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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평화로운 시기엔 루쉰을 읽지 않습니다. 진실(相), 컨센서스(無共識), 분명한 것들(不確定)을 찾을 수 없는 지금과 같은 환란의 시기에 그를 찾죠.” 이미 팔순이 넘은 첸리췬(錢理群)선생이 작년 연말, 다시 <루쉰선집(錢理群新編, 魯迅作品選讀)>과 평론집 <錢理群講魯迅>을 출간했다. 2015년부터 양로원에서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9년 부인과 사별했다. 부인과 같은 시기에 암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는 받지 않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한동안 사람들을 접촉할 수 없어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루쉰탄생 140주년이었던 작년부터는 책의 출간과 함께 비리비리(중국판 유튜브)에도 강연을 올리고 있다. 연말에는 교편을 잡고 있던 베이징대학에서도 인생 마지막 강의를 했다. “글로벌 시대의 지역문화살리기라는 제목이었다. 그는 젊은시절 하방돼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중 한곳인 구이저우(貴州)의 소도시 직업학교에서 10년 넘게 교편을 잡았다. 이곳과의 인연이 이어져, 이번엔 지역의 지식인들과 함께 새롭게 지방지(地方誌)를 편집했다. 지방지 혹은 지리지는 과거 전통시대 지역의 다양한 경제, 문화, 지리 콘텐츠를 담은 출간물이다. 과거의 향토역사 혹은 상상해볼 수 있다. 인생을 달관하고 보니 창의력이 샘솟는다는 지금은 양로원생활에 대한 글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1) 첸리쉰이 참여해서 새롭게 정리한 구이저우성 안슌(安順)시의 지방지, 안슌성기. 자세한 내용은 다른백년사이트 (http://thetomorrow.jinbo.net/archives/13546)의 글에 정리돼 있다.

마오저뚱에 의해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로 박제됐던 루쉰은 중국인민에게 신처럼 추앙받았지만 대륙의 지식인에게 오히려 오랜기간 외면받았다. 문화혁명 시기엔 마오저뚱을 끊임없이 읽었는데, 그는 다른 학문활동이 불가능했던 시기에는 머릿속에서 루쉰과 마오저뚱사이에 가상의 대화를 시도하며, 시대의 아픔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80년대 베이징으로 돌아와 루쉰연구에 전념한 첸리췬은 중국의 청년들과 루쉰을 잇는 다리역할을 자신의 인생사명으로 삼아왔다. 2002년 정년퇴임후에도 청소년들에게 루쉰을 알리는 자리라면 지역을 마다하지 않고 강연요청에 응했다. 

루쉰은 “좋은 아버지이자 귀여운면도 있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동화를 쓰고자하기도 했지만 시대의 무게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은 에세이(雜文)들인데 그가 세상의 변화를 신속히 캐치하고, 소통하는 방식은 마치 지금의 SNS와 같다. 당대의 이단아였던 그의 생각은 지금 돌아봐도 신선하다. 자식과 아내에게 전제군주로 군림하던 가부장에 대해 대를 물림하기 위한 목적과 성적욕망의 결과일뿐인데 무슨 얼어죽을 ”아버지의 은혜“를 찾냐고 일갈하면서 자녀가 행복하고 합리적인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면 족하다고 말한다. 

그림2) 2021년 12월 베이징 대학에서 진행된 그의 마지막 인생강연. 미소짓는 할아버지로서 그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그는 친일파로 몰렸던 지식인이자 동생 저우줘런(周作人)에게 일제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애국자였지만, 맹목적인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중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고, 최고”라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린 숫자가 많아 절대 멸망하지 않을 테니 무슨 짓이든 저질러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후안무치한 이들을 꾸짖었다. 근대를 시작한 서구인들과 같이 개인의 자아가 개성을 드러내며 혁신을 추구하는 것을 고무하고민족의 이름으로 비대해진 집단적 자아속에 숨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비겁하고 나약한 이들을 경계했다.  

첸리췬의 또다른 연구대상이었던 저우줘런은 여러면에서 루쉰, 즉 저우슈런(周樹人)과 상보적인 성격과 글쓰기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첸리췬이 저우줘런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구이저우에서 돌아와 석사과정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마오저뚱이 설정한 국가주의적 관점의 루쉰이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과제를 돌파구로 선택했다. 그는 민국시대 중국 계몽주의자 유형의 두 전범으로 두 사람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좌파를 선택한 루쉰과 인도주의, 자유주의를 고른 저우줘런은 사상적 분기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첸리췬은 투르게네프가 돈키호테와 햄릿을 비교하면서, 서로 다른 두 인간형이 함께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주장을 한 것을 즐겨 인용한다. “저우씨형제의 생명공동체가 중국 문화사에 끼친 영향을 긍정하는 것이다.

