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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브(globe)에서 플래닛(planet)으로

역대급 태풍으로 알려진 ‘힌남노’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미디어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이런 제목의 기사들을 내보냈다.

 

태풍이 할퀸 포항 

제주 곳곳 할퀸 태풍

부산 울산 할퀸 힌남노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할퀸다’이다. 이것을 지구인문학적 개념으로 바꾸면 ‘행성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에는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을 차크라바르티는 ‘행성(planet)’ 개념으로 나타낸다. 물론 제임스 러브록이나 브뤼노 라투르 같으면 ‘가이아(Gaia)’ 개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를 ‘가이아의 복수’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라투르의 ‘가이아’가 지구의 행위적 측면을 강조하는 개념이라면, 차크라바르티의 ‘행성’은 지구의 거주적 측면에 주목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라투르가 가이아로서의 지구론을 전개했다면, 차크라바르티는 행성으로서의 지구론을 주창한다. 특히 차크라바르티가 강조하는 것은, 탈식민주의(postcolonial) 연구자 출신답게, 글로브(globe)와 플래닛(planet)의 차이이다. 글로브(globe)는 인간의 손이 간 지구를 가리키고, 그런 점에서 인간중심적 개념이다. 이점은 기술의 발달과 자본의 힘으로 전 세계가 단일화되는 것을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구(Earth)에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들도 많다. 지구의 깊은 심연이 그런 곳이다. 그것을 차크라바르티는 ‘행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같은 ‘지구(Earth)’라고 해도, ‘글로브(globe)’가 인간의 손길이 닿는 영역을 말한다면, ‘행성(planet)’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지구의 측면을 가리킨다. 차크라바르티에 의하면,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인간 차원의 이야기’이다. 반면에 행성은 인간의 차원을 벗어난 이야기이다. 지금까지의 지구이야기가 글로브에 주목했다면, 이제부터의 지구이야기는 행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차크라바르티는 주장한다.

 

인류세 인문학자 차크라바르티

차크라바르티의 행성론은 2019년 가을에 나온 그의 논문 “The Planet: An Emergent Humanist Category”에서 전개되고 있다(Critical Inquiry 46, Autumn 2019). 번역하면 “행성: 새롭게 부상한 인문학 범주”가 될 것이다(이하, 「행성」으로 약칭). 이 제목으로부터 그가 인문학에 새로운 범주를 도입하여 새로운 인문학을 시도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새로운 인문학이란 다름아닌 인류세 시대의 인문학을 말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도는 이미 2008년에 쓴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The Climate of History: Four Theses)”에서 시작되었다. 이 논문 역시 실려있고, 다행히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다(『지구사의 도전』에 수록). 참고로 이 논문은 인류세 인문학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에 한글로 번역된 교토대학 시노하라 마사타케(篠原雅武) 교수의 『인류세의 철학』(모시는사람들)에서는 이 논문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인류세라는 학설을 ‘인간의 존재 방식을 다시 묻기를 요구하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논의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논문이다.” (97쪽) 

 

또한 브뤼노 라투르는 티모시 렌턴과 같이 쓴 논문에서 차크라바르티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인류세 시대에 인류(humanity)를 정의하는데 있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Bruno Latour and Timothy M. Lenton, “Extending the Domain of Freedom, or Why Gaia Is So Hard to Understand,” Critical Inquiry, 45-3, Spring 2019, p.1

 

2008년의 논문 「역사의 기후」가 “인간사와 자연사의 결합으로서의 새로운 역사학”의 제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런 점에서 인류세 시대의 역사론이라고 한다면, 2019년의 논문 「행성」은 “글로브와 플래닛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런 점에서 인류세 시대의 행성론에 해당한다.

이 논문의 모태는 2019년 5월 1일에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Divinity School)에서 행한 강연 “The Planet: An Emergent Matter of Spiritual Concern?”이다. 이 강연은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고, 원고도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 홈페이지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아울러 이 논문은 2021년에 나온 그의 저서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맨 마지막에는 ‘후기’ 형식으로 차크라바르티와 브뤼노 라투르의 대담이 실려 있는데, 제목이 “The Global Reveals the Planetary”이다. 직역하면 “글로벌적인 것은 행성적인 것을 폭로한다”이다. 이 대화 역시 2019년의 논문에 관한 것이다.

