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업체와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냐고요? 저도 답이 없죠.” 경남지역의 용접노동자 출신 작가 천현우씨의 <쇳밥일지>북토크를 우연히 유튜브로 보고 청년세대 혐중감정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먹고사니즘’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천현우씨는 경남지역의 여러 중소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날것의 경험 그대로 털어 놓았다. 수도권과 지방,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구성된 한국의 이중경제 구조속에서 후자에 속한 평범한 청년들에게 안전하고 안정된 삶과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 환경은 이 기업들이 중국 제조업체들과의 가망없는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이들은 별 수 없이 최저임금이라도 잘 보장되는 수도권으로 몰려가 편의점 알바, 배달라이더, 물류센터직원, 콜센터 상담원이 되곤 하는데 특히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지역에 남는 비율이 매우 낮다고 한다.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이 바로 주로 제3세계에서 유입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최근 또다른 베스트셀러인 <좋은 불평등>이 이러한 한중경제관계의 변화와 한국내 불평등 사이의 연관관계를 구조적으로 밝힌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 읽었던 임명묵 작가의 <K-를 생각한다>가 다소 제한된 사례로 분석했던 현실이 여러모로 실증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다시 대중무역흑자로 돌아서냐고요?” 노동자인 동시에 개미투자자인 청년들이 즐겨본다는 <삼프로TV>에 나오는 중국전문가들도 구체적인 답을 청하면 말끝을 흐린다. 고부가가치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는 ‘중국제조2025’는 코앞의 현실이고 애국주의정서에 힘입은 자국제품선호를 뜻하는 궈차오(國潮)가 중국의 젊은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중국시장에서 한국 물건은 하이테크 전자제품도 화장품 같은 소비재도 설 자리를 잃고 있고, 한국시장이나 다른 해외시장에서도 중국물건과의 경쟁속에 같은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반도체를 만드는 삼성전자와 배터리를 생산하는 LG에너지솔루션의 성패에 사활을 걸고 “초격차를 유지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대국굴기’의 도도한 흐름앞에 미국도, 유럽도, 일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만이 기적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나이브한 생각도 없다.
가성비 좋은 노동력과 잘 정비된 생산인프라를 좇아 끊임없이 유동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덕을 본 것도 사실이고, 세계최대의 국내시장도 상수이다. 하지만, 불과 20년만에 세계적 공업대국 일본, 한국을 차례로 앞지른 중국 제조업의 이 ‘어마무시’한 실력의 문화적 기원은 어디 있을까? 큐레이터 줘징(左靖)이 엮은 공예문화 무크지 <바이궁(百工)>의 창간호가 나온 2016년만해도 중국사회는 기술인력의 부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濟)나라의 재상 관중(管仲)이 인민을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한 것은 결코 차등을 의미하지 않았는데 후대에 이를 오독한 것이라 한탄한다. 중국 전통사회가 상공업을 충분히 중시했다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사회에 뒤쳐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푸념이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교육과 산업, 일자리 정책의 최근 변화와도 맞물려있다. 당시에는 농촌인구의 교육수준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최근 국내에 출간된 <보이지 않는 중국(invisible china)>도 이 시점의 상황에 비추어, 중국인의 평균적인 교육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중국 경제와 사회의 도약은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2~3년전부터는 조금 다른 양상도 눈에 띈다. 중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학부를 졸업한 후에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명문대 대학원 진학을 통해 ‘학벌세탁’을 꾀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4년제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괜찮은(decent)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취업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직업교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현장 기술자들이 직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안정된 커리어를 이룰 수 있도록 교육관, 직업관, 경제적 보상체계를 바꿔 나가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과거의 사(士)에 해당하는 엘리트보다 보통사람들의 안정된 생애주기 설계와 이를 위한 교육이 절실해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중국도 한국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거나 그만 못하지 않냐고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사상가이자 동시에 엔지니어였던 묵자(墨子)의 조물(造物)설계 이념의 깊이도 논한다. 묵자는 세가지 편(便)함을 요구하는데, 삶, 몸, 그리고 이(利)로움에 대해서 그러하다. 반대로 세가지 설계는 금지하는데, 관능과 향략을(觀樂)위한 설계, 순수한 장식미를 위한 설계 그리고 소비를 자극하는 설계이다. 