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경망과 개념망 모형
사람은 신체적 신경망과 더불어 사회적 언어망을 갖고 있어. 이 둘 사이에 하나의 망이 더 있는데 나는 이를 ‘개념망’이라고 이름 지었어. 신경망이 ‘몸’, 언어망이 ‘머리’에 해당된다면 개념망은 ‘마음’이라고 볼 수 있지. 몸과 마음, 머리는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 서로 상호적인 관계야. 몸을 이해하려면 마음과 머리를 알아야만 하고, 머리를 이해하려면 몸과 마음을 알아야만 하지. 신경과 개념, 언어도 마찬가지야. 개념망을 이해해야 신경망과 언어망이 연결되는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있어.
개념망은 개념과 범주의 순환이야. ‘감각-지각-생각-욕망’ 신경망의 흐름을 개념망으로 정리하면 ‘범주-범주화-개념-개념화’ 과정과 유사하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개념은 나의 생각과 욕망으로 구성되고, 범주는 나의 몸이 감각+지각하는 대상이야. 사람은 감각활동으로 모은 다양한 정보(범주)를 지각으로 통합(범주화)하고 생각(개념)으로 정리해 욕망을 형성(개념화) 한 후 욕망을 바탕으로 행동하지. 이렇게 감각과 생각, 범주와 개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과정이 신경망+개념망의 소통이야. 이를 모형으로 그리면 아래와 같아.
‘모형’이란 ‘맥락을 포괄하는 영역들의 연결 관계’라고 볼 수 있어. 안쪽의 순환 고리가 사람의 신경망 맥락이고 바깥쪽의 순환 고리는 개념망 맥락이야. 신경망과 개념망을 연결한 이 모형이 내가 디자인 역사를 보는 관점이지. 그래서 디자인 역사를 말하기에 앞서 이 모형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이 모형을 이해하려면 먼저 신경망과 개념망을 구성하는 용어를 알아야 해. 앞선 칼럼에서 신경망의 용어들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엔 개념망의 용어들에 대해 살펴볼게.
2. 인지언어학의 등장
언어학은 다양한 분야로 나누어져 있어. 이 중 ‘개념(concept)’과 ‘범주(Category)’는 언어학의 의미론(意味論, semantics)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야. 사실 언어학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야. 게다가 신경과학과 심리학이 융합된 인지언어학은 최근에 형성된 분야라 더욱 생소하지. 인지언어학에는 언어에 대한 상식적인 통념을 깨는 내용들도 더러 있지. 인지언어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언어학은 과학적 실험보다 고전적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어. 고전 철학은 약 2500년 전 축의 시대 이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많은 상식이 고전 철학에 기반하고 있지. 그래서 앞으로 내가 말하는 내용들이 지금까지의 우리 상식과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거야. 즉 지금까지의 현재의 언어적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는 의미지.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언어학의 기원을 찾으면 호메로스(Ὅμηρος, BC 8세기경)와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BC 470~399)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그건 너무 먼 이야기이니, 현대 구조주의 언어학에 기초를 놓은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부터 시작할게. 앞선 칼럼에서 말했듯이 소쉬르도 겉와 속을 구분해서 언어를 분해했어. 프랑스어로 겉은 시니피앙(signifiant)이고 속은 시니피에(signifier)인데 이를 한자어로 번역하면 기표(記表)와 기의(記意)야. 기표는 겉으로 경험하는 언어고, 기의는 속에 들어있는 의미지. 가령 단어의 겉은 사람들이 공통 감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으로 체계화된 소리 혹은 글자야. 반면 단어의 속은 겉처럼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 많은 단어가 사전적 의미처럼 객관적 의미를 갖고 있기에 우리는 소통할 수 있어. 하지만 속 안의 의미는 언어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겉만큼 객관적이지 않지. 상당 부분 각자가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지.
