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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 네이쳐지에 발표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한중일 등이 참여한 다국적 연구팀의 알타이어계통연구가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을 출발점으로 보던 기존의 학설과 달리 몽골, 터키, 퉁구스,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이 되는 원시알타이어를 사용하는 농경민족이 9천년전 요하서역에서 기장을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유전생물학, 고고학, 언어학에 기반한 자료를 통계적으로 분석해 이런 결론을 도출했다. 최근 선사시대의 인류와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다양한 학제간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이를 주도하는 이들 독일연구진과 협업한 중국과학원팀이 재작년에 네이쳐와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도 이번 연구와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 성과를 2020년 10대 과학연구업적으로 지정하기도 했고, 팀장인 30대 여성과학자 푸차오메이(付巧妹)박사가 시주석을 독대하는 기회도 얻었다. 

사진1) 네이쳐지에 실린 다국적 연구팀의 분석 결과. 언어, 선사유물, 유전자를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중국대륙과 만주로부터 조와 쌀의 농사가 어떻게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졌는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역사과학 칼럼니스트 보인(波音)이 작년에 출간한 <무자사기(無字史記)>는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이 연구결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직립원인 등의 고인류와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아시아 대륙으로 진입하고 퍼져나간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이야기이다. 진화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기 전인 1940년대에는 직립원인인 베이징원인(北京猿人)이 중국인의 선조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지금은 인류 모두가 지금으로부터 8만년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부계는 유전자의 Y염색체, 모계는 미토콘드리아를 통해, 직접적인 조상을 추정할 수 있다. 현생인류중 일부는 고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과의 관계를 통해 소량이지만 이들의 유전자를 지니게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티벳사람들이 데니소바인의 유전자 덕분에 산소가 희박한 고원지대에서도 큰 어려움없이 생활한다.

저자는 소수민족인 몽골족 출신인 덕에 한족혈통중심주의의 혐의를 받지 않고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특권을 누린다. 모두에 강조하는 것은 “태즈매니아의 기술고립비극”이다. 빙하기에 도보로 호주대륙에서 이주한 후 일만년간 외부와 접촉이 차단됐던 이 섬에 백인들이 당도했을 때, 원주민들은 도리어 기술이 퇴보해 물고기 낚시조차 못하는 상태였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한 중국은 서쪽 오리엔트 지역에서 온 채색도기, 청동기술 등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요하와 황하유역에서 기장(黍서)과 조(䅇속), 콩(숙)을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남방의 장강유역으로부터 개량된 야생벼(稻)를 받아들이고, 다시 서쪽에서 밀(麥)이 들어와 곡이 차려졌다. 기장과 조, 콩의 한자발음이 유사한 것은 고대한어에서 곡식을 칭하는 말이 같았을 것이라는 점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역대 한족 왕조가 국가의 기본으로 여기는 사직(社稷)이라는 말에서 사는 국토, 직은 곡식을 뜻하는데 그 중에서도 조를 말한다. 밀이 도입되기전 조는 북방의 가장 중요한 식량이었다. 개와 돼지가 중국에서 길들여졌으며 양이나 소, 말과 같은 다른 가축들은 외부에서 전해졌다.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 북방에 농사의 기술이 성숙해졌을 때, 마침 당시의 기후와 기술수준에서 농사를 짓기에 가장 적합했던 황하유역 하류인 중원, 즉 지금의 허난(河南)성에 다양한 민족이 모여들었다섬서(陝西)성에서 기원한 앙소(仰韶)문화와 동북지역에서 온 홍산(紅山)문화의 일족들이 조우한다. 황제(黃帝), 염제(炎帝), 치우(蚩尤)가 벌이는 탁록(涿鹿)전투의 신화는 이런 민족의 이동, 충돌교류, 융합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상상이 가능하다. 저자가 현대의 크리올에 비유한 원시한어(漢語)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상(商)왕조가 갑골문자를 창제하면서 3천년을 이어갈 화하족의 중화문명이 탄생했다닫힌 시스템이 아니라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의 사방으로부터 유입된 문화와 혈통이 혼종된 결과이다.  

