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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의 변화

1860년은 한국사상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이 해에 최제우는 경주에서 득도를 하였고, 최한기는 서울에서 인정(人政)을 저술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때가 4월인데, 최한기가 『인정(人政)』의 서문을 쓴 것도 4월이라는 사실이다. 동학과 기학, 기학과 동학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진다.

인정(人政)에는 경장(更張)」이라는 짧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갑오경장이라고 할 때의 경장이다. 따라서 경장은 지금으로 말하면 개혁’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천하의 일에는 경장할 것이 많이 있다. 단 운화교(運化敎)에는 경장할 것이 없다. 단지 수시로 수행(修行)하여, 운화기(運化氣)에 어긋남이 없으면 될 뿐이다. 하루 이틀에서 한달 일년에 이르기까지 (운화기를) 잘 살펴서 따르면 된다. 천년이 지나도 마찬가지고 만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人政(인정) 권12 「敎人門(교인문」「更張(경장)」

 

과연 기학자(氣學者)다운 발언이다. 천만년이 지나도 운화하는 기에만 따르면 된다니 – . 게다가 <운화교(運化敎)>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 점이 놀랍다. “기의 활동운화를 궁극적인 가르침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일견 신비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요즘같이 대기가 불안하고 기후가 상승하는 시대에는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문장이다.

 

만약에 기화가 변하면 마땅히 경장을 해야 한다. 기화가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경장은 없다.

(氣化若變, 則當有更張; 氣化不變, 則永無更張.)

 

최한기는 유학을 경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기학을 내놓았다. 그런데 지금은 기화가 변한 시기이다. 따라서 최한기의 논리대로라면 기학을 경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유학의 경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최한기도 크게 보면 유학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평천하(平天下)에서 안천지(安天地)로

사실 유학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다. 대학원 다닐 때 정인재 교수님께서 대학(大學)의 팔조목을 보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전통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아서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사이에 화사(和社)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사는 사회를 조화롭게 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이미 20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대가다운 통찰이다. 

수신(修身) – 제가(齊家) – <화사(和社)>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

한국사회에서 종종 공공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세월호 사고가 나던 해에 SBS에서 공공성 꼴찌 국가 한국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국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가정[家]과 나라[國]에 논의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 중간 영역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논의는 서양어 society의 번역어가 들어온 뒤의 일이다(가령 1931년에 나온 이돈화의 신인철학』에는 사회라는 말이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저 도식에서 여전히 걸리는 게 있다. 바로 천지(天地)’ 항목이 없다는 점이다. 요즘같이 생태위기나 기후변동이 심각한 상황이라면 천지를 안정시키는 것도 리더의 덕목이지 않을까? 아니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1992년에 리우(Rio)에서 있었던 <Earth Summit – Global Forum>에서는 세계 정상들이 지구환경’ 문제를 놓고 회담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평천하’ 다음에 <安天地(안천지)>를 넣어 보았다. 平天下(평천하)가 Globe 차원이라면 安天地(안천지)는 Planet 차원이다. Global은 흔히 지구적이라고 번역되지만, 여기서 지구적은 국제적이나 ‘세계적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Planet은 행성 지구라고 할 때의 행성로서의 지구를 가리킨다. 

수신(修身) – 제가(齊家) – 화사(和社)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 – <안천지(安天地)>

          

격물(格物)에서 경물(敬物)로

그런데 이렇게 해 놓고 보니 또 하나 걸리는 게 있다. 그것은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에 대한 관심이다. 대학의 팔조목에는 사람 이야기는 있지만 사물이나 생물에 대한 배려는 없다. 물론 격물(格物)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물(物)은 주체라기보다는 객체에 가깝다. 주자학적으로 해석하면,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근대 시기에는 사물을 탐구하여 결국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았던가? “아는 것이 힘이다고 베이컨이 말했듯이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교육이 대중화되고 평준화되어 누구가 격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는 유튜브를 보고서도 격물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격물(格物)을 <경물(敬物)>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경물은 동학사상가 최시형의 말이다. 최시형은 사람만 공경해서는 도덕의 극치에 이르지 못하고, 사물을 공경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에 합일될 수 있다고 하였다(해월심사법설』「삼경). 즉 경물(敬物)이 되어야 경천이나 경인도 완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최시형이 의 목적을 천지기화의 덕과의 합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화와의 합일은 최한기의 기학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최시형의 경물은 최한기의 기학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최한기의 기학과 최시형의 동학은 결이 다르다. 기학은 엄밀하고 방대한 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고, 동학은 영성과 수행을 강조하는 설법 중심의 신념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시형도 기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최한기와 다르지 않다(가령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以天食天(이천식천)의 원리를 동질적 기화와 이질적 기화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최한기는 최시형과 같은 경물’ 사상은 설파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두 사상이 대화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국문학자 조동일 선생이 최한기와 최시형을 합쳐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우리 학문의 과거를 결산하는 가장 큰 성과는 19세기의 두 거인 최한기와 최제우가 이룩했다. 최한기는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최대한 다지고, 최제우는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각성에 이르는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했다. 양쪽을 합쳐야 할 일을 다 한다고 할 수 있다. 

