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정의가 있을까? 역사를 바로 세우자며 토왜를 절멸하자고 한다. 토왜를 없애면 역사가 정의로워지는가? 친미, 친중, 친유럽, 친북방, 친러….아마도 한민족(?)에서 살아남을 이는 없을 것이다. 토왜도 친미도 척결했다는 북한은 정의로운 나라인가? 남한에서 자동차를 많이 팔기 위해 한미동맹에 찬성하는 자동차 회사 임직원과 그 노동자들을 친미라고 할 수 있을까? 자본은 민족이 없다. 노동에도 민족은 없다.
최근 필자와 종종 대화하는 범생명사상활동가들은 감, 감정, 정서, 영성, 정동(情動 Affect) 등을 말한다. 생명의 감정은 사건의 체계(이 말도 논쟁적이다.)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사건의 체계가 시간을 가지면 역사가 되는가?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역사는 생명의 의지나 감정에 좌우되는가? 생명은 근대국민국가적 감정을 가지는가? 생명은 생명이지 생명에 민족과 국가가 있는가?
‘역사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역사주의와 역사는 구분해야 한다. 시장주의와 시장은 다른 말이다. 시장은 2천 년 전에도 있었다. 시장주의는 근대의 일이다. 역사주의는 역사를 중요시하는 관점이 아니라 사회역사는 그 자체 객관적 실재로서의 경로와 법칙으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가진다. 역사주의는 자연필연성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대체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대표적인 역사주의다. 역사적 유물론에서 사회의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은 필연이므로 인간은 이 이행법칙 내에서만 자유의지를 가진다. 역사는 그 자체가 진화(진보?)의 필연성을 가진다. 딱히 마르크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근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시대는 필연적인 일이라고 근대 계몽주의자들도 말했다. 반공산주의자라 하여도 부르주아지시대를 근대화론으로 말하며 이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한다.
지금 시대의 근대화론은 여러 형태의 FTA나 4차산업혁명론으로 나타난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론이나 조선말의 근대화론자들인 개화파도 마찬가지다. 근대를 가까운 시대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부르주아지시대라는 고유명사로 쓴다면 동학혁명을 자생적 근대라고 할 수 없다. 동학혁명은 근대혁명은 아니다. 다만 ‘자생적 근대’ 또는 ‘토착적 근대’를 부르주아지시대와 다른 의미로 쓴다면 동의할 수 있다. 역사주의에서 부르주아지적 근대는 역사의 필연이다. 지난 대선에서 코스피지수 5천, G5, 국민소득 5천 달러 주장도 모두 부르주아지시대의 역사적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주의적 태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말은 『자본론』에서 이렇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 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더 높거나 더 낮은 사회적 적대 관계의 발전 정도는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법칙들 자체이며, 확고한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하면서 관철되는 이러한 경향들이다. 공업이 더 발달한 나라는 덜 발달한 나라에게 자신의 미래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본인들이 알든 모르든 ‘서울이나 울산 따라가기’ 개발, 성장 공약을 외치는 대선이나 지방선거 입후보자들은 참으로 대단한 역사주의자들이다. 후진과 선진이라는 말은 역사주의의 개념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는 것은 탈역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생산력 개발과 성장은 부르주아지국가나 프롤레타리아국가나 역사의 법칙이므로 반대할 수 없다. 다만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임무일 뿐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나 부르주아지는 같은 역사주의로서 서로 굳건한 동맹자들이다. 반개발, 반성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개발, 비성장주의는 탈역사주의 견해다. 그런데 통상 ‘탈역사주의’ 그러면 정의롭지 못하고 제멋대로이고 모욕적인 말로 듣는다. 그것은 ‘(부르주아지) 역사는 정의롭다’는 거짓말에 속아서다. 부르주아지시대뿐 아니라 그 이전 시대까지도 역사는 정의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역사는 정의롭게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결코 심판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는 이념적이다. 심판하는 것은 지금 시대의 정의지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그 정의는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생명은 이런 역사주의로부터 독립된 존재인가? 생명이 역사적 존재라면 노예제 생명, 봉건적 생명, 자본제적 생명, 사회주의적 생명, 공산제적 생명 이렇게 불러도 되는가? 1989년에 발표된 『한살림선언』의 인식을 담아 ‘한살림 생명’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서두의 토왜나 친미와 대칭하여 민족(?) 주체적 생명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생명이 사람만이 아니라면 4월이면 이 강산 곳곳에, 콘크리트 틈새에도 피는 민들레에게도 ‘자본제적 민들레’, ‘한살림 민들레’, ‘민족적 민들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생명은 역사에 구속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고 한다면 필자는 자연사적 존재와 사회역사적 존재를 분리하는 것이 된다. 자연사와 사회역사는 따로 굴러가는 것일까? 그런데 사람까지 포함한 생명 일반은 역사주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라고 한다면 탈역사주의를 선언하는 것이 된다. 즉 국민이나 민족이 아닌 개인을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쓰면서 지금 말 장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에 걸린다. 필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역사의 방향 근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 때문이다. 기후위기 때문에 생명이 자주 언급된다. 그렇다면 역사시대에서 생명시대로 가는 것일까? 이 둘은 분리될 수 있는가? 5천 년 전 민들레(사람)와 지금 민들레(사람)를 구분하는 것은 가능할까?
역사란 과연 지금 이 시간에 실재하는 것일까? 1980년의 광주항쟁은 분명 존재했던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탈역사주의라고 하여 광주항쟁을 없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모두를 동일하게 구속하는 존재가 아니다. 광주항쟁은 어떤 이들에게는 폭동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정의로운 일이다. 광주항쟁이 어떤 법칙을 가지고 가지고 모든 사람을 모든 생명을 구속하지는 않는다. 필자에게 광주항쟁은 더할 수 없이 정의로운 일이지만 역사는 보편적이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 그렇다고 정의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역사는 불택선악이다. 더구나 광주항쟁이 영산강과 무등산을 구속하는 것도 아니다.
필자의 생각으로 기후위기는 역사주의를 깨트리고 있다. 개발과 성장을 멈추자는 필자는 역사주의에 대해 반동하는 보수인가?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43065740177760912/
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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