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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he New York Times

 

거장의 죽음

몇 년 전에 《뉴욕타임스》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2018년 10월 25일)하고 소개했던 브뤼노 라투르(1947~2022)가 지난 10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유작은 「사회이론 문제로서의 가이아(Gaia as a Problem of Social Theory)」였다. 이 논문은 올해 7월에 나온 공저 Writing Gaia: The Scientific Correspondence of James Lovelock and Lynn Margulis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 수록되어 있는데, 논문 제목으로부터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가이아’를 붙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종래의 가이아론, 가령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가이아론과의 차이는 ‘사회이론’으로서 가이아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라투르는 왜 그토록 가이아에 집착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라투르의 가이아 탐구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에 런던에서 “가이아를 기다리며: 예술과 정치를 통한 공통 세계 만들기(Waiting for Gaia: Composing the Common World through Arts and Politics)”라는 강연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2013년에는 기포드 강연에서 가이아를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은 2017년에 『가이아와 마주하기(Facing Gaia)』라는 제목의 영어책으로 출판되었다. 2019년에는 지구시스템과학자 티모시 렌턴과의 공저로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왜 가이아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가(Extending the Domain of Freedom, or Why Gaia is So Hard to Understand)」를 발표하였다. 실로 라투르 인생의 마지막 10년은 가이아와 씨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상, 조성환, 「생태위기에 대한 지구학적 대응」 『종교문화비평』 42집, 2022년 가을호 참조). 

 

지구시스템과학에서 인류세인문학으로

라투르의 죽음을 가장 애통해 했을 학자는 아마도 디패쉬 차크라바르티였을 것이다. 그는 라투르와 동년배이자(1살 차이) 사상적 동지 관계에 있었다. 다만 차크라바르티가 ‘행성’ 개념을 토대로 인류세 인문학을 전개했다면, 라투르는 ‘가이아’로 신기후체제(New Climate Regime)의 인문학을 구상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기후변화와 인류세를 인문학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 거장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라투르가 차크라바르티의 2009년 논문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를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정의에 있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평가한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다(“Extending the Domain of Freedom,” p.1). 어쩌면 이 논문의 영향으로 라투르도 본격적으로 가이아 연구에 몰입했는지 모른다. 그 이후의 연구 방향을 보면 자신의 평생의 근대 비판론, 그리고 차크라바르티가 제기한 인류세인문학의 방향이 그의 가이아론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지구시스템과학(Earth System Science)’을 토대로 인류세인문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티모시 렌턴(Timothy Lenton)의 연구에 힘입고 있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라투르는 2019년에 렌턴과 공동 논문을 썼는데, 2021년에 차크라바르티가 쓴 ‘행성’ 논문에는 이 공저 논문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또한 렌턴이 2016년에 쓴 지구시스템과학 입문서 『지구시스템과학 입문(Earth System Science: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University Press, 2016)을 펼쳐보면, 차크라바르티나 라투르의 논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이아(Gaia)나 인류세(Anthropocene) 또는 심층 시간(deep time)이나 거주성(habitability) 개념이 그것이다. 이 사실은 라투르나 차크라바르티의 인류세인문학이 렌턴 등의 지구시스템과학 연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지구시스템과학은 인문학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지난 호에서는 근대적 ‘글로벌’ 개념이나 ‘시공간’ 개념이 깨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보다 철학적인 개념의 사례로, 근대적인 ‘자유(freedom)’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적 자유 개념

차크라바르티는 2009년에 쓴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에서 ‘근대적 자유(modern freedom)’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근대적 자유라는 대저택은 화석 연료의 지속적 이용이라는 기초 위에 서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부분은 에너지 집약적이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래로 자유에 대한 어떠한 논의에서도, 인간이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은 동시에 지질적 행위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자각이 들어서지 못했다. 자유를 논하는 철학자들은 주로, 그리고 당연하게도, 인간이 어떻게 부정의, 억압, 불평등, 혹은 다른 인간들이나 인간이 만든 체제에 의해 강요된 획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지질적 시간과 인류사의 연대는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 

– 조지형 외,『지구사의 도전』, 365쪽.

