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부터 기본소득제는 우리나라 공론장의 중심으로 서서히 이동해 왔고, 2021년에는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흥미로운, 하지만 상당한 불편함을 주는 논쟁은 주로 복지국가론 지지자와 기본소득론 지지자 사이에 발생했다. 복지국가론 지지자 중 일부는 제도의 합리성이나 필요한 재정의 크기 등을 문제 삼아 기본소득론을 비판했다. 하지만 비판은 덜 분석적이며 덜 통합적이고 덜 미래지향적이라는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한계들의 극복과 한국사회의 재구성의 측면에서, 나는 복지국가론과 기본소득론은 서로 반목되기 보다는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보며, 그것이 결국에는 복지국가의 새로운 버전인 복지국가 5.0의 핵심적 구성요소 중 하나가 되리라 판단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여기서는 복지국가론이 기본소득론에 대해 갖는 몇 가지 오해들을 밝히고, 양자 간의 화학적 융합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기본소득론에 대한 오해 1: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국가를 대체하려는 담론이다
복지국가론과 기본소득론의 긍정적 융합을 시도하기에 앞서, 기본소득론이 피력하는 몇 가지 입장을 명시하는 것이 이 글을 포함해 향후 전개될 융합작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양자간의 시너지를 위해, 무엇보다도 상호간의 오해의 소지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본소득론은 복지국가의 사회보장체계 전체를 대체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는 점이다. 기본소득론의 대부로 알려진 필리프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와 유럽의 기본소득론자들은 기존의 사회보장체계와 기본소득의 적절한 융합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교육이나 건강과 같은 사회서비스의 강화와 최저임금제나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고용보장체계의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 정의상 기본소득을 기존의 모든 이전소득(transfer income)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질 좋은 교육과 의료서비스, 기타 사회서비스 등에 대한 공공지원을 대체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물론 기본소득이 이런 식으로 묘사될 때도 많고, 또 기본소득 옹호자들 가운데는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기본소득을 그저 기존의 여러 복잡한 사회수당체계를 급진적으로 단순화한 거처럼 선전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우리의 기본소득 정의에 대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겠지만, 어쩔 수 없다. »[1]
사실 제도상으로 상호간의 완전한 대체는 불가능하다. 단적으로 사회보장체계는 소득보장체계만이 아니라 사회서비스체계나 고용보장체계도 포괄하는데, 기본소득은 소득보장에 관련된 것이고 따라서 다른 두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사회서비스체계를 민영화하고 노동3법 등의 노동보호를 위한 법제들을 없앤 다음, 기본소득으로 받은 현금으로 해당 서비스를 구매하게 하거나 노동자들의 힘만으로 노동보호를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비합리적이며 우리를 파탄으로 이끌 것임이 명확하다. 이를 인식하고 있기에, 주요 기본소득론자들은 복지국가론과의 융합에 적극적인 것이다.
다만 기본소득론을 제기했던 소수의 사람들, 특히 미국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있던 경제학자들(프리드만, 하이예크 등)이 기존 사회보장체계를 기본소득제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은 기본소득론의 본류가 아니라 곁가지 중의 곁가지일 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의 논쟁에서 다소 아쉬운 점은 기본소득론을 제기한 전문가들이 기존의 사회보장체계와의 융합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존 사회보장체계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기본소득론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기에 다소 격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사회보장체계와의 접점들에 대한 논의들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해, 이로 인해 많은 오해들이 생겨났다. 물론 복지국가론 지지자들이 기본소득론에 대해 보여주었던 비우호적인 대응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기본소득론이 던지는 문제제기가 현재 답보 중인 우리나라의 복지국가론을 한 단계로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임에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소득론에 대한 오해 2: 기본소득론은 매우 경직적이어서 복지국가론과 조율되기 어렵다
두 번째의 지적할 점은 기본소득의 핵심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보편성), 개별적으로(개인성), 반대급부로서의 특정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비의무부과성) 기본소득액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보편성, 개인성, 비의무부과성이란 3가지 원칙은 핵심이어서 불변적이지만, 충분성, 현금성, 정기성 등의 다른 원칙들은 현실에서 적용할 때 조정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푼돈 기본소득’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하지만 이 비판은 충분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핵심에서 다소 비껴간 비판이다. 핵심인 보편성, 개인성, 비의무부과성이 지켜지는 한, 처음에는 현실적인 한계로 소액으로 시작하여 점차 적정 수준까지 기본소득액을 올리겠다는 것은 크게 문제될 바가 아니다. 기본소득 방식의 소득보장제도를 온전한 형태로 한 순간에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한 순간에 도입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제도에 대한 비합리적인 비판이다.
