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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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문명전환과 사상투쟁’을 이야기했거니와 내부적인 사상투쟁도 불가피하다. 생명사상들 사이의 사상투쟁 말이다. 생명 존엄의 생명사상, 동성애 반대의 생명사상, 자연주의 생명사상, 신비주의 생명사상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상투쟁의 무기는 ‘비판’이 아니다. 양자택일의 ‘대안’도 아니다. ‘다시’ 보기다. ‘다시’ 쓰기다. ‘또 다른’ 생명사상 만들기다. 생명사상 ‘다시-쓰기’다. 생명세계 ‘다시-그리기’다.

 

‘다시’, 나와 세상을 태동케 하는 또 하나의 기술

이때 ‘다시개벽’의 그 ‘다시’이다. 이때 다시는, 이를테면 ‘또 다른 형식’이다. 우형(又形)이다. 또 다른 범주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개념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또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이야기 치료’에서 ‘이야기 다시 만들기’의 그 ‘다시’이다. 자신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과거마저 바꿀 수 있다.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학적 체계이론의 개념 중 하나인 재-기술(re-description)의 그 재(再/다시)이기도 하다.

다시-보기, 다시-쓰기는 ‘바르게 보기’와 ‘새롭게 보기’와 다르다. 바르게 보기는 ‘바르게/그르게’의 구별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바르게 보기는 나/우리의 바름과 너/너희들의 그름을 무의식적으로 깔고 간다. 새롭게 보기도 마찬가지이다. 새롭게 보기는 ‘새로운/낡은’의 구별을 전제한다. 나/우리는 새로움과 너/너희들의 낡음을 무의식적으로 깔고 간다. 그런 구별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자각이 없는 단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수많은 다르게 보기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런 맥락에서 개벽담론에서 선천/후천 구별을 전제로 한 후천개벽론은 이론적인 퇴행으로 보인다. 혹은 대중적, 정치적 개벽담론으로의 진화인지도 모른다.)

요점은 ‘생/명’ 관점에서 볼 때, 자신과 세계에 관한 다시-보기, 다시-쓰기가 이론적 실천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비판’ 개념과 ‘대안’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그간의 관행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말이기도 하다. 생명사상 다시-보기, 생명운동 다시-쓰기를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다시 읽기가 선행될 수 있다.) 예컨대, 한살림선언에서 언급되고 있고,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는 ‘전일성’ 개념이나, 기계/생명의 구별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자는 것이다.

생명운동과 관련된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재-상상, 다시-그리기도 필요하다. 한살림의 ‘밥 한그릇’은 아름답다. 생명평화결사의 ‘생명평화 무늬’도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다시 볼 때, 둘 다 정태적이다. 역동성과 복잡성을 충분히 느낄 수 없다. 생/사를 오가는 바이러스의 역설적 생명 형식을 떠올리기 어렵다.

 

우연성 해방: ‘사상투쟁’에서 ‘사상경합’으로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인생엔 정답이 없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실감한다. 사회에도 정답이 없어 보인다. (요사이 한국 대통령의 행동과 패권국가들의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선진국이라는 유럽의 혼란을 보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활동 연한이 쌓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개인적 삶도 사회도 우연적이다. 돌아보면 그때그때의 상황적 선택이 있었을 뿐이었다. 수많은 ‘다르게’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수많은 ‘다시’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루만은 ‘다르게도 가능한’이라는 생활인들의 감각을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재정의한다. 루만의 우연성(contingency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하지도 않은 것’으로 개념화된다.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크가 “하나님은 우연성의 형식으로 활동한다” 말했던 그 우연성이다.(김지하 다시-읽기를 하면서 장회익의 판넨베르크 읽기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르게도 가능하다면,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면, 우리의 활동도 더 이상 보수/진보라는 딱 하나의 구별로 재단될 수 없다. 또 다른 구별을 도입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선택(/배제)을 채택할 수도 있다. 우연성은 또 다른 가능성을 해방한다.(우연성과 우발성은 구별된다. 우발성은 의식이나 사회가 예상치 못한 체계 외부의 사건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르게도 살 수 있다. 다르게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선택들은 도약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뼈 아픈 성찰과 성숙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앞서 이야기한 사상투쟁이 상대방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 사상투쟁은 ‘사상경합’이 된다.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가 유의미해질 수 있다. 또 다른 것들의 경합은 공존을 전제로 한다. 어떤 것은 현재화(顯在化)된 것으로, 어떤 것은 잠재화(潛在化)된 것으로. (물론, 싸우지 않는 인생이 없다.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다시, 왜 생명사상이었을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생명사상이었을까? 역사적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김지하와 장일순, 그리고 당대의 수 많은 마음들과 신체들에게는 너무너무 절실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명의 반대말은 반(反)-생명, 혹은 죽음이 아니다. 생명의 반대편에는 권력이 버티고 있다. 정신을 파괴하고, 신체를 도륙하는 폭력이었다. 권력이었다. 그리하여, 저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러 번 소개했듯이,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생명사상은 이념의 지배에 반대하는 이념이다. 생명사상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환각 세계에 대한 폭로이다. 마음으로 지은 세계를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다. 살아있는 느낌, 처절한 고통, 생동하는 기쁨만이 실재라는 체험적 신념이다. 나아가 원초적으로, 이런 생명의 작동이 적합/부적합도 만들고 아군/적군도 생산한다는 자각이다.

