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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는 말은 저를 깊은 심연으로 끌고 내려갑니다. 그 깊이는 오늘과 과거의 물리적 거리이기도 하고, 어둠과 어린 시절의 찬란함이기도 합니다. 아빠는 언제나 제 존경의 대상이었죠. 가치관과 철학이 확고한 지식인이고, 다정하고 늠름하고 멋진 아버지.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포옹과 키스를 퍼부어주시던 당신. 제게 늘 해주시던 말씀이 있죠.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삶이 된다.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생각을 습관화해야 한다.” 언제나 반짝거리는 눈으로 당신의 화려한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처음 아빠에게 맞은 날을 기억합니다. 7살의 어느 저녁, 한참을 가지고 놀던 풍선이 터져버렸습니다. 찢어진 풍선 조각은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그러자 아빠는 쓰레기를 바로 치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저는 이따 치우겠다고 답하고는 티브이를 시청했습니다. 이내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지만 저는 움직이는 만화에 정신이 팔려 듣는 둥 마는 둥 했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요, 당신은 어두운 목소리로 티브이 전원을 끄고는 매를 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아빠의 무서운 얼굴과 경직된 분위기. 저의 첫 매는 효자손이었어요.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었다 서기를 반복하며 매를 맞았습니다. 작은 몸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끔찍한 아픔이었어요. 양쪽 종아리에 피멍이 든 채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언니의 말로는 그날 밤 제가 잠든 사이 아빠가 눈물을 흘리며 저의 다리에 약을 발라줬다고 해요. 다음날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채찍을 미워할 새도 없이 제게 당근을 한가득 물려주셨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애정이 넘치는, 내가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첫 학대의 트라우마는 ‘사랑의 매’로 둔갑했습니다. 제가 땅속 심연으로 향한 게 그때부터였을까요? 저는 초등학생일 때부터 쉽게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집 옥상에서 떨어지면 매질보다 더 아플까 상상하곤 했습니다.

뭐든지 시작이 어렵다고 하죠. 매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갖은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의 매를 맞게 됩니다. 동생과 싸워서, 방 정리를 안 해서, 말대답해서, 음식을 남겨서, 식사 예절이 좋지 않아서, 심부름을 안 해서, 아침에 늦잠을 자서… 사랑의 매질 다음에는 의례적인 보상의 시간이 따랐습니다. 훈육이 끝나면 저를 안아주시거나, 대화를 시도하거나, 애정을 퍼부으셨죠. 언제 어떤 이유로 맞을지 모르니 저는 집 안에 매가 될만한 물건은 숨기거나 버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손으로 때리면 감정이 실린다며 언제나 매를 든다는 것을 강조하셨죠. 매를 드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매의 형태 또한 다채로워졌습니다. 효자손, 회초리, 주걱, 옷걸이, 빨래 건조대, 우산 등 길쭉하고 묵직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집어 들었습니다. 가장 두려운 무기는 골프채였어요. 아빠는 골프에 조예가 깊은 프로 출신이어서 집에 골프채가 많았거든요. 저를 때릴 만한 매가 보이지 않을 땐 골프채를 집어 드시고는 휘둘러보았지만, 단단한 쇳덩어리는 아무래도 과하다 싶었는지 이내 가방에 도로 넣으셨지요. 그럴 때면 저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습니다. 혼자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제발 골프채에 맞는 날이 오지 않기를. 차라리 나무 회초리로 맞는 게 낫겠지.’ 하도 맞다 보니 맞는 데에도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맞는 부위의 근육에 힘을 주면 고통이 미세하게 덜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봤자 맞으면 언제나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웠지만.

