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한파가 스며든 섬진강 물에는 살얼음이 맺힌다. 나는 호기롭게 겨울 항해를 나섰다. ‘섬진강부터 남해 바다까지 이미 종주를 했다’ 라는 자신감을 안고 가볍게 카누에 올랐다. 그러나 큰 코를 다쳤다. 이내 급류에 휘말린 배가 좌초된다. 찬 물이 온 몸을 흠뻑 적신다. 정신이 번쩍든다. 물의 길에는 인프라가 전무후무하다. 명확한 경로 설정과 목표 설정이 중요함을 다시 깨닫는다.
올 한 해 섬진강과 남해를 여행하며 그 목표를 정리했다. 풍요의 감각. 몸을 돌보는 감각. 그리고 야생의 감각을 물의 길에서 느꼈다. 내년의 항로는 남해 바다를 지나 대한해협 혹은 현해탄으로 불리는 곳이다. 특히 한국 일본 네 글자를 붙여 놓을 때 오는 남다른 무게감이 있다.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싶을까.
나의 이야기는 한 친구를 만나며 시작되었다. 이름은 후쿠야마 코타, 우리는 종로 북촌 마을의 작은 한옥집에 처음 만났다. 그곳은 우프 네트워크(WWOOF : World Wide Opportunity on Organic Fram의 약자)의 한국 사무실이었다. 우프는 전 세계의 유기농가를 방문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코타는 특이하게도 한국 사무국장으로서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지역의 농장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하고, 농사에 관심많던 코타는 내게 한국, 일본, 대만의 시골 여행을 제안해주었다. 나는 2년간 이른바 농사 여행을 떠났다.
당시 나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도시에서 온 여행자였다. 무엇이든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여행 첫날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긴 시간 입국 심사를 받았다. 당신은 왜 길게 여행을 하는지. 당신은 왜 직업에 농부라고 썼는지. 쩔쩔매며 질문을 받다보니 늦은 시간에야 공항을 빠져나왔다.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농장 인근 기차역에 도착했다.
새벽 늦은 시간 임에도 농장 호스트는 기꺼이 나를 데리러 나왔다. 그 땐 그게 참 고마웠다. 그런 식의 크고 작은 도움들이 이어졌다. 서툴고 어리숙한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주었다. 단바, 사사야마, 구사쓰, 카쓰가야마 등등. 이름도 알지 못했던 지역은 내게 일본을 다시 감각하게 된 공간이었다. 여행은 내가 세상을 통해 귀중히 보살핌을 받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선물은 순환한다. 누군가에 받았다면 다시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대가없이 주고 받는 마음이 나를 성장시킨 것이다. 그렇게 생긴 마음에서 물의 길에 나선다. 물의 길 너머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공동체 의식 회복에는 친구라는 감각이 중요하다. 중국 최후의 유학자 량수밍은 서구와 중국 문명을 비교하며 윤리 공동체를 설명한다. 서구 문명의 공동체란 개인이 합쳐진 단체이다. 예컨대 길드 조합과 같이 능력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생겨난 것이 공동체다. 반면 중국 문명은 개인 의식이 희박했다. 가족, 국가, 자연이 인,의,예,지,신 등의 윤리 가치로 묶여있는 공동체다. 특히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친구를 통한 공동체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의미가 내겐 각별하다. 내가 무언가 받았다면 다시 주게 될 거라는 서로의 믿음이 느껴진다.
18세기 쓰시마 섬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는 신의를 통한 실리의 외교를 강조했다. 그는 일본, 조선, 중국에 대한 상대주의적 역사관을 견지하면서 각 문화의 장단점을 존중했다. 그의 일본어 수필의 발문에는 조선통신사 조태억이 남긴 이별의 시가 담겨있다.
절해고도에 기이한 선비는 누구인가?
오직 호슈만이 그 이름으로 영예를 얻었도다.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하고
백가의 책을 암송하니,
불우한 환경에 처함은 어찌 운명이 아니랴만
그 재능은 다 빛나고도 남음이 있도다.
내일이면 만 리 이별하니,
되돌아보는 그 뜻은 무엇인가
문헌학자 김시덕은 “500년간 두 번의 침략(임진왜란, 일제식민기)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낳았다.”라고 평가한다. 조선 통신사는 첫 번째 트라우마 이후 시도된 양국의 정치, 경제적 교섭이었다. 조선은 전쟁 포로의 송환과 적국의 정보가 필요했고, 일본은 커져가는 대륙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동상이몽적 노력으로 시도된 조선통신사는 모순을 지닌 동시에 우정을 낳았다. 쓰시마 섬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는 그 믿음과 우정의 영역을 보여 준 것이다.
내 기억에는 할아버지와 연관된 것도 있다. 어느 날 “나는 일본에 저항할 수 없었다.”라고 할아버지는 뜬금없는 고백을 했다. 청년이 된 내 모습에서 본인의 옛 감정들이 떠오른 듯 했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개항도시 군산에서 노동자로서 살아온 본인의 부끄러움이 있던걸까. 그럼에도 할아버지에게는 많은 일본 친구들이 있었다. 서재에 쌓여있던 일본에서 온 잡지, 편지, 선물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대한해협을 건너며 마주하는 무게가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싶다. 친구를 만드는 작업이 확대되기를 바란다. 물의 길이 흥미로운 이슈가 되기를 바란다. 하늘 길이 열리며 문화 교류의 활발한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 오사카, 후쿠오카, 도쿄 등등 한국과 일본 사이의 허브 도시가 다시 열린다. 쓰시마 또한 물의 길의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허브 도시였다. 무엇보다 내 친구 코타가 쓰시마로 귀촌해서 살고 있다. 친구의 상징성이 강한 장소이다. 나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친구의 마음을 품고 항해에 나선다.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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