이상의 차크라바르티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허남진・조성환의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지구인문학 – 지구(Earth)에서 행성(Planet)으로」(『문학・사학・철학』, 67호, 2021년 12월)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의 행성론도 간략히 언급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위의 2019년 논문에 좀 더 집중해서 그의 행성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대지진을 통한 행성과의 조우

2021년에 10월 22일에 공주교대 글로컬인문학연구소와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의 공동주최로 열린 콜로키움 <『인류세의 철학』 저자와의 대화: 인류세 시대의 철학과 교육>에서 시노하라 마사타케는 차크라바르티의 「행성」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소개하였다.

인간들은 역사 속에서 항상 행성(planet), 즉 ‘깊은 지구(deep Earth)’와 경험적으로 만나 왔다. 지진, 화산 폭발 그리고 쓰나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행성을 반드시 인문학적 사유의 범주로 만났던 것은 아니다. 가령 1755년의 리스본 지진 이후에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와 논쟁을 하고, 1934년에 비하르 지진 이후에 간디와 타고르가 토론을 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인간들은 ‘행성’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서도 행성을 다룰 수 있었다.

여기에는 우리가 그 동안 잘 몰랐던 세계사적 지진들, 가령 리스본 지진이나 비하르 지진과, 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저명한 사상가들의 논쟁이 소개되고 있다. 세계사에 어두운 나로서는 지진도 지진이거니와 그것을 둘러싸고 철학자와 정치인들이 논쟁을 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차크라바르티가 그런 ‘역대급’ 지진의 발생을 ‘행성과의 조우’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행성은 ‘깊은 지구’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시노하라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기고 있다.

1755년에 발생한 포르투갈의 ‘리스본 지진’은 라이프니츠나 칸트 같은 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34년에 인도 북부에서 일어난 대지진에 간디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도 이것에 필적할만한 사건이다. 이것을 차크라바르티는 “행성과의 만남”이라고 보는 점이 대단히 신선하다. (『인류세의 철학』, 모시는사람들, 2022, 16쪽)

여기에서 우리는 차크라바르티의 저 문장을 받아들이는 강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즉 동일본대지진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일본인으로서는 차크라바르티가 말하는 ‘행성과의 만남’의 의미가 더 절실하게 와 닿았는 것 같다. 반면에 나처럼 TV나 인터넷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지진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은 지진의 참혹함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이 없다. 시노하라가 기후변화와 인류세라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가 일상에서 대지진이라는 재난을 겪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95년의 고베 지진과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의 경험을 통해 “인위의 산물로서의 인간 세계가 자연의 맹위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절감했다.”고 고백하고 있다(『인류세의 철학』 한국어판 저자 서문, 7쪽). 즉 시노하라가 차크라바르티의 말에 공감했던 이유는 지진이라는 사건을 통해 <인간의 취약함(fragility)>이라는 실존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탈식민지 연구에서 기후변화 연구로

차크라바르티 역시 자신이 살았던 호주 캔버라(Canberra)의 산불 경험을 통해 서발턴(탈식민주의) 연구에서 기후변화(인류세) 연구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금세기 초에 나의 관점을 바꿔 놓은 일이 발생했다. 2003년 호주 수도 특별구역(Australian Capital Territory)에서 발생한 엄청난 산불은 인간들과 비인간들(nonhuman beings)의 생명을 앗아갔고, 수백 채의 가옥을 파괴시켰으며, 호주의 유명한 ‘숲속 도시(bush capital)’ 캔버라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숲과 공원을 훼손시켰다. 이러한 비극적인 피해에 대한 애도는 나로 하여금 특정 화재의 역사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했으며, 그 원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는 내가 살고 있는 인간중심적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D. Chakrabarty,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2021, pp.2-3. 번역은 허남진・조성환,「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지구인문학」 284쪽 참조. 강조는 인용자의 것

 

당시의 캔버라 산불은 4명의 인명피해를 비롯하여 수도권 면적의 3분의 2를 훼손시켰다. 그런데 캔버라는 차크라바르티가 박사학위를 받은 호주국립대학이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 그로서는 남다른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 감정이 그로 하여금 탈식민지주의 연구에서 지구인문학 연구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후 그는 화재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원인이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래로 인간이 ‘지질학적 힘’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인류세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2003년 호주의 대형 산불은 차크라바르티에게 있어 학문적 회심을 일으킨 ‘지구사적 사건’이었다(이상, . 허남진・조성환,「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지구인문학」 284쪽).

