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사물
사물들이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민’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제인 베넷이 『생동하는 물질』의 마지막 부분에서 전개하는 주장이다.
비인간(nonhumans)을 인민(demos)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동하는 물질』, 96쪽.
여기에서 ‘인민’의 원어인 demos는 고대 그리스어로, democracy(민주주의)에서의 demo와 같은 말이다. 영어로 바꾸면 people에 해당하고 public(공민)과 상통한다. 따라서 “비인간=사물을 인민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은 사물을 정치적 행위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생동하는 물질』의 다른 곳에서는 “비인간 물질성을 정치적 생태학의 참여자로 인정한다”(266쪽)고 표현하고 있다. 『생동하는 물질』의 부제가 “사물들의 정치생태학”이고, 서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자 <정치적 기획>이다”라고 선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물이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베넷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허리케인이 대통령을 실각시킬 수 있는가?
에이즈를 일으키는 면역결핍 바이러스가 동성애 혐오나 복음주의의 부활을 유발할 수 있는가?
– 『생동하는 물질』, 264쪽.
여기에서 허리케인이나 바이러스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현상으로 인해 정치적 지형도가 바뀔 수 있다. 요즘 같으면 코로나 대응이나 폭우 대책의 잘못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물도 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베넷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물들의 민주주의
이러한 관점에서 베넷은 먼저 종래의 정치 개념이 인간에게 국한되어 있었다고 비판한다.
생기적 유물론자의 민주주의 이론은 말하는 주체와 침묵하는 객체 사이의 구분을 일련의 차이나는 경향들과 변화하는 능력들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이 다윈과 라투르가 벌레 이야기를 했을 때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다. (…) 인간의 신체, 바이러스의 신체, 동물의 신체, 기술적 신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점차 강해지면,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객체의 세계를 가정하는 민주주의 이론이 한때의 빈약한 설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 『생동하는 물질』, 264-266쪽.
베넷에 의하면, 종래의 민주주의는 존재를 주체와 객체로 나누고, 주체는 ‘말하는 인간’, 객체는 ‘수동적 사물’로 각각 간주한 뒤에 ‘인간’에 한해서만 민주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과 비인간이 ‘행위성’을 공통분모로 양자가 서로 얽혀 있다면, 양자를 주체와 객체로 양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베넷의 생각이다. 베넷은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 존 듀이의 ‘공민(public)’ 개념을 가져온다.
공민(public)을 연합 행위(conjoint action)의 산물로 제시하는 듀이의 설명은 역동적인 자연생태계와 많은 점을 공유하는 정치 체계를 그려낸다. 이러한 주장은 (…) 비인간 신체들을 공민(public)의 구성원으로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어떻게 그들이 연합 행위에 참여하는지 뚜렷이 주목하는 (…) 행위 이론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 『생동하는 물질』, 255쪽.
만약 인간의 문화가 생동하는 비인간 행위성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뒤얽혀 있다면, 그리고 인간의 지향성이 오직 어마어마한 비인간의 수행원들과 함께할 때에만 행위적일 수 있다면, 민주주의 이론의 적절한 분석 단위는 개별적 인간도 아니고 인간만의 집합도 아닌, 하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연합하고 있는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공민(public)’일 것이다.
– 『생동하는 물질』, 265-266쪽.