루쉰의 사상은 모순적이고 복잡하며 다차원, 다면을 가진 살아있는 유기체였기때문에, 모든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첸리췬은 이런 발견과 해석의 과정을 영구적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모순적 사고와 성격의 재미난 예가 있다. 그는 주로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삶의 오랜 기간을 보냈다. 고독과 전통문화를 사랑하기에 베이징을 그리워하다가도, 고독을 증오하고 시대에 뒤쳐질 것이 겁나 “재미있고 생기있는 상하이”를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동서양의 속물문화가 혼재한 상업도시 상하이는 여전히 그에게 번잡스런 양아치들의 놀이터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고향인 저장성의 샤오싱(紹興, 남방의 황주(黃酒)를 대표하는 소흥주가 바로 이곳 특산이다.)은 남송의 수도로 중화문명의 정수를 간직한 항저우(杭州)와 외래문물에 일찍부터 열려있던 항구도시 닝보(寧波)와 가깝다. 이러한 문화적 토양이 어린시절 그가 받은 교육의 단단한 기반이 됐다. 민국의 수도 난징(南京)을 거쳐 토쿄(東京)에 유학을 간 그는 세계의 변화를 가깝게 관찰하며, 조국의 운명에 드리운 그림자를 봤다. 귀국후 주요 활동무대가 된 것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베이징과 상하이이다. 그는 한 때 남방의 도시 푸졘성 샤먼과 광둥성 광저우에 머물기도 했다.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샤먼대학과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샤먼의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과 고즈넉한 평화에 빠져있다가도 금새 싫증을 느껴, 폐쇄적인 지역문화를 흉보며 아내 쉬광핑(許廣平)의 고향인 광저우로 옮겼다. 광저우 체류도 길지는 못했는데, 정치적 격변상황에서 별 수 없이 상하이로 돌아간다. 그는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비주류와 이단이었지만, 거주지역으로만 살펴보자면 실은 늘 중앙의 자장에 머물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림3) 광저우의 루쉰기념관, 중산대학의 초기 캠퍼스에 위치한 종루건물이고, 1927년 그가 중산대학에 재직할 당시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1924년 이 건물 1층 강당에서 국공합작을 논의하는 국민당 전국대회가 열렸는데, 약산 김원봉이 이를 참관했다고 한다. 국공합작의 결과로 황푸(黃埔)군관학교가 광저우에 설립되고, 김원봉도 동지들과 함께 입교하게 된다.

첸리췬은 중국의 루쉰을 넘어, 동아시아 사상가로서의 루쉰도 이야기한다. 일본에는 일찍부터 동아시아의 근대를 고민하면서 루쉰을 연구한 다케우치 요시미 등과 같은 걸출한 학자들이 있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첸리췬 본인이 방문학자로 한국에 일년간 머물면서, 한국 학자들과도 교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루쉰이 동아시아의 근대에 끼친 영향과, 역으로 한국과 일본이 중국의 현대사상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증언한다. 동아시아 지식공동체의 구상은 첸리췬과 같은 중국의 공공지식인을 포함해서, 한중일 지식인들이 과거 30여년간 꾸준히 토론해 온 과제이다. 하지만, 중국굴기후 시진핑 시대에 중국담론이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미중갈등으로 한중일 외교관계가 악화되면서 활발한 교류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다. 일국중심 관점을 벗어나려는 트랜스내셔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한중일 삼국만을 하나로 묶는 것도 인위적인 개념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은퇴후 첸선생이 활발히 참여한 또다른 캠페인은 청년자원봉사활동이다. 루쉰사상의 정수가 실천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년대생부터 80년대생까지 반세기 가깝게 청년들과 밀접히 교류해온 그의 권면이, 자신이 “섬세한 이기주의자(精緻的利己主義者)”라고 부른 MZ세대 현실주의자들에게도 먹힐지는 의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첸선생이 일반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인터넷을 통해 널리 유통된 이 글 때문이다)그의 천진난만한 할아버지 미소가 대중들에게 환영받는 것과 달리, 여전히 청년들이 “큰뜻을 품어야 한다(樹雄心 立壯志)”라는 그의 가르침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림4) 2012년 발표된 “섬세한 이기주의자”라는 첸리췬의 중국 엘리트 청년들에 대한 우려섞인 지적이 중국사회에서 큰 논란거리가 됐다.

 

 

* 중국의 지식청년시대 공공지식인 (다른백년 사이트 http://thetomorrow.jinbo.net/archives/13714)들 중에는 학계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사회적 발언권과 영향력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다. 첸리췬 선생도 이들중 하나이다. 다만 이들이 청년들이나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비리비리와 같은 비디오 플랫폼을 통한 동영상 강의는 직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신향촌건설운동의 지도자 원톄쥔 교수와 그가 이끄는 조직들은 과거 매년 청년들을 모집해서 농촌으로 파견해 왔다. 첸리췬 교수의 청년자원봉사활동과 신향촌건설운동은 민간사회의 젊은 활동가를 육성하는 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몇년전부터 모집인원이 미달되기 시작했다. 더이상 젊은 이상주의자들을 찾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90허우 청년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이들 사회운동은 SNS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원톄쥔 교수의 강의는 세계체제론을 포함한 신좌파 시각의 국제정치와 지정학이 많이 다뤄진다. 관료연구자 출신인 그의 발언에서는 일정 부분 국가주의적 관점이 들어있기도 하다. 즉, 애국주의 청년들이 쉽게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라는 것이다. 이런 간접적 참여자나 지지자가 늘어도 실제 이들을 실천의 장으로 이끌 수도 있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 첸리췬은 루쉰 사상의 약점을 중국 전통사상의 약점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초월성, 종교성, 영성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중화문명의 정통성이 내세를 부정하는 유가로 대표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도에서 들어 온 불교가 크게 유행하게 된 이유이다. 혹은 민간신앙이 도가로 숨어들어 도교를 낳기도 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중국인들의 유일한 신앙은 생존(活著)이라는 말을 루쉰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개인의 생존욕구는 가족, 가문의 생존이나 민족 공동체의 생존으로 확장이 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의 보통 사람들은 지금 이곳의 현실생활에 충실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살아야하는 이유의 하나가 되는 저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많이 갖고 있지 않다. 루쉰이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루쉰이나 니체와 같은 강한 자아를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쉽게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다.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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