사진2) 조와 기장 등 지금은 간단히 잡곡으로 치부되는 곡물들은 밀이 들어오기 전, 쌀과 함께 동아시아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식량이었다. (이미지 출처: 인터넷 개인 블로그)

민족이 이동함에 따라 특정지역의 유전자 풀이 바뀌는 세가지 양상이 있다. 인구가 늘며 주위의빈땅을 채워나가는 방식침략한 민족이 원주민을 도륙하여 완전히 대체하거나, 남성들을 살해하여 부계의 유전자만 바뀌는 경우. 그리고 왕족과 상층부만 교체돼 큰 변화가 없는 경우이다. 상(商)이 주(周)왕조로 교체되며 역사시대가 시작된 것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혈통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문화가 전환됐다. 점을 치는 샤머니즘 대신 정교한 예악(禮樂)에 기반한 종법제도를 실시하면서 중화문명의 정수인 공자와 유교의 출현을 준비한 것이다. 한(漢)제국 이래 북방의 주민과 군대가 계속 남하하여 남방을 한화시킨 것은 두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혈통과 문화 모두 변화했다. 한족을 형성해 나간 두 사례는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결정함에 있어 혈통의 유전자 진gene보다는 문화유전자 밈meme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래전 중국남방에는 화하족과 구별되는 다수의 혈통과 문화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5천년전 장강하류인 지금의 항저우지역에 태동해 천년간 이어진 양저(良渚)문화는 문자와 청동기술이 없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문명에 비견할 정도의 규모와 기술수준을 자랑한다. 이미 쌀을 재배하여 식량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방지역은 고온 다습한 기후와 습지, 산지가 많은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평야지대는 부족하고, 토질은 점성이 높아, 수렵채집 경제에는 유리하지만, 북방과 같은 대규모 농경사회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한(秦漢) 이후, 북방민족의 정복 대상이 된다. 철제 농기구가 도입되면서 토지가 개간되고, 농경 경제가 발전한다. 이번엔 고온다습한 기후가 북방보다 높은 농경생산력을 보장하게 된다. 위진남북조시대 이래, 중국 경제와 인구의 중심이 남방으로 이동하게 된 경과이다. 

사진3) 양저문화의 화려한 옥기들은 종교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저문화는 토성과 장강하류의 거대한 제방의 건축에서 볼 수 있듯, 도시생활과 종교의식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고대문명에 근접한 수준의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신화로부터 역사로 神話から歴史へ”)

남방 고유의 문화나 민족들과 관련이 있으며 일찌감치 타이완으로 건너가,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으로 퍼져나간 오스트로네시안도 이들중 일부이다. 역시 중국을 포한한 다국적 연구팀이 유전자를 비교분석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타이완 독립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과학적 발견이기도 하다. 위진남북조와 북방민족 역사의 전문가인 베이징대학의 (羅新) 교수가 2019년에 출간해 호평을 받은 <반역자로서의 역사가(有所不的反叛者)>는 유전자 기술의 광범위한 사용에 의한 역사와 민족연구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는 학문과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인터 애국주의를 비판하며 민족주의를 초월한 역사연구를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의 남용이 인종주의로 귀결할 것을 염려한다. 유전생물학의 선배격이며 역시 독일에서 유래한 체질인류학이 나치에 의해 우생학으로 사용된 아픈 기억 때문이다. 