또한, 기본소득론자들은 모든 구성원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더라도 생애주기에 따라 액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생애주기에 따라 필요한 자원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받는 기본소득액이 장년이 되어 가정을 이룬 후 받는 액수보다 작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기본소득이 자산조사 없는 보편적 성격의 사회수당과도 병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생애주기에 따라 아니면 특정한 상황에 따라 별도의 현금급여가 필요하다면 이를 사회수당의 형태로 제공하고 동시에 기본소득도 중복해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에 따라, 현재의 소득보장체계는 기본소득을 포함한 다층구조로의 변화가 가능하다. 요컨대,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적이고 자율적이며 사회참여적인 삶’의 영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들이 가능하며 이 중에 기본소득 형태를 갖는 현금급여의 적절한 위치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기본소득론에 대한 오해 3: 기본소득은 소득보장제도의 일종으로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본소득론은 제도로서의 내용도 획기적이지만 이 제도의 적용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사회상에 더 큰 무게가 실린다는 점이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은 제도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단순하다. 재정적인 역량만 된다면, 이 제도를 도입∙운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장치가 토대가 되어 도달하게 될 사회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는 사회의 구성과 운영의 원칙들이 달라지는 것으로 사회의 성격 자체가 많이 달라지게 되며,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고 있다.
« 이 모든 현안 가운데서도 특히 절실한 것은 우리의 사회와 세계의 사람들이 스스로 경제안정을 추구하는 방식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재구조화하는 활동이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여러 불안 요소들을 잠재우고 그 대신 희망을 갖도록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오늘날 흔히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고 불리는 것을 과감하게 도입해야 한다 »[2]
정치 영역에서 보면, 모든 사회구성원을 진정한 시민으로 그리고 실질적 자유를 향유하는 시민으로 바꾸고자 한다. 복지국가도 사회보장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사회경제적 토대를 제공하고, 이 위에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를 제공하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복지국가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소득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며 이 임금노동으로 인해 현실에서 ‘적극적 자유’를 실제로 펼칠 가능성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구성원은 공적 사안의 형성 및 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시민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현재의 복지국가는 이 지점에서 매우 취약하여 별다른 참여 통로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기본소득론은 기본소득이란 도구를 통해 이를 넘어서고자 하고 있으며,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단순한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진정한 역량까지 포함하는’[3] ‘실질적 자유’의 확보를 강조하고 있다.
노동 영역에서는, 기본소득이라는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노동의 다양한 형태(생계형 노동, 자아실현형 노동, 사회공헌형 노동 등)가 가능하게 되어 사회구성원의 선택의 폭은 넓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회혁신을 만들어내는 활동과 기술이 태동하게 된다. 그리고 정신적∙육체적 노동을 분명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하고 노동에 대한 반대급부 또한 제공되지 않는 노동, 즉 ‘그림자 노동’을 소외의 공간에서 해방시켜 사회의 전면에 나서게 만든다. 더 나아가면, 노동의 다양성으로 인해 그리고 노동의 탈시장화를 통해, 임금노동은 오히려 기존의 노동보호의 정도를 더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경영에의 노동참여 강화 등).
