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프양자중력이론’의 창시자인 현대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등에 의하면 시간은 관계의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시간은 다른 사건들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흐르지는 않는다. 주요한 이론적 근거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루트비히 볼츠만의 ‘열역학제2법칙 엔트로피’다. 시간의 방향, 크기, 속도는 모두에게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대개는 시간의 크기, 방향은 모두에게 같다고 착각하거나 전제한다. 현대경제학이 양자역학의 시간함수나 엔트로피 공식을 도입한다면 현대경제학은 전복되지 않을 수 없다. 현대경제학에서 시간은 생성되지 않는 그 어떤 독립적 실체다. 보통 시간의 척도는 태양을 기준으로 인간화되었다. 인간화란 말은 물리학의 법칙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엔트로피가 등장함으로서 물리학자들은 시간의 척도를 ‘인간화’가 아닌 ‘물리화’했다. 시간은 엔트로피 발생의 속도와 크기에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경제에서 시간은 공장에서의 상품생산과 효용의 소비 시간 속도를 말한다. 이 과정은 모두 엔트로피 증가의 과정이다. 현대경제학은 효용의 근본 원천인 자원의 생성순환 시간을 말하지는 않는다. 자원은 거기에 있어서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닫힌계의 엔트로피 증가는 거스를 수 없어서 자원의 한계는 명확하다.
엄밀히 말하면 지구는 고립계가 아니고 태양 에너지는 들어오고 나가며, 물질 이동은 없는 닫힌계다. 그런데 온실가스층으로 지구에서 방출된 열이 우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우주개발이 현실적 의미를 얻고, 자원 기술이 발전하면 지구자원의 한계는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주식민지를 개척하기 전에 지구의 기후 변화는 가난한 사람들과 동식물에게서 이미 파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닫힌계다. 태양에너지를 100% 사용하는 획기적 기술이 등장한다해도 물건을 만들 자원이 없다. 태양에너지가 생명과 땅에 비축되고 생성순환하는 시간에 비해 효용의 생산이 앞지르고 있어서 생산의 한계는 명확하다. 이런 점에서 지구는 열린계가 아니라 고립계다.
시간은 사건의 관계함수다. 생성론은 지금 이때의 사건함수라 할 수 있다. 철학의 생성론은 실재론과 맞서 있다. 20대에 한참 마르크스주의를 배울 때 원전은 소련 사회과학원판이고 번역은 아마도 일본판이었을 책에서 시간은 객관적 실재로서 유일성, 독립성, 방향성을 가진다고 했다. 이것은 아이작 뉴턴의 역학이었다. ‘뉴턴역학’은 아인쉬타인과 엔트로피로 유명한 루트비히 볼츠만에 의해 깨졌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시간함수를 사건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불확정성으로 본다. 근대 진보사관은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물리학이 무엇인지 알려면 “시간을 물어 보라”고 했다고 한다. 양자역학에서 시간은 입자성, 중첩성, 불확정성 등을 지닌다. 시간은 그 자신 독립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건의 관계에서만 생성된다. 실재론이 아니라 생성론이다. 실재론은 ‘신’처럼 독립자, 단독자로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이고, 생성론은 실체는 모든 주체들의 사건의 얽힘에 의해 생성되며, 그 크기나 속도 또한 사건의 얽힘에 따라 다르다. 내가 20대에 배운 시간은 실재론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짝퉁유물론이었다. 이 말은 스탈린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의 파산을 말하는 것이다. 좌측에서도 근대는 거짓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결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말로 오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르크스의 한계를 오늘에 비추어 말한 것인데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일반화하는 악용은 부디 없기를. 「호모 사피엔스」로 유명해진 유발 하라리는 화폐, 국가, 신 등을 허구라고 말하며 실재론을 맹렬히 공격한 바가 있다. 그는 한국의 교육방송에도 출현해 이 주장을 거듭 밝혔다. 생산경제의 주역은 노동과 지구가 아니라 실재하지 않는 국가, 화폐, 법인(기업) 등인데 필자의 생성경제론에서 살림(경제)의 주역은 사람과 지구이며, 지구와 사람, 사람과 사람의 생성관계함수다.
그런데 이런 시간의 특성이 경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경제는 인간에게 즐거움과 편리를 주는 ‘착한 효용’과 쓰레기, 전쟁, 질병 같은 ‘악한 효용’ 모두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성론에서 물건은 주체의 사건에서만 효용을 가진다. 주행되지 않고 주차장에 있는 차는 효용이 없다. 대개 정기 출퇴근하는 이들의 차량은 하루에 효용을 3시간 정도 제공한다. 이론 모형으로만 보면 개인 자동차를 위한 자원은 지금의 1/3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차는 주차하기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주차되어 있는 차와 운행되는 차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영업이윤이 목적인 우버 공유 차량이 아니라 자원의 효과적인 효용을 달성하기 위해 마을공유 차량을 제공하고, 이용 비용을 감가상각비와 보험료 정도의 실비로 제공한다면 우리는 엔트로피 증가 속도를 늦추는 것이 되고 그만큼 자원 생성순환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필자는 20여 년 전 독일의 지몬스발트라는 흑림 속 농촌마을에서 마을 공유차량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이용카드만 꽂으면 된다. 용도에 맞게 고급차량부터 경차 트럭까지 있었다. 이런 경제는 시간의 통제이자 엔트로피를 낮추는 것이라서 자원 생성순환에 유리하다. 그만큼 빈곤이 해소된다. 이 단순한 예에서 보듯이 효용의 크기, 속도, 혜택은 효용의 이용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경제의 생성은 지역의 문화, 관습, 사람들 간의 관계, 지역의 제도 등에 다르다. 모두에게 강제되지 않으면서도 모두에게 자유로이 공유되는 효용의 이용, 그에 따른 도시공간 설계와 이용은 정보공유가 이동 중에도 가능한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러서야 현실 동력을 얻게 되었다.