사진4) 푸차오메이 박사팀의 연구에 의하면 8500년전 중국 푸졘성에서 발굴된 인골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현대 대만의 소수민족인 아메이(阿美)족의 유전자와 가장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타이완에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으로 퍼져나간 오스트로네시안 어족에 속한다. 이 연구결과는 이들이 중국의 남부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기술적인 문제도 지적한다. 몇년전까지도 Y염색체만을 사용하는 연구 방법이 모모민족의 수퍼아버지와 같은 표현으로 특정 민족의 대다수 인구가 한명의 아버지에서 비롯했다며 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부장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모계 이력을 찾는 미토콘드리아를 분석할 때는 지나치게 소수의 유전자만 보게 된다. 부계이든 모계이든 전체 유전자중의 일부만을 비교하는 방법들이 얼마나 그 개체나 그가 속한 그룹의 유전자 특성을 잘 나타내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이런 문제들은 점차 해결되고 있으나 유전자군의 염기서열 특성으로 민족을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거부감을 표시한다. 서구의 과학자들이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홍인종으로 인류를 구분한 이래 저질러온 수많은 행각이 지나치게 비윤리적이기 때문이고, Black Lives Matter나 팬데믹 이후의 아시아인 공격과 같은 인종차별적 범죄는 여전히 기승을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전자 특성 그룹과 해당 민족을 표기할 때, 인종에 대한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고 의도적으로 언어사용그룹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탈민족주의 역사연구는 사실 중국정부를 불편하게 만들만한 내용은 아니다. 자신의 전공에 맞게 북위를 연 선비족, 흉노나 돌궐의 역사를 살피며 근대 민족주의가 새롭게 창조한 민족의 신화들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동투르기스탄 독립을 외치는 위구르족의 민족주의도 근대적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증한다북위의 선비족 황제가 자발적으로 한화를 선택한 후에, 과거 유목민족의 풍습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문자옥을 일으키며 역사기술을 바꾸는 사례도 되짚는다. 역사 왜곡을 주도한 것은 한족 역사가의 음모가 아니라 비한족의 문화적 정체성 전환의 댓가일 뿐이다. 몽골세계제국론을 통해 원 왕조를 중국사에서 분리시키려하는 일본과 서구학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그는 불만을 표시한다. 중국사 바깥에서 다양한 언어로 기술된 세계제국 몽골을 재조명하는 시도는 의미가 있지만, 실제로 이를 건설한 쿠빌라이칸은 자신을 중원왕조 계승자로서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 징기스칸만을 과도하게 영웅시하는 태도야말로 역시 근대민족국가 몽골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기획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사진5) 돌궐민족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광활한 영토에 오랜 기간 존재해왔다. 현대의 터키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를 계승한 것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다른 시대에 돌궐이라는 이름과 언어를 사용해왔기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 통일된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에 와서는 문화적 요소보다는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신념으로 동질성을 갖게 됐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는 북방과는 달리 비교적 순탄하게 한족으로 통합된 것처럼 보이는 남방의 역사가 실은 오랜 기간에 걸 무력을 사용한 정복과 동화의 결과였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어쨌든 이러한 확장이 가능했던 것은 남방은 한족의 주류문화를 전파하기 용이한 농경지대였기 때문이다. 민족을 정의하는 요소는 혈통이 아니라 문화이며 그 형성과정은 정치의 몫이라는 것을 재삼 강조하고 있으니, 신장과 시장(티벳)의 통합을 통한 중화민족의 완성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슬픈 강제 한화의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을 들여다 볼 때는, 한족, 중화민족 혹은 독립을 요구하는 비한화(非漢化) 소수민족중 어느 시각에서 바라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 시좌에 따라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도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지식과 민족 정체성의 이해에 대한 높은 해상도를 갖추지 못하면 언제든지 논리적 자기 모순에 빠질 수 있다. 이를테면 위대한 중화민족을 찬양하면서, 한족중심주의에 빠져 한푸 열풍을 즐기고, 동시에 중화민족에는 포함되지만 비한화한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이는 적지 않은 한족 중국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소수민족을 한화/문명화하는 사명을 띄고 있다는 의식을 보임으로써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국과 서구사회가 중국인을 멸시하고 차별한다고 분노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예전에는 모른척 하다가 갑자기 신장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미국 정부의 위선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민족의 기원에 관한 앞서 두 저자의 결론을 종합해보면,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논의된 한족과 중화민족 개념의 형성에 관한 실은 유전자와 같은 혈통의 추적, 고대유적이나 언어, 과거의 역사사료와 같은 문화연구보다, 근대의 정치사, 혁명사를 직접 들춰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2015년에 출간된 중국공산당사 연구자 양쿠이송(楊奎松)의 <적이 침입했다(鬼子來了)>를 보면 불편한 역사적 사실들이 가득하다부제인 현대중국의 곤경은 왜 이 사실들이 중국의 젊은 애국주의자들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설명한다. 

