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 발족 이후 저는 여러 매체에 비거니즘 관련 글을 썼습니다. 가장 큰 화두는 ‘비거니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였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사상과 운동을 한국에 도입하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채식주의’는 너무 한정적이었습니다. 먹는 것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물주의’나 ‘중생주의’, ‘짐승주의’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비거니즘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역사를 알아보고, 나아가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 계몽주의 등 다른 담론과의 접점을 찾아봤습니다. 저의 두번째 에세이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는 그러한 고민의 결과입니다. 해답은 동물해방물결의 소 살리기 운동을 위해 강원도 인제를 다녀오다가 얻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한살림 운동을 해오셨던 분들의 도움으로 소들의 보금자리를 확보하게 되었을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비거니즘은 살림이다.’ 살리는 철학이며 살리는 운동이다. 인류세라는 죽임의 시대를 극복하는 열쇠로서 비거니즘은 살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림’은 가사 노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지만 사전적으로는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바로 이 ‘살아가는 일’을 남성중심 사회는 여성에게 할당하고 평가 절하합니다. 장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정리하고 돌보는 일을 ‘집사람, ‘안사람’, ‘아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집안일’로 정의합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지만 그 가치를 높이 사지 않습니다. 어릴적 어머니가 저희 집안에서 담당하였던 일은 전부 저를 ‘살리기’ 위한 살림 노동이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반겨주고 챙겨주는 일. 무력하고 불안한 아이였던 제가 살아갈 수 있도록 어머니가 베풀어준 사랑입니다. 살림의 본질은 삶의 지속이자 생명의 재생산, 다시 말해 사랑입니다. 그러한 살림을 여성에게 맡기고 ‘바깥 양반’들이 집중한 일은 무엇일까요? 살림의 반대인 죽임입니다. 생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학살하는 일입니다. 분류하고, 판단하고, 예측하고, 개발하는 일입니다. 서양 근대 기계 문명은 이성의 언어로 육식주의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지탱합니다. 무한 경제 성장의 신화를 숭배합니다. 살림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순환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살림은 ‘원위치’ 시키는 것이 전부입니다. 요리하고 먹고 싸고 치우고 다시 요리하고 먹고 싸고 치우는 일입니다. 무한한 확장과 성장을 꿈꾸는 살림꾼은 없습니다.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살림을 외주 주고 죽임을 일삼는 이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기후생태위기가 도래했습니다. 지구라는 우리 모두의 유일한 집에서 삶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생명이 지속 불가능해졌습니다.
지구 살림이 지상 과제입니다. 지구를 살린다는 말을 많이 쓰지만, 정확히는 지구라는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를 살려야 합니다. 인간중심 사회는 비인간 존재를 집안 식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한히 착취하고 파괴해도 괜찮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오늘날 제6차 대멸종기를 초래했습니다. 이전에도 5번의 절멸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한 종에 의해서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절멸보다는 박멸이라는 말이 적확합니다. 비거니즘은 인간중심주의를 초월하여 종평등한 사회를 이루고, 모든 동물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합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비인간 동물과도 한집안을 이루어 같이 살아가자고 합니다. 비건이 흔히 듣는 비아냥은 ‘식물은 고통을 안 느끼냐?’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정의하는 고통이란 불쾌한 자극에 대한 중추 신경계의 반응이기 때문에 정의상,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식물도 항상성 유지를 위한 여러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척추 동물인 인간이 느끼는 것과 같은 성질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지나친 의인화입니다. 반면 비인간 동물이 느끼는 것은 인간의 고통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 과학계의 합의입니다. 식물에 대해서도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고수하여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가정해도, 채식이 식물에게 덜 피해를 줍니다. 소고기 1kg을 만들기 위해 옥수수 12kg이 필요합니다. 육식이란 인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에게 식물을 왕창 먹이는 행위입니다. 중간 단계 없이 인간이 직접 식물을 먹으면 훨씬 효율적입니다. 지구는 80억 육식 동물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1명의 육식 동물을 살리기 위해 수백 명의 초식 동물이 죽어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인류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육식 동물이 아닌 채식 동물이 되어야 합니다. 잡식 동물인 인간은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죽임의 밥상을 살림의 밥상으로 바꿀 때입니다.