생명의 진화와 복잡계의 자기조직화(프렉탈, 창발)는 엔트로피를 낮추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람, 동물, 식물의 성장, 분해된 것들이 흙이 되어 식물을 키우는 에너지(지력地力)의 생성, 단백질이 생명이 되는 것처럼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전환되는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창발현상 등은 새 에너지를 생성하여 엔트로피를 낮춘다. 생명현상은 엔트로피를 낮추고 새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돌도 에너지를 생성한다. 흙이 굳어진 돌은 시멘트, 건축자재로 사용된다. 거꾸로 풍화된 돌은 흙이 되어 지력을 생성한다. 존재하는 자연계의 모든 것들은 사람 손에 오기 전에는 생명현상을 가진다. 통틀어 생태수용력이라고 하자. 그러나 무엇인가로 생산되어 인간을 위한 효용으로 소모되면 엔트로피를 높인다. 기계나 인공지능은 생명현상이 없다. 이것이 기계와 생명의 결정적 차이다.
착한 효용은 자연의 생성 속도와 수용력이라는 사건 체계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세계는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체계다. 가정하여 철금속과 석유가 고갈되었다고 하자. 철강 대채제인 탄소섬유도 석유화학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대도시는 무엇으로 유지되고 이용되며, 상품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나? 생태수용력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서는 앞서 공유차랑에서 말한 것처럼 첫째 효용의 이용 방법이 혁신되어야 한다. 둘째로는 생성 가능한 자원 이용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셋째로는 먼거리 교역이 필요없는 자원의 지역화가 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효용은 한 번 만들어 사용하면 되돌릴 수 없는 불효용화 과정이 되고 만다. 효용은 다른 말로 하면 점차로 자원 총량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지역은 점차로 효용을 생성할 수 없고 외부에서 자원을 가져와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으로 외부 자원을 가져 오는가? 가장 손 쉬운 것이 자본의 유치다. 지금 모든 자치체가 그러고 있다. 그런 방식이 한계에 도달했다. 즉 자본에 의한 성장의 한계 시대에 도달했다. 기후 변화는 성장의 한계를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구 65만의 전주는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철금속도 석유도 없다. 그럴싸한 대기업도 없다. 그것이 상상력의 한계고 기술에 대한 무지다. 지금은 100미터 건물도 나무로만 짓는다. 지금 전주가 주력할 것은 액화목재 기술이다. 액화목재가 철강만큼의 고인장력을 가지는 기술을 가진다면 플라스틱과 석유화학은 추방해도 좋다. 3D출력기와 액화목재기술이 결합되면 못 만드는 것이 없다. 에너지는 태양이 있다. 밀림의 나무를 베자는 것이 아니라 간벌목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무는 심으면 된다. 특히 속성수이고 우후죽순이며 고인장력을 가진 대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제방공사에는 인장력을 높이기 위해 대나무를 사용하기도 했다. 한옥에서 개판 대신에 대나무로 산자를 엮어 흙과 기와의 증량을 부담하기도 했다. 개인이 집에서 수제 전기자동차를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 시대다. 공유적 이용, 먼거리 교역이 필요없는 지역화, 석유화학에서 자연화학으로의 이행, 생태수용력 내에서 경제의 순환성 설계 등을 필자는 농(農)의 원리라 생각한다. 이 농의 원리를 주요한 경제 원리로 채택하는 것을 농시(農侍)라 이름했다. 생성경제는 농시와 같은 말이다. 생성경제에서 수도권이 좋은가? 호남이 좋은가? 호남이다. 지역소멸지는 자본과 권력이 소멸한 곳이라서 생성경제의 신천지다. 기후변화 때문에 그렇게 가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의 속도는 누구에게서나 동일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만 가는 것도 아니다. 거지와 부자의 시간은 다르다. 하루살기 버거운 사람들한테 이런 이야기는 쓰잘데 없는 지적유희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의 이런 속성은 미래를 저당잡아 민중을 유린하는 진보사관이나 역으로 보수사관도 다 기만임을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은 지금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기억으로 존재하지 역사가 객관적 실체로서 독립성을 가지고 그 어떤 법칙이나 신의 의지에 의해 앞으로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사주의다. 역사주의는 진보의 원천이었다. 역사주의는 마르크스 사적 유물론의 결정적 한계다. 역사주의는 유물론이 아니라 실재론이었다. 지금 나와의 이러저런 사건에서 펼쳐지는 시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언제 행복할 것인가? 생산이 작위의 개념이면 생성은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개념이다. 수운이 말한 무위이화는 생성의 원리다. 그것을 수운은 동학 주문에서 조화정(造化定)이라 하였다. 생명현상,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과정을 수운은 불연기연(不然其然)이라 하였다. 그 원천을 혼원지일기라 하였다.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가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이라고 동학은 말한다. 생성론이다. 생성경제에서 노동은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내용은 따로 더 자세하게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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