이러한 고려는 상대방에 대해 차등을 두지 않고 아끼고 사랑하는 그의 겸애(謙愛)사상에서 비롯한다. 귀족과 부자들뿐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물건을 만드는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전통중국 공업문화 담론의 바탕과 깊이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신석기시대부터 네차례에 걸쳐 찾아 온 중화 ‘공(工)’의 마지막 전성기는 명나라시절이다. 어느 업종(行)이든 뛰어난 사람은 있게 마련이라는 뜻을 가진 행행출장원(行行出状元)과 다양한 생업을 의미하는 삼백육십행(三百六十行)이라는 표현도 명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말이다. 관료나 지식인뿐 아니라 모든 생업의 기술을 가진 이들이 차별대신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수공을 포함한 다양한 생업의 기술이 번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장강삼각지역문화의 적자인 소설가 왕안이(王安憶)의 작품 <톈샹(天香)>에는 바로 이 시기 비단과 자수 등으로 유명했던 강남지역의 정원축조술, 구들을 포함한 건축기술(매우 흥미롭게도 자금성의 중국식 구들인 캉(炕)을 만든 조선의 온돌장인에 대한 언급이 있다), 먹제조 기술, 각종 먹거리의 가공 등 다양한 생활공예기술이 묘사된다. 중국은 송나라 이래 생산력 향상에 힘입어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명청기를 거치는 동안 적서차별을 포함한 신분제가 거의 사라지게 된다.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에 진출한 명문가에서도 농민, 장인과의 통혼이나 상공업 종사를 꺼리지 않았다. 주인공 가문의 처첩을 포함한 복잡한 혼인과 생육관계 속에 다양한 생업과 신분, 그리고 살림살이가 얽힌 드라마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사농공상의 우열개념이 있던 조선에 비하면 장인과 그가 보유한 기술이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중국의 ‘내셔널 브랜드’ 중 상당수가 바로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다양한 생업의 기술을 의미하는 바이궁은 서주(西周)시대의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에 처음 등장한다. 일본의 종교학자이자 예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이끈 민중의 공예, 즉 민예운동에 대응하는 개념을 찾는 중국의 학자들에게 재발견됐다. 무네요시는 영국의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을 참고했으나 다시 서구와 대별되는 동양적 혹은 일본적 ‘정신’을 추구했다. 원로 저널리스트 판웨이(潘偉)씨는 주로 광둥지역의 농촌과 도시의 옛거리에서 발견한 생활기술 장인들의 이야기를 20년간 매주 지역언론에 연재해왔다. 이렇게 모인 200여개의 직업에 대한 기록과 사진을 집대성해 2021년에 <바이궁지(百工記)>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다양한 생업이 번성한다는 의미의 백업흥왕(百業興旺)이라는 표현은 특히 중국의 향촌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중국의 전통사회구조에 정통했던 인류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은 그의 대표작 <강촌경제(江村經濟)>에서 강남지역의 부가 농업뿐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수공업에 의해서 지탱되었음을 실증적으로 연구했다.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고 지주들이 도시로 이주해서 공장주가 되거나 외지 물건을 수입하는 일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향촌의 산업이 쇠퇴하고 농민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도농균형발전의 관건중 하나는 농촌지역에 1차 산업으로서의 농업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이 적정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중국의 ‘향촌건설/진흥’ 연구자들이 이야기한다.
중국에서는 2010년 이후, 중산층과 여피들의 소비취향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다양화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눈에 띄는 흐름중의 하나는 미니멀리즘과 개인의 웰빙을 중시하는 자연친화적인 라이프스타일과 디자인의 유행이다. 미국의 킨포크 잡지스타일, 일본의 무인양품 브랜드가 각광을 받고 있는데, 초기에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타이완을 통해서 유입되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목공 등을 비롯한 DIY열풍도 가세하고 있는데, 취미나 부업활동이든 아니면 전문직이든 일본의 소위 장인정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이 문화에는 다분히 100년전의 선각자인 무네요시의 사상이 녹아있다.
무네요시가 그러했듯 중국의 바이궁담론은 애초부터 국가적 관점과 민족주의에 일방적으로 포섭되기보다는 “지역에 사는 보통사람들의 생활을 풍성하게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도 함께 진화하고 있다. 줘징은 향촌건설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문화예술인으로 고향인 안휘성뿐 아니라 구이저우, 윈난과 같은 농촌지역에서 예술을 통해 마을의 삶에 활력을 되찾아주고 있다. 향촌의 풍토, 물산, 인문, 관습을 발굴하고 재해석해서 다양한 공공공간을 만들고 여기서 여러 영역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일을 벌인다. 그가 2011년 베이징을 떠나 귀촌한 곳이 명승지 황산(黃山)에서 가까운 안휘성 이(黟)현의 비샨(碧山)마을이다. 이 문화와 실천을 알리는 <비샨>이라는 무크지도 만들었고, 이 지역의 전통생활기술을 모아서 <이현바이궁>을 편찬했다. 무크지 <바이궁>은 이를 확대한 후속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시 도시의 동네로 공간을 넓혀 중국 전역에서 지역의 기록과 창작을 융합하는 방지소설(方志小說) 프로젝트도 탄생시켰다. 예를 들어 북한과의 접경지대인 단둥(丹東)에서 한달을 거주한 예술가는 탈북민과 관련한 어휘를 정리하여 사전을 만들어 낸다.