여기에서 ‘public’은 보통 ‘공중(公衆)’으로 번역되는 개념으로,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베넷은 듀이의 『공민과 그 문제』와 『경험으로서의 예술』에 나오는 public 개념을 발전시켜서, 사물도 인간과 함께 하나의 문제를 공유하면서 연합할 수 있고, 따라서 public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사물도 하나의 ‘인민(demos)’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 이론의 단위를 ‘인간’에서 ‘인간과 비인간’으로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넷은 이러한 민주주의론을 〈유물주의자의 민주주의 이론(a materist theory of democracy)〉이라고 부른다(『생동하는 물질』, 262쪽). 간단히 말하면 ‘사물민주주의(democracy of things)’ 또는 ‘사물정치(Dingpolitik)’라고도 할 수 있다(’사물정치’는 라투르의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팬데믹 패닉』, 북하우스, 141쪽 참조). 최한기 식으로 말하면 인정(人政)에 대해 물정(物政)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확장된 민주주의
이처럼 물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 정치의 개념도 변하게 된다. 베넷은 이어서, 지금까지 정치 이론에서 비인간 존재가 배제되어 온 것은, 마치 투표에서 여성이 배제된 것과 같다는 라투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최고 수준의 정치적·도덕적 질문들이 수 세기 동안 수많은 현인들에 의해서, 인간을 구성하는 비인간은 배제된 채, 오직 인간을 위해서만 제기되어 왔다는 것은, 단언하건대 마치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노예와 여성의 투표를 반대했던 것과 같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 『생동하는 물질』, 267쪽; 브뤼노 라투르 지음, 장하원·홍성욱 책임 번역, 『판도라의 희망』, 휴머니스트, 2018, 469-470쪽.
라투르에 의하면, 예전에는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노예와 여성이 지금은 정치에 참여하고 있듯이, 앞으로는 사물도 정치의 한 요소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이 1999년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앞서간 견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베넷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전까지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듯이, 민주화(democratization)의 범위도 더 많은 비인간을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인정할 수 있게끔 넓혀질 수 있다.
– 『생동하는 물질』, 266쪽.
여기에서 “민주화의 범위를 넓힌다”는 말은 “비인간 존재를 정치적 영역에 포함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달리 말하면 〈확장된 민주주의(extended democracy)〉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확장된 민주주의론’은,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라투르(1999)나 베넷(2010) 이전에 이미 토마스 베리(1988)가 제기한 바 있다.
토마스 베리의 생명정치
가톨릭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지구학자(geologian)’를 자처한 것으로 유명한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는 1988년에 쓴 『지구의 꿈』에서 천인상생(天人相生)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생명주의(biocracy)〉의 출발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책에서 내가 취하는 입장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와 역사적 비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상호증진적인 인간-지구의 관계(mutually enhancing human-earth relatiinships)’가 현재 확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구의 재생은 진행 중이다. 우리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사업 계획들에 대해 환경 영향 평가서를 요구하자마자, 우리는 민주주의(democracy)를 넘어서 생명주의(biocracy)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생명주의’란 우리 인간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광범위한 생명공동체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1982년 UN 총회에서 통과된 세계자연보호헌장(World Charter for Nature)을 통해 이미 인간의 일을 행함에 있어 자연세계가 갖는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 토마스 베리 지음, 맹영선 옮김, 『지구의 꿈』, 대화문화아카데미, 16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하도 마찬가지).
여기에서 베리는 생태적 위기에 대한 UN의 대응을 ‘생명주의’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생명주의’란 “인간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광범위한 생명공동체를 참여시키는 정치”를 말한다. 즉 민주주의가 인간만을 고려한 정치체제라면, 생명주의는 비인간 존재까지 염두에 두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제인 베넷의 표현을 “민주화의 범위를 비인간의 영역으로까지 넓히는 정치”가 토마스 베리의 생명주의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베리의 시점은 대단히 낙관적이다. 인간의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자연환경의 요소를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지향하는 생명주의가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것을 새로운 역사적 비전의 출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최한기 식으로 말하면, 19세기 후반에 근대인들은 인정(人政)과 물정(物政)이 융합된 천인정치(人物政治)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하면서, ‘생태시대(ecological age)’라고 명명하고 있다(『지구의 꿈』 제5장). 동학사상가 최시형과 최제우의 표현을 빌리면, ‘천인상여(天人相與)’하는 ‘다시개벽’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베리의 생명주의와 생태시대 개념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인식과 맞물려 있다. 이 점은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다음 말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어투가 비장하게 바뀌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비전, 즉 땅과 생물과 인간이라는 지구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공동체, 즉 친밀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라는 비전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들이다. 사실 이러한 비전은 최근에 와서야 가능해졌다. 이전 시대의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했다. 또한 우리는 이 거대한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친척들 모두와 충분히 친밀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또한 지구의 다양한 피조물이 말하는 각각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
– 『지구의 꿈』, 17쪽.
