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년만이다. 두번째 책을 번역하면서 첫번째 책을 번역할 때의 기시감을 느꼈다. 나는 당시 조한혜정 선생의 권유로 일본 도치기栃木현 나스那須라는 농촌지역에 있는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이라 불리는 자급자족생활교육센터에 머물고 있었다. 센터 설립자 후지무라 선생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3만엔 비즈니스”라는 제목의 농촌생활 마이크로비즈니스 독본이었다. 당시 생활을 통해 교육내용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동시에 텍스트를 번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과 글과 삶이 일치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자급자족기술 훈련의 내용은 내 삶의 궤적 속의 고민, 하고 싶은 일이나 잘 할 수 있는 일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 책의 내용은 온전히 내 말과 글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보람의 의미를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무감’이라는 이념적 땔감이 필요했다. 어차피 알고 시작한 일이라 그 마음의 부담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이 경험들은 이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내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긴 터널의 벽을 덮고 있는 타일 같은 것들이었다.
이 터널은 서울의 하자센터라는 곳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연수도 이곳에서 일하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학창시절부터 막연히 동경해 오던 삶속의 공공성, 인문학, 예술, 창의성, 공동체 등을 만났고 생태주의와 영성도 덤으로 장착했다. 원래 마음에 품고 있던 “동아시아의 대안적 근대찾기”라는 주제의식에 3년간의 이 경험들을 조합해서 나름의 목표를 세웠고, 계획했던 대로 2015년 중국으로 건너왔다.
부연하자면 동아시아와 근대에 대한 고민은 사회나 역사의식같은 추상적인 사유에서도 기인했지만 절반쯤은 내 첫 커리어인 14년간의 다국적 컨설팅기업 근무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이 업계에서 일하면서 한국뿐 아니라 홍콩, 베이징, 싱가폴과 토쿄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는데, 서구인들이 지배하는 기업문화와 목표속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과 로컬직원들은 늘 도구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 분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각기 다른 주권국가의 국민들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식민화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서구의 담론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시아인들이 자기 일과 삶의 주인이 되려면, 서구에 맞설만한 주도 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전이든 전후이든 그 사업에 실패했다는 것이 내 주관적인 판단이었다.
중국으로 건너와 목표대로 생태교육과 생활공동체 만들기를 시도했다. 한편으로는 이곳이 동아시아 청년 교류의 거점이 되기를 희망했다. 반년 가량 중국 전역의 생태농장 등을 돌아보고 신향촌건설운동 실천자들을 만나본 후에 상하이 근교의 한 마을을 낙점했다. 2년 가깝게 여러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광저우의 한 마을로 이주했다. 이번엔 대안적 생활을 추구하고 있는 마을 친구들이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뮤니티안에 머물면서 한중 교류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활동과 네트워킹 거점들을 내가 살고 있는 광둥과 중국 남부지역에 더 집중시켰다.
예기치 않은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모든 활동이 중단됐다. 하릴 없이 글과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애초에 ‘중국’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은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특정 영역이나 지역으로 초점을 맞추지 못한 소위 ‘중국전문가’라는 말은 성립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중국에 국한하기보다는 아시아에서의 포괄적인 지역적 경험이 내가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목표로 삼은 분야 이외의 중국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중국 내의 매체와 소식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주로 집에서 머물면서 여기로 눈길을 돌리고 주변 사람들 외의 중국사람들의 생각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팬데믹 2년차에 한중관계가 급격히 악화하면서 한국에 있는 지인들의 도움과 소개로 대중매체에 글을 쓰게 될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경향신문에 중화권에서 출간되는 서적의 서평을 연재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됐다. 그때부터 중국 문화와 사회를 조금 폭넓게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출간되지도 않은 책한권에 대한 짧은 지면의 소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느꼈고, 책 소개를 구실로, 당대 중국의 문화, 사회 현실과 그 배경이 되는 맥락과 역사를 함께 소개하고 싶었다.
문득 자신이 중국에 대한 문화와 사회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한 적도 없고 하다못해 학창시절 그 흔한 인문학, 사회과학과 문화비평의 글쓰기 훈련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일에 관심은 많았지만 실제로는 전공서적에만 코를 박고 있던 공대 모범생이었다. 한국 사회나 문화에 대해서 내가 공론장에 말을 보탤 기회가 주어질 리 없었다. 그런데 특수한 위치와 상황 덕분에 얼떨결에 얼치기 ‘평론가’가 된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했던 10년전의 선택 덕에 결국 어느 정도 젊은 시절의 로망을 이룬 셈이다.
