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와 디자인
이젠 나의 문체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이 문체는 언어 디자인 사례야. 쓰다 보니 글이 길어져서 두 번으로 나누게 되었어. 이번엔 ‘평어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음엔 ‘한국말의 다양한 언어 형식들’에 대해 이야기할게.
우리 사회는 디자인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어. 덕분에 누구나 디자인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자인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은 아주 빈약해. 디자인을 제대로 배우려면 대학에 가야만 하거든. 대학에 가려면 입시라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나와 친구들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디자인 교육 문제를 오랜 시간 고민해왔어. 고민이 실천으로 이어져 누구나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는 대안 학교를 시작했어. 학교 이름은 ‘디학(designerschool.net)’이야.
디학의 교육 방향은 줄기세포 같은 디자이너 양성이야. 줄기세포는 어떤 세포도 될 가능성 있는 세포야. 디자인 교육도 마찬가지야. 특정 매체를 교육하기에 앞서 디자이너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지. 줄기세포 같은 디자이너가 되려면 디자인 기초가 튼튼해야 해. 그래서 디학의 수업은 실기에 바탕이 되는 이론적 본질을 강조하지. 우리는 십여년동안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면서 디자인의 이론적 바탕이 ‘언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디학 커리큘럼도 ‘언어’를 중심으로 꾸렸지. 디자인 언어는 크게 시각언어, 타이포그래피, 글쓰기로 구분할 수 있어. 시각언어는 ‘이미지’ 기호를 말하고, 타이포그래피는 ‘글자’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분야야. 그리고 글쓰기는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지.
보통 예술과 디자인은 창의력이 아주 중요한 분야라고 말하지만 사실 시각언어나 타이포그래피 능력은 ‘창의력’보단 ‘노력’이 더 중요해. 앞서 디자이너의 전문성은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듯이 여러 디자인 사례를 통해 이미지 기호와 타이포그래피 규칙을 이해하고 직접 실천해보는 노력이 필요하거든. 그럼 창의력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창의력의 바탕은 생각이야. 즉 생각하는 능력이지. 그럼 생각이란 무엇일까? 나는 ‘언어로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키워드는 ‘언어’와 ‘과정’이야. 사실 생각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가까워. 생각은 거듭하면 할수록 계속 변화하니까.
생각은 언어의 연쇄 과정이야. 사람은 보통 언어로 생각해. 언어 없이 생각하려는 노력을 해봐. 결코 쉽지 않을 거야. 아니 불가능할지도 몰라. 그래서 생각하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 능력이 좋아야 해. 언어 능력이 좋아지면 생각이 성장하고 창의력도 높아지지. 그럼 예술과 디자인도 더 잘할 수 있게 되겠지. 사실 언어 능력을 높이는 방법은 별거 없어. 읽고 쓰기를 꾸준히 하면 되지.
디학은 항상 글쓰기를 강조해. 디학의 글쓰기 교사는 이성민 선생님(이하 성민)이야. 성민은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철학 번역자가 되었어. 라캉이나 지젝 등 주로 현대 철학을 번역했지. 그러다 디학과 인연을 맺으면서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 성민은 디자인 관련 철학책을 찾아 번역하는 등 디자인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의 새로운 관점을 발견했어. 보통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표현’의 문제로 여기는데, 성민은 디자인을 ‘태도’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지.
2. 언어 디자인으로 관계 문제 해결하기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가 디자인 문제를 가져오면 해결해주는 역할을 해. 이 상황에서 디자이너는 문제 해결자로서의 태도를 갖게 되지. 성민은 많은 사람들이 전문적인 디자이너와 같은 태도를 갖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는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해 “이 문제를 ‘디자인 문제’로 보면 어떨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블평불만자의 태도에서 벗어나 해결자의 태도로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라고.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되지. 즉 문제를 ‘디자인 문제’로 인식하면서 창조적인 문제 해결자로서의 태도를 갖게 되지.
철학자인 성민은 오랜 시간 사랑과 우정 등 또래 문화와 관계 문제를 고민해 왔어. 사실 디자인을 알기 이전부터 이미 또래 관계를 디자인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성민은 새로운 대화 실험을 기획했어. 이 실험은 아주 간단해서 모든 대화를 반말로 바꾸는 것이야. 또래들의 대화처럼. 그러면 왠지 더 친밀한 대화가 가능해질 것 같았거든. 성민은 한두차례 실험을 통해 반말 대화를 통해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변화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실험은 지속적으로 실천되지 못했어. 지속적인 관계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지. 하지만 성과도 있었어. 언어로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언어를 새롭게 디자인함으로서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
성민은 어느날 최봉영의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지식산업사, 2005)을 읽게 되었어. 이 책은 한국문화의 고질적인 수직 관계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지. 그 원인은 바로 ‘한국말’이야. 한국말은 특이하게 반말과 존댓말이 형식적으로 구분되어 있어. 최봉영은 이런 언어체계를 ‘존비어체계’라 이름 지었어.
