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넘게 전주민의 자택격리가 진행중인 상하이를 가까스로 탈출해 유럽으로 돌아온 벨기에 청년이 유창한 만다린으로 질문을 던진다. “왜 중국시민들은 이런 부당한 정책을 펼치는 정부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거죠?” 중국판 유튜브 비리비리에선 하루만에 삭제됐지만 유튜브에선 여전히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상하이에 10년 넘게 거주하는 한국인 지인이 입에서 불을 뿜는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한 고위공무원 가족이 양성판정후에도 격리시설에 안가고 버티면서 줄줄이 확진되는 통에, 보름넘게 단지내 산책도 못하고 있어요. 그중 한명은 주민들 항의로 마지못해 격리시설에 갔다가 음성판정 받았다면서 하룻만에 몰래 숨어들어왔죠. 그리고 다시 양성나왔고요.” 중국은 여전히 소수의 통치세력인 관과 대다수의 민으로 나뉘는 계급사회일까?
서구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거의 과도기가 없었지만 중국은 봉건사회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간극이 2천년이나 존재한다. 베이징대학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허화이홍(何懷宏) 교수는 2천년의 긴 세월을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단순히 봉건전제사회라고 부르거나 막스 베버가 가산(家產)관료제 사회라고 칭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서 서주(西周)시대에서 춘추시기까지는 <<세습사회>>, 한나라에서 청말까지를 <<선거사회>>라고 분석한 두권의 책을 펴냈다. 여기서 선거(選舉)는 투표(election)가 아니라 선발(selection)을 의미한다. 중국은 지금의 한국 같으면 ‘학종’에 의한 수시모집같은, 추천 찰거(察舉)제와 수능 필기시험에 해당하는 정시모집 과거(科舉)제를 통해서 평민에게도 관료가 될 ‘기회의 평등’을 부여한 역사가 2천년이 넘는다. 극소수의 천민들은 과거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과 달리, 명청시기를 거치며 신분제가 해체되고, 적서차별도 없앤 탓에, 이는 전혀 빈말이 아니다. 문헌 고증을 통한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관료로 임용된 사람들중 20~50%가 평민출신이었고, 특히 과거제가 확립된 송대이후에는 늘 1/3 이상을 유지했으며, 그 비율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물론 도시와 향촌출신간의 격차는 늘 존재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의 페어뱅크(fairbank, 費正清)는 중국의 전통사회를 도시-향촌분리사회로 규정하기도 했다. 청조 과거급제자 900여명 표본에 의한 페이샤오퉁(費孝通)의 조사에 따르면 이중 44%가 향촌출신이었다. 당시 인구의 90%가 향촌에 집중된 것을 고려하면 도시에 비해 상대적 비율은 많이 낮다. 하지만, 같은 시기 서구사회 지식인들의 농촌출신 비율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높다고 볼 수도 있다.
저자는 토크빌이 근대화를 거치며 서구사회를 변화시킨 평등의 흐름을 설명한 관점으로 중국의 전통사회를 비교분석하면서, 그 내재적 ‘근대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사상적으로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는 나름의 형식적 평등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유가는 인격의 평등, 묵가는 기독교를 연상시키는 겸애(兼愛), 도가는 자연으로 대상을 확대한 생명의 평등을 추구했다. 하지만 유가의 차등(差等)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전반적으로는 봉건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더욱 중시했다. 실질적인 평등면에서는 유가가 추구한 소강(小康)이나 대동(大同)이라는 이상사회를 고려하면 군주와 소수의 관을 제외한 대다수의 민은 평균주의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청말민초(清末民初)의 사상가이자 향촌개혁가였던 량슈밍(梁漱溟)이 관찰한 화베이(華北)와 산둥(山東)지역 농촌의 사례를 보면, 거의 모든 소농이 자기 토지를 갖고 있었고, 만주족 귀족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도, 영구경작권을 가지고 있었다. 광둥성의 빈농출신인 쑨원(孫文)도 남방지역의 농민들에 대해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근대이전의 생산력 한계속에 전체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상황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민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역성혁명이 일어나는 경우는 근대적 의미의 평등권 추구라기보다, 사회적 모순이 누적돼 이런 실질적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세습사회, 즉 봉건제가 해체되면서 선거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했던 것은 군주의 세습을 통해서 사회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 관료의 세습은 막았기 때문이다. 비결은 역시 유교와 공자, 그리고 귀족도 평민도 아니면서 동시에 귀족도 평민도 될 수 있는 사인(士人)계급의 등장이다. 