저는 언니와 남동생 사이 둘째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아빠의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어야 했습니다. 언니는 묵묵히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내는 의젓한 큰 딸이었고, 동생은 손이 많이 가는 어리숙한 아이였기에 별 탈이 없었습니다. 제가 첫 매질의 대상이어서였을까요? 미운 둘째여서일까요? 유독 나의 팔다리는 푸르뎅뎅한 피멍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매질로 실핏줄이 터질 때마다 저의 가슴도 찢어졌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벌어지는 만큼 저와 아빠의 거리도 멀어져갔습니다. 매질이 누적될 때마다 장난기 넘치고 다정다감하던 아빠는 점차 사라져가고, 무서운 괴물 같은 남자로 변했어요. 집에서는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순간도 편하게 쉴 수 없었습니다. 집은 쉼과 돌봄의 공간이 아닌 벗어나고 달아나고 싶은 공간이 되었고,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마음의 흉터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백 번도 넘게 맞았지만, 유난히 기억이 생생한 날이 있습니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부모님의 유전을 물려받아, 초등학생 저학년 때는 다양한 종목의 운동선수를 할 만큼 에너지가 넘치고 건강했어요. 그런데 하도 맞다 보니 몸과 마음이 병들어 허약해졌나 봅니다. 어느 날은 너무 심하지 않게 적당히 맞고 있었는데, 앞이 흐릿하게 보이더니 머리가 핑- 돌았습니다. 그대로 쓰러져 기절했고, 눈을 떠보니 소파에 누워 아빠의 간호를 받고 있었어요. 제가 깨어나자 민망한 듯 물을 충분히 마시고 들어가서 자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는 매질을 당하다 너무 힘들 땐 어서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야 매질이 멈출 테니까.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저의 생일날이었습니다. 아침잠이 많은 저는 늑장을 부리다가 어느새 등교 시간이 지나버렸어요. 시계의 초점이 지각을 가리키자 저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던 아빠는 또 매를 집어 듭니다. 아마 처음 골프채로 맞은 날이었을 거예요. 그날이 제 생일인 걸 아셨던 건가요? 아빠만의 방식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된 저는 단단한 쇳덩이로 맞을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지각이어도 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맞느라고 결석을 해버렸지 뭐예요. 오전 내내 피 터지게 맞다가 하교 시간이 될 즈음, 저의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는 친구들에게 얼굴을 비추러 학교로 향했습니다. 피부색을 보기 힘들 정도로 온 다리가 시퍼렇게 멍이 든 채로. 제 다리를 보고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던 친구들에게 저는 생일빵을 맞았다며 웃어넘겼어요. 더운 6월이어도 긴 바지를 입을 걸 그랬습니다.

역시나 처음이 어렵죠. 생일빵 이후로 아빠는 종종 골프채를 들었습니다. 골프채는 전문 용어로 ‘클럽’이라고 불립니다. 클럽의 위쪽 손잡이는 고무 재질로 감싸진 ‘그립’, 길게 쭉 뻗은 샤프트를 지나 아래에 달린 쇳덩이 ‘헤드’가 있죠. 그립과 헤드를 막론하고 묵직한 골프채로 맞으면 뼈가 울려 시릴 정도로 아팠습니다. 하루는 제 방에서 신명나게 맞던 도중, 너무 괴로워 용기를 내어 샤프트를 움켜잡아 막았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그대로 클럽을 비틀어 저를 넘어트리고는 구석에 내몰린 저를 마구 밟았습니다. 손으로 때리면 감정이 실린다며 웬만하면 매를 드는 분이신데, 아마 처음으로 발로 밟힌 날일 거예요.

또 언제는 샤워를 마친 후 제 방에서 발가벗고 쭈그려 앉아 발톱을 깎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을 닫고 있는 게 불편하셨는지, 아빠는 갑자기 방문을 뻥 차고 열었습니다. 놀란 저는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감히 소리를 지르다니, 그대로 저는 발로 밟혔죠 뭐. 당시에 우리 집에는 대문을 제외한 모든 문고리가 없었습니다. 맞다가 방으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그면 아빠가 모조리 부숴버렸거든요. 아빠는 운동선수 출신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라 그런지, 문고리는 생각보다 쉽게 빠지더군요. 그렇게 문고리가 없는 채로 방문을 제대로 닫지도 못하고 몇 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폭력으로 마음의 상처가 깊어질수록 저는 겉돌았고, 겉돌수록 폭력의 강도는 심화되었습니다. 폭력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는 사슬입니다. 누군가 작정하고 고리를 부숴버리지 않는 한 폭력은 끝도 없이 대물림되며 그 힘은 무섭도록 빠르게 강해집니다. 누구나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중학생 때 저는 틈만 나면 아빠에게서 도망치기를 시도했습니다. 친구네 집으로, 갈 곳이 없을 땐 집 옥상으로, 공원으로, 아빠가 있는 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집 밖에서 밤을 새우고 가출을 일삼기 시작했어요. 당연하게도 날이 갈수록 우리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관계가 엉망으로 꼬였습니다. 언니는 부모님 속을 썩이는 저를 못마땅해했고,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학교를 빼먹고 집을 나가는 저를 미워했으며, 동생과도 하루가 멀다고 싸웠죠. 가출을 시도했다가 집에 붙잡혀 들어온 날,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극심하게 맞았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방으로 도망쳤고, 전화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두 명의 중년 남성 경찰관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제가 뛰쳐나가자 아빠는 저를 막아서고 방으로 욱여넣었고, 경찰과 한참 대화를 했습니다. 이내 경찰관은 제게 아빠를 구속할 거냐며 윽박지르곤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훨씬 심하게 맞았죠. 아무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제 편은 아무도 없었고, 제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상처투성이인 채로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그런 나날이 십 년 넘게 반복되며 언제인가부터 제 마음의 문은 완전히 닫혔습니다. 아빠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솟구쳤고, 당장이라도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습니다. 공포에 휩싸여 향했던 집은 감옥이었고 저는 죄수였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빠의 존재를 무시해야 했고, 당신과 나 사이에 단단한 벽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대화는 서서히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거리는 멀어졌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요, 어느 순간 사랑의 매질도 멈추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아빠는 갈라섰고,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은 지 수 년이 흘렀습니다.