 

생명사상의 폭로

나에게 생명사상은 차라리 일종의 ‘폭로’다. 나에게 생명사상의 존재 이유는 생명의 존엄에 머물지 않는다. 생명의 자기보존 욕망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삶의 곤고함, 비굴함, 끈질김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두려움과 공포를 처절하게 깨닫기 위함이다. 우리는 살육당하는 동물들을 느끼면서, 자신의 아픈 몸을 경험하면서 알게 된다. 생명은 무엇보다 ‘고통받는 몸(일레인 스캐리)’이라는 것을, 동물들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을. 생명사상은 마음과 사회의 생명성을 드러낸다. ‘생/명’의 생명사상이라고 말해도 좋다.

첫째 ‘생’. 생명사상은 인간의 생명성(신체성)을 폭로한다. 정신적 인간, 사회적 인간도 중요하나, 역시 인간의 최종심급은 생명이다. 신체다. 배고픔이 밀려올 때, 아픈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에 앉아있을 때, 고통스러운 타자의 몸을 느낄 때, 그런 신체적 순간들에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이 생명체라는 것을. 포스트휴머니즘 담론까지 갈 필요도 없다.

둘째 ‘명’. 생명사상은 생명의 비-생명성을 폭로한다. 나의 몸은 몸뚱이다. 화학기계다. 생물학적 기계다. 태양이 없다면, 달이 없다면 작동을 멈출 물질이다. 아니다. 물질 이상이다. 가끔은 초월적으로 경험되는 우주적인 사건들이다. 김지하의 처절한 체험이 보여주었고, 수많은 성인들, 종교적 천재들의 깨달음 사건이 보고하는 신비한 체험들이 있다. 그리고, 신명, 신기, 영성, 천, 허, 무, 공…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셋째 ‘/’. 생명사상은 생/사의 역설, 생/명의 역설을 폭로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를 폭로한다. 자기생산체계로서 생명활동은 생/사의 구별을 생산한다. 그리고 사회적 경험으로 축적된 생/사의 구별은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린다. 나아가 사회의 역설, 문명의 역설을 드러낸다. 그리고 역설 다루기의 지혜를 강제한다. 김지하의 표현을 빌자면, ‘역설의 생활화’를 촉구한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생/사의 경계를 진동하는 반(半)-생명적 생명형식으로 정의된다. 일정한 ‘조건’ 아래서만 살아있다.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큰 복합체인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 생명도 조건에 따라 생/사가 구별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생명사상의 이유

그것은 다시 말하면, ‘생명사상의 존재 이유’가 된다. 체계이론과 정동이론을 경유해, 김지하로부터 얻은 나름의 또 다른 생명사상이기도 하다. 이번엔 폭로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기호를 빌려서) 세 개의 물음표로 질문한다.

첫째 ‘생’. 살아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생명사상은 살아있는 삶과 사회의 조건을 묻는다. 생명사상은 고정관념과 사회적 이념에 포획된 삶의 해방을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예컨대 김지하에게 먼저 필요했던 것은 개념세계에 대한 금강경의 치열한 도전이었다. 우리는 의미세계를 살고 있지만, 모든 의미는 구성된 것이라는 자각이 그것이다. 생명사상의 출발점이 된다.

둘째 ‘명’. 그리고 다시, 묻는다. 살아있음 그 자체가 중요하다면, 살아있음을 살아있게 만드는 힘,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살아있음의 원천에 관한 질문이다. 그 답은 물론 ‘신명’, ‘신기’, ‘영성’ 등으로 이름 붙여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다.