위의 차크라바르티의 고백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나의 관점을 바꿔 놓은 일이 발생했다”는 말이다. 이 표현은 마치 호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가 ‘악어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고 고백한 것을 연상시킨다. 플럼우드가 악어의 먹이가 될 뻔한 사건을 통해 자연과 조우했다면, 차크라바르티는 산불 경험을 통해 행성과 조우한 것이다.

 

글로브 지구는 행성 지구를 드러낸다

호주 산불이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글로브에 의한 플래닛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The Global Reveals The Planetary). 왜냐하면 차크라바르티의 개념 정의에 의하면, 글로브는 산업혁명 이래로 진행된, 그리고 1990년대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으로 가속화된 ‘인간화된 지구의’ 측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반면에 플래닛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통제불가능한 지구의 속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현재의 과학으로서는 통제불가능하다. 심지어는 예측조차 어렵다. 그래서 만약에 차크라바르티가 태풍 힌남노의 기사를 썼다면, 아마도 “행성과의 조우”나 “행성이 모습을 드러내다”는 식의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글로브에는 인간의 강건함이 묻어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지구를 ‘인간화’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 확신은 근대에 대두된 진보(progress)라는 이념과 같이 간다. 반면에 플래닛에는 인간의 취약함이 드러난다. 그래서 인간은 행성을 인간화할 수는 없다. 즉 행성은 인간화되지 않는다. 문제는 근대 이후로 진행된 산업화와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인해 인류가 행성을 망각했다는 점이다. 차크라바르티가 ‘행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성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홀로(獨) 존재한다(立). 노자의 개념을 빌리면 ‘자연’이고 ‘독립’이다. 그래서 인간이 개변할 수가 없다(獨立不改. 『도덕경』 제25장). 거주가능한 임계영역은 과학기술로 개조할 수 있지만, 행성적 차원은 인간이 대면하거나 돌볼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무위의 영역이고 불인(不仁)한 존재이다.

이처럼 행성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그것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에 다름 아니다. 이 공포를 근대화, 산업화되기 이전의 인간들은 ‘reverence’라고 말했다. reverence는 ‘외경’이라고 번역되는데, 동아시아적 개념으로 말하면 ‘경(敬)’이다. 그래서 차크라바르티의 행성론의 마지막은 경론(敬論)으로 끝나고 있다(논문에는 없고 강연에만 나온다. 이하의 차크라바르티의 논의는 강연 원고인 “The Planet: An Emergent Matter of Spiritual Concern?”에 의한 것이다).

 

행성에 대한 외경

차크라바르티의 경론(敬論)은 지질학자 앤드류 길슨(Andrew Gilkson)의 인용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인간은 지구에 대한 외경(reverence)의 감각을 상실하였고, 윤리가 없으면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고이다.

‘지구에 대한 외경’은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천지에 대한 외경’에 해당한다. 그것은 해월 최시형 철학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였다. 최시형은 스승 최제우의 ‘경천’을 ‘경천지(敬天地)’, 즉 ‘천지에 대한 외경’으로 재해석하였고, 그것을 ‘천지부모’라는 우주론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래서 차트라바르티의 경론은 해월의 경론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반면에 라투르의 가이아론에서는 경론과 같은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런 점이 같은 인류세 인문학자라고 해도 라투르와 차크라바르티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차크라바르티는 길슨의 말을 인용한 뒤에 외경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다. 흥미롭게도 퇴계학이나 동학에서 말하는 경(敬) 개념과 대단히 유사하다.

외경(reverence)은 단순히 놀람(wonderment)이나 생명사랑(biophilia)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외경은 두려움과 경외가 혼합된 존경의 관계를 시사한다. 이탈리아어의 어원에서는 ‘경계한다/조심한다(wary)’는 뜻이다. 우리는 행성과 그 과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개괄한 (인간과의) 상호성(mutuality)이라는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의 행동을 예측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경계할/조심할(wary)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경계하고 조심한다”(wary)는 말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경(敬)을 논하면서 강조한 태도였다. 가령 유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이상기후가 발생하면, 그것을 “하늘의 노여움(天怒)”으로 받아들였다. 러브록 식으로 말하면 “가이아의 복수”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마치 상제(上帝=하늘님)를 대하듯이 두려워하고 성찰하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경(敬)’이라고 설명하였다(중종실록 34년 11월 25일 1번째기사). 경학(敬學)으로 저명한 퇴계가 어린 선조에게 바친 <무진육조소>에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라”고 간언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비록 맥락은 다르지만,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두려운 영역’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외경과 경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조선의 유학자들이나 차크라바르티나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유학에서 말하는 경천(敬天)의 천(天)을 행성(planet)으로 바꾸면 차크라바르티의 행성론과 상통하게 된다.