첫째, 쑨원(孫文)과 량치차오(梁啟超)를 포함한 중국의 근대 선각자들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만주족을 물리친 후 한족의 주거지역인 한지(漢地) 혹은 내지(內地)18성으로 불리는 만리장성 안쪽에만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대청제국의 또다른 판도였던 신장, 시장, 만주와 같은 변강邊疆지역은 자신의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하나의 민족하나의 국가라는 근대민족국가 수립의 열정이 이들을 추동했다.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의 오족공화(五族共和)는 1912년 중화민국 수립후,항복한 청황실의 후손이 주장해 마지못해 이뤄진 인식의 전환이다. 혁명의 상징도 18성기星旗에서 5색기色旗로 변화했지만 이때 이미 지금의 몽고국인 외몽골과 티벳은 차례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1930년대 일본의 만주침략과 중국분할 전략에 위기감을 느낀 후에야 중국 지식인과 역사가들은 비로소 단일한 중화민족의 존재감과 확장적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진6) 중화민국의 상징깃발은 초기에 한족거주지인 18성을 상징하는 18성기였으나 (좌하단), 오족공화를 상징하는 5색기(중앙)로 바뀌었고, 나중에 다시 청천백일기로 통일된다 (좌상단)

둘째자기가 살던 마을 밖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는 농민이 태반이고, 이민족 청의 지배하에 300년가까이 살았던 한족 중국인들은 민족과 근대의 통일국가에 대한 개념이 매우 박약했다. 아편전쟁 당시 광저우에 영국군이 침략했을 때 뿐아니라,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수도 베이징에 8국연합군이 진입했을 때도 일반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이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수수방관하거나 오히려 협력했다. 심지어 진주하는 외국군대의 대열에 참가한 중국인 편대도 있다. 이에 더해 남방지역민특히 광둥의 민중은 애향심은 강했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은 안중에 없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화교의 대다수인 중국 남방계 이민들은 원래 대륙에 있는 자신의 고향을 뿌리로 삼았을뿐 스스로 중국인의 정체성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제3자들이 그들을 중국인으로 부르는 것에 반응해 자신을 화인(華人)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진7) 베이징을 함락시킨 8국연합군에는 중국인 용병들인 화용영(華勇營)이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개혁과 혁명지도자들은 변화를 거부하는 청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본과 소련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한 경우가 많았다. 혁명파인 쑨원은 청일전쟁 패배후, 광저우에서 자신이 혁명을 일으키면, 일본군이 북에서 협공하는 방법으로 광둥을 손에 넣고 싶어했다. 개량파인 캉유웨이(康有為)와 량치차오도 변법실패 후 일본에 머물 때 낭인 지도자들에게 광둥성을 공략해줄 것을 요청했다. 흑룡회(黑龍會)와 같은 일본의 극우낭인집단이 중국대륙에서 쑨원의 혁명을 도와 수많은 희생을 치뤘고, 신해혁명 후 쑨원이 위안스카이와 맞서며 기획한 중화혁명군중 유일하게 세력을 이뤘던 산둥성의 동북군은 100% 일본의 자금과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쑨원은 애초 이런 협력의 댓가로 만주와 몽골지역을 일본이 차지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눈을 감아주려 했다. 

무력과 금력 지원 요청뿐 아니라 그들은 청일전쟁 패배후 근대화의 일념하에 일본을 사상과 기술의 스승으로 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근대 중국을 열어간 지식인과 혁명가중 일본유학 경험이 없는 사람이 드물고, 적지 않은 이들은 혁명이 실패할 때마다 일본 외교관의 도움을 얻어 일본으로 도피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캉유웨이는 무술변법 실패로부터 신해혁명 성공이후 귀국한 15년간의 해외망명생활중 일본에 12년간 머물기도 했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개화파 김옥균 등의 행적과 다르지 않다. 아웅산 수키의 부친이며 미얀마의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이 일본과 연합해 영국식민지배자들을 몰아낸 후에야 일본군과 맞서게 된 것을 연상해도 된다. 

생전에 한번도 반일구호를 내세운 적이 없는 쑨원은 1920년대 광저우에 혁명 거점을 만들고 황포군관학교를 세울 때에도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이때는 외세가 지원의 댓가로 중국의 영토를 영구지배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전환한 상태였다. 중국인들이 국가와 민족의식에 눈을 뜬 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된 1930년대 이후부터이다. 자신의 앞마당에 침입한 일본군의 만행이 엘리트뿐 아니라 일반민중들을 자극했다. 역으로 일본의 식민통치행위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이뤄진 지역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도 덜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찌감치 일본에 할양된 타이완이 대표적이다. 바꿔말하면 중국은 스스로의 개혁이나 혁명보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맞서면서 근대민족국가 건설을 가속할 수 있었다. 