그 자신이 사인의 대표격인 공자는 봉건적 신분계급질서를 옹호했지만, 동시에 학교를 열어 신분에 상관없이 그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누구나 덕행과 학문을 닦으면 관료가 될 수 있는 ‘고전 중국몽(中國夢)’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과거제는 팔고(八股)라는 표준을 오랜 기간 유지했는데, 송대에 왕안석(王安石)이 틀을 기초한 후, 주희(朱熹)가 정리하고 주석을 단 사서(四書)를 다루는 경학(經學)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철학, 논리학, 정치학과 사회학 등이 결합된 인문사회과학이다. 그 형식은 시부(詩賦)로 문학적 재능도 함께 살폈다. 표준의 변화를 시도하는 일이 제법 있었지만, 금새 복원됐다. 주자의 신유학은 중국문화 2천년의 정수로 중국지식인들의 컨센서스가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중요성이나 그 운영의 엄정함에 대한 요구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는데, 국가의 기강을 상징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의 의지와 무관하게 항구적으로 진행돼야 했으며,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연기가 되어도 꼭 보결시험이 행해져야 했다. 미국의 200년 역사상 4년에 한번 대통령 선거는 반드시 치뤄야 한다는 논리나 의지에 비견할만하다. 황제나 고관이 과거에 개입할 여지는 적었으며, 설령 개입이 있어도 대세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출제와 진행, 평가 등의 관리도 매우 엄격했으며 부정이 발견되면 엄벌에 처했다. 청조의 일부 기록을 살펴보면, 4명의 황제재위기 벌어진 5번의 향시(鄉試)에서 부정행위에 연루된 37명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그중 한명은 최고위급 관료인 대학사였다.
또, 관료들이 학력자본이나 권력을 이용해 과거선발에 유리한 결과를 얻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통시대의 affirmative action과 같은 노력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건륭제와, 강희제의 정책인데, 지역선발 단계, 특히 수도권에서는, 평민자제의 합격비율을 9:1로 높여 잡기도 했고, 고급관료들의 자제와 친인척이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開報回避)를 시행하기도 했다. 물론, 바꿔말하면 현실적으로 관료자제의 합격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문제가 심각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난한 평민들에게 수십년간 글공부에 매달리는 과거준비라는 선택지가 실제로 가능했겠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전통시대에는 교재를 비롯한 지식의 양에 한계가 있었고, 인쇄술의 발달로 학습 환경을 확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 중국에는 종친, 향우회 등을 통해서 어려서부터 학문적 재능을 보이는 인재를 집단적으로 지원하는 풍토가 있었기때문에 실질적 기회의 평등도 상대적으로 양호하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구사회의 봉건제는 종교와 무력, 그리고 영지에서 기반한 재력을 결합해 귀족집단에 부여하고, 그 신분을 법률로 명문화했다.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국왕과 영주사이에 서로 보호를 약속하는 의존관계를 맺었다. 한명의 최강자와 다수의 강자가 재력과 무력을 기반으로 계약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 요소들의 결합은 혈통에 기반한 봉건제를 오랜 세월 강고하게 유지하는 배경이 됐다. 이와 달리, 중국 상위계층의 권력은 관직으로부터 나오고, 관료가 되기 위한 조건은 개인의 문화역량/자산, 즉 아비투스였다.
중국에서 봉건제가 성립한 것은 서주시대부터 적장자(嫡長子)를 군주로 선택하고 종법(宗法)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에 그 필요가 생겨났다. 적장자가문인 대종(大宗)과 나머지 형제가문인 소종(小宗)이 나뉘고 소종의 제후를 지역에 봉해서, 봉지를 개척하게 했다. 이런 구조는 봉건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됐기 때문에 제후는 경대부에게 채읍(采邑)을 나눠줬다. 이들 지역 귀족이 다시 농민의 땅에서 공출을 받았으므로 이 계층은 천자(天子)-제후(諸侯)-경대부(卿大夫)-사(士)로 구조화한다. 평민은 농민이자 야인(野人)인 서인(庶人)과 도시에 사는 국인(國人)인 공상(工商)인으로 구성됐다.
중국에서 봉건사회와 세습귀족계급이 해체된 것은 전국시대로 돌입하면서 전란속에 계급유동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귀족계급내부에서 권익이 재분배되는 가운데 분쟁이 증가하고 종법제도의 기반이 되는 가족유대감이 옅어진 것이다. 한편으로 량슈밍은 서구와 비교해 중국에서 봉건제가 단기간에 사라진 이유를 이성(理性)적인 혹은 초월성을 부정하는 현세적인 경향때문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때문에 정치와 대등하거나 이의 권능을 넘어서는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문화를 중시해 원래 무사(武士)계급이었던 사(士)가 문인으로 전환하면서 무인보다 상위계급으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식 선거제도와 일맥상통하게 베버가 이야기한 탈주술화(disenchantment)가 일정한 수준으로 전통시대에 함께 벌어진 조숙한 ‘근대성’으로 볼 수도 있다. 기존의 귀족들도 혈통에 기반한 특권에 집착하지 않고, 지식과 문화자본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사인계급으로 전환했다. 이의 문화적 흔적으로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을 구분하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라는 유교적 표현이 있다. 군자는 원래 국왕의 아들이라는 국군지자(國君之子)에서 유래하는데, 나중에는 혈통과 무관한 덕행과 학식의 소유자로 뜻이 바뀐 것이다.
