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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주 : 연재가 한없이 늦어지고, 연재에 일관성이 없이 오락가락하여 독자들과 담당자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약속된 6개월 12회의 연재가 4회 남아 급하게 ‘몸-생/명’을 키워드로 하는 제 나름의, 또 다른 생명사상을 제출합니다. 나머지 3회는 오늘 글을 바탕으로 2회에 걸쳐 또 다른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아울러 대선 이후에 쓴 ‘진리정치의 종말’, 그 이후에 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스토리 작가, 그리고 영화감독의 첫 번째 작업은 ‘세계관 설정하기’라고 한다. 창조하고자 하는 세계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30여 년 전 한살림선언의 저자들이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때 세계관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세계감’이 있다.

한살림선언은 ‘전일적(全一的)’ 생명의 세계관을 표방했다. ‘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되, 특히 전체로서의 생명세계와 부분 속의 전체성 강조했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감은 ‘전일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부분/전체-도식에 물음표를 던진다. 생명세계의 질서와 조화, 통일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분열과 차이의 역동적 생명감각을 불러낸다.

 

‘생/명’이라는 생각도구

‘생/명’이라는 기호는 ‘각비(覺非)’, 부정(No)의 생명감각을 부정의 생명사상으로 변환하기 위한 생각도구 중 하나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정의 사유를 생명의 세계관 안에 장착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생/명으로 다시 생각하기’는 말은 일차적으로 기존의 생명 관념에 대한 부정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유기체적 생명 관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초월적 생명 관념을 부정한다. 자연주의적 생명 관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사회구성주의적 생명 관념을 부정한다. 창조질서로서의 생명세계를 부정함과 동시에 음양론적 생명세계를 부정한다.

그리고, 기존의 ‘생명’ 관념을 ‘생’과 ‘명’으로 해체하고 다시, ‘생/명’으로 재구성해본다. 이를테면 생명은 ‘생(生)’이면서 동시에 ‘명(命)’이다. 이때 생(生)이라는 글자는 새싹의 상형으로써 형태가 있는 생명체를 지시한다. 명(命)이라는 글자는 ‘주어진 의무’라는 뜻도 있으나, 의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객관 상황’(네이버 한자사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과 명 사이, ‘/’는 체계이론을 따라서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역설적 경계를 표상할 수도 있고,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되는 온전한 한 세계의 순간을 상징하는 기호가 될 수도 있다.

생/명이라는 생각 도구는 무엇보다 체계이론의 ‘체계/환경’ 및 ‘형식/매체’ 도식을 수용한 것이지만, 사실 사상사적으로 적지 않은 비슷한 도식들이 관찰된다. 대승불교의 ‘색/공’의 사유가 일단 떠오른다. 또한 노장의 ‘유명(有名)/무명(無名)’과 ‘유형(有形)/무형(無形)’, 장재(張載)의 ‘객형(客形)/태허(太虛)’, 그리고 신유학의 ‘태극/무극’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에겐, 동학의 ‘태극(太極)/궁궁(弓弓)’과 ‘기연(其然)/불연(不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드러난 질서/숨겨진 질서’도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혼돈적 질서’를 의미하는 (문예이론에서 유래한) 카오스모스(chaosmos) 개념이나 들뢰즈-가타리의 카오스모제(chaosmose)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지하 시인은 또한 ‘활동하는 무’, ‘살아있는 없음’, ‘흰 그늘’ 등을 통해 생명의 역설을 개념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명’이라는 생각도구를 통해 탐구해보면, 우리의 삶과 세계는 또 다른 이미지들의 중첩으로 다가온다. 우선, 인간을 비롯한 생명은 몸을 가진 생명-체(體)다.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유기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과 다르게 생명체들은 동일성을 가진 ‘실체적 존재’라기보다는 생명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구성적 존재’이다. 다른 한편 생명은 혼돈으로 경험되기도 하고 보이지 않은 신비한 생명력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감응되고 감응하는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한 하나의 생명 사건이다.

요컨대, ‘생/명’이라는 생각 도구를 통해 ‘생’의 생명활동을 ‘다시’ 관찰한다. 무엇보다 ‘명’의 생명세계를 ‘다시’ 느낀다. 살아지는 삶, 그늘진 삶, 돌보아지는 삶을 배운다. 그리고 분열적이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삶의 역동성과 잠재성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것은 ‘한 송이 꽃’으로, ‘한 생각’으로 경험된다.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과 비교하여, 이를테면 그것은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번엔 ‘전일성’과 ‘통일’의 생명세계 대신 ‘차이’와 ‘역설’의 생명세계가 강조된다. 그리고 그 매체는 ‘몸’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재설정하는 또 다른 생명의 세계관은 ‘몸-생/명’의 세계관이다.

