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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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끝날 줄을 모른다. 미국과 중국이 대만을 두고 으르릉거린다. 분명 국제분쟁 이상이다. 서유럽과 유라시아, 중국문명과 미국문명의 충돌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일찍이 예견했던 ‘문명의 충돌’의 그것처럼 보인다.

무슨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명을 말할 만큼 앎이 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나의 감상(感想), 문득 느끼어 일어나는 생각은 ‘문명의 충돌’과 ‘사상투쟁’이다. ‘문명의 전환’이 아니다. ‘문명의 충돌’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명의 전환은 문명의 충돌을 경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상의 전환은 사상의 충돌이 있고서야 가능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문명’과 ‘또 다른 사상’이 태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내 안의 문명 충돌들

이미 오래된 일들이다. 전투는 매일매일 계속된다. 집안에서의 가부장 문명과 탈-가부장 문명의 충돌 이야기다.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의 집도 문명의 충돌 현장이다. 하루종일 TV를 통해 기독교문명이 스며든다. 방 한 켠, 아마도 돌봄로봇의 원시적 형태가 될 법한 눈을 깜박이고 몸을 뒤집는 고양이 인형이 덩그렇게 놓여 있다. 부모님에겐 아직(?) 아니다. 돌봄인간과 돌봄기계 어느 쪽도 탐탁치 않은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말을 알아듯는, 아니 자꾸 말을 거는 스마트폰도 나에겐 문명의 충돌이다. 알바생을 내쫓는 프랜차이즈 식당의 키오스크도 문명의 작은 전장(戰場)이다. 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여전히 당황스럽다. 대형마트를 갈 때마다, 또한 문명의 충돌이다. 신(新) 문물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족보를 알 수 없는 물건들, 너무도 다양한 먹을거리들, 처음 보는 브랜드들이 나를 매번 신문명의 세계로 이끈다. 오랜만에 찾는 SF영화들의 세계관들도, 물론 문명의 충돌이다.

 

투기문명의 침략

그러나 문명의 충돌은 그렇게 소프트 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만의 문제가 아니다. 농촌은 도시문명의 침략 현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의 대박 투기장이다. 하나는 ‘부동산’ 대박 투기장(投機場), 또 다른 하나는 ‘쓰레기’ 대박 투기장(投棄場)이 그것이다. 부동산 뿐만 아니라, 쓰레기 투기도 대박이다.

서울의 부동산업자들이 산골 오지에 수만, 수십만평 임야를 사고,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정치인과 협력(?)하여 프로젝트를 만들고, 토지이용계획을 바꾸고, 지원사업을 받고, 최신식의 대규모 카페와 최신식의 대규모 휴양시설을 짓고 운영한다. 주민들과 지역시민단체의 강력한 저항에 주춤거리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정읍 이야기다. 결국 땅값이 수십배 수백배(?) 오르고 농촌형 ‘대장동’이 된다.

그리고 농촌은 또 다른 대박 투기장이다. 산업폐기물을 처리하는 퇴비공장들이 수십개씩 만들어지고 산업폐기물을 무단 매립하고,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악취를 내뿜는다. 역시 정읍 이야기다. 그러나 도시에서 온 업자들과 현지의 토지주들에겐 대박이다. 식민지라는 말로 부족하다. 농촌은 도시문명의 약탈 현장이다. 투기하는 도시문명과 투기의 기술이 없는 비도시문명의 ‘일방적’ 충돌 현장이다.

“아파트를 지어 부동산 가치를 남겨야 하는 서울에서 도축시설을 남겨둘 리 없다. 기르고 죽이는 일 모두 농촌에 떠넘기고 오로지 먹는 입만 대도시에 남겨둘 뿐이다.” 농촌사회학자 정은영의 관찰이다. 축사는 물론이거니와 도축장도 없다. 1989년 마장동 도축장이 문을 닫은 후 서울에는 도축장이 없다고 한다.

대신 농촌은 도시민을 먹이기 위해 초대형 축사들과 초대형 도축장이 배치된다. 정읍은 전국 최고의 축산 밀집지역 중 하나이다. 전에는 가끔씩 자랑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축산 폐수와 악취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인근 고창은 초대형 도축시설 때문에 주민들이 전쟁을 벌였다. 해마다 벌어지는 지옥 같은 전염병 가축의 살처분도 고스란히 농촌의 몫이다.

 

사상의 충돌

‘투기’ 문명 뿐만이 아니다. 차들이 다니지 않아 한산한 2차선 지방도, 계곡을 지나고 산기슭을 오르내리며 이미 오지 속에서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지금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산을 뚫고, 산기슭을 자르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아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그 누구 하나 관심할 여력이 없다. 지역정치인들의 공치사 속 도로공사와 건설업자만이 눈을 번뜩인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문명의 충돌 현장이다. 자동차문명과 생태문명의 충돌.

그런데, 문명의 충돌은 사상적 충돌을 동반한다. 문명의 충돌은 항상 사상의 충돌이었다. 그렇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사상투쟁이 치열하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러시아의 사상인 유라시아주의가  ‘알렉산드르 두긴’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문명사적 대전환기라서일까? 그 범주가 ‘문명’을 이르니 사상투쟁의 차원이 달라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접한 사상가들은 역시 사상투쟁의 전사(戰士)들이었다. 인류사적인 사상투쟁의 전사 마르크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근 가장 뜨는 서구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브루노 라투르도 사상투쟁의 전사가 되었다. 그의 신간 『녹색계급의 출현』에 나오는 “너무 방치된 이념투쟁”이라는 소제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독일에서는 20세기의 헤겔이라고 불린다는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계몽의 계몽’을 주장하며, ‘옛 유럽적 사고’와 평생을 맞서 싸웠다.