지역의 전통 공예품과 특산물을 상품화해 전시하는 매장과 공방도 비샨마을에 열었는데 비샨궁샤오셔(碧山工銷社)라 불린다. 과거 배급제를 실시하던 중국 농촌의 배급상점 궁샤오셔(供銷社)를 레노베이션하고 공방기능을 추가하여 이렇게 명명했다. 지역과 환경을 중시하는 ‘롱라이프 디자인’으로 알려진 디자인 편집상점인 ‘디앤디파트먼트(D&Department)’의 나가오카 겐메이(長岡賢明)도 함께하고 있다. 디앤디파트먼트는 일본 전역에 점포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이념을 공유하면서 지역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파트너와 함께 한다. 해외에는 한국의 이태원과 제주도에 점포가 있었는데, 중국에 처음 점포를 연 곳이 바로 비샨이다. 그 역시 무네요시의 아들이자 일본의 1세대 산업디자이너인 야나기 소리(柳宗理)의 후예를 자처한다.
무네요시의 공예사상은 20여차례에 걸친 방문을 통해 그가 매료됐던 소박하고 실용적인 조선 생활공예의 미에서 비롯했다. 무네요시와 한반도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지만 90년대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가 강화하면서 “한과 비애”라는 키워드로 집약되는 그의 조선미술에 대한 관점은 비판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과 유럽의 문화예술을 연구했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무네요시를 현재의 눈으로 비판하기보다 시대적 맥락속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일본 최고의 국보들 대부분이 한반도와 백제장인의 솜씨라는 그의 당시 발언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민예운동이 ‘자발적 오리엔탈리즘’, 즉 서구의 시선속에 형상화한 자신의 모습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용성은 부족하고 아기자기하기만 한 일본의 지역 기념토산품(お土産)을 낳았을 뿐이라고 폄하한다. 서구인들이 특히 이 동양적 혹은 일본적 ‘허무함’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판단은 세계적으로 평가받는 무인양품의 하라 켄야(原研哉)와 현재 토쿄의 민예박물관 관장이기도 한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를 비롯하여 일본 산업디자인에 끼친 그의 영향도 충분히 고려한 결과인 것일까? 나가오카 겐메이는 ‘일본식 허무주의’를 다시 전파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을 찾을 것일까?
한반도와 일본, 중국의 장인과 공예정신은 이렇게 오랜 시간 깊은 인연으로 엮여 있다. 원래 지역민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장인의 마음과 솜씨에 국가간 경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족: 이렇게 결론을 맺으면 생명평화주의자였다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흉내내며 낭만주의적 대사나 치는 게 다냐고 흉보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나는 정치경제전문가도 아니고, 외교관도 아니다. 한국의 미래 대중경제전략을 거론하는 것은 내 일도 아니고, 깜냥도 안된다.
하지만 주위에 계신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주장을 눈여겨 본 것이 있고, 나 자신의 생활경험을 좀 보태서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하고 싶다. 나는 한국은 결국 세가지 트랙을 동시에 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쪽에 올인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첫째, 여전히 미국을 위시한 서방핵심국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중 혹은 중국배제전략에 조금 기대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나서서 반중을 할 필요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중국 사람들은 한국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중국이 우리에게 끼친 해가, 우리가 중국에게 본 덕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과 서구가 중국이 그리 싫어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벌이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냥 못이기는 척 중국에게 밉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에서 살짝 거들기만 하면 된다. 앞에 나서서 대리전을 치뤄서는 안된다.
둘째, 비중비미(非中非美)를 해야하는 우리와 비슷한 입장의 나라들과 함께 연대해야한다고 정태인 선생이나 한겨레 신문의 박민희 위원도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제3지대 연대론이라고 명명했다. 가장 좋은 예는 물론 아세안국가들이고, 한-베트남처럼 지속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협력해야 한다. 여기서 전제는 이들이 우리보다 뒤쳐져 있다고 얕보는 태도를 버리는 동시에, 이들이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만큼 존중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정신적 강자에 굴종하고 약자에 군림하려는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파트너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일본이 이 대열에 동참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친미극우적인 성향이 강한 일본정부와 별개로, 민간과는 충분히 이런 방향으로 협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셋째, 중국과의 직접적인 경쟁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국과 협력하거나 관계가 있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중국을 숙주로 하는 기생식물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 조금 더 중립적으로 표현하자면, 중국을 플랫폼으로 여기고 플랫폼을 이용하는 참여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세가지 전략을 영역과 규모에 따라서 적절히 조합해서 구사한다면, 지금처럼 중국과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다가 낭패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상황이지만,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관계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처지일 수도 있다.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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