서평으로 소개한 책중에 ‘방법으로서의 자기’가 있었다. 중국의 영화와 드라마,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에서 우연히 샹뱌오 교수를 언급하는 것을 듣고 관심이 생겨 그들이 말한 언론인터뷰 기사를 찾아봤다. 그는 당대 중국 청년들의 경험에 대해서 묻고 답했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부근의 소실’과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로컬지식인 ‘향신鄉紳’이라는 개념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한국에서 마을만들기를 하거나 공동체 담론을 만들어가는 ‘마을주의자’들과도 말이 통할 것 같았고, 한국 선비들의 전통같은 것도 생각났다. 조한혜정 선생이 우선 머리속에 떠올랐지만 현역에서 활발히 뛰는 젊은 세대의 지식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 책을 찾아봤다. 중국 근현대사와 사회에 대한 통찰이 남달랐다. 동아시아라는 주제도 다른 각도로 돌아볼 수 있게 됐다. 나와 동년배인 그가 걸어 온 끊임없이 유동하는 삶의 궤적속에서 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감정이입을 돕기도 했다.
지인이 샹뱌오 선생을 개인적으로 아는 한국분을 소개해줬는데, 그는 박사논문 때문에 몹시 바쁜 터라, 대신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설마했는데, 내게 기회가 돌아온 것이다. 결정이 되자 샹뱌오 선생이 직접 연락을 줬다. 좋은 신호였다. 이번에도 단지 책한권을 번역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대결적 인식을 강화할만한 내용이 아니면 가뜩이나 잘 팔리지 않을 중국관련 서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한중 민간의 대화를 촉진하는 계기로 삼고 싶었다. 원래 이 책은 지식의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대화의 정신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획자 쉬즐유엔許知遠씨의 설명이 떠올랐다. 어떠한 내용과 형식이든 이 사회적 대화가 국경을 넘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두가지 생각이 있었다. 첫째, 샹선생의 최근 주요 인터뷰와 공개 글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몇개 추려냈다. 원래 책 내용에 이 글들을 더해서 한국판에 함께 펴내고 싶었다. 한국사회와 동시대성이 두드러지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한국 내 중국연구자들 외 일반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한국에 있는 청년 연구자들을 찾아 이 글들의 번역을 맡기고 싶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중년 한국 남성인 내가 아니라 한국 청년들이 이 메시지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애초에 대화따위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가능하면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국인 청년이 합류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운이 좋아서 서울에 있는 한국인 청년 연구자, 중국인 청년 연구자 각 한명씩, 맞춤한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팀이 짜여졌다. 기획을 마무리하기 위해 샹뱌오 선생이 줌회의를 먼저 제안했다. 우리 팀과 샹뱌오 선생, 그리고 중국 책의 대담자인 단독출판사의 편집인 우치씨와 함께 선정한 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책과 글에 대해서 궁금한 점도 직접 확인했다.
그렇게 광저우와 서울, 베를린, 베이징 사이에서 반년 가까이 메일과 온라인 회의를 통한 활발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다. 특히 우리 번역팀내에서는 매주 회의를 가졌다. 의견을 나누다 우연히 끼어들어온 우크라이나 화제를 계기로 샹선생과 한국 지식인들간의 대화를 주선하고, 한국의 매체에 실리도록 코디네이트했다. 지면의 제약으로 다 싣지 못한 대담의 전문은 책에 포함시켰다. 책을 번역하는 과정 못지 않게 공부가 됐다. 모든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
책을 번역하면서 서평을 쓸 때보다 훨씬 꼼꼼하게 샹선생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실은 그의 이런 저런 제안들이 중국보다 한국독자들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이 설명하는 것처럼, 그는 “방법으로서의 자기”라는 사유법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가 있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일본의 학자가 쓴 글이다. 그는 루쉰을 연구하면서 일본과 아시아의 근대를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중일전쟁에 참여한 그의 경험은 연구와 삶이 연계된 사유의 깊이를 가져왔다. 그 후에도 “방법으로서의 중국”과 다시 아시아가 여러명의 중국과 일본의 후배연구자들에 의해 동아시아 담론으로 이어졌다. 책을 읽기 전에는 샹뱌오도 그 논의를 계승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방법으로서의 자기는 그저 수사학이 아니었다. 실재 없이 부호화한 동아시아 담론의 부실함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자기 삶, 일상의 필요와 문제에서 출발하지 않은 담론은 생명력이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는데, 동아시아 담론은 이미 그런 운명에 처해있다.
