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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손이가 돌아왔다. 왕손이는 나의 원죄와도 같은 존재다. 2010년, 스무살 때 나는 서울에서 잠시 자취를 했다. 난생 처음 오피스텔에 혼자 살았다. 평생 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외로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서울에서 나홀로 타향살이를 하니 외로웠다. 당시 만나던 애인은 통금이 11시였다. 나는 <혼자가 되는 시간>이라는 노래를 작곡할 정도로 밤에 혼자 있는 게 싫었다. “밤 열한시 쯤 길을 나선다. 둘이 가면 혼자 오는 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나는 강아지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애인과 함께 가까운 펫샵에 가서 유리창 안에 갇힌 강아지들을 둘러봤다. 그중 제일 조용하고 주눅들어있는 아이가 눈에 밟혔다. 다들 자기를 봐달라고 창을 두드리며 왈왈 짓는 와중에 그 아이만 혼자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걔가 가장 착해 보인다는 이유로 선택했고 단돈 25만원을 지불한 후 집으로 데려왔다.

돌이켜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생명을 책임질 준비도 되지 않은 이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듯이 강아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지금도 펫샵에서는 온갖 동물이 그렇게 판매된다. 동물권은커녕 인권에 대한 감수성도 부족했던 시절, 나는 그날의 거래가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외롭기 때문에 집에 오면 나를 반겨주고 같이 있어줄 동물을 구매해서 단칸방에 가둬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왕손이는 그리하여 나의 가족이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극구 반대했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집에는 ‘이삐’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자그만 시츄였다. 동생과도 같았던 이삐는 심장사상충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지켜본 건 나였다. 학교를 다녀오니 집에 아무도 없었고, 이삐가 베란다에 축 쳐져 누워 있었다. 안아 올리니 단말마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후 우리 가족은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기로 했다. 사랑을 준 만큼 보낼 때의 고통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모부님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인과 함께 강아지를 데려왔다. 이제 스무살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심보도 있었고, 타향살이가 고달프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이름도 대충 지었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가 <추노>였다. 극중 배우 김지석이 연기한 인물이 ‘왕손이’였다. ‘대길(장혁 분)’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열심히 노비들을 추격하는 유쾌한 캐릭터였다. 나는 그냥 그 이름이 웃겨서 ‘왕손이’라고 정했다. 2019년, 내가 티비엔 <문제적 남자>에 출연해서 김지석 씨를 만났을 때, 이러한 일화를 털어놓으려다 멈칫했다. 막상 말하려니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저희 집 강아지가 배우님 이름을 따서 왕손이에요”라고 하면 뭔가 그쪽도 소름끼칠 것 같고 나도 성의 없는 반려인처럼 보일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뭐 어차피 극명인데 재밌게 웃어 넘길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때는 말 못할 이름이었다. 요즘도 “왜 왕손이에요?”라고 누가 물어보면 그냥 “손이 커서요”라고 거짓말한다. 실제로 잉글리쉬 코카스파니엘은 손발이 크다. (무엇이 손이고 무엇이 발인가?) 왕손이를 춘천 본가에 데려가니 어느 순간 ‘전왕손’이 되어 있었다. 전범선 동생 전왕손. 엄마는 요새도 나를 부르려다 ‘전왕손~’하기도 하고 왕손이를 부르려다 “전범선~”하기도 한다.

반려동물 입양은 가족이 생기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부끄러운 과거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곧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가을에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로 되어 있었고, 나는 왕손이를 데려갈 수 없었다. 애인이나 가족에게 맡기고 가버릴 심산으로 강아지를 데려온 것이다. 왕손이가 사람이었다면 나는 파렴치한 아버지였다. 애인은 집에 다른 강아지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난처했고, 나는 춘천에 왕손이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왕손이를 처음 사올 때는 후환을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생명을 최소 15년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의 안이함이 수치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의 삶을 경시하는 시장 제도에 분개한다. 스무살 전범선은 25만원에 왕손이를 살 수 있어서는 안 되었다. 오늘날의 펫샵은 과거 노예 시장과도 같다. 생명을 재산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무자비하고 반인도적인 거래가 버젓이 일어난다. 자격도 없는 이가 주인으로 거듭난다. 왕손이를 바라보면 한없는 죄책감과 후회에 휩싸인다.

나는 유학 시절 <동물 해방>을 읽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지만, 만약 왕손이가 없었으면 마음이 동했을까 싶다. 2012년,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의 저자 멜라니 조이를 만났을 때, 나는 한국인은 개도 먹고 돼지도 먹고 소도 먹는다고 반론했다.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것은 서양인이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개가 아닌 소가 가족의 일부였기 때문에 소고기보다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 나는 삽겹살은 먹으면서 개고기에 치를 떠는 몇몇 반려인들의 모순이 황당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멜라니 조이가 말하는 인지부조화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개고기가 나쁘면 돼지고기, 소고기도 나쁜 것 아닌가? 반대로 돼지고기, 소고기가 괜찮으면, 개고기도 괜찮은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왕손이 고기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식용견은 따로 있다’는 헛소리로 변명할 자신도 없었다. 누군가 왕손이를 먹는 것이 싫다면 내가 개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를 먹는 것 모두 잘못된 일이었다.