 

‘몸’은 세계의 영점

한살림선언에서 “생명의 본질은 정신”이다(이때 ‘정신’은 베르그손의 정신으로 보인다. 육체/정신의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에너지적’ 정신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한살림선언은 궁극적 실재로서의 생명, 초월적 생명을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의 생명의 세계관 재설정에서는 몸이 강조된다. 살아지고 살아가는 몸의 구체적인 움직임과 감각, 그리고 일상의 숨결과 고통, 아울러 몸의 한없는 깊이와 알 수 없는 몸의 힘에 주목한다.

‘몸 일원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기후 재난시대, 그리고 돌봄의 시대에 즈음해 제안하는 또 하나의 ‘설정’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자면, “몸은 세계의 영점(零點)”이다. 이때 몸은 정신/육체로 구별할 때의 육체로서의 몸만은 아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몸이기도 하고, 암에 걸린 몸이기도 하고, 빈곤이 새겨진 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몸의 우주성’과 김지하의 ‘거룩한 신체론’의 몸이기도 하다. 여기서 몸은 생명세계의 공통 기반이다. 동아시아에서 기(氣)가 세계의 원천이듯이 몸이 곧 세계의 바탕이다. 기의 취산(聚散)으로 설명하듯, 몸의 ‘나고/죽음(生/死)’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몸-생/명’의 관점에서 세계는 (방편으로서) 몸을 매체로 ‘생’의 몸과 ‘명’의 몸으로 구별된다. ‘코스모스 몸’과 ‘카오스 몸’으로 나누어본다. ‘물질적 몸’과 ‘비-물질적 몸’으로 구별해본다. ‘감각하는 몸’과 ‘감응되는 몸’을 동시에 생각해본다. (그러나 ‘몸-생/명’ 역시 하나의 사건으로서 매번 ‘신명 나는 몸’이다.)

해월의 향아설위(向我設位)에서 우주적 생명활동의 기준점은 ‘나’다. 그런데 “나는 나의 몸이다”라고 말하는 메를로 퐁티를 따라서 다시 말하면, 향아설위의 ‘나’는 ‘몸의 나(自身)’가 된다. 김지하의 표현과 몸의 관점을 연결해 말하면, 향아설위의 아(我)는 ‘밥 먹는 나-몸’, ‘일하는 나-몸’, ‘제사 지내는 나-몸’이다. 그리고, ‘거룩한 나-몸’이 된다. 이를테면, 향아설위는 ‘향신설위(向身設位)’다.

정동적이고 영성적인 몸으로 인해 이제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몸과 몸 사이의 정동적 흐름을 통해 “산 것과 죽은 사이의 경계를 해체”할 수도 있다. 수운 최제우가 들은 하늘의 소리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은 다시 말하면, ‘내 몸이 네 몸’(吾身卽汝身)이 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실존적으로 돌보고 돌보아지는 생명공동체가 된다.

몸은 희로애락의 근거일 뿐만이 아니라, 영성의 근거이기도 하다. 신학자 몰트만은 “신체성은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종국(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거꾸로 신령함은 몸의 내적 속성이 된다. 신학자 전현식이 퐁티의 ‘살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몸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잘 정리해놓았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우리밖에 놓여있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몸과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있는 우리 삶의 지평(horizon)이며 장(field)이다. 세계는 과학적 분석의 대상인 객관적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라, 몸적 주체가 그 세계 안에서 다른 체현된 주체들과 함께 느끼고 욕망하며, 사랑하고, 미래의 비전을 세우는 생명의 망(the web of life)이다.”

몸은 존재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앎의 척도이기도 하다. 일찍이 한살림선언은 ‘분석/직관’의 이중구조로 생명의 인식론을 설명한 바 있다. 과학적 접근방법과 더불어 무엇보다 직관이 강조된다. 그 직관이란 다시 말하면, ‘몸’의 앎이다. 우리가 ‘직감(gut feeling)’이라고 말하는 내장감각과 같은 보이지 않는 몸의 감각이 직관의 실재일 수 있다는 말이다. 생/명의 관점에서는 두 개의 앎이 있다. 의식적 경험과 비-의식적 경험이 그것이다. 의식적 경험이란 지각(知覺), 즉 ‘아는 감각’, ‘재현적 감각’이다. 반면 비의식적 경험이란 육감이나 직감, 혹은 직관으로 표현되는 ‘알 수 없는 감각’, ‘재현할 수 없는 감각’이다. 그리고 재현할 수 없는 이 몸의 감각이 ‘재현적 앎’, 즉 생각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관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의 내적 능력이다.