여기에서는 앞에서의 희망찬 논조와는 정반대로 매우 비관적이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처럼 베리에게는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고 있다. 아니 “비관 속에서 낙관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베리는 이어서 “우리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낮추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제 우리의 목소리를 낮추고, 우리의 기계론적 방식을 지구의 생물학적 과정에 강요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관리하고 명령하며 강요하고 억압하려는 우리의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생명이 의존하는 거대한 지구공동체의 인도를 아주 겸허하게 따라야 한다. 우리는 고립된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이 아니라, 보다 거대한 지구공동체와의 친밀함 안에서 우리 자신을 성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구공동체 또한 우리 존재의 보다 거대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운명은 지구의 운명과 통합되어 있다.
– 『지구의 꿈』, 17-18쪽.
여기에서 베리는, 비록 ‘행위성’ 개념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라투르나 베넷이 주장한 것과 같이, 인간의 목소리를 낮추고 비인간 존재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은 최근에 와서야 가능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 근대 사회에 한정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서구지역에서는, 가령 한국에서는 19세기 동학사상가 최시형이 “천지부모-만물동포”를 설파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해방 후에 서구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상과 실천이 잊혀졌을 뿐이다. 다행히 1980년대 중반에 그것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한살림운동’이다.
‘인류세’의 선구자
위의 인용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인간의 운명은 지구의 운명과 통합되어 있다”는 말은 베리에게 이미 인류세와 같은 인식이 싹트고 있음을 시사한다. 차크라바르티 식으로 말하면, “지금 시대는 인간사와 자연사가 통합되어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리는 ‘인류세’의 정의(定義)와 유사한 말을 『지구의 꿈』 서두에서 하고 있다.
오늘날의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우리는 단순히 인간 사회의 구조와 기능만 해로운 방법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우리는 행성 지구를 화학적으로 변화시켰다. 생물계를 변화시켰으며 지형을 변화시켰다. 심지어 행성 지구의 지리적 구조까지 변화시켜버렸다. 행정 지구의 구조와 기능이 형성되어 존재하기까지는 수억 년, 아니 수십억 년이 걸렸다. 지금까지 지구 역사나 인간 의식에 이처럼 엄청난 변화가 나타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지구의 꿈』, 15-16쪽.
여기에서 베리는, 2000년에 파울 쿠뤼천(Paul Crutzen, 1933-2021)이 제시한 ‘인류세’ 개념을 연상시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의 지질학적 구조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 말이 1988년에, 그것도 과학자가 아닌 종교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베리는, 한나 아렌트(1958)나 브뤼노 라투르(1999)와 함께, “인류세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
베리의 생명주의와 지구공동체 개념이 나온지 4~5년 뒤에 한국의 정치가 김대중(1924~2009)은 ‘지구민주주의(global democracy)’ 개념을 제창하였다(김대중의 ‘global democracy’에 대해서는, 김학재, 「김대중의 통일‧평화사상」, 『통일과 평화』 9집 2호, 2017, 69-70쪽에 소개되어 있다).
나는 지난 대통령선거 때(1993년 12월) 신인도주의를 제창한 바 있다. 그것은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 셋째는 이 지구상에 있는 들짐승·날짐승·물고기·공기·물·흙·나무와 들판에 자라나는 풀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의 생존권을 사랑과 속죄의 심정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이러한 평소 생각의 일단을 1993년 1월부터 5개월 동안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있으면서 안소니 기딘스나 존 던 같은 사상가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피력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많은 토론을 하면서 우려와 희망과 책임을 논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인도주의를 포괄하는 민주주의를 코스모폴리탄 데모크라시(cosmopolitan democracy) 혹은 글로벌 데모크라시(global democracy)라고 이름 붙여 보기도 했었다. 물론 생각은 아직 초보적이며 더 발전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잘 안다. 이 방향으로 앞으로 생각을 다듬어나갈 계획이다.
–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한길사, 1994, 407~408쪽.
이것은 1994년 1월호 『월간중앙』에 특별 기고한 김대중의 「20세기의 회고와 21세기의 전망」에 나오는 말이다. 이 해는 흥미롭게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에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6개월 동안 유학한 뒤에 한국에 돌아온 상황이었다. 이 글이 나온 1월말에는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이 출범하였다.