육식을 하려면 반드시 동물을 죽여야 하지만, 채식은 식물을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 곡식, 버섯 등은 식물과 균의 열매입니다. 사과 나무는 스스로 재생산하기 위해 씨앗 품은 사과를 만들고 그것을 떨굽니다. 마찬가지로 벼는 익으면 쌀을 만들어 퍼뜨리고, 균사체는 버섯을 피워 포자를 터뜨립니다. 동물은 균과 식물의 과실체를 먹고 그들의 재생산을 도우면서 오랜 세월 공진화해왔습니다. 사과를 따고, 쌀을 추수하고, 버섯을 수확해도 사과 나무와 벼와 균사체는 죽지 않습니다. 잘 가꾸고 널리 퍼뜨린다면 그들의 재생산을 돕는 일입니다. 죽임이 아닌 살림입니다. 농부 만큼 땅에 가깝고 식물과 균을 사랑하는 직업이 없습니다. 축산업자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소, 돼지, 닭을 직접 기르는 사람 만큼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물은 인간이 먹으려면 죽여야 합니다. 채식은 살림이지만 육식은 죽임입니다. 가축을 가족처럼 먹여 살려왔던 축산업자가 직접 죽이지 않고 도살장으로 보내는 것은 살림과 죽임의 모순을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자식 같은 송아지, 병아리를 내 손으로 죽입니까. 반면 농부에게는 수확 만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과실을 거두는 일은 동물을 도축하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씨앗 품은 식물의 사랑을 받아서 나누는 일입니다.
‘살림’이라는 말은 참 신기합니다. 살리는 일을 아우르는 말을 우리가 이미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입니다. 다만, 살림을 집안일로만 치부하고 여성의 몫으로 치부한 것, 나라 살림과 지구 살림을 집안 살림 하듯이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비거니즘은 남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모두를 살리자고 주장합니다. ‘살림’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소수의 백인 남성 지배 계급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촌 경제를 모든 생명을 위한 지구 살림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경제’라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영어의 ‘에코노미(economy)’를 근대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경세제민’의 줄임말인 경제를 썼습니다.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경제’라고 하면 다스리는 지배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입니다. 하지만 ‘에코노미’의 그리스어 어원은 느낌이 다릅니다. ‘오이코노미아’는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관리’를 뜻하는 ‘노미아’가 합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집안 살림이라는 뜻입니다. 에코노미를 경제가 아닌 살림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지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국가 경제가 아닌 나라 살림, 세계 경제가 아닌 지구 살림이라고 생각하면 무한 경제 성장의 신화를 운운할 수 없습니다. 살림을 무한히 키운다는 건 섬뜩하지 않나요? 살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등골이 부러지는 소리입니까? 살림은 성장이 아닌 순환이 전부입니다. 생태주의를 뜻하는 에콜로지와 에코노미의 뿌리가 같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구를 우리 모두의 하나뿐인 집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경세제민이 아닌 살림이야말로 진정한 에코노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경제학자가 아닌 살림꾼의 목소리가 권력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학자의 대부격인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건 도축업자나 양조업자나 제빵사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 추구 때문’이라면서 경제의 기본 원리를 사리사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기주의야말로 우리의 저녁을 준비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의 저자 카트리네 마르살은 너무나도 창피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스미스의 저녁은 그의 어머니인 마가렛 더글라스가 차려줬다는 점이죠. 결혼을 하지 않았던 스미스는 어머니와 거의 평생 함께 살았습니다. 스미스가 저녁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과연 어머니의 이익 추구 때문일까요? 경제의 기본 원리가 이기주의라는 스미스의 발상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핵심 이론입니다. 하지만 스미스가 그토록 ‘이성적인’ 저술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사랑으로 그를 돌봐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살림’은 어머니 마가렛의 몫이었고, 그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그의 아들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성인 어머니보다 남성인 도축업자, 양조업자, 제빵사의 노동이 더 중요해보였던 것이죠. 이것이 남성중심적인 근대 문명의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살림을 등한시하는 자의식 과잉된 소수의 백인 남성들이 짜놓은 법칙대로 지구를 개발하고 생명을 파괴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마가렛 더글라스의 집안에서 진정한 살림꾼은 누구였을까요? 