중국인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150년간 길을 잃었지만, 아주 오랜 기간 “방법으로서의 자기, 중화中華”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중국인들은 결국 시간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한다. 제3자인 내가 보기에도, 앞으로 10년후가 될지, 아니면 30년후가 될지 모르지만, 미국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결국 자신만의 세계를 복원할 것이다. 물론 그게 ‘어나더 아메리카another america’라는 패권적인 사고일지, 아니면 보다 평화롭고 평등한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비젼일지 우리가 지금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결국 ‘우리’들일 것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한번도 자기를 방법으로 삼아 본 경험이 없다. 대국들의 힘이 정면 충돌하는 위치에 놓인 지정학적 운명 탓에, 짧게는 500년 길게는 1,000년 넘게 중화라는 방법에 의탁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식민지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100년간 일본이라는 방법을 거울 삼았다. 마지막으로는 30년 가까이 미국이 제시하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우리 삶의 척도가 돼왔다. 우리 세대도 그렇지만 절반 이상으로 두뇌와 생활양식이 서구화된 것처럼 보이는 MZ세대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김어준이 신나게 명명하던 K에 대한 갈망과 이에 대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은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촛불시위와 방역, K-컬쳐의 예상치 못한 성공을 보면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언설에 반신반의했다. 드디어 “방법으로서의 한국”의 시대가 온 것인가?
뭔가 이야기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 것은 K-문명을 얘기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서구문명과 중화문명의 상대적 배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봤던 입장에서 K-문명이라는 말은 무척 낯설게 들렸다. 한국의 지식인들과도 교류가 많은 중국의 대표적 학자 쉬지린許紀霖 선생이 문명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조선문명이나 베트남문명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죠.” 한국인이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는 어떤 감정을 실어서 한 말이 아니다. 문명이 주변으로 전파가능한 일종의 “거대한 보편성의 체계”를 의미한다고 할 때, 한국이라는 중간체급의 나라가 문명의 담지자가 된다는 것은 어색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유럽의 강대국들이지만 프랑스나 독일을 두고 프랑스문명이나 독일문명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서구문명’의 일부일뿐이다. 내 생각엔 한국이 이미 선진국으로 발돋움해서 인근 지역이나 다른 곳으로 전파되는 어떤 문화와 표준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과거 문명을 자양분 삼아 지역 혹은 인류의 보편문명의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다. 문명의 몇몇요소들만 편의적으로 골라 K-문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실한 내용물에 포장만 화려한 과자들처럼 느껴진다. 한국산이니 맛은 자극적으로 매콤달콤할 수도 있겠지만.
문명이나 문명화가 국가와 정부를 형성하기 위한 정치담론이라는 아나키적 비판관점으로 보면 문명담론에 대한 집착은 강대한 국가와 유사제국 건설의 욕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중국 서남부와 동남아시아, 인도에 걸쳐있는 주요한 국가형태와 이 국가들에 인접한 고산지대의 소수민족을 연구한 인류학자 제임스 스코트는 문명과 야만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초기국가 형태의 기반이 된 노예의 포획과 관련이 있음을 논증한다. 문명담론의 담지자인 국가는 세금과 부역, 전시의 군역을 제공해야할 신민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고, 전쟁과 약탈을 통해 사로잡은 자유민을 노예, 그리고 정착 농민으로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 로마제국, 그리고 초기 중화권 왕조들 모두 이런 노예제도위에 성립됐다. 지형과 기후 때문에 역사적으로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웠던 동남아시아의 경우, 근대 식민화 이전까지도 많은 국가들이 이런 노예국가의 형태를 유지했다. 이 지역의 고산지대에 살며, 화전농, 수렵, 채집을 통해 생활하는 조미아Zomia라 불리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국가체제’에 의해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소수민족 원주민으로 치부되거나, “살아있는 화석이나 개화하지 못한 조상”의 일족들로 여겨지지만, 실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삶을 살고 싶어 주체적으로 이탈한 도망자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특히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선진문물 제도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주변 나라들에 전파해야할 문명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위험한’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하게됐다. 마치 400년전에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이 중화의 적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던 모습이나 200년전 서구인들이 비서구권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며 대포와 선교사를 앞세워 아시아에 진출했던 일, 그리고 일본인들이 같은 핑계로 조선을 침략했던 사실들이 떠올랐다.
