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새해는 태평양의 일출이었다. 거대한 바다 위의 태양은 더 크게 보였고, 나는 무언가 대담한 전환을 꿈꿨다. 그 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큰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 스스로 한 다짐은 새로운 세상 속에서 살겠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남쪽 큐슈의 작은 도시 미야자키에 모여서 함께 캠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텐트를 펼치고, 물을 끌어오고, 간이 주방을 만들고, 간이 화장실을 만든다. 마치 난민촌을 만드는 것 같다. 대게 재료로 쓰이는 것들은 주워오거나 대나무와 같이 자연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자신의 잠자리, 먹거리, 옷거리를, 의식주를 스스로 만드는 감각은 세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스스로 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난다. 특히 평소에는 보고 싶지 않던 이른바 ‘소외된 나’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처음 캠프에 간다는 것은 좀 더 사회적인 이유였다. 나는 세상이라는 주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을 거치며, 나는 자본주의, 근대, 현대 시스템 이런 것들에 꽤나 비판적인 태도로 살아갔다. 대안적인 삶을 찾던 와중 일본에서 온 요시다 겐고의 가족들을 만났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들이 만든 대나무 주방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뒷마당에서 구해온 재료로 손쉽게 건축물을 만드는 모습이 마치 마법같았다. 그의 가족들은 그러한 자급자족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캠프를 미야자키에서 연다고 했다. 나는 기술을 익히면 내가 찾는 답이 좀 더 보일 것 같았다.
요시다 겐고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준비하는 캠프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는 그들이 왜 그런 자급자족 기술들에 관심을 가진 이유였다. 또한 캠핑을 통해 단순히 자연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족의 계기는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사건이었다. 그 날은 가족에게 영원히 멈춰있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 같았다. 여섯 명의 자녀들과 도쿄를 탈출하던 그 날, 가족들은 많은 다짐을 한 것 같았다.
나에게 있던 다짐은 “더이상 이런 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였다. 2014년의 취업 준비생은 세상을 그렇게 보았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생중계로 바라보며 느낀 참담함은 모든게 거짓말이라는 깊은 의문을 내게 심어주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도 거짓말 같고, 모든 사람을 구조했다는 말도 거짓말 같았고, 이러려고 다들 좋은 회사에 가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게 세상에 깊은 의문감을 품고 도착한 곳이 미야자키 산 속이었다.
캠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나눠주었다. 함께 일상을 벗어나는 느낌은 특별한 여행 같았고,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묘한 설레임을 주었다. 처음 한 달로 예상한 캠프 일정은 두 달을 넘겨 세 달로 연장되었다. 좀 더 다양한 실험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느끼고 있던 깊은 감정은 괴리감이었다. 아무리 캠프가 진행되고 있어도 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캠프에서 통역을 했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거짓말쟁이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짐이라는 것들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핑계 같았다. 실은 우리가 만난지 2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매번 불안했다. 한국, 일본, 대만에서 캠프를 함께 했지만 괴리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 느낌은 나를 만난 것이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세상만큼, 알 수 없는 작고 작은 내가 거기 있었다. 이른바 성격 유형론은 성격을 통해 나를 분석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특히 수많은 영성가들은 세상이라는 것도 이러한 ‘내’가 인식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산드라 마이트리는 애니어그램을 통해 성격을 감옥에 비유한다. 9가지 성격 유형은 내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패턴일 뿐이다. 그것이 ‘나’라고 믿고 행동하는 것은 함정에 깊게 빠지는 꼴과 같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가진 4번째 유형, 우울한 자아는 불일치감을 느낀다. 세상은 나와 분리되어 있으며, 나는 독특해야만 세상과 연결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이미 자기만의 환경에서 자라난 특별한 존재다. 아무리 질투를 해도 이미 모두가 특별한 것이며, 끊임없이 비교할수록 마음만 우울한 뿐이다.
세상을 만들러 간 캠프는 알고보니 나를 만나는 장소였다. 캠프라는 조건이 그랬다. 끊임없이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만난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 것도 없는 조건 속에서 큰 괴리감을 만난다. 마치 빈집을 구경하며 아늑한 미래를 상상하듯이, 비어있는 공간에서 더 멋진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매일 매일 내게 오는 일상은 그렇지 않다. 이상과 현실이 대비되는 과정에서 괴로워하는 나를 만난다.
결국 끊임없이 만나는 것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패턴들이 좀 더 보이기 시작했다. 느낌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는 힘이 생겼다. 관조하는 힘이 생기니 균형잡는 힘이 생겼다.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계속 반복하니 어느새 성장한 것이다. 캠프를 통해 나를 만난 과정 자체가 성장의 여정이였던 것이다.
마치 수만번 떨어진 물방울이 모여 돌멩이에 구멍을 내듯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이 새로운 지형을 만들듯이, 지긋지긋한 반복이 새로운 성장을 낳는 것이다. 미야자키에서 매일 이야기 한 것은 새로운 문명이다. 그것은 어쩌면 정직하게 나를 만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내겐 불을 피우며 잠자리를 준비하는 캠프가 그런 만남의 감각이 되었다.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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