셋째 ‘/’. 그런데, 삶은 왜 괴로움으로 딜레마로 모순으로 경험되는가? 문득 삶을 살게 하는 근원적 힘을 알차리기도 하지만, 일상은 편치 않다. 죽음의 공포,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예상대로 여기서의 대답은 역설의 자각이다. 그러나 전체론이나 일원론, 혹은 경계 넘나들기나 비유비무, 반대일치로는 부족하다. 하나됨 체험을 통한 직관적 깨달음과 더욱 복잡하고 논리적인 과학적 깨달음이 요구된다.

 

역설의 생명운동

그러므로, 생명사상 다시쓰기를 한다면, ‘생명의 존엄’과 같은 소박한 도덕규범으로는 매우 아쉽다. ‘상극의 시대에서 상생의 시대로의 전환’이라든가,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의 전환’ 식의 유토피아적 희망만으로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응답할 수 없다.

요체는 역설이다. 역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에게 김지하의 생명운동은 ‘역설 다루기’이기도 하다. 가히 ‘역설의 생명운동론’이라고 명찰을 붙일 만하다. 물론 여기엔 영성이 전제된다. 질서 이전 혹은 구별 이전, 정동이론가 마수미를 빌어 말하면, ‘비구별지대’를 전제한다.

 

“생명현상 즉 자기 작동의 현상은 그 자체가 ‘아니다-그렇다’가 공존하는 역설을 근거로 한다. 생명운동은 이 양극이 공존하도록 하는 운동이다. 생명의 철학은 이 역설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역설적인 생명논리에 의해 여러 쌍의 혼란스런 양극을 동시에 파악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역설, 역리는 항상 ‘기우뚱함’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이 ‘기우뚱함’은 시대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 김지하전집 제2권, 372

 

위 김지하의 글을 공부의 자료로 삼아 공유한다. 김지하 전집 제2권, ‘환경운동의 사상적 기초’에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물론 우리는 다르게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써야 한다. ‘아니다/그렇다’의 반대일치나 ‘양극의 공존’ 식의 이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다음 번 연재의 마지막 순서 ‘생명운동의 이유’에서 역설 다루기의 최고수 한 명인 니클라스 루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읽고자 한다. ‘자기작동’, ‘아니다/그렇다’, ‘기우뚱한 균형’, ‘조건’ 등이 키워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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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1: (마음이 급해져서 사족을 단다.) ‘다시’의 전제는 관찰의 메커니즘에 대한 과학적 자각이다. 이를 해명하는 체계이론의 핵심 개념인 재-진입(re-entry)과 자기지시/타자지시, 불교의 아상(我相)/법상(法相), 현상학의 노에시스/노에마 개념이 중요하다. 재-진입 개념은 노벨상을 수상한 탁월한 마음이론가 ‘에델만’의 핵심개념이기도 하다. 요점은 관찰, 즉 구별/지칭은 신경체계 혹은 의식체계, 혹은 (루만의 경우) 사회체계의 작동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음의 작동, 신경의 작동, 사회의 작동이 각자의 세상을 지어낸다는 말이다. 의식은 항상 외부의 어떤 것(고양이)을 지향하지만, 그에 대한 관념(고양이에 대한 표상)은 마음의 작동이 지어낸 것이다. 물론 의식체계, 생명체계, 사회체계의 작동은 체계 외부와의 연동을 전제로 한다. 이때 생명이나 마음에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 작동의 연쇄, 마음 작동의 연쇄가 있을 뿐이다. 그 작동의 연쇄가 주체와 대상을 만들어낸는 말이다. 특별한 1970년대 말 감옥에서의 특별한 생명체험 후 김지하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제3의 눈 찾기에 나선다. 물론 그 제 3의 눈은 ‘생명’이다. 정확히 말하면, 생명의 작동이다. “주체와 객체 간의 이항대립을 넘어서, 주체도 객체도 아닌 ‘제3의 눈’을 찾아야 한다.”(김지하전집 제1권, 생명의 담지자인 민중)

 

사족2: (오늘은 뱀 발이 두 개다.) 더불어 생명의 사회성, 생명사상의 사회성도 강조되어야 한다. 모든 사상은 사회적이다. 자유롭고 순수한 생각은 없다. 개인적 체험은 신체적이고 의식적이지만, 신체와 의식은 사회 속에서 생태계 속에서 공존하고 공진화한다는 점에서 사회와 분리할 수 없다. 사회적 환경들과 연동되면서 우리의 몸은 ‘굽신거리는 몸’이 되기도 하고, 최근 인터넷 영상을 통해 자주 관찰하게 되는 ‘거들먹거리는 몸’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그 체험의 소통은 사회적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것’에 사유인 생명사상 역시 사회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것이 ‘생명운동’일 때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주요섭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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