 

경천(敬天)을 상실한 근대인

차크라바르티의 행성론은 근대 비판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근대인들이 외경의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에 동물로 출현했을 때, 그들의 동물적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것은 다른 동물에 대한 두려움이자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에 대한 외경이었다. (…) 그리고 홀로세와 인간 문명이 등장하였다. 이어서 주축시대의 종교들은 우리는 만물의 중심에 있다고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적 제국과 자본주의 근대가 탄생하였다. 우리는 점차 고대의, 토착의(indigenous) 종교들이 토대를 두고 있던 외경의 문화를 점차 망각해 갔다. 

[로크나 칸트와 같은] 17세~18세기의 유럽사상가들은 인간의 지위를 지나치게 과신하였다. 19세기~20세기의 근대화의 물결에서, 전기와 기술의 결합으로, 그리고 도시와 인구의 증가로, 인간들은 다른 생맹체들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감각을, 그리고 외경의 감각을 극복하였다. 

근대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 행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충동이 (…) 손실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도 치명적인 손실이다. 행성은 인간에게 경이로우면서도 두렵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구 윤리(Earth ethic)’를 발전시키려면, 놀람과 외경이 결합된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https://bulletin.hds.harvard.edu/the-planet-an-emergent-matter-of-spiritual-concern/

 

여기에서 차크라바르티는 근대의 본질과 문제를 두려움과 외경이라는 인류의 원초적 감정에서 찾고 있다. 근대의 본질은 두려움의 극복에 있고, 근대의 문제는 그것으로 인한 외경의 상실에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결과로 얻은 외경의 상실은 인류로 하여금 ‘행성과의 조우’를 가속화시켰다. 과거에도 행성과 만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행성은, 러브록이나 유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을 향해 반격하고 분노하고 있다.

이상의 차크라바르티의 근대 진단은 19세기에 탄생한 동학의 배경에 “요즘 사람들은 하늘을 외경하지 않는다(不敬天主)”는 문제 의식이 있었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나아가서 라투르가, 린 화이트가 1967년에 쓴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기원」(한글 번역은 《계간 과학사상》 창간호, 1992년 봄호에 수록)을 언급하면서, 서구의 그리스도교는 영성(하늘)에 치우쳐 지구(땅)를 소외시켰다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린 화이트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 오직 인간의 구원에만, 인간 중에서도 영혼의 구원에만 헌신하기 위해서 우주(cosmos)에 대한 모든 관심을 점차 포기했기 때문이다. (…) 자신들이 그리스도교적 영성(the Spirit)에 소속되어 있다고 믿는 사이에 그들은 지구(Earth)를 상실했다.

Bruno Latour, Facing Gaia : Eight Lectures on the New Climatic Regime translated by Catherine Porter, 2017, p.210

 

그래서 차크라바르티와 라투르 그리고 최제우의 언설들을 종합해 보면, 인류세 시대에 “하늘에 대한 외경”을 회복해야 한다고 할 때에 이 때의 ‘하늘’이 과연 어떤 하늘이어야 하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차크라바르티는 그것을 ‘행성’이라고 하였고, 라투르는 ‘가이아’라고 불렀으며, 최시형은 ‘하늘’이라고 하였고, 천도교는 ‘한울’이라고 하였다. 차크라바르티가 말하는 ‘지구윤리’는 이런 의미에서의 ‘하늘’에 대한 외경의 회복에서 출발하고, 천도교 사상가 이돈화의 표현을 빌리면 ‘자연도덕’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이돈화, 천도교중앙총부, 1968(초판은 1931)).

이처럼 인류세 시대는 윤리나 도덕과 같이, 종래에 인간의 영역에만 한정시켰던 가치들을 비인간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시대이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것을 인간화하고 인공화하려 했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인간과 무관한,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외경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차크라바르티는 이것을 ‘행성’ 개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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