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아시아 대륙이 지리적 실체보다는 심성적인 실체라는 이야기를 길게 했었다. 아시아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보다 무언가가 ‘아닌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유럽이 아닌 무언가, 서구가 아닌 무언가의 총체가 아시아다. 물론 여기서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서구가 아닌 무언가라면 ‘비서구’라는 이미 잘 쓰이는 표현이 있다. 비서구는 때로는 문화적으로, 때로는 국제 정치적으로도 쓰이는 말인데, 이야말로 서구가 아닌 모든 것의 집합을 의미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다. 그렇다면 구태여 아시아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아시아는 유라시아에서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라는 뜻이고, 비서구는 지구 전체에서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라는 뜻이다. 그러니 아시아와 비서구를 등치시키면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도 아시아에 포함되는 이상한 결과가 나오는 셈이다. 이는 우리의 지리적 직관에 전혀 맞지 않는다. 여기서 아시아의 실체는 한 번 더 모호해진다. 아시아는 분명 명확하게 지시하는 대상이 없다. 그저 ‘유라시아에서 유럽과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구 전체에서 유럽과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와 변별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시아라는 개념이 오늘날과 같은 용례로 쓰이기 시작한 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게해 건너편 아나톨리아를 나타내던 말이던 아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대륙이자 지역을 나타내게 되는 단위로 변하는 과정은 유럽의 지리적 지식이 확장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유럽 건너편의 아시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시아인’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도 출신 작가 판카지 미슈라의 책 <제국의 폐허에서>는 19세기에 어떻게 아시아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 형태를 갖추어 가는지를 추적한 책이다. 이 책은 아시아의 세 위대한 문명권, 이슬람 세계, 인도, 중국의 지식인들을 살펴본다. 인도는 17세기부터 유럽 상업 세력의 침투를 겪었고, 인도의 정치적 중심지인 무굴 제국이 약화되면서 가장 빠르게 식민 상태에 놓이게 된 지역이었다. 이슬람 세계, 특히 오스만 제국은 한 때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역시 17세기를 지나면서 군사적 경쟁에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일은 이미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과 그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의 급속한 약화는 모든 무슬림 국가가 마침내 유럽인들에 종속적인 지위로 추락했다는 것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유라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부가 모여 있던 중국이 자신의 취약성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인도가 이미 영국의 손에 떨어지고, 이집트가 나폴레옹의 발밑에 들어갔을 때, 건륭제는 제국에 부족한 물산이 없으므로 영국과의 무역은 제국으로서 이득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실제로 그 말은 사실이었다. 중국이 이득이 되지 않아도 억지로 무역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데는 50년이 더 걸렸다. 1840년의 아편전쟁과 이어지는 서구 열강들의 공세는 무역을 하고 말고는 중국의 의사에 달린 게 아니라 유럽의 힘에 달린 것임을 입증했다.
이 연속적인 종속의 과정이 아시아인이 스스로가 아시아인임을 깨닫게 하는 동력이었다. 서구의 군사적 우위와 그에 따라 설치된 상업적 거점은, 서구가 건설한 네트워크가 아시아 내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관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네트워크는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홍콩, 캘커타,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들은 아시아의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곳이 되었고, 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을 넘어서는 지구적인 인식을 발전시키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즉, 그들은 아시아와 서구가 만나는 공간을 통해 서구의 글로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었고, 그 네트워크에서 자신과 다르지만 처지는 몹시 비슷한 동료들을 발견했다.
판카지 미슈라는 세 문명권의 대표적 지식인들, 이슬람 세계의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와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중국의 양계초를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는 서구의 공세에 대응하여 이슬람 세계가 모두 함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각성해야 함을 역설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통치자들을 계몽하고자 했고, 유럽을 방문하여 서구의 지식인들과 논쟁을 펼치기도 했다. 이슬람 신앙을 정치적 동원의 주요한 근거로 생각한 ‘아시아’라는 인식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 아프가니는 북아프리카에서 인도네시아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무슬림 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비전에 불을 지핀 최초의 근대 지식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알 아프가니보다 더 후대의 인물인 타고르와 량치차오는 아시아라는 개념에 더 천착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서구 세계가 형성한 지구적 네트워크, 그리고 서구 세계가 발전시킨 근대적인 사상과 이념의 청사진을 빠르게 흡수했다. 그러나 서구와의 조우, 나아가 서구적 근대성의 흡수는 새로운 세대의 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했다. 최초의 근대적 아시아 지식인들은 당연하게도 전통 교육을 충실히 이수한 사람들이었고, 오랜 기간 쌓아온 자신들 문명의 지적 성취와 그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서구적 근대성이 건설한 강력한 군사력, 국가 행정력, 기술적 진보, 대중적 차원의 계몽, 자본의 놀라운 팽창 속도는 아시아 지식인들에게 그동안 그들이 배워 온 모든 것, 나아가 그들이 먹는 방식, 입는 방식, 종국적으로는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조차도 뒤쳐진 것이고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심었다.