 

여기에서 차크라바르티는 세 가지 지적을 하고 있다. 첫째 근대의 자유 개념이 인간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즉 인간 사이의 불평등이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만을 생각했다. 둘째, 그 자유 개념은 화석 연료라는 에너지 기반 위에 성립하고 있었다. 즉 에너지 의존적인 자유였다. 셋째, 그렇게 해서 획득한 자유가 지구의 환경을 바꾸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즉 인류사와 자연사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상즉상입의 관계에 있다는 인류세적 관점이 없었다. 이와 같은 차크라바르티의 견해를 바탕으로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비인간 존재(non-human)의 힘들이나 시스템은 자유와 관련된 문제로는 고려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해방되고 독립되어 가는 것이야말로 자유 그 자체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 아미타브 고시,『대혼란의 시대』159쪽. 시노하라 마사타케,『인류세의 철학』92쪽에서 재인용.

 

즉, 근대의 자유 개념은 비인간 존재를 배제시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생각하는데 있어서도 비인간 존재, 즉 자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해 왔다. 이상의 지적들은 인류세 시대에는 ‘자유’ 개념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 변화의 일단을 지난 8월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시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모시는사람들, 2022)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지진과 쓰나미와 원전 사고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자연이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조건을 다시 묻도록 요구한 것은 아닐까? 인간의 존재 방식이 자연과 관계 맺고, 자연에 좌우되며,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과의 관계로 인해 생기는 ‘어쩔 수 없음’, 즉 ‘자유로울 수 없음’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다.

– 시노하라 마사타케,『인류세의 철학』91쪽. 

 

차크라바르티가 지진과 쓰나미에서 ‘행성과의 조우’를 보았다면, 시노하라는 인간의 자유 개념이 자연에 의해 제약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즉 인간이 결코 자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자유에 대한 자각은 종래의 자유 개념에 근본적인 수정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서구 근대의 자유 개념은 ‘자연의 필연’과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은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필연의 영역이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 자유의 영역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생존권 안에서의 소요

시노하라와 유사한 생각은 라투르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지구생활자들(terrestrials)은 이동할 수 있지만, 지구 또는 가이아라고 명명된 생명체들의 암석층, 생물막, 흐름, 유입, 밀물이 후대를 위해 어느 정도 지속가능한 거주적합성의 조건들을 창조해 낼 수 있었던 딱 그만큼의 거리까지만 그럴 수 있을 뿐이다. 그 간석지를 넘어서서는 단 1미터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이와 같은 한계를 누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우리가 적합한 장비를 지니고 누빌 수 있는 몇 킬로미터 두께의 얇은 생존층…”

– 브뤼노 라투르 지음, 김예령 옮김, 『나는 어디에 있는가?』, 48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여기에서 라투르는 인간의 자유가 지구라는 조건에 의해 제약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은 ‘생존층’이라고 불리는 불과 몇 킬로의 공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라투르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행성적 자유(planetary freedom)’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래의 인류세 시대는 인간이 지구의 자원을 자유롭게 사용한 시대이다. 그러나 그 자원이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유로운 사용에 의해 지구의 기후시스템이 불안정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누렸던 자유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류세란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 시대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인간의 자유가 자연에 의해 한계지워진 것임을 자각시켜 준 시대이다. 이렇게 한계지워진 것, 조건지워진 것을 동아시아에서는 ‘명(命)’이라고 하였다. 운명, 천명, 생명이라고 할 때의 ‘명’이 그것이다. 그 명(命) 안에서 자유를 누릴 줄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逍遙)’의 의미일 것이다. 

 

자유와 자연의 이분법

라투르는 차크라바르티보다 좀더 철학적으로 자유 개념을 분석한다. 그것이 앞에서 소개한 2019년의 논문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왜 가이아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가?」이다. 먼저 “왜 가이아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가?”라는 부제로부터, 라투르가 죽기 전까지 가이아 개념에 매달린 이유가 짐작된다. 러브록이 가이아 개념을 제창한 지 반 세기가 지났건만 여전히 가이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투르가 가이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인 자연 이해, 인간 이해가 오늘날의 생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철학에서는 자연을 필연의 영역으로, 인간을 자유의 영역으로 이해하였다.즉 자연 세계는 자연 법칙에 의해 운행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결정되어 있는데 반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규율을 세워서 그것에 따라 사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법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준 것이 차크라바르티의 인류세인문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가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정의에 대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연 이후로, 필연의 영역(자연)과 자유의 영역(사회) 사이에 새로운 연속성을 확립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 Latour & Lenton, “Extending the Domain of Freedom, or Why Gaia is So Hard to Understand”, Critical Inquiry 45, Spring 2019, p.1. 이하 “Latour & Lenton(2019)”로 약칭.