최봉영은 한국 사람의 언어관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상호 반말’ ‘반말-존댓말’ ‘상호 존댓말’. 상호 반말과 상호 존댓말은 모두 수평적 대화 관계야. 상호 반말은 사이가 가깝고 상호 존댓말은 사이가 다소 멀다는 차이가 있지. 반면 반말-존댓말 관계는 위계가 분명한 수직적 대화 관계야. 윗사람은 반말을 하고 아랫사람은 존댓말을 하는 비대칭적 대화를 하게 되지. 최봉영은 한국 사람의 차별과 억압 문제는 반말-존댓말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해. 한국의 고질적인 억압 문화를 해결하려면 반말-존댓말 관계를 상호 존댓말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성민은 이 책을 통해 언어와 관계가 아주 밀접하다는 자신의 실험 가설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게 되었어. 그것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한국말 사례로 말이야. 한국의 고질적인 인간관계의 문제, 즉 차별과 억압의 가장 큰 원인이 한국말에 있다는 점도 깨달았지. 게다가 전세계에서 유독 한국과 일본만 형식화된 존비어체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한국말을 새롭게 디자인함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어. 성민은 이때 비로소 ‘디자이너의 태도’를 자각하게 되었다고 해. 자신이 해왔던 실험이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관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디자인 과정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지.
03) 평어 디자인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의 문체는 성민이 디자인한 언어야. 나는 이 언어의 이름을 ‘평어(平語)’라고 지었어. 우리는 이 언어를 디학에서 실험적으로 적용해 보았고 실제로 관계가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어. 디학의 성공적 실험을 통해 언어 디자인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지.
[평어 규칙 : 이름 + 반말]
1) 호칭은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단, 이름 뒤에 종결어를 붙이지 않는다.)
2) 반말로 말한다.
3) 비속어를 자제한다.
평어의 디자인 규칙은 아주 간단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면서 비속어를 뺀 반말로 대화하는 거야. 가장 중요한 규칙은 호칭이야. 한국사람은 누군가를 부를 때 ‘선생’이라는 직함을 쓰거나 호칭 뒤에 ‘님’ ‘아’ 등의 종결어를 붙히지. ‘윤여경 선생님’ 혹은 ‘여경아’처럼. 하지만 평어에선 사람을 부를 때 직함이나 종결어미를 쓰지 않아. 마치 영어에서 사람을 부를 때 ‘존’ ‘찰스’라고 말하듯 ‘여경’ ‘성민’ 이름만 부르는 것이지. 여러 사람을 호칭할 때는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특정 상대방을 호칭할 때는 이름을 부르면 되. ‘여경 어서와’ ‘성민 반가워’처럼.
평어 디자인에 있어 가장 큰 화두는 ‘너’야. 한국말에서 ‘너’는 ‘나’의 너머에 있다는 말로 ‘나’와 마주한 상대방을 지칭하는 말이지. 영어에서 상대방을 부를 때 쓰는 you가 쓰이는데 한국말 ‘너’는 영어 you처럼 수평적이지 않을 때가 많아. 간혹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호칭하는 반말처럼 느껴지거든. 그래서 ‘너’를 평어 호칭으로 쓰기엔 아직 조심스러워.
04) 평어로 말하고 글쓰기
생각의 기본 언어는 반말이야. 보통 생각을 할 때 반말로 하거든. 반말로 대화할 때도 대체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지. 그래서 반말을 할 때는 마음이 편안해. 싸울 때는 빼고. 관계도 마찬가지야. 반말로 대화를 나누는 관계는 대체로 편하고, 친밀하고, 수평적인 경우가 많아. 다만 말이 편하다 보니 욕이 섞이고 가끔은 상대방에게 막말도 하게 되. 이럴 땐 말싸움이 일어나지. 적대적인 관계는 항상 반말이야. 평상시 서로 존댓말을 쓰며 존중하던 사이라도 말싸움이 일어나면 ‘야! 너 뭐라고 했어!’처럼 반말을 하거든. 그래서 반말은 친밀한 동시에 적대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지.