찰거제도가 운영되던 양한(兩漢)이 쇠망하며 위진남북조 시기에 사족(士族)계급이 번성했을 때 선거사회가 세습사회로 일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사족은 사인들이 명문가를 형성한 것을 뜻하는데, 이렇게 문화자본과 권력을 세습하려는 경향은 후대를 챙기고 자자손손 번영을 기원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으로 볼 수도 있다. 유교윤리하에서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강조됐다. 중국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가족과 가문의 공동체 의식이 국가나 종교의 그것보다 우선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봉건사회로 돌아가지는 않았는데, 결국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부나 무력이 아니라 문화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대지주나 상인들이 중심이 되고, 사병도 거느린 지방의 호족(豪族)들이 존재했지만, 역사에 장기간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강남(江南)지역의 호족들이 대표적인데, 이 시기에 중국 경제의 중심이 북에서 남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결국 남조(南朝)의 정치엘리트위치를 점한 것은 남으로 내려온 북의 사족들이었다.
좋은 제도라도 오래되면 모순이 쌓이게 마련이다. 급제할 때까지 대부분의 응시자들이 지나치게 오랜기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호소했다. 합격자가 극소수인 시험의 특성상 재능보다는 운이 결정적 요소가 되기마련이고, 우여곡절끝에 합격한 후에는 이미 중장년이 된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실전에서 발휘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관직의 숫자는 제한돼 있는데 너무 많은 이들이 좁은문으로 몰려들어 국가에 부담이 된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절대인구도 증가하고 수험생도 증가하면서 수험자와 합격자 모두 질적하락이 일어났다. 권력을 얻기 위한 관문으로서의 시험의 속성상 공리주의가 만연할 수 밖에 없었다. 문화도덕엘리트를 선발하자는 원래 취지와 달리 과거에 응시하거나 합격하는 이들 중 보신주의자, 기회주의자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수험생의 증가에 따른 국가의 대응은 시험의 경로를 늘이고, 시험횟수도 증가시킨 것이다. 과거는 크게 동생과(童生科), 향시(鄉試), 회시(會試)의 세단계로 진행됐다. 이중 하급과거인 동생과는 현(縣)시, 부(府)시, 원(院)시를 거쳐서 최종합격하면 실제로는 오늘날의 대학생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 고등교육을 받을 자격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합격한 이들은 생원(生員)으로 불렸으며 하급신사(士紳)에 속하게 됐다. 두번째 단계인 향시를 통과한 후부터는 관료가 될 자격이 부여되는 사대부(士大夫)가 된다. 합격할 때마다 차례로 공생(貢生), 과인(舉人), 진사(進士)로 승격됐다. 마지막 단계가 수도의 궁궐내 황제앞에서 열리는 전시(殿試)였다. 수험생이 너무 많아지거나 관료의 적체현상이 벌어질 때마다 실제로 문제가 해결된 계기는 전쟁이 일어나거나 역성혁명이 벌어진 것이다. 난리가 일어나면 전체 인구도 줄고, 타겟이 되기 쉬운 명문가가 먼저 몰락했다.
중국이 근대화의 격랑에 휩싸이면서 1905년에 과거제가 폐지되는데, 근대화 개혁의 신호탄으로 어떤 의미에서 전통사회의 가장 근대적인 제도였던 과거가 우선적으로 폐지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량치차오(梁啟超)를 비롯한 신지식인들은 과거제를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진보를 지향하는 서구문명과 달리 중화문명의 전통적 이상은 태평천하였다. 그래서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소수의 도덕문화엘리트를 관료로 선발해서 정치를 맡긴 것이다. 이제 국가의 이념은 부강한 국가를 지향하며 공리주의적인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고, 세계열강을 경쟁상대로 설정하는 것으로 리셋됐다. 이를 위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기술을 교육하여 전문가를 육성하고자 했다. 변화는 청일전쟁의 패배후 이에 자극을 받아 시행한 1898년의 무술변법을 시발점으로 단계별로 진행됐다. 최종적인 과거의 폐지는 1900년 8국연군이 베이징으로 입성하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원래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던 이들이 이와같은 외부의 압력속에 입헌파로 빠르게 변신했다. 이들이 성급하게 과거폐지를 주도하게 됐고 준비가 부족하여 부작용이 생겨났다.