조동일, 『우리 학문의 길, 1993, 182~183쪽.

 

인간 너머의 유학

격물을 경물로 바꾸게 되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인간 너머나 포스트 휴먼 차원의 유학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 너머의 유학(more-than-human Confucianism)>이나 <포스트휴먼 유학(posthuman confucianism)>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동안 인간만의 특권으로 여겨져 왔던 가치들을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토마스 베리는 지구법을 제창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구법이란 인간 이외의 존재의 생존권까지 보장해주는 법을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뉴질랜드 등에서는 지구법이 제정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동학적으로 말하면, 경물 사상의 제도적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통 유학에서도 사물을 배려하는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물일체(萬物一體)나 애물(愛物) 개념이 그것이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논의의 출발이 기본적으로 사람이었다. 정치의 주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리학에서는 사람과 사물(동식물)을 기(氣)의 우열로 나누기까지 하였다. 

반면에 최시형은 오히려 경물에 무게를 두는 느낌이다. 그래서 도덕 실천의 방향도 경물(敬物)에서 경인(敬人)으로 향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동학이야말로 인간은 물론이고 사물까지도 유학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킨 <해방철학>고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서 만물이 하늘님이다는 최시형의 말은 오늘날 논의되는 포스트휴먼 윤리의 극치에 다름 아니다. 격물에서는 서양에 뒤졌지만 경물에서는 앞선 것이다. 

이처럼 유학을 포스트휴먼화 하고자 할 때, 피해갈 수 없는 개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仁)’이다. 인(仁)이야말로 유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인간(휴먼)의 본질이라고도 말해진다. 따라서 이 본질을 외면한 채 인간 너머의 유학을 구상할 수는 없다. 그런데 최한기는 인(仁)에 대해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의 자리에 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까지만 해도 인(仁)은 핵심 개념이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인(仁)이란사람과 사람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단지 심학으로만 인(仁)을 이해했는데, 공자의 본뜻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仁也者人與人之相與也. 先儒只以心學爲解, 恐本旨不然. 『논어고금주』「양화」).

 

정약용에 의하면, 주자학에서는 욕심만 제거하면 인(仁)이 발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보기에 이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인(仁)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형성되는 후천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인인상여(人人相與)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감정이 인(仁)이다. 그래서 인(仁)은 결코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는 덕목이다. 

 

이라는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다.

(仁之爲物, 生於人與人之間也. 『定本 與猶堂全書(4)』『文集III』「答李汝弘」)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 관계는 만나면 만날수록 친근한 감정이 두터워지는 법이다. 다산은 사랑의 감정은 부모에 의해서, 친구에 의해서, 선생에 의해서 배우고 경험함으로써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다른 사람에 의지해야 비로소 인간이 완성된다고 하는 정약용의 독특한 인간관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인(仁)의 정의와 인간관은 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개념을 연상시킨다. 우분투란 당신이 있어서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는 공공적 또는 상여적(相與的인간관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인간은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배우고, 선생으로부터 언어를 배우고, 친구로부터 우정을 배움으로써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Desmond Tutu, “Ubuntu” in God is not a Christian). 다산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인(仁)

그런데 다산의 이든 아프리카의 우분투든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다. 그것은 물(物)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휴먼적 관점에서 보면, 아니 장일순의 한살림철학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인간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인간 이외의 존재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살기 어렵다. 기후가 변하면 생활이 불안정해지고, 기계의 도움 없이는 삶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천지와 만물은 인간의 조건이다. 원불교에서 천지와 동포(만물)의 은혜를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은혜는 조건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다산의 저 인(仁)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바꾸면 어떨까?

 

‘인’은 사람과 사 사이에서 생겨난다. (仁之爲物, 生於人與之間也.)

