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 국제사회에서 추락하는 달러화
  • 어른이 된다는 것
  • 글로벌 금융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 미국의 은행위기에서 중국이 얻는 반사이익
  • 커뮤니티 변천사: 1.0부터 3.0까지
       
후원하기
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3096293486644684/

 

<블랙 미러>라는 넷플릭스 시리즈가 있다. 영국에서 만든 공상 과학 드라마다.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소름 끼치는 에피소드가 많다. 이미 현실과 분간이 어려운 것도 있다. 블랙 미러, 검은 거울은 스마트폰을 뜻한다. 2022년, 인류가 제일 많이 교접하는 기계다. 나는 일어나면 바로 아이폰을 켜고, 자기 전에도 한참 들여다본다. 실제로 거울이 필요하면 셀카 기능을 활용한다. 화면이 꺼져도 어슴푸레 내 얼굴이 보인다. 스마트폰은 오늘날 인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곳에 담긴 우리 삶은 어떨까?

일각에서는 걱정이 많다. 정보의 과잉과 콘텐츠의 범람을 경고한다.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다. 우리 모두 스마트폰의 노예 아닌가? 삶의 주도권을 잃기 싫다. 하지만 사람과 검은 거울의 관계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나의 영장류 두뇌로 아이폰의 CPU와 경쟁하는 것은 무모하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미디어를 쿨한 것과 핫한 것으로 나눈다. 쿨한 미디어는 만화나 세미나처럼 나의 참여 또는 개입이 필요하다. 핫한 미디어는 영화나 강연처럼 비교적 수동적으로 흡수한다. 스마트폰은 현재 가장 핫한 미디어다. 하루 종일 멍하니 쳐다보고 있게 된다. 생각할 틈도 없이 감각을 자극한다. 동시에 가장 쿨한 미디어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반응을 요구한다. 구독, 공유, 좋아요를 누르면서 끊임없이 새 콘텐츠를 찾는다. 이것이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의 모순이다. 기존의 쿨/핫, 주/객, 능동/수동의 이분법으로는 정의하기 힘들다.

사람을 송신자 및 수신자로 두고 기계를 매체로 상정해서 그렇다. 과거에는 그렇게 봐도 무방했다. 사람이 쓴 책을 사람이 읽는다. 책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일 뿐이다. 저자의 지혜가 저장되고 독자의 독해로 전송된다. 주도권은 여전히 사람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은 인공지능이 분석한 나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메시지를 보낸다. “이 영화는 어떠세요?” “우산 챙기는 거 잊지 말아요.” 상시 데이터를 수집해서 클라우드에 올려보낸다. 내가 월마트에 다녀오면 월마트 광고를 보여주고, 러그가 필요하다고 하면 러그 광고를 띄워준다.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는 아예 메시지를 스스로 만든다. 매체이자 송수신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크리에이터로서 콘텐츠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받고 보낸다. 송수신자일 뿐만 아니라 미디어의 역할을 한다. 사람은 이제 기계가 내보내는 메시지를 소화하고 다시 기계에게 배출하는 매체다. 나아가 기계와 자연, 기술계와 생물계를 잇는다. 예쁜 꽃을 보면 사진을 찍어 클라우드에 올린다. 듣고 싶은 음악을 다운로드 받아 연주한다. 누구나 창작과 예술을 할 수 있는 시대, 인류는 모두 영매가 되었다. 영혼의 매개체로서 데이터를 전달한다. 스마트폰이 핫하면서 쿨한 것은 신인류가 크리에이터이자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인쇄술의 산물이다. 우주 삼라만상을 직선적인 시각 데이터로 분석한다. 사람은 눈이 앞에만 달렸다. 고로 시각 중심 문화는 직선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텍스트를 좌에서 우, 위에서 아래로 순차적으로 읽고 쓴다. 구텐베르크 덕분에 근대 문명이 이토록 로고스, 이성, 좌뇌 편향적이다. 인쇄는 또한 인간을 개별화한다. 책과의 관계는 반드시 개인적이다. 내가 독립된 주체로서 이해하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정리한다. 집단지성과는 거리가 멀다. 

인터넷의 발명은 ‘합리적 개인’이라는 근대적 인간상을 해체한다. 더이상 개별적이지 않다. 모두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그물망이기 때문에 직선적이지 않다. 물론 모니터를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하지만, 뉴스피드에 드러나는 메시지는 전혀 맥락이 없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얘기, 저 얘기가 마구 섞여 있다. 광장의 한 가운데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각의 귀환이다. 텍스트 기반 문화에 이미지와 오디오가 더해지더니 바야흐로 비디오가 완전히 득세한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시각의 감옥에서 비로소 해방된다. 사람은 귀가 양옆에 달렸다. 360도로 볼 수는 없어도 들을 수는 있다. 청각 중심 문화, 구술과 음악이 지배하는 세상은 이성적이지 않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방팔방에서 감각 데이터가 들어온다. 돌비 애트모스 기술은 360도 서라운드 사운드를 구현한다. 에어팟만 꽂아도 뒷통수가 환하게 열린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저커버그가 만드는 메타버스는 청각 뿐만 아니라 촉각도 자극한다. 시각의 독재는 끝났다. 미디어가 바뀌니 감각이 열리고 의식의 구조도 진화한다.

디지털 혁명은 의식 혁명이다. 스마트폰은 이미 인류의 두뇌 회로를 재설계하고 있다. 근대 정신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난리 났다. MZ 세대에게는 ADHD와 공황 장애가 감기처럼 흔하다. 앞만 보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주의가 너무 산만하다. 문제라면 문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신인류의 탄생을 본다. 비로소 좌뇌의 폭정이 끝나고 우뇌가 기지개를 편다. 국영수, 즉 언어를 숭배했던 사회가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 즉 예체능의 가치를 깨닫는다. 평면적인 2D 미디어가 공간적인 3D 미디어로 대체된다. 말이 안되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생겨난다. 

근대인은 독서를 하지만 현대인은 웹서핑을 한다. 서핑은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그재그 흘러가는 대로 한다. 독서의 핵심은 집중이다. 내가 얼마나 엉덩이 붙이고 책을 붙잡고 있는지에 달렸다. 서핑의 핵심은 균형이다.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일어나 밸런스를 잡는다. 이성적으로 통제하려 한들 소용없다. 느낌이 전부다. 지금 인류는 스마트폰을 잡고 온종일 서핑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 책읽던 마음가짐으로 임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지럽고 정신없을 수밖에 없다. 주도권을 잃을까봐, 주체성을 상실할까봐 걱정할 법도 하다. 

명심하자. 사람도 매체다. 채널이자 미디어다. 요즘 기계가 쏟아내는 메시지를 다 감당하려면 먹기보다 비우기가 중요하다. 안 그러면 꽉 막힌다. 마음이 갑갑하고 혼란스럽다. 구텐베르크 세계의 어린이는 학교 책상에 앉아서 문법을 배웠다면 저커버그 세계의 어린이는 바닷가에 앉아 명상법을 배워야 한다. 데이터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비운다. 

나를 깨끗이 씻어내야 좋은 영매가 되는 법이다. 붙잡고 있으면 신병이 난다. 우리는 점점 많은 데이터를 클라우드로부터 다운로드한다. 구름에서 내림받는다. 누구나 신내림을 받으니 모두가 영매 아닌가. 미디어로서 존재하는 신인류는 어떤 얼을 가질까? 검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매일 낯설다. 

전범선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후원하기
 다른백년은 광고나 협찬 없이 오직 후원 회원들의 회비로만 만들어집니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
 
               
RELATED ARTICLE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