 

‘생/명’의 통일

한살림선언에 따르면, “한살림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생명의 통일활동”이다. 한살림선언은 이를테면 ‘생명의 대통일’ 선언이었다. “우리 민족의 통일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 전 생태계, 전 우주생명과의 통일을 지향하는 생명운동이다.” 수운의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인용하며 우주적 생명세계의 궁극적 통일성을 강조한다. 생명세계는 하나의 몸이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의 몸이면서 동시에, ‘몸-생/명’의 관점에서 생명체는 ‘차이 나는 하나됨’ 사건이다. 헤아릴 수 없는 바다생물들처럼 잠재성의 바다에서 차이 나는 몸짓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자기-구별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차이를 드러내고 자기생산체계로 도약한다. 감응하는 세계의 잠재성이 어떤 ‘차이의 반복’(들뢰즈)을 통해 형식화(forming)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식화의 과정에는 생장소멸이 있다. 폼생폼사(form生form死)한다.

그러므로, ‘몸-생/명’의 관점에서 생명의 통일이란 생명 아닌 것을 전제로 가능하다. 생명체/비-생명체의 통일,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 혹은 유기체적 살아있음과 비-유기체적 살아있음의 통일이다. 생명은 ‘생/사의 역설적 통일’이다. 비유컨대, 고전역학적 살아있음과 양자역학적 살아있음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통일이나, 음/양의 합일과 구별된다. 이를테면 ‘현재/잠재’의 통일이다. 들뢰즈와 루만에게서, 동학과 김지하에게서 ‘현재/잠재의 통일’이라는 범주와 사유를 발견한다. 색/공, 기연/불연, 객형/태허, 카오스모스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특히 잠재성의 역동이 중요하다. 가끔은 우리가 ‘신의 사랑’이라고 말했던 그것 아닐까.

‘생/명’의 통일은 온전한 짜임의 한 순간으로 경험된다. 나아가 한 세계를 산출한다. 예컨대 ‘나락 한 알’이 바로 한 순간, 한 세계이다. 물론 ‘나락 한 알’이라는 결정체 안에는 미결정의 생명세계가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기연(其然)은 항상 불연기연(不然其然)이다. 색은 항상 색즉시공이다. 코스모스는 항상 카오스모스다. 질서는 시간적으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로 경험되기도 하지만, 항상 ‘혼돈적 질서’다.(카오스모스는 혼돈과 질서를 합한 개념이지만,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로 보느냐, ‘혼돈적 질서’로 보느냐에 따라 중대한 차이가 있다.)

생장소멸하는 생명활동은 양자의 운동이 그러하듯이 불연속적이다. 생명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형식이 사라져야 한다. 폼사폼생(form死form生), 폼이 죽어야 새로운 폼을 만들 수 있다. 생명체의 연장은 괴물을 생산할 뿐이다. 전환(transformation)이라는 개념도 생명활동의 불연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환은 소박하게 ‘변화’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거듭나기다. 나아가 태동들이다. 탄생들이다.

그리고, ‘생/명’ 사건은 (불연속성이 암시하듯이) 우발적 사건으로 경험된다. 인과적이지 않다. 대체로 루만을 따라서 ‘다르게도 가능한’이라는 의미에서 ‘우연성(contingency)’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우연성은 이를테면, 생/명, 혼돈적 질서, 카오스모스의 활동형식이다. 바야흐로 우연성의 시대다.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우연성을 논한다. (나에게는 그렇게 읽힌다.) 독일의 신학자 판네베르크는 “신은 우연성의 형식으로 활동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니클라스 루만에게 우연성은 현대사회의 고윳값이다.

 

‘몸-생/명’의 세계관으로 응답하기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세계감(世界感)’과 ‘세계상(世界像)’, 그리고 ‘세계관(世界觀)’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경구처럼, 세계는 세계관 형성의 배경이지만, 동시에 “세계관이 세계를 만든다”. 예컨대 최근 할리우드 영화들은 다중우주론과 페미니즘 등 변화하는 세계관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나아가 플랫폼 기업들과 디지털 하드웨어 기업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감을 감염시킨다.