 

, 인인상여(人人相與)를 인물상여(人物相與)로 바꾸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物)은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만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람에 한정되었던 인(仁)의 정의를 인간 이외의 존재에까지 확장시킨 셈이다. 사물은 인간이 돌보거나 관리해야 할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을 바꾼다면, 사물에 대한 사랑과 공경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러한 사상은 역사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조선후기에 유씨부인이 쓴 조침문(弔針文)」은 사람과 사물(바늘) 사이의 애틋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의 시 역시 마찬가지다(박희병, 이규보에게서 배우는 생태적 정신, 『한국의 생태사상 참조)이들은 모두 바늘과 벼루가 있어서 자신이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가산이 빈궁하여 침선(針線)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생애(생계)를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호 통재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후세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과 일시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라, 바늘이여.

유씨부인, 「조침문(弔針文)」

 

사업이 너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事業借汝遂). 

벼루여! 나는 너와 함께 돌아가겠다(與汝同歸). 

살아도 너로 말미암고 죽어도 너로 말미암겠다(生由是, 死由是) 

이규보, 소연명(小硯銘)

 

여기에서는 잃어버린 사물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 나아가서는 사물과의 연대감과 동지애가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과 사물 사이의 인(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이 관계를 표현하는데 한국어의 <>처럼 적절한 개념은 없을 것이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바늘과 벼루가 벗님이 된 것이다(조성환, 허남진, 「인류세 시대의 새로운 존재론의 모색 – 애니미즘의 재해석과 이규보의 사물인식을 중심으로」). 

이들은 최시형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경물(敬物)을 실천하고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최시형은 이러한 전통시대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정서를 경물로 개념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파하였다: “이토록 사물을 존중할[敬物] 수 있다면 하물며 사람에[敬人대해서랴!

 

인(仁)의 생태적 확장

인(仁)은 흔히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설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보고 제나라 선왕이 느낀 감정이다. 제선왕은 자신의 감정을 차마 하지 못하는 불인(不忍)한 마음이라고 표현하였다. 주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설명하였다. 맹자는 이런 측은지심이 인(仁)의 실마리(端)라고 하면서, 이 마음을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 인술(仁術)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제선왕이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소에 대해 느낀 감정은 유씨부인이 부러진 바늘에 대해 느낀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윤동주의 표현을 빌리면, 죽어가는 것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다(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서시」). 아마도 오늘날의 환경운동가나 생태사상가들이 멸종되어 가는 생명과 오염되는 자연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구학자를 자처한 토마스 베리는 그것을 생명학살(biocide) ‘지구학살’(geocide)이라고 표현하였다(지구의 꿈)최근에는 생태학살(ecocide)’이라는 표현도 자주 보이고 있다(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정치신학자 케서린 캘러는 생태적 비애(ecological grief)라는 말을 썼고(묵시적 종말론에 맞서서), 생태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지구의 울부짖음이라고 하였다(생태공명). 

학살, 비애, 울부짖음… 이 단어들에 공통되는 것은 측은지심이다. 이들은 모두 만물에까지 연민의 정서를 느끼고 있다. 성리학자들이 외쳤던 만물일체의 인(仁)이 오늘날의 생태사상가와 환경운동가들에게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仁)은 생태적 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태적 비애는 지구적/행성적 차원에서 느끼는 비애(planetary grief)라고 볼 수 있다. 나와는 무관한 듯이 보이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도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단과 칠정의 차이

아마도 퇴계가 칠정(七情)과 사단(四端)의 감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확실히 생물학적으로 보면, 사단이든 칠정이든 감정이 나오는 원리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생기게 되는 맥락을 고려해 보면, 사단은 철학적 신념이 동반된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퇴계는 죽어가는 증손자를 살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여종의 갓난아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증손자는 젖을 먹지 못해 죽었고, 퇴계는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정석태 번역, 『안도에게 보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까? 그는 제선왕처럼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본 경험이 없다. 즉 죽을지도 모르는 증손자를 만난 적이 없다. 

퇴계가 제시한 근거는 뜻밖에도 유교 경전이었다. 주자가 편집한 근사록 “남의 자식을 죽여서 자기 자식을 살려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주자학이라는 철학적 신념에 투철하였고, 그것을 보편적 원리로 받아들여서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념이 그로 하여금 자기 혈육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의 자식은 죽일 수 없다는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생명을 남에게 <양보>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하나인 사양지심(辭讓之心)을 <생명의 양보>라는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의 논리를 흉내 내서, 이 양보하는 마음을 인간 너머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면 어떻게 될까? 즉 만물에까지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인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비인간(nonhuman) 존재의 생명을 존중하는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종의 <생태적 양보>인 셈이다.