 

가이아는 글로브가 아니다

그렇다면 라투르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있을까? 바로 여기에 라투르가 가이아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먼저 가이아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기체(organism)’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다윈적 자연 개념에서는, 유기체들은 그들의 환경(environment) 안에서 끊임없이 다른 유기체들과 상호교섭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자기 외부에 있는 물질들을 교환하고 있다. 하지만 가이아는 다른 가이아와 상호교섭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에는 환경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가이아는 그 자신 이외에는 환경이 없다.

Latour & Lenton(2019), p.9.

 

즉 지구는 지구 이외의 행성과 상호교섭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다윈적인 ‘유기체’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유기체에는 계층적 질서가 있는데 가이아에는 그것이 없다고 라투르는 말한다. 장자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혼돈’인 셈이다. 그러나 혼돈이 곧 혼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질서가 인간의 인식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혼돈이라고 명명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가이아도 무질서한 상태인 것은 아니다. 질서는 있지만 그 질서들 사이에 어떤 위계나 층차가 없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더 나아가서 가이아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이아는 통합된 영역, 구, 지역 또는 실체라기보다는 조각보(페치워크)와 같다. 

(Gaia is very much a patchwork and not a unified domain, sphere, region or entity.)

– Latour & Lenton(2019), p.10.

 

즉 가이아는 어떤 중앙 통제시스템을 갖고 있는 글로브(globe)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투르가 보기에 가이아는 유기체도 아니고 글로브도 아니다. 

 

가이아는 스스로 그러하다(自然)

라투르의 가이아 정의는 마치 중국의 3세기 도가사상가 곽상의 우주론을 연상시킨다. 곽상은 종래의 천(天)이나 도(道)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천(天)은 만물의 총명이다. 도(道)는 무능하다.

– 『장자주(莊子注)』

 

여기에서 천이나 도는 만물을 주재하는 주재자나 통일된 법칙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곽상이 보기에는 만물은 각자의 타고난 자연성에 의해 살아갈 뿐이고(萬物自然), 그것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우주가 조화롭게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이나 도는 단지 만물들의 총합을 말할 뿐이다. 

라투르가 생각하는 가이아는 실로 이와 같다.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들이, 라투르 개념으로 말하면 행위자들이, 각자의 활동에 의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들이 살기에 적합한 거주환경을 만들었고,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지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의 본의라는 것이 라투르의 주장이다. 

실제로 러브록은 자신의 유작에서, “나의 가이아 개념, 즉 ‘피드백시스템에 의한 자기조절로서의 가이아’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라투르이다”라고 극찬을 하였다(James Lovelock, We Belong to Gaia, 2021, p.88.). 여기서 ‘자기조절’이 곽상의 개념으로 말하면 ‘자연(自然)’에 상응한다. 그래서 라투르는 “가이아는 외적 원인이 없다”고 말한다. 즉 자기 안에 활동의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세적 자유 개념

가이아가 유기체도 아니고 글로브도 아니라면 그것은 과학의 범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더군다나 가이아를 구성하는 만물이 자기 안에 원인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신의 창조와 같은 신학적 범주로도 설명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라투르가 가이아를 과학이나 종교와 같은 근대적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가 있다. 달리 말하면 자연이나 자유의 이분법으로는 가이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에 사는 행위자들이,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만물이, 각자 자기 원인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들이 외적인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비록 비인간 존재라 할지라도 그들 또한 ‘자유’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지구의 대기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라투르가 비인간 존재에게도 자유라는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다른 표현으로는 “비인간의 정치학(politics of nonhuman)”이라고도 하였다. 김대중 식으로 말하면 ‘지구민주주의’이다.

바로 여기에서 자연과 자유의 근대적 이분법이 깨지게 된다. 비인간 존재에게도 자유가 부여되고, 인간 또한 비인간 존재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세 시대에는 한편으로는 자유 개념이 확장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되게 된다. 비인간 존재의 입장에서는 자유의 확장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유의 제약이다. 이처럼 인류세는 우리가 그동안 신봉해 왔던 근대적 가치들이 근본적으로 재고되는 시기이다. 라투르나 차크라바르티와 같은 인류세인문학자들은 바로 이런 인문학적 전환이야말로 오늘날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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