존댓말은 생각에 격식이 부여된 말이야. 존댓말을 쓰면 말을 아끼고 조심하게 되. 말의 형식도 지켜야 하고, 격식에 맞는 단어를 골라 써야 하는 등 여간 불편한 게 아니야. 존댓말은 말을 끝낼 때 ‘습니다’ ‘해요’ 등 종결 어미를 신경써야 해. 대상에 따라 존대하는 단계도 구분되어 있고. ‘했어요’보다 한 단계 높으면 ‘하셨어요’고 ‘먹어요’를 높이면 ‘드세요’가 되지. 존댓말 형식은 대체로 반말보다 길고 번거로운 경향이 있어.
존댓말은 상대를 존중하기에 적대적인 관계가 될 가능성이 낮지만 동시에 친밀해질 가능성도 낮지. 그래서 상호 존댓말을 하면 서로 거리가 생기게 되지. 반말하던 사이에서 갑자기 존댓말을 쓰면 무척 어색하고 멀게 느껴져. 가령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할머니가 “야 이놈아 작작 먹어라!”라고 말하다가 계산할때 “손님 00만원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면 굉장히 어색해지겠지.
평어는 반말의 편안한 장점을 살리면서 적대적 단점을 최소화한 대화 형식이야. 평어는 기본 골격이 반말이지만 존댓말처럼 형식이 있어. 평어를 쓸때는 비속어를 자제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을 신경써서 하게 되지. 그래서 평어를 경험한 디학 사람들은 평어가 수평적인 대화는 가능하지만 반말처럼 친밀하진 못하다고 불평하곤 해. 평어는 반말보다 멀지만 존댓말보단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즉 평어 관계는 반말과 존댓말 중간 어디쯤이야.
글을 쓸때도 마찬가지야. 독백형 글쓰기는 내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대화형 글쓰기는 상대방을 신경써야 해. 그래서 대화형 글쓰기를 할 때는 대부분 존댓말 형식을 사용해. 반말투의 대화글은 없지. 한국의 문어체는 보통 ‘이다’로 끝내는데 이 문체는 대화보다는 독백에 가까워. 그래서 기존 문어체는 글을 쓸때 마음이 편해.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니까. 마치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일기처럼.
평어 글쓰기는 반말-대화형 글쓰기야. 평어로 글을 쓰면 읽고 있는 상대방을 의식하게 되. 나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을 하듯 글을 쓰게 되지. 그래서 그런지 조금 더 독자를 배려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 같아. 또 평어로 글을 쓰면 다양한 종결 어미를 의식해야 해. 계속 ‘~지 ~지’로 쓸 수는 없으니까.
말은 시공간에 따라 계속 변화하지만 말의 뼈대는 잘 변하지 않아. 그게 바로 ‘토씨’야. ‘나는 학교에 간다’에서 ‘나’ ‘학교’ ‘간’에 붙은 토씨, ‘는’ ‘를’ ‘다’는 명사나 동사 뒤에 붙어서 말의 구실을 정해주지. 한국말에서 토씨는 가장 오래된 토박이 한국말이야. 한국사람의 생각 정체성을 담고 있는 언어유전자라고 할까. 그래서 토씨에는 시공간을 초월해 한국사람의 정서가 담겨 있지. 말의 정서가 잘 드러난 경우가 바로 사투리야. ‘그랬쥬’ ‘그런겨’ 등의 지방 사투리는 ‘쥬’나 ‘겨’ 등의 토시 덕분에 그 지방 특유의 정서가 말맛으로 느껴지지. 이렇듯 토씨는 말의 구실만이 아니라 말맛도 좌우해.
평어로 글을 쓰면 한국말 토씨의 역할을 새롭게 깨닫게 되. 지, 어, 야, 해, 까, 든, 고 등등 한국말은 종결 어미가 정말 많거든. 사투리까지 고려하면 더욱 다양한 종결어미가 있을거야. 평어 대화체로 글을 쓰면 말의 흐름에 맞게 토씨들을 적절히 섞어야 해. 여러 토씨말을 종결 어미로 조화시키면서 한국말의 말맛을 느끼게 되지. 아무튼 요즘 나는 평어 덕분에 아주 흥미로운 글쓰기 경험을 하고 있어. 성민 고마워~
그래픽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이다. 그린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이 사람과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과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디자인 공부 공동체인 ‘디학(designerschool.net)’에 참여한다. 쓴 책으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X축》(스테파노 반델리, 2012) 《런던에서 온 윌리엄모리스-그는 왜 디자인의 아버지인가》(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이 있으며, 공저로 《디자인 확성기》《디자이너의 서체 이야기》(지콜론북)가 있다. 이 외 〈다른 백년〉, 〈디자인 평론〉, 〈경향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