넷째, 초기 그들이 상상한 중국은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합중국과 연방공화국이었다. 각 성이 독립적인 행정, 재정, 교육, 군사권한을 갖는 자치체를 구성하고 이들이 연방을 이룬다는 구상이었다. 쑨원도 마오저뚱도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심지어 젊은 시절의 마오는 대중화민국(大中華民國)을 반대한다는 중국분열론을 주장할 정도였다. 

다섯째, 잘 조명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역사가 있다. 공산제도와 세계대동사회의 이상주의를 마음에 품은 인본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신해혁명이후 남방을 중심으로 곳곳에 세력을 형성했다. 훗날의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오저뚱은 당시 마르크스보다 크로프트킨을 더 높이 평가하고, 톨스토이의 평화주의에 영향을 받은 무샤노코우지 사네아츠 (武者小路)와 같은 사람들이 실천한 일본의 신촌(新村)운동을 공부했다. 이중에서도 쑨원에 의해 광둥성장에 임명돼, 광둥군벌(粵軍)을 이끈 천지옹밍(陳炯明)은 광저우와 푸졘의 장저우(漳州)를 근거지로 무정부주의 기반의 자치정부를 수립하려 시도했다. 그는 광둥성 모델을 각 성으로 확대하고 과거의 쑨원도 동의했던 연방정부를 만들려는 생각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미 일당제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꾼 쑨원의 북벌계획에 반대하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진8) 쑨원(우)에 의해 광둥성 성장으로 임명된 천지옹밍(좌)은 한때 쑨원의 가장 가까운 혁명동지이자 국민당 정부와 군의 최고위급 각료였다. 그는 당시 할거하던 탐욕스런 군벌중 하나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실은 각 성의 자치정부가 연대하는 연방중국 (聯省自治)을 희망했으며, 무정부주의적 지역주의를 꿈꾸기도 했다. 중국의 국가수립 모델에 대한 생각을 연방제에서 중앙집권제로 바꾼 것은 쑨원이었다.

여섯째, 쑨원은 삼민주의에서 주창한 바와 같이 애초 영미와 프랑스를 모델로 하는 민권 즉 자유로운 시민권이 중심이 되는 국민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충돌을 겪은 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같이 국가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는 민족국가의 모델을 따르게 된다. 또, 플라톤식의 철인정치, 즉 엘리트와 혁명가들의 독재국가를 구현하려 했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에게만 피선거권과 선거권이 함께 주어지는 수석당원 자격을 부여하고, 끝까지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선거권을 포함한 공민권도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혁명참여와 동의 여부로 나뉘는 새로운 계급과 일당 독재에 기반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통이 정초된 것이다.     

이상주의와 당시 농업사회였던 중국의 역사발전단계에 걸맞는 현실적 정치체제의 선택지 앞에서 중국의 지식인과 혁명가들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후자를 선택해야 했다. 구체제와 맞서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선택을 지금의 시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중국 정부가 여전히 외세의 간섭과 적전 분열을 경계하는 애국주의 프로파간다에 매달리며 과도한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중국은 여전히 도시화율이 60%에 머무는 농촌중시국가이며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만으로도 더 이상의 도시화 진척은 위험하다는 시각이 있다. 국가전략으로 식량주권을 확보해야 하는 입장에서 자급자족의 기초인 농촌을 축소시킬 수 없다. 하지만 지역살림살이와 자신의 생계에 연연하는 전통적 농민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으로 거듭나서 높은 정치참여도를 갖게하는 것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속가능성이 농촌기반사회, 즉 일당 독재의 기반을 지켜야할 당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수립후 백년이 지난 지금, 이미 고등학교 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여전히 중국 특색만을 강조하며 민주주의 체제로 진전하지 못하고, 한화되지 않는 소수민족들에 대한 인권 침해도 극심한 현재적 곤경은 과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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