시민이 된다.

이런 식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점차로 지구 생태수용력 한도 내에서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필자의 궁리는 이런 상상력과 기술을 수십 가지 쓸 수 있지만 따로이 지면을 얻어 밝히겠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동기에 지배당해 안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상호부조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태평성대가 필요하지 진보가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서는 “강주영, 「시작된 개벽 – 생산문명에서 생성문명으로의 이동」 『다시개벽 2022 가을호』, 통권 8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에 자세하다.

진보의 폐기와 지구 경농시민이 필요하다.

 

 

그 동안 읽어주신 독자들과 논의의 장을 준 다른백년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강주영

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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