겉과 속의 관계는 ‘그릇’의 안과 밖으로 은유할 수 있어. 그릇은 안과 밖이 나누어진 구조로 밖에 있는 것을 안에 넣었다 뺏다 할 수 있지. 소쉬르도 언어를 그릇처럼 생각했어. 언어 표현(기표) 안에 언어적 의미(기의)를 자의적으로 넣다 뺏다 할 수 있다고 여겼지. 소쉬르가 언어 기호를 기표와 기의로 분해하면서 사람들은 언어를 요소결합체로 인식하기 시작했어.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게 되었지. 이후 언어학은 언어 기표들을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언어의 형식적 구조와 의미를 연구했어. 언어의 의미는 언어의 형식과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형식과 달리 의미(기의)는 자의성이 높아서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어렵다고 보았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어학에서 언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가 다소 소홀했지. 예를 들어 “나는 학교에 간다”와 “학교에 나는 간다” 두 문장은 동일한 의미일까? 기존 언어학에서 두 문장은 동일한 의미야. 기존 언어학은 의미의 미묘한 차이보다는 규칙(문법)에 맞는 단어의 논리적 배열이 중요하거든. 마치 수학처럼 ‘1+3’과 ‘3+1’은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입장이지. 이렇게 기존 언어학은 내용보다 형식의 정합성을 중요시했어.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형식보다 의미를 더 중요시 여기는 언어학자들도 있었어. 이 학자들은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에 언어의 형식보다는 의미가 형성되는 경험적 바탕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지. 이를 은유언어학이라고 말해. 조지 레이코프와 같은 은유언어학자들은 언어의 바탕에 사람의 경험이 있다고 주장했어. 사람은 위아래, 앞뒤와 같은 비슷한 신체조건을 갖고 있고, 같은 문명과 문화를 공유하면 유사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지. 언어적 의미도 이런 공통 조건과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어. 가령 위로 올라가는 것은 어렵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그래서 성적을 ‘올리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져.
추상적인 언어는 구체적인 경험을 함축한 언어에 은유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있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갔네’는 마치 시간을 자동차나 자전거로 은유한 셈이지. 또 인생이나 사랑 같은 추상적인 말들은 대개 여행이나 전쟁 같은 구체적인 경험에 은유되어 소통되면 이해가 잘돼. 이렇듯 언어의 의미는 언어 형식보다는 경험이 더 중요해. 은유언어학자들 언어 형식은 의미를 잘 전달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의미가 형식에 구속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지. 기존 언어학이 ‘의미는 형식을 따른다’라고 생각했다면, 새로운 언어학은 ‘형식은 의미를 따른다’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자신들의 의견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지.
20세기 후반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언어와 신경작용의 관계가 밝혀지기 시작했어. 은유언어학이 주장했듯이 언어의 의미가 사람의 경험, 즉 신경망과 밀접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지. 뇌 영상은 뇌의 혈류나 전류의 흐름을 측정해 뇌의 활성화 정도를 측정할 수 있어. 감각을 할 때는 뇌의 뒤쪽이 반응하고, 생각을 할 때는 뇌의 옆쪽이나 앞쪽이 반응하지. 기존 언어학자들은 사람의 뇌 어딘가에 언어를 담당하는 모듈 영역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뇌영상을 촬영해보니 그런 언어 모듈을 발견할 수 없었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뇌 영상은 뇌의 특정 영역이 아니라 감각과 생각, 운동 등을 담당하는 전체가 반응했거든. 언어는 사람의 신경망 일부가 아닌 전체와 관련이 있었던 셈이야. 이를 계기로 기존 언어학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언어 의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어. 언어학의 중심이 기표(형식)에서 기의(의미)로 전환되었지. 이를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이라고 말해.
인지언어학이 등장하면서 고전 철학의 언어적 통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어. 플라톤이 ‘정의’라는 말의 이데아기 있다고 주장했듯이 기존 철학자들은 언어와 개념은 하나라고 생각했어. ‘정의’라는 언어에 대응하는 이데아적 개념이 있다고 생각했지. 이를 본질적 개념이라고 말해. 기존 언어학은 언어와 개념은 동일하기에 모든 언어가 본질적 개념을 갖고 있다고 보았어. 그래서 언어를 본질적 의미를 갖고 있는 형태까지 분해한 다음 조립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문제는 언어의 본질적 개념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냐인데… 이 문제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어. 또 언어의 본질적 개념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인지언어학은 신경 활동과 언어와의 관계를 통해 이 문제의 답을 찾았어. 각종 실험을 통해 언어적 의미는 사람의 신체적 신경망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신경망이란 곧 신체적 경험을 의미해. 