아시아를 만든 것은 바로 그 의구심이었다. 요컨대, 아시아라는 개념은 유라시아의 문명사회가 서구적 근대성을 갑작스럽게 대면하고, 서구의 힘에 의해 종속되면서 형체를 갖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비서구’지만 ‘아시아’가 될 수는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대륙의 사회는 ‘위대한 고전 문명’의 전통을 발전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서구에 의한 식민화를 겪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원주민 문명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그 뒤 이베리아의 식민 사회가 원주민 문명을 대신한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원형을 형성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 사회와 문명은 라틴아메리카처럼 심각한 파괴를 겪지는 않았고, 유라시아 문명의 점진적 침투에 이미 직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대륙의 토착 문명과 사회는 인류 보편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과 가치 체계, 그에 입각한 누적된 텍스트 전통을 유라시아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서구 사회 일반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당연히 겪기는 하였어도 그 양상이 아시아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아시아 사회들, 정확히는 유라시아의 비서구 사회들은 수천년을 이어온 독자적 중심성과 전통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심지어 서유럽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아시아인들은 서유럽인들이 자신보다 우월할 것이라고, 적어도 압도적으로 우월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구 근대의 압도적 우월성과 마주했다. 전통의 무게가 클수록 그 전통의 취약함과 후진성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아시아 지식인들이 전통의 후진성과 서구 근대성의 우월성을 지각하고 취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한쪽에서는 전통이 전혀 후진적이지 않고, 전통을 더욱 강하게 고수함으로써 서구 세력에 대항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반대쪽에서는 전통을 철저히 지우고, 영혼 차원에서 서구인의 복제품이 되어야만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전자의 부류는 전통으로는 도저히 서구 근대성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남은 인생 내내 확인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후자의 부류는 자신들이 ‘역사의 옳은 쪽’에 판돈을 걸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 역사의 옳은 편에 있다는 서구인들이 결코 자신들을 동등한 위치로 끼워주지 않는다는 데 좌절했다. 그들은 기껏해야 문명화 사명의 정당성을 증명해주는 ‘모범적인 흉내쟁이들’이었다. 서구의 지식인들은 모범적인 흉내쟁이들의 모습 속에서 여전히 모범적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남아 있음을 지적하고, 자신들과 흉내쟁이를 구별하는 것을 즐겼다.
따라서 많은 지식인들이 양 극단 가운데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인도, 중화 문명의 전통을 버릴 수 없는 이들, 그러나 서구 근대성이 가져다 준 거대한 진보를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아시아라는 단위를 어떠한 문명적 비전으로 인식한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었다. 오직 전통만을 고수하는 이들은 아시아라는 단위를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전통적인 무슬림 세계의 인식이라면 인도인과 중국인은 모두 ‘불신자(kafir)’라는 면에서 무슬림과 구분된다. 오히려 서유럽인들은 같은 종교적 기원을 공유하는 ‘책의 사람들’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는 하였다. 전통적인 중화 문명의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은 조금 더 익숙한 서역인이었고, 유럽인들은 조금 덜 익숙한 서역인이었다. 불교의 기원인 천축은 이상향으로 묘사되고는 했지만, 어쨌든 세상은 ‘중국과 나머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대로 영혼까지 서구화를 추구한 사람들에게, 아시아라는 말은 그저 후진성과 동의어였다. 따라서 이 말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인과도 뜻이 통하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후진적인 비서구의 일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찾아낸 것이 바로 아시아였다. 이슬람, 인도, 중국의 지식인들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들이 다른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금세 인식할 수 있었다.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문명을 갖고 있던 저 나라도 서구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저 나라의 지식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을까? 새로운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 무슨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가능해진 것은 서구가 만들어 놓은 글로벌 네트워크에 접속하게 되면서였다. 서구의 네트워크와 서구가 형성한 인식 체계의 틀 속에서 아시아가 형성되고 있었다.
일본은 이 시기 어떻게 아시아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확산되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지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식민화, 혹은 반식민화를 피해낸 일본은 ‘제국주의로부터의 생존’이 지상 목표가 된 모든 아시아 국가와 민족들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본의 방식은 ‘탈아입구’라는 표어에서 상징되듯이 철저한 서구화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구식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지식 등 모든 것을 자국에 이식하였다. 이러한 ‘일본식 모델’의 성공은 바로 인접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게 공명했지만, 인도와 서아시아에서도 크게 울려퍼졌다. 그 절정은 ‘극동의 소국’이라는 이미지만 있던 일본이, ‘세계적 열강’이라는 러시아를 무너뜨린 러일전쟁이었다(물론 일본은 18세기에도 이미 소국이 아니었고, 러시아는 겉보기와 달리 내적으로 굉장히 취약했지만 말이다). 아시아 전역이 이 소식에 흥분했고, 대륙 반대편의 이란과 오스만 제국에서는 일본 승리의 원인을 헌정 체제에서 찾은 급진적인 입헌 운동이 승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을 변방의 섬나라라고 인식한 앞 세대와 달리 근대화를 가르쳐 줄 스승이라고 여긴 새로운 세대의 중국 유학생들은 일본의 경험을 중국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들은 청제국의 붕괴를 이끌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어떤 나라보다 근대 아시아의 정체성 혼란을 극심하게 겪은 나라였다. 전면적인 서구화는, 독자적 전통과 문명을 오랜 세월 발전시킨 일본인들에게는 당연히 엄청난 충격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서구식 생활을 하지만 실제 내면에서는 일본식 생활과 풍습을 유지하는 이중 문화생활이 19세기 후반 일본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화를 피하는 것이 확실시 되면서 정체성 위기는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일본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반응은 역시 여느 아시아 사회와 마찬가지로 전통주의자, 서구 근대주의자, 그 사이의 방랑자들로 나뉘었다. 하지만 일본의 방랑자들은 다른 문명권보다 더 독특한, 그리고 강력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위대한 전통과 문명을 공유하고, 서구 근대성이 야기하는 위협에 직면한 사회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고, 그들의 정치적, 사상적 각성을 촉구하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타고르와 친분을 갖기도 했던 일본의 사상가 오카쿠라 덴신의 저작 <동양의 이상>에서, 그 첫 문장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아시아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문장은 바로 이렇다.
“아시아는 하나다.”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대학원생.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하고 있다. 서아시아 '본토'보다는 러시아 문명과 서아시아 문명의 접경 지대에 더 관심이 많다. 유라시아의 근대화와 냉전 정치가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과학기술, 문명사, 대중문화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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