우리가 주변국가를 침략할 위험이 있다거나 “꼴같지 않게” 잘난척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 민주주의나 선진문물이 주위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고, 제법 성숙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가르치거나 우리 삶의 방식을 전파하기 위해 나설 필요는 없다는 뜻일 뿐이다. 일본과 중국을 제외하고, 확실히 여러면에서 객관적인 국가의 역량이 우리보다 못한 나라들, 이를테면 동남아시아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선도하거나 개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이는 비유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오랜 기간 세대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꼰대질’에 다름아니다. 각 나라와 민족은 자기들만의 맥락과 역사가 있다. 발전을 하든 퇴보를 하든 과거 경로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결과이다. 모든 진로와 이를 선택하기 위한 의사결정은 결국 자신들이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도움을 청할 때,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가능하지만, 그 선은 가능하면 보수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우리의 경험을 배우고 싶어 할 때,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도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족하다.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다”고 생각할 때, 이건 모두 각자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지 한국의 방법이 다른 나라에도 적용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각자 사회의 발전 정도와도 상관이 없다. 우리도 중화, 일본, 미국이 아니라 더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방법으로 삼을 수 있었다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쇄국정책을 취해야 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우리가 낙후한 부분이 있어서 외재적인 지식과 논리를 수용한다고 해도, 자신의 현실과 맥락에 맞게 소화해서 내재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바깥에서 들어 온 것도, 궁극적으로 자기 방법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걸 다른 식으로도 표현하고 싶은데 나는 “만이蠻夷국가”, “경계국가”라는 말이 생각났다. 만이국가는 무슨 말인가? 한국은 오랜 기간 외부에 문명의 중심이 있다고 상상하고, 스스로를 변방 오랑캐라고 비하해왔기 때문에, 늘 바깥에서만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중심이 쇠락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패스트 폴로워로서 중심의 기술과 사유를 꽤 많이 따라잡았을 때는 스스로 정통성이 있다고 선포를 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정통성이란 건 늘 외부에서 온 것이고 온전히 내재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모방자의 역할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경쟁과 추격에 과연 끝이 존재할까?
중요한 건 우리가 언제쯤 그들을 따라잡아 스스로 노른자가 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늘 중심과 변방, 문명과 오랑캐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온 한계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오랑캐나 변방이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족할 수 있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떨까? 어차피 일등은 하나뿐인데, 나머지 훨씬 더 많은 존재들은 일등이 되지 못해서 불행해야만할까? 하나의 중심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나머지 주변, 변방들과 함께 평등하게 어울리기 위해,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자기를 방법으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뜻이 아니라 결국 자족함을 알고, 경쟁보다는 어울림과 협력을 중시하고, 적절하게 노력하면서 삶을 즐길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뜻을 조금 확장한 것은 ‘경계국가’이다. 우리는 실제로 노력하면 노른자의 일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고, 실제 그 문턱에 가깝게 다가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G10이나 G5에, 또 핵심국가라는 말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것 같다. 이제 한국이 더 이상 발언권도 없는 변방의 낙후한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핵심이 되기 위해 애면글면하기 보다 핵심과 변방의 사이를 우리 의지와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경계’에 위치한 국가로 남는 것은 어떨까? 이미 우리는 상당부분 그런 위치와 능력은 갖췄으니, 자신의 아이덴티티 설정만 제대로 하면 될 일이다.
이렇게 굳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한 핵심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명의 다른 이름이 보편과 표준화이기 때문이다. 보편이 과도하게 중시되고 표준화가 강요될 때, 이걸 받아들이는 반대 급부는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의 맥락에 따른 현실 사정을 무시해서도 안되고 다양성이 가져다 주는 풍성함을 모른 척 해도 안된다. 보편을 좋아, 시대의 흐름을 좇아, 정말 나쁜 것들은 점차 바꿔나갈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자기의 리듬과 속도에 맞게 진행해야 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만이 보편의 보편이라 할 수 있는 그라운드 룰Ground rule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심과 문명에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자기를 방법으로 삼는다는 또다른 의미는 이런 태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책의 흐름을 좇아, 내용을 깊이 음미해 본 번역자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샹선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 사정에 맞게 풀어보고 싶다. 9월경에 한국에 출간될 그의 책과 가을에 공중파로 EBS 위대한 수업에서 공개될 그의 강의에, 이 과정을 지켜보고 참여한 일인으로서 보잘것없지만 몇마디를 보태고 싶다.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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