이 글에서 김대중은 신인도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세계시민적 민주주의〉 또는 〈지구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하고 있다(단, 여기에서는 지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지구민주주의’라고 번역하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조성환, 〈팬데믹 시대에 읽는 지구학(3): 『아시아적 가치를 읽고』〉, 《개벽신문》 95호(마지막호), 2020년 7월 참조). 토마스 베리가 인간의 생존과 지구와의 화해를 위해서 일종의 〈생명민주주의〉를 말했다면, 그리고 라투르와 베넷이 비인간의 ‘행위’와 ‘힘’ 개념에 주목해서 〈사물민주주의〉를 제안했다면, 김대중은 비인간 존재들의 ‘생존권’에 주목하여 〈지구민주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그리그 그 시기는 베리(1988)와 라투르(1999)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1992~1993).
‘글로벌’의 중의적 의미
한편 김대중은 사후에 발간된 그의 자선전에서 케임브리지대학 유학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앤서니 기든스, 존 던 교수와도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를 침탈하는 등의 불행한 일들이 많았음을 돌아보았다. 이제 국민국가 수준의 민주주의를 차원을 달리하여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서로 뜻을 같이했다. 세계 곳곳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자유와 정의가 깃든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다. 나아가 인류의 형제인 모든 생명붙이에게도 ‘평화’가 깃들어야 한다. 나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나무, 풀, 동물, 물고기, 날짐승, 공기, 흙)의 생존권이 보장되는 전 지구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든스 교스는 이러한 새 민주주의를 ‘코스모폴리탄 데모크라시(cosmopolitan democracy)’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글로벌 데모크라시(global democracy)’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1)』, 삼인, 2010, 615쪽.
이에 의하면, 김대중의 생각에 대해서 먼저 기든스 교수가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안했고, 이에 대해서 김대중은 ‘글로벌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 개념에는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나온 누스바움의 『세계시민주의 전통: 고귀하지만 결함있는 이상』(2019)에 의하면, 세계시민주의는 ‘이성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만을 존엄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인간우월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비인간 동물과 자연계에 대한 경멸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이상, ‘세계시민’ 개념에 대해서는 이우진, 「지구위험시대에 따른 교육의 방향전환 – ‘세계시민주의교육’과 ‘생태시민교육’을 넘어서 ‘미래생존을 위한 교육’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89, 2021.09, 472~473쪽 참조).
한편 김대중의 위의 설명에 의하면 ‘글로벌 데모크라시’의 ‘글로벌(global)’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국가적(national)’ 경계를 넘어선다(transnational)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human)’ 차원을 넘어서 비인간(nonhuman)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또한 “인류의 형제인 모든 생명붙이에게도 〈평화〉가 깃들어야 한다”는 말로부터, 지구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는 평화사상의 발로임을 추측할 수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김용철, 「현대평화이론의 관점에서 본 김대중의 평화관」, 『현대정치연구』 14-2, 2021년 여름호 참조).
생명평화사상으로서의 지구민주주의
생태주의 소설가 최성각은 2000년에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고 〈생명평화〉라는 말을 고안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는 노벨평화가 아니라 생명평화다. 생명평화라는 말은 생명과 평화의 합성어가 아니라 노벨평화의 상대말로서 〈생명의 평화〉라는 뜻으로 만든 것입니다.
– 임은경, 〈80년대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지금은 환경운동 : ‘생명평화’라는 용어와 ‘삼보일배’를 처음 만든 소설가 최성각〉, 《월간 말》, 2007년 11월, 126쪽.