한국 생명운동의 전사(前史)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 동학과 천도교 역시 일종의 사상전쟁의 역사였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좌도난정(左道亂政), 삿된 사상으로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목이 잘렸다. 한살림선언에도 소개된, 1900년대 초 의암 손병희의 삼전론(三戰論)도 유명하다. 재전(財戰)도 중요하나, 역시 도전(道戰)과 언전(言戰)이 핵심적이다. 요컨대 사상투쟁의 결과로 목숨을 잃었고, 그래서 더욱 강력한 사상투쟁이 절실했을 것이다(한국전쟁을 비롯한 한국현대사에서의 자유주의/사회주의 이념투쟁의 역사는 생략한다.)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사상의 충돌은 어머어마 했고, 그리고 21세기에도 사상투쟁이 치열하다. 문명사적 대전환기, (문명의 미래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존망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푸틴과 시진핑과 같은 정치지도자들은 사상전쟁의 총지휘자들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대통령 역시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언급했으니, 사상투쟁에 선봉에 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그런데, 최근의 행적으로 보면 그의 사상투쟁은 시늉뿐이었던 것 같다. 밀도와 깊이가 몹시 의심스럽다. 더욱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이념이 제출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생명사상가 김지하의 사상투쟁은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1991년 죽음의 굿판 이후 변증법과 유물주의에 대해 지독하게 문제제기를 거듭했다. 생명운동의 사상투쟁은 오로지 김지하 몫이었다. 다만, 김지하가 진보세력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로 인식되지 않았을 뿐이다.

 

지역은 문명충돌과 사상투쟁의 최전선이다

사상투쟁은 대사상가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 오늘 지역은 문명충돌과 사상투쟁의 최전선이다. 기업들과 행정조직들은 나름의 논리를 개발하고, 이야기를 발명하고, 이념을 생산한다. 그들의 배후엔 연구기관들이 있고, 대중매체가 있고, 그리고 도인(道人)들도 있다.

이번엔 전북 이야기다. 집안에서의 문명의 충돌 못지 않게, 지역 역시 문명충돌의 뜨거운 현장이다. 사상투쟁의 최전선이다.

내가 살고있는 정읍은 드러난 사상투쟁의 현장은 아니다. 자신의 사상을 사회적으로 밝히는 ‘기술자(記述者)’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그런 정도의 사상투쟁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전라북도다. 전북은 문명충돌과 사상투쟁의 최전선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새만금을 둘러싼 오랜 전투가 있었다. ‘개발’과 ‘보존’의 전선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의 사상투쟁은 무풍지대나 다름이 없었다. 민주당 일당 독점체제였기 때문이다. 권력만이 아니라, 자원배분 뿐만 아니라, 논리도 내러티브도 감정도 독점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북은 늘 권력과 개발의 소외지역이었고, 피해의식과 희생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다시, ‘생명평화’를 이야기하려 한다. 물론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이때 생명평화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다. 지금 여기의 긴급한 현실의 가치이다. 지난날 전북의 생명평화는 새만금 갯벌의 보존을 지시했다. 지리산 살리기를 떠올리게 했다. 방사능 폐기장 반대를 상징했다. 오늘 나에게 생명평화는 농촌의 도축장, 산업쓰레기 폐기장, 대규모 투기성 요양시설들을 지시한다. 물론, 거기에만 머물진 않는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의 생각’임을 자각하고 있다.

 

전환은 충돌을 경유한다

그렇다. 전환은 충돌을 경유한다. 문명의 전환도 사상적 도약도 충돌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충돌한다’는 것은 이미 이질적인 것이 태동했다는 것,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질서들 사이에서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문명의 충돌은 또 다른 문명의 태동의 증거한다. 사상적 충돌은 또 다른 사상의 태동을 증거한다. 그리고, 문명의 태동을 알아차린 또 다른 생각들과 조직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상을 기술한다. 언젠가 썼던 글을 다시 읽아본다.

 

“세계관은 물론 세계의 산물이지만, 거꾸로 세계관이 세계를 바꾼다. 팬데믹의 충격 속에서 사람들은 생활의 변화만이 아니라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한다. 자신의 감각과 의식의 변화를 자각한다. 대면/비대면으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음의 진화와 전환과 도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다. 포스트 코로나의 사상들이 이미 수많은 미디어와 기업과 정부와 학자들에 의해 전파되고 또한 전염되고 있다. 이런저런 개념과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고 있다.”

 

생각은 일어난다. 충돌과 부딪침이 있어 ‘생각 사건’이 일어난다. 상상(像想), 감상(感想), 몽상(夢想), 환상(幻想), 명상(冥想). 이미지로부터, 느낌으로부터, 꿈으로부터, 허깨비로부터, 그리고 텅빈 어둠으로부터. 그리고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또 이어져, 생각의 고리를 만든다.

다시, 문제는 사상이다. 예컨대 ‘몸-생/명’의 세계관도, ‘감응의 공동체’도 하나의 사상이고, ‘문명의 충돌과 21세기 사상투쟁’도 하나의 사상이다. 불연기연(不然其然), ‘미결정성의 무한한 잠재력과 복수(複數)의 현실들’도 하나의 사상이다. 사상은 생각이다. 무엇보다 ‘자각적 생각’이다. ‘생각임을 아는 생각’이다. 사상은 ‘생각의 틀’이다. ‘생각의 생각’이다. ‘생각을 생각하게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몸-마음의 표층이지만, 모든 생각은 무궁한 몸-마음 과정의 촉매가 된다. 그리고, 사상이 사회화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세계를 격발하는 뇌관이 된다.

주요섭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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