40년 전 한살림선언은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으로 ‘시대의 허기(虛氣)’에 응답하고자 했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응답해야 할까? 응답은 세계관의 재-설정(re-configuration)에서부터 시작된다. 펜데믹-기후변화 및 대전환시대의 오늘, 나의 설정은 ‘몸-생/명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진리의 선포라기보다 차라리 윤리적 결단이다. 몸의 감각과 체험에 기반한 진실의 몸짓이다. (돌아보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그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몸-생/명’의 세계관에 기반한 깊고도 담대한 염원과 열망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몸-마음의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세계’를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몸-생/명’의 관점에서 우주엔 초월적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면, 우주 자체가 거대한 의미다. 삶-생명 자체가 숭고한 의미이다. 그리고 의미는 그때그때 또 다른 무늬로 표현된다. 삶의 의미나 사회적 가치도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질 때 현재화(顯在化)될 수 있다. ‘몸-생명’의 세계감과 세계상, 그리고 세계관을 바탕으로 또 다른 ‘자기-몸짓’과 ‘자기-이야기’를 발명하고 재-발명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과는 다르다. 생명체라는 형식이 그러하듯이 하나의 세계는 감응적 생명세계의 나와 우리와 세계들의 공(共)-작용을 통해 구성된다. 한 세계가 탄생한다.

앞에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언급했거니와, 간단히 응답능력(responsibility)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응답 능력은 ‘몸-생/명’의 활동 능력이다. 생태적·사회적 떨림을 알아차리고 함께 울리는 ‘공명의 기술’이기도 하고, 생명세계의 잠재성을 현재화하는 역량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에 맞서는 대담함이기도 하다. 그때그때의 폼생폼생(form生form生)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응답능력의 가장 적극적인 수준, 즉 또 다른 사회적 코드의 재-발명 혹은 새로운 사회적 범주의 창발로 나아간다. 삶과 사회의 형식을 재구성하고 재발명한다. 그리고 스스로 경험한다. 이를테면 ‘몸-생/명’의 사회적 자기-실현이다.

그렇다면, 응답의 관건은 ‘무엇’이 아니고 ‘어떻게’이다.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감응되고 감응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또 다른 사회적 체계의 출현을 촉매할 것인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규칙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삶의 원천은 규칙이 아니라, 염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염원은 ‘보이지 않는 몸의 깊이’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런 맥락에서 ‘몸-생/명’ 관점에서의 또 다른 사회운동의 방법론적 키워드는 ‘가정법’과 ‘예감’이다. 즉 불연기연의 구성적 예감이다. 불연(아직 아님)의 잠재성이 희망이라는 형식을 통해 또 다른 세계로 태동한다.

그러므로, 뉴노멀이 아니라 새로운 가정법이 필요하다. 예컨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2천년 전 광야의 소리도 그 중 하나이다. 조선 말 대환란기, 대전환기에 수운 최제우가 선포한 ‘다시개벽’도 그 중 하나이다. 수운의 다시개벽은 뉴노멀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재창조 서사다. 무엇보다, ‘감응적 서사’다. ‘신령한 거대담론’이다. 유기체적 신체와 우주적 신체가 연동된, ‘몸-생/명’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흐름에 감응되고 감응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을 생성시킨다. 내 생애 안에서 또 다른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선형적 시간을 깨고서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가정법적 활동이다. 자기-계시, 자기-형성, 자기-기술(記述)이다. 다시-보기, 다시-쓰기, 다시-하기다. 위기감이 위기를 재-생산하고, 희망의 예감이 희망을 만든다. 그렇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민주화가 된다면’이라는 가정법과 염원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로 믿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소망을 담았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실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듯 제도화, 실체화되었다. ‘그날이 오면’이라는 ‘몸-생/명’의 역동적 염원이 ‘보이지 않는 힘’이었던 것이다.

팬데믹-기후재난 시대에 필요한 것은 뉴노멀이 아니다. 가정법이다. 오늘의 예감이다. 뉴노멀은 없다. 뉴노멀은 사후적으로 정의될 뿐이다. 지금 여기, 사건과 그 사건의 연쇄로서 어떤 과정을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먼저, 자신(自身)의 욕망과 소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생명-운동’이라는 사회적 ‘과정기획’도 마찬가지다.

 

*몸-생/명의 세계관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은 지난 해 12월 모심과살림연구소에 제출한 보고서, ‘몸-생/명의 세계관 저항과 꿈꾸기의 생명운동’(http://www.mosim.or.kr/arch_report/4091)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70437486399276/

주요섭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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