가령 ‘마’라는 소리와 ‘음식이 입속으로 들어오는 경험’이 함께 일어나 ‘맘마’라는 말의 의미가 형성돼. 또 ‘자동차’라는 단어도 ‘자동차와 관련돼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그 의미가 형성되지. 물론 ‘자동차’의 사전적 개념은 있어.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면 “원동기를 장치하여 그 동력으로 바퀴를 굴려서 철길이나 가설된 선에 의하지 아니하고 땅 위를 움직이도록 만든 차”라고 나와 있지. 하지만 우리는 ‘자동차’를 이런 개념으로만 여기지 않아. 자동차와 관련된 수많은 추억과 경험들에 의한 새로운 개념들이 추가되지. 나아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바퀴’가 없는 ‘날으는 자동차’를 상상할 수 있어. 경험과 기술의 변화로 언어의 본질적 개념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21세기 이후 언어에 대한 많은 고전적 입장들이 과학적으로 논파되고 있어. 뇌와 심리, 신경과학과 언어학이 융복합된 인지언어학은 앞서 말한 “나는 학교에 간다”와 “학교에 나는 간다”의 의미를 구분해. 두 문장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 혹은 듣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 전자는 ‘나’를 강조했고, 후지는 ‘학교를’ 강조한 문장이니까. 이를 인지언어학에선 ‘초점화(focusing)’라고 말해. 말하는 사람은 주로 초점이 되는 단어를 가장 앞에 쓰는 경향이 있고, 듣는 사람 또한 말하는 사람이 강조한 초점을 중심으로 의도를 해석하지. 또 뇌에는 언어의 본질적 개념이 들어있지 않아. 언어적 표현은 고정되어 있지만 개념은 경험적 맥락에 따라 계속 재구성되거든. 그래서 언어와 개념은 별개로 구분되어야 해. 내가 언어망과 개념망을 구부 했듯이. 앞서 한국말에서 ‘말’이 ‘금 안에 두다’라는 뜻이었듯이 언어는 경험에 따라 계속 변화되는 개념을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한정 지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3. 개념망 : 개념과 범주
개념은 개인의 안에 있고, 언어는 개인의 밖에 있어. 언어는 사회적으로 공존하기에 사람은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문명과 문화의 언어를 배우게 되지. 언어를 배우면 언어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 개념과 언어가 매칭되. 보통은 개인이 스스로 구성한 개념에 언어를 매칭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어. 전문적 단어의 경우 이미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경험과 개념을 머금고 있기에 단어를 배우면 동시에 새로운 개념도 익히게 되지. 사람은 개념과 언어를 매칭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개념과 언어를 발명하기도 해. 현대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철학은 개념을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했듯이 사람은 생각으로 개념을 구성하고, 이 개념은 사회적 언어로 소통되지.
사람은 속성통합체야. 속성통합체란 다양한 속성들이 알맹이로 들어있다는 뜻이 아니야.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ow Emotions Are Made)』의 저자 신경심리학자 배럿(Lisa Feldman Barrett) 사람의 속성인 감정은 감각자극에 의해 재구성된다고 말해. 기쁨이나 슬픔 등의 감정은 구성된 신체적 느낌일 뿐 언어적 속성이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지. 사람은 상황에 따라 개인적 느낌에 적합한 언어를 찾아. 가령 눈물이 흐르는 느낌은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어. 같은 느낌이라고 주어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언어로 대변될 수 있지. 이때 구성되는 느낌이 바로 개념이야. 개념은 영어로 concept이야. concept을 형태소로 분해하면 con+cept이야. 여기서 con은 모은다는 together의 의미고, cept은 ‘잡아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 감각 경험을 모아 생각으로 잡아내는 것이 개념인 셈이지.
개념이 언어를 만나면 더욱 정교한 생각을 할 수 있어.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본적 원형 개념(prototype)을 내포하고 있지. 이 때문에 고전 철학자들이 언어에 본질적 개념이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언어의 원형 개념은 이데아와 같은 구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주 추상적인 느낌이야. 아기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구성하는 개념과 말소리 언어를 연결하는 학습을 하면서 성장해. 경험+말소리 학습이 반복되면서 특정 소리는 나름의 원형 개념을 내포하지. ‘마’라는 발음처럼 한국사람은 ‘이’나 ‘저’ 그리고 ‘가’라는 발음에서 어떤 원형적인 느낌을 갖고 있어.
생명체가 환경변화에 따라 진화하듯 개념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진화해. 개념은 주로 확대되거나 좁아지는 방식으로 진화하는데 아무래도 좁아지기보다는 확장되는 방향이 좋겠지. 개념을 키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야. 일단 개념과 관련된 어휘가 많아야 해. 보통 사람은 언어화된 개념을 갖고 생각하는데,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새로운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아. 아무래도 어휘가 많아야 좀 더 풍성하게 개념을 구성하고 성장시킬 수 있으니까. 두 번째는 개념과 관련된 경험이 풍부해야 해. 개념은 경험적 은유에서 비롯되는데 경험이 빈약하면 개념도 성장하지 않겠지.