여기에서 ‘생명의 평화’는 인간만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생명평화’는, 인간들의 평화에 초점을 맞추는 ‘노벨평화’와는 달리, 인간 이외의 존재의 평화까지 지향하는 훨씬 확장된 평화 개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는, 김용철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 이외의 존재의 평화까지 생각해서 나온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최성각이 말하는 ‘생명평화’ 사상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은 1994년말에는 미국외교협회가 발행하는 영문 저널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문화는 숙명인가?(Is Culture Destiby)〉라는 글을 투고하는데, 거기에서도 지구민주주의론을 주창하였다(이 글은 이승환 외, 『아시아적 가치』, 전통과 현대, 1999에 번역이 실려있다). 아울러 그것의 사상적 원천으로 유교의 평천하(平天下), 불교의 불성(佛性), 그리고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을 들었다. 이른바 ‘아시아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론’을 제창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넘어서 비인간으로까지 민주주의의 범위를 확장시킨 ‘확장된 민주주의’이다. 아울러 ‘평천하’나 ‘불성’ 그리고 ‘인내천’이 모두 평화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면, ‘생명평화 민주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지구법(Earth Jurisprudence)과 지구민주주의(Earth democracy)
한편 토마스 베리는 ‘지구공동체’ 개념을 제시한지 13년 뒤인 2001년에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의 제정을 제안하였다. ‘지구법’은 인간 이외의 존재의 권리도 법적으로 인정하자는 생각이다. 따라서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론에서 제창한 자연물의 생존권 보장을 법적으로 제도화하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6년 뒤에 실제로 지구법이 제정되었다. 2017년 3월 15일에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이 신성시하는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이 통과된 것이다. 세계 최초로 지구법이 반영된 입법 사례였다(강금실, 〈[생태칼럼] (6) 강(River)의 권리〉, 《가톨릭신문》 3037호, 2017.03.26. 참조).
한편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가 나온 지 10년 뒤인 2004년에는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지구민주주의론이 등장하였다.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1952~)의 ‘어쓰 데모크라시(Earth democracy)’가 그것이다. 시바의 지구민주주의는, ‘글로벌(global) 대신에 ‘어쓰(Earth)’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좀 더 절박한 느낌을 준다. 지구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문제시 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10여년 사이에 상황이 급박해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대중이 지구민주주의의 사상적 원천을 아시아에서 가져왔듯이, 시바도 인도의 힌두사상에서 힌트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나에게 ‘지구민주주의’ 개념은 인도문명이 뿌리를 두고 있는 생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것은 Vasudhaiva Kutumbakam, 즉 “지구는 한 가족이다”는 사상이다. 진화된 마음은 세계가 하나의 가족이라는 것을 안다. “이 사람은 친구이고 저 사람은 적이다, 이 사람은 내 편이고 저 사람은 내 편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편협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구민주주의는 우리가 생태적 관점에서 지구 가족의 일원이고 동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Vandana Shiva, “Earth Democracy: Sustainability, Justice and Peace,” Buffalo Environmental Law Journal 26(1), 2019, p.1.
여기에서 시바가 소개하고 있는 “지구는 한 가족이다”고 하는 ‘지구일가(地球一家)’ 사상은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의 ‘천지부모-만물동포’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편협한 마음’은 최시형이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을 설하면서 말했던 ‘인심의 편견’을, 그리고 ‘진화된 마음’은 “하늘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이라고 말할 때의 ‘하늘의 관점’에 각각 상응한다.
김대중은 비록 지구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로 ‘인내천’을 언급했지만, 사실은 최시형의 천지부모나 경물사상이야말로 지구민주주의 사상에 가장 적합하다. ‘인내천’과 달리 인간 이외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조성환·이우진, 「동학사상의 ‘지구민주주의’적 해석」, 『유학연구』 60, 2022년 8월을 참고하기 바란다).
어쨌든 김대중과 반다나 시바는 모두 비서구 지역의 토착사상에서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의 원천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언제부터인가 서양의 인문학에서 ‘indigenous’라는 말이 자주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지구적 패러다임을 찾기 위해서 비서구 지역의 토착문화와 전통사상에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생태위기와 기후변화의 위기를 당면하여 ‘정치’의 범위는 확장되고 있고, 그것의 사상적 토대는 탈중심화 되고 있다. 사실 정치뿐만 아니라 법학, 철학, 종교학, 역사학, 문학 등등, 모든 영역에서 인간 이외의 존재를 고려하는 ‘탈인간화’가 진행되고 있다. 인류세가 가져온 인문학의 새로운 모습이다. 아마도 여기에 가장 근접하는 한국철학은 기학과 동학일 것이다.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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