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자연스러움’을 경계합니다. 자연스럽다고 믿어왔던 것들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인간이 공장식 축산으로 가축을 길러 고기를 먹는 행위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훈육이라는 폭력, 남성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 그리고 징병제 그 자체,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는 암묵적인 약속도, 오직 한 상대와의 독점적인 연애도, 무기한 계약 조건의 결혼도, 사유재산과 자본주의도, 문화적으로 생성된 거의 모든 표상은 자연스럽다고 말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가부장제 사회의 ‘자연스러움’은 이성애자 비장애 인간 남성을 기준으로 규정되기 때문이죠. 제가 여성이기에 해야만 했던 일들, 여성이라는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통과해야 했던 퀘스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자연스럽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지면서 제 세계에는 큰 균열이 납니다. 균열은 한 번의 충격보다는 연쇄적인 사건으로 인해 서서히 금이 그어집니다. 저의 첫사랑 아빠에게 배반을 당하고, 저는 남자를 증오하는 동시에 메마른 사랑을 갈구하게 됩니다. 내가 온전히 긍정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대상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아주 골치 아픈 일이에요. 게다가 저는 사랑을 받아본 적도, 할 줄도 모른다고요. 내가 증오하는 남자들을 사랑하는 것 만한 수모가 없습니다. 나를 죽일 뻔했던 이들은 모두 남자였는데, 나를 죽이려는 대상에게 성애를 느낀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열반에 오르기 전에는 세상 모든 남성이 미웠습니다. 마치 처음 비건이 되면 모든 인간이 죽임꾼으로 보이는 것처럼. 하등한 존재로 치부하는 대상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숨길 때도 있었죠. 그런데 섹스는 하고 싶어서 여자랑 데이트를 해보기로 했죠. 정치적 레즈비언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여자랑도 잘 맞더라고요? 남자 덕에 여자한테 마음이 열렸네요. 알고 보니 저는 젠더와 무관하게 한 존재에게 매력을 느끼더랍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거 줄곧 남자만 만나왔나 봅니다. 저처럼 후천적 동성애에 눈을 뜬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젠더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성 정체성을 부정하고 회피를 거듭하며 맺어지는 관계는 결코 안정적이지 못했어요. 내가 부정하는 존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데 당연히 실패했죠. 아니, 애초에 저라는 존재를 부정하는데, 타인을 사랑하는 게 성립이 될까요? 해로움을 전제로 연결된 인연은 모두 상처만 가득 안은 채로 찢어지게 됩니다. 인종, 젠더, 국적을 막론하고 나는 이제 평생 사랑이란 걸 할 수 없는 걸까, 절망하고 있던 차에 J를 만나게 됐어요. 그는 길거리에서 동물권 운동을 하다 알게 된 사람이에요.
비건이고, 페미니스트이고, 귀엽고, 무신론자이고, 기타 연인으로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치적 조건을 모두 첫걸음에 통과한 단 한 사람. 제 기준 대한민국 상위 1% 안에 드는 조건이랄까요. 게다가 록스타에요. 연애 초반에는 잔뜩 긴장한 채 서로를 의식했어요. J는 어찌나 제 눈치를 보던지 고추도 잘 서지 않았어요. 저는 크게 실망하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구나 싶었죠. 물론 삽입 말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지만, 발기되지 않은 성기가 저의 성적 매력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다행스레 서로 경계를 허물고 관계가 무르익으니 자나 깨나 벌떡 서요.
우리는 처음부터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왜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지, 왜 롤링스톤즈가 비틀즈보다 위대한지, 왜 대마초가 합법화되어야 하는지, 왜 몸으로 혁명을 실천해야 하는지, 왜 세상에 예술이 필요한지, 왜 운동(movement)과 예술의 접점을 고민해야 하는지,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제가 꿈꾸는 가치를 단번에 이해하는 사람이 소울메이트인가 봐요. 우리는 동물해방을 실천하며 동시에 기계해방을 예견하는 영혼의 단짝이에요.
만난 지 한 달 만에 함께 살기 시작해 벌써 2년하고 3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무탈하고 사건 사고 없는 연애는 처음이에요. 과거의 연애와 비교하자면 성공적인 관계랄까요? 이는 모두 착하고 배려심 깊은 J 덕분입니다. 저는 온갖 정신병을 끌어안고 악랄하게 굴어도 그는 언제나 저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고, 먼저 사과하고, 선뜻 용서해 주었어요. 남성 혐오적인 언어를 남용하고, 이기적이고 지배적으로 행동하는 저를 결코 미워하지 않았죠.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절대 누군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지만, 그는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의 나를 잘 알기에, 그가 사랑하는 나와 사랑하지 않는 나 모두를 사랑해 주었어요. J를 통해 잃어버린 남성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어떠한 폭력 없이 사랑을 듬뿍 먹고 자란 J의 역사가 자리합니다. J의 무한한 사랑, 모부에게 받은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야금야금 먹었어요. 이 사랑은 첫사랑의 맛과 비슷해요. 첫사랑의 맛은 빈 구멍을 메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는 저의 거울이 되어주었어요. 하염없이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그의 모습에 저는 부끄러웠어요. 저는 그의 사랑을 닮고 싶어요. 사랑이 순환하고 증폭한다는 감각을 온 세포로 음미합니다. 또 우리의 먼 미래를 상상합니다. 아마 처음일 거예요.
카메라를 들고 지구를 유랑하는 낭만적 유목민. 네트워크 안팎에서 이미지와 신체로 연결되는 작업하는 사람. 기술을 경유해 생명의 공통 언어를 모색하는 미학적 수행자. 종의 경계가 허물어진 생태적 관계망을 상상하며, 더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채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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