아빠, 왜 그랬나요? 왜 저를 그토록 때린 건가요? 꼭 그래야만 했나요? 당신 키의 반도 못 미치게 작고 마른 아이를 학대해야 했나요? 너무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나의 호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죠. 생생한 고통에 잠들지 못하고 울던 수많은 밤에 저는 허공을 향해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나요? 이 글을 쓸 수 있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아빠라는 존재를 지우고 살아왔습니다. 나는 평생 불행하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죽고 싶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태어난 것을 후회했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불행은 더 큰 불행을 낳았습니다. 아빠의 사랑의 매질에 중독되어 나를 파괴하는 곳으로 향했고 저를 무너트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당장의 고통을 묻어버릴 다른 고통을 찾고, 나를 마비시키는 무감의 늪으로 빠졌습니다. 어둠의 심연이 깊어질수록 묘한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 말고 엄마나 동생이 맞는 모습을 보았다면 훨씬 견디기 힘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나만 때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를 태어나게 한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몇 번이나 죽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사는 것만큼 죽는 일도 쉽지 않더군요. 목숨이 겨우 붙은 산송장의 저는, 살기 위해 존재의 이유를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저는 많은 곳을 지나왔고 많은 얼굴을 만났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폭력의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들. 나보다 아픈 사람들. 삶을 살고자 하는 어떠한 기회조차 거세된 사람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람들. 죽임당하는 사람들. 저는 그들이 불행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이 삶을 되찾고 존재를 회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을 위해 분노했고 함께 아팠습니다. 제가 가진 고통의 언어로 그들과 공감할 수 있었고, 그 괴롭고 끔찍한 연대를 통해 저는 희망과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럴 때면, 이상적인 가족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티끌 없는 저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 차 흘러넘치는 완전한 존재. 온전하며 충분한 삶. 폭력 이전의 행복하고 충만하던 어린 시절. 그 모습을 상상하며 느린 걸음이지만 한 발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어서, 그 사랑을 기억하고 계속해서 꺼내어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단단한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가 아무리 괴롭더라도 아빠를 용서해야 합니다. 오로지 용서를 통해 내가 해방될 수 있음을 압니다. 당신도 내가 겪었던, 어쩌면 더욱 가혹한 폭력을 겪었겠지요. 폭력 없는 가정을 상상하기 힘들었겠지요. 아빠가 아는 유일한 길이었을 테지요. 가차 없이 때려서라도 좋은 가족을 만들고 싶었겠지요. 아빠의 가족이란 그런 모습이였겠죠. 어린 딸을 때려야만 했던 아빠가 너무도 가엽습니다. 폭력을 행사할 줄만 알았던 당신을 꽉 안아주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을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겪은 고통과 분노는 폭력에 노출된 이들과 연결될 수 있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이 열쇠로 굳게 닫힌 문들을 열어젖히고자 합니다.

제가 끊어내는 사슬의 조각이 튀어 나가 다른 사슬에 균열을 내고 언젠가 모두 무너지기를 소망합니다.

폭력의 사슬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죽도록 미운 당신을 용서함으로써 나를 치유하고, 

용서라는 숭고하고 본질적인 사랑의 행위로 생명 언어를 회복하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아빠를 용서합니다. 

나의 용서가 아빠와 저의 영혼을 구원할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내게 삶을 주셔서,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저의 진심이 닿기를 바라며, 아빠에게 이 편지를 부칩니다.

 

사랑을 담아, 편지지 모심.

편지지

카메라를 들고 지구를 유랑하는 낭만적 유목민. 네트워크 안팎에서 이미지와 신체로 연결되는 작업하는 사람. 기술을 경유해 생명의 공통 언어를 모색하는 미학적 수행자. 종의 경계가 허물어진 생태적 관계망을 상상하며, 더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채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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