그런데 생태적 슬픔, 생태적 양보는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퇴계가 근사록에서 배웠듯이, 또는 해월이 하늘이 하늘을 먹는” 기화의 이치를 자각했듯이,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위기적 징후들에 대한 자각과 의식이 생겼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것을 인류세 인문학자들은 행성 의식(planetary consciousness)’이라고 말한다. 사단은 예를 들면 이러한 차원에서 생기는 마음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칠정과의 차이라고 퇴계는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시비지심(是非之心)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기후위기가 빈곤문제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기후정의(climate justice)를 부르짖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후정의는 “기후위기 시대의 시비지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베리가 만물의 생존권까지 보장하는 지구법을 제창한 것은 생명학살에 대한 실상에 분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사단은 자연스럽게 발로하는 칠정의 감정과는 다르다. 최한기 식으로 말하면 기화도덕을 지키는 가운데 발현되는 성숙한 감정이다. 흔히 사단을 도덕감정, 칠정은 자연감정으로 구분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런 식으로, 사단의 대상을 생태적 차원, 만물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기후변화 시대의 유학’이 아닐까? 최한기의 표현을 빌리면, “인의예지를 천지운화의 차원으로까지 확충해 나가는 것이다.

 

인의예지를 통민운화(統民運化)에서 행하여 확충해 나가면 천지운화의 인의예지가 되고, 

존양(存養)해 나가면 일신운화(一身運化)의 인의예지가 된다. 

인정 10권교인문(敎人門3「인의예지」

 

이 존양의 수양에서 나오는 것이 인의예지의 감정이고, 그것을 천지의 차원으로 확충하면 인간 너머의 유학이 된다.

 

인류세 시대의 <천명도> 

추만 정지운이 작성하고 퇴계가 수정한 「천명도」는 사단과 칠정을 천지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구조는 천지 안에 인간이 들어있는 형태이다. 구체적으로는 맨 바깥에 천원(天圓)이 감싸고 있고, 그 안에 지방(地方)이 들어가 있고, 지방(地方) 안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안에 사단과 칠정이 있고, 맨 가운데에는 경(敬)이라는 덕목이 들어 있다. 이 중층적 도상(圖像)을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출처: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1999, 145

먼저 천원(天圓) 부분에 주목해 보자. 흰색과 검정색이 반반씩 섞여 있는데, 이것은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음기와 양기가 어우러져서 형성되는 대기(大氣)로 이해하면 어떨까? 그리고 그 바로 밑에 <천명(天命)>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은, 대기를 천명으로 받들라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대기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천원(天圓) 안에 지방(地方)이 들어 있는데, 이 역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표면의 얇은 막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수천 킬로미터 깊이의 지구 전체 중에서 생명이 살 수 있는 불과 몇 킬로의 영역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천원과 지방은 오늘날 인류세 인문학자들이 말하는 생물권(biosphere) 내지는 임계영역(critical zone)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물이 살 수 있는 지표와 대기의 부분을 도상화한 것이다. 

그 다음 그림은 인간 안에 사단과 칠정이 들어 있고, 인간 밖에 동물과 식물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사단은 인간과 이웃해 있는 만물까지 고려하는 생태적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敬)>은 천지와 만물에 대한 태도를 나타낸다. 유씨 부인은 「조침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라고 애통해 하였다. 바늘이 부러진 뒤에야 자신의 부주의한 <행위>를 후회한 것이다. 이것은 지구인문학적으로 보면, 영화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자신이 불시착한 행성이 다름아닌 지구임을 깨닫고, 인간의 어리석음에 통곡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 윤리가 요청된다. 하나는 우리의 행위를 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이외의 존재도 존중하는 것이다. 후자는 최시형이 경물로 제시하였다. 전자는 인간의 활동이 초래한 인류세가 주는 교훈이다. 이 양자의 측면, 즉 경건(퇴계)과 공경(해월)을 아우르는 개념을 <천명도>의 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이야말로 기후변화 시대에 요청되는 윤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퇴계와 혜강, 그리고 해월을 <합쳐> 나간다면, <인간 너머의 유학> 나아가서는 <기후변화 시대의 한국철학>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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