과거제도폐지의 실질적 피해자들은 오랜 기간 과거를 준비했던 나이가 많고 가난한 하급향신들이었다. 젊은 향신들은 도시로 이동을 시작했고, 도시의 상류계급은 이미 정보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녀들을 해외유학보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들중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학교를 열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하지만, 신학교 출신 인재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과거 급제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당초의 기대와 달리 이들에게는 관료로서의 신분상승 기회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교육을 받은 인재의 숫자도 상대적으로 감소했고, 문맹률이 더 높아졌다. 19세기말 전국에 2천개가 넘는 서원이 있고, 학생은 15만명이었는데, 1909년의 통계를 보면 전국에 학교는 700여개, 전체 학생수는 7만여명에 불과했다. 19세기말 여론주도층 엘리트로 간주할 수 있는 관직이 없는 신사계급에 속한 사람은 140만명이었는데, 1910년 성단위 의회의 준비단계인 전국의 자의국(諮議局)에 속한 이들은 30만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과거의 신사출신이었다. 1880년 남녀노소를 통틀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인구는 20%정도였는데 민국시기인 1930년대 소학교 졸업자, 즉 비문맹자의 비율은 전국민의 17%에 불과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신사계급이 붕괴됐고, 이는 민중을 조직하고 동원해서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엘리트 계급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농촌에는 고령의 신사와 토호만이 남아서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심해졌다. 농촌이 공산당혁명의 온상이 된 배경에는 이러한 변화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거제의 폐단과 전근대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제는 오랜 기간 유지된 탓에 중국에 정치제일주의라는 뿌리깊은 관념을 심어줬고, 중국사회는 아직도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권력이 독립변수이고, 명예와 부는 이에 따르는 종속변수이다. 지금은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경제제일주의가 만연하고, 중국도 그 영향하에 있지만, 정치제일주의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상업을 통해서 부를 얻을 수는 있지만, 정치권력의 비호를 얻지 못하면, 부를 오래 지킬 수 없다는 오랜 경험칙이 존재해왔다. 중산층이상의 중국사람들은 늘 재산권을 국가에 몰수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어서, 해외로 재산을 이동하고,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공산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오랜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2021년 공동부유정책의 시작을 전후해,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알리바바의 마윈을 비롯한 인터넷 플랫폼 대자본과 그 창업자들이 된서리를 맞고 있다. 수천년을 유지해온 정치제일주의 전통이 극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정치권력이 지나치게 강한만큼 사회의 다른 분야의 발전은 억제될 수 밖에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물론 소수의 지배계급인 관과 피지배계층인 다수의 민이 나뉘는 계급사회가 지속되는 것이다. 중국의 선거(selection)제도는 비트포겔(wittfogel)이 지적한대로 지배집단에 새 피를 수혈할 뿐 현대사회의 민주적 평등을 보장하지 못한다. 권위적 정부의 집권세력이 여론에 신경쓰는 것은 전통사회의 유교적 민본주의와 다르지 않고, 투표로 정치적 책임을 지는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태평천국의 난을 전후해서 생원을 포함한 신사의 인구비율은 1%, 그들의 가족을 더하면 5%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당국가사회의 정치엘리트인 중국 공산당원이 9천만명에 조금 미치지 못하므로 14억 인구의 6%정도에 해당하니 이 비율은 그 당시와 별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제 오랜 전통이 그림자를 드리운 중국의 현실이 조금 이해가 간다면, 그 전통을 공유하는 한국사회의 실정도 돌아볼 수 있다. 법조권력을 위시한 고급관료들의 특권의식과 권능, 이를 묵인하는 언론과 대중의 판단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학력자본을 세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산층은 현대판 신사계급인 것일까? 물론 명백한 부패와 불법이 아니라면, 이런 사회적 이익의 분배문제는 일도양단하는 식으로 옳고그름, 선악을 판단할 수 없다. 많은 사안들이 회색지대에 놓여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보수’와 ‘민주개혁’, ‘진보좌파’의 의견이 가치관에 따라 첨예하게 대립한다. 또, 노년층, 중장년층, 그리고 청년들의 의견이 자신들이 놓인 현실에 따라 모두 다르다. 실은 개개인이 놓인 이해관계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허화이홍 교수가 선거사회의 내재적 근대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중국의 현실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근대국가를 수립한 이후에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이어지는 일당독재 당국가의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과거와 현재가 조응하는 가운데 어떻게 보다 나은 제도를 설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실제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한지 이미 한 세기에 가까워지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전통사회의 문화적 영향이 깊이 남아있다면, 우리와는 경로가 달랐던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모델을 금과옥조로 여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싱가폴처럼 절충한 모델이 실제로 시행되고 있는 예도 있다. 유교문화를 공유하는 동아시아인들이 이제 동서양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린 마음으로 논의를 해볼만한 주제이다.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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