인류가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관점으로 지구 살림을 꾸렸더라면 지금과 같은 기후생태위기가 닥쳤을까요?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그래프와 수식을 숭배하는 경제학자보다 살림 100단에게 귀 기울여야 합니다.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삼십년 평생 애덤 스미스처럼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었고,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군대에서는 공공 급식을 먹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발리올 칼리지에서 석사 과정을 할 때, 매일 도서관에 갔습니다. 애덤 스미스도 발리올 출신이기 때문에 약 265년 전,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했을 거라 상상하며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하루 종일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끼니 때가 되면 학내 식당에 가서 맛난 식사를 했습니다. 청소는 청소부의 역할이었죠. 저는 밥하고 청소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노동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성적이고 고차원적인 일에 집중하려면,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손발 노동은 남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분업이자 시장 경제의 작동 원리였구요. 식당 조리사보다 변호사, 펀드 매니저의 연봉이 훨씬 높은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법률이나 투자 자문의 일이 밥해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할까요? 밥을 먹고 생명을 지속하는 것보다 삶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식구와 밥을 나누고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 가치있는 행위가 또 있을까요? 자본주의의 가치 체계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확신한 후, 저는 ‘먹고사니즘’을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요즘 세대의 먹고사니즘을 말할 때, 생계 유지를 최우선시하고 정치적 무관심을 보이는 행태를 떠올립니다. 사회적 가치나 사상보다 나의 진로와 직업이 중요하다는 태도죠. 하지만 직장 생활을 중요시할수록 진짜 밥을 먹고 사는 일에는 소홀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빨리 대충 때우거나, 밖에서 사먹고, 집에서 배달시켜 먹기가 일쑤입니다. 참된 먹고사니즘은 밥을 먹고 삶을 사는 일을 최우선시해야 합니다. ‘무엇이 중헌디?’라고 물었을 때, ‘삶과 살림’이라고 답하는 것이 먹고사니즘이라고 믿습니다. 비거니즘과 먹고사니즘 모두 밥상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의 시작입니다. 저는 비건이 되면서 먹고사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살림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원래는 저 혼자 쓰기로 했으나, 살림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식구들이 함께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짝꿍인 편지지와 같이 쓰게 되었습니다. 저희 해방촌 집에는 편지지와 전범선, 그리고 왕손이가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갑니다. 왕손이는 12살 잉글리쉬 코카스파니엘 남성입니다. 제가 스무살 때, 비거니즘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었을 때, 펫샵에서 사온 친구입니다. 유학하는 동안 어머니께 맡겨 두었다가, 얼마 전에야 다시 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동물해방운동을 한다고 나다니는 저를 보고 어머니는 “왕손이부터 챙겨라”, “나부터 해방해달라”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왕손이가 없었다면 제가 채식을 시작했을지 의문입니다. 미안한 마음이 항상 앞서는 친구입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지지는 저와 연애한 지 일년이 조금 지난 사이입니다. 만나자마자 영혼의 단짝이라고 느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비거니즘과 예술의 접점을 함께 고민하는 동지이기도 합니다. 지지는 살림 100단은 아니어도 99단 정도 됩니다. 저보다 모든 면에서 살림을 잘합니다. 요리 실력이 빼어납니다. 저는 어깨 너머로 배우며 매일 같이 연습합니다. 이 책은 저와 지지가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면서 떠오른 단상을 각자의 관점으로 써내려간 것입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질문을 던져봅니다. 동물의 고통 때문이고 싶지 않아서 채식을 합니다. 기후위기에 기여하고 싶지 않아서 되도록이면 지역 농산물을 구매합니다. 토양을 파괴하고 싶지 않아서 유기 농산물, 무농약 농산물을 택합니다. 저희 세 식구의 살림이 다른 생명의 죽임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집안 살림과 나라 살림이 생명 살림이자 지구 살림이기를 바랍니다.
2021년 가을, 해방촌에서,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포르체, 2021)와 (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