경제 영역에서는, 중소기업과 사회적 경제조직(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마을관리기업 등)이 활성화되고 이들 중심으로 생산체계가 재구조화 된다. 기존의 대기업 중심의 생산체계는 그것 자체로 크나큰 혁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혁신은 대기업이 아닌 다른 생산조직에서 일을 하더라도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 조건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다양한 생산조직을 형성∙운영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사회보장의 영역을 보면, 소득보장체계를 기본소득제, 사회수당, 사회보험형 소득보장제도(공적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로 구성되는 다층구조로 재구성하고, 기존의 사회서비스체계와 사회규제체계를 유지하면서 각 요소들 간 역할분담의 황금비율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복지국가가 기본소득을 수용했을 때, 복지국가의 혁신이 가능하다
본 저자가 보기에 기본소득론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2가지이다. 기본소득론이 지향하고 있는 사회상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양산하고 있으며 현재의 사회 구성 및 운영의 원칙들은 이를 해결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기본소득론은 이를 극복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논의의 장, 새로운 열망의 장, 새로운 상상의 장을 열어주고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이 사회상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구축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토대이다. 이 토대는 ‘인간적이고 자율적이며 사회참여적인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의 확보이다. 기본소득론은 이 토대를 기본소득이라는 현금급여로 제시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토대는 반드시 모두가 현금일 필요는 없지만 일부는 현금으로 채워져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것을 현금으로 확보할지 현물로 확보할 지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사실 이 재화와 서비스의 확보는 기존의 복지국가도 형식적으로는 목표로서 분명히 강조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보여주듯이 그 목표의 달성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달리 말하면 부분적 실패의 근원에는 바로 이 재화와 서비스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론은 기존의 복지국가가 변해버린 내외적 환경에 다시금 적응하기 위해 무엇을 공략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위에서 말한 재화와 서비스의 보편적 확보이다.
사실 현금급여로서의 기본소득과 그것이 그리는 미래의 사회상 사이에는 명확한 자연적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에서 말한 재화와 서비스의 확보는 현금, 현물, 사회 규제(regulation) 등의 적절한 조합을 통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복지국가가 발명해낸 여러 제도들이 활용될 여지는 매우 크다. 이는 곧 복지국가의 사회보장과 기본소득론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작업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작업의 시작은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기본소득론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일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론은 이미 그 내용들을 상당부분 채워 놓았고, 이것을 사회보장의 눈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상기했듯이 기본소득론의 권위자들은 기존의 복지국가와 기본소득제도의 접점이 있으며 제도적으로 섞일 수 있고 상보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론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는 복지국가가 답해야 한다. 사회보장체계의 관점에서 양자 간의 융합이 가능한지에 대한 답과 더불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답과 대안은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기에 복지국가의 또 다른 거대한 적응(grand adaptation)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복지국가의 재구성이라는 복지국가 5.0 기획은 기본소득론과 커다란 접점을 가지고 있다. 제도로서의 기본소득제는 ‘0’의 행복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론이 제시하는 사회상은 ‘+’의 행복이 충만한 사회일 수 있다. 공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구성원이 많아지고, 노동을 하더라도 자아실현을 위해 또는 사회공헌을 위해 행하는 노동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의 행복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 이외의 다양한 활동이 늘어나는 것 또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다. ‘+’의 행복을 현실에서 구체화시키는 장치들이 빠졌다. 제도로서의 기본소득은 토대를 제공할 뿐이며, 이 토대 위에서 ‘실질적 자유’를 구체화시키는 제도들이 더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사회학적 상상력이 혁명의 시기만큼이나 필요한 때이다.
[1] . 필리프 판 파레이스, 야니크 판데르보흐트, 홍기빈 역, 21세기 기본소득, 흐름출판, 2017, 37쪽.
[2] . 같은 책, 24쪽.
[3] . 같은 책, 252쪽.
정책연구소 이음 선임연구위원.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에서 수학 후 밑으로부터의 복지국가운동 전개 중. 소득보장, 건강, 노후 등의 영역에서 근원적 욕구의 사회화, 정책의 정치화, 정치의 정책화 등을 연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관점에서 복지국가의 재설계를 탐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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