 지난 사 년 간, 나는 여기저기 비거니즘과 동물 해방을 말하고 다녔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왕손이부터 챙겨라”, “나부터 해방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해방촌 반지하에 사는 것보다 춘천의 넓은 집에 있는 것이 왕손이에게 더 좋다고 자위했다. 나는 솔직히 왕손이를 잘 돌볼 자신이 없었다. 맨날 밖에 나가서 싸돌아다니느라 집안 살림도 뒷전인데, 식구를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럴 거면 애초에 왜 데려온 거니?) 양반들에서 건반 치는 지훈이랑 같이 살 때는 거의 집에서 잠만 자다시피 했기 때문에 도저히 왕손이를 키울 환경이 안 되었다. 그러다 지지랑 함께 살면서 집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살림에 대한 생각도 180도 바뀌었다. 일년 정도 지지와 살림을 꾸리고 나니, 조금은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때, 엄마가 SOS를 보냈다. 더이상은 힘드니 왕손이를 데려가라! 동물 해방보다 엄마 해방이 우선이었다.

 나는 지지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심지어 전 애인과 기르던 강아지였다. 시어머니가 맡고 있던 내 새끼를 갑자기 같이 키우자는 것과 같았다. 이미 가사 노동의 불균형 때문에 몇 차례 다툰 적이 있었다. 지지가 나보다 훨씬 깔끔한 성격이고 요리 실력도 월등하기 때문에, 나는 따라가기 힘들었다. 노력한다고 노력했지만, 지지 만큼 집안 살림에 있어서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왕손이를 데려오면 이러한 갈등이 더 커지지 않을까? 엄마와 지지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했다. 지지는 며칠 고민하더니 데려오자고 했다. 고맙고 고마웠다. 나는 책임 있는 양육자가 되리라 다짐했지만, 왕손이 때문에 다투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예상과 달리 왕손이는 가정의 평화를 가져왔다. 일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하루에 세네 번 산책을 나가서 똥을 싸게 하고, 밥도 좋은 거 먹이려고 직접 재료를 데치고 손질한다. 털이 많이 날리니 청소도 자주 해야 하고 베란다나 화장실에 오줌을 싸면 물 청소도 해야 한다. 하지만 왕손이까지 세 식구가 되니까 분명 우리집 사랑의 총량이 증가했다. 몸은 더 피곤한데, 마음은 더 충만하다. 왜 그런가 고민을 해봤는데, 셋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 같다. 둘이 사랑할 때는 일직선상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런데 항상 둘이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불가피하게 불균형이 발생한다. 연인이 다투는 이유는 대부분 서운해서다.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재고 따지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인간인 이상 쉽지 않다. (강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잘 한다.) 나와 지지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섭섭함이 있었다. 주는 만큼 받지 못한다는 느낌, 일방적인 사랑의 흐름을 서로 감지할 때가 있었다. 둘의 사랑은 줄다리기 같기도, 시소 같기도 하다.

여기에 왕손이를 추가했더니 삼각형이 되었다. 주거니 받거니에서 돌고 도는 사랑으로 진화했다. 왕손이는 나와 지지 모두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준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왕손이를 끔찍이 아낀다. 만약 내가 지지에게 조금이라도 서운할라치면, 지지가 왕손이를 보살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녹아내린다. 내게 주었으면 하는 사랑이 왕손이에게 흘러갔다 다시 내게 흘러온다. 반대로 나는 지지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면 괜히 왕손이를 더 챙긴다. 산책을 가거나 목욕을 시키거나 공놀이를 한다. 행복한 왕손이를 보며 지지는 금방 누그러진다. 질투가 없기 때문에 우리 셋은 사랑의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 일종의 삼자 연애다.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깊이 공감했다. 당신도 나를 키울 때 아빠랑 참 행복했다고. 그래서 성당에서도 삼위일체라고 한다고. 내가 미국 가고 왕손이 키울 때도 좋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혼자 많이 힘들었다고. 나는 엄마랑 통화하면서 왕손이를 쳐다보았다. 의자 위에 곯아떨어진 얼굴에서 갓난 아기 전범선이 보였다. 아빠가 나를 볼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비교도 안 되겠지. 엄마는 개를 키우는 건 두 살 짜리 애를 돌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인간은 자라지만 개는 평생 두 살 같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딱 귀여운 만큼 힘들다.” 엄마의 말이 비로소 와닿았다. 


“왜 그래? 너 울어?” 아빠가 떠난 지 삼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는 아빠에게 받은 사랑을 충분히 돌려주지 못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한스럽다. 엄마에게, 지지에게, 왕손이에게 나눠줘야 한다. 엄마를 왕손이로부터 해방하고 나와 지지 사이에 왕손이가 들어오니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 노견인 내 새끼는 햇수가 많이 남지 않았다. 여생의 보금자리를 책임지는 것이 나의 죄를 덜고 한을 씻는 최소한의 도리다. 내 가슴 속에 쌓인 내리사랑을 순환시키는 일이다.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포르체, 2021)와 (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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