언어학에서 경험하는 대상을 ‘범주(Category)’라고 말해. 대형마트 카탈로그(catalogue)에 수많은 제품들이 분류되어 있듯이 범주는 특정 개념을 중심으로 분류되지. 범주와 개념은 늘 헷갈려. 범주도 개념처럼 모여 있다는 의미로 여겨지거든. 우리는 상식적으로 사물이나 사건이 모아진 상태를 범주라고 하니까. ‘가전’이란 말 안에 다양한 가전제품들이 연상되듯이 범주는 대개 언어 형태로 묶여 있어. 하지만 개념은 범주처럼 특정 언어나 특정 제품을 지칭하지 않아. 앞서 ‘자동차’라는 말의 사전적 개념에서 보았듯이 언어나 제품 등의 범주들이 모일 수 있는 ‘규칙과 범위’를 정할 뿐이지. 범주가 개념에 의해 분류되는 과정을 범주화(categorization)라고 말해. 범주를 경험하려면 먼저 개념이 있어야 해. 개념을 중심으로 범주가 경험되니까. 그래서 뇌과학에선 개념이 없는 경험을 ‘경험맹’이라고 말하지.
플라톤의 이데아 이후 고전 철학은 다양한 경험 범주를 모으는 중심점으로서의 원형 개념을 상상했어. 변화의 중심에 절대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개념이 있는 것이지. 만약 누군가 그 본질적 개념을 찾으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거야. 사람들은 원형 개념을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어. 그래서 스스로 개념을 구성하기에 앞서 어디선가 원형 개념을 찾으려고 노력했지.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어. 원형 개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우리는 어떻게 원형 개념을 물려받았을까? 사실 이 대답은 너무 간단해. 태초에 그 개념을 만든 사람은 신이었거든. 무엇보다 요한복음에 첫 문장에 “태초에 로고스(개념)가 있었다”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언어의 원형 개념은 신이 만들거나 물려주지 않았어. 사람이 만들고 사회적으로 학습되었지. 따지고 보면 언어화된 원형 개념들은 그 사회의 누군가 만들어낸 사회적 인공물이야. 물론 어떤 언어는 나름의 개념적 본질이 있어. 주로 전문적 용어나 사회적 신조어가 그렇지. 일상 언어에서는 인지언어학에서 말하는 기본 층위 범주(basic-level categories)의 언어들이 그런 경향이 높아. 기본 층위 범주의 언어란 ‘자동차’나 ‘고양이’처럼 단어에서 즉각적으로 이미지가 떠오르는 단계의 언어를 말해. ‘동물’처럼 언어가 너무 추상적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모호하고, ‘버먼 고양이’처럼 언어가 너무 구체적이어도 선뜻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 생물학 분류로 치면 ‘개’와 ‘고양이’, ‘사슴’ 등이 구분되는 ‘속(屬, genus)’ 분류 범주에 해당되지.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인지하는 분류 범주라고 할까.
언어에 본질적 원형 개념이 있다는 것은 이런 기본 층위 범주의 언어들이 우리에게 준 일종의 착시현상이야. 언어와 개념은 달라. 우리가 신에게 물려받은 것은 언어적 개념이 아니라 개념을 구성할 수 있는 유전적 신경망이지. 덕분에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개념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어. 개념에 어떤 본질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언어적 착각이지. 게다가 일상의 언어에서 개념적 본질은 없어. 개인의 해석에 따라 또 주어진 맥락에 따라 개념 구성이 달라지니까.
개념망에서 중요한 것은 개념과 범주에 대한 이해야. 그리고 이 둘의 관계야. 언어는 개념을 품고 있는 범주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개념과 범주는 늘 헷갈리지. ‘가전’이란 언어는 ‘집 안에 있는 전자제품’이라는 개념과 ‘집 안에 있는 여러 전자제품들’ 범주를 모두 품고 있는 말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가전제품’이란 개념적 말을 소리나 글자의 범주로서 경험하기도 하지. 이렇듯 사람의 언어는 한 단어에 개념과 범주가 모두 포함된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래서 언어에서 개념과 범주를 쉽게 구분하기는 어려워. 다만 개념은 내 안에서 구성되고, 범주는 내 밖에서 경험된다는 차이만 유념하면 될 듯싶어.
그래픽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이다. 그린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이 사람과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과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디자인 공부 공동체인 ‘디학(designerschool.net)’에 참여한다. 쓴 책으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X축》(스테파노 반델리, 2012) 《런던에서 온 윌리엄모리스-그는 왜 디자인의 아버지인가》(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이 있으며, 공저로 《디자인 확성기》《디자이너의 서체 이야기》(지콜론북)가 있다. 이 외 〈다른 